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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부천지역 4.15 동맹파업과 지역연대투쟁의 전통

1989년 부천지역 4.15 동맹파업과 지역연대투쟁의 전통

 

 

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40호
<이달의 역사> 기고글

 


들어가며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황사와 꽃샘추위는 유난스러운 강풍을 동반하고 있다. 이렇게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김창우의 <전노협 청산과 한국 노동운동>을 다시금 펼쳐 보니, "그처럼 뜨거웠던 '연대의 정신'이 10년 남짓만에 이렇게 싸늘하게 죽어버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문제제기가 눈에 띤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전노협 청산과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의 금속산업노조 조직 재편, 보다 구체적으로는 조선노협(전국조선업종노동조합협의회) 사례에 대한 평가 속에서 "지역연대투쟁을 활발하게 벌여낼 수 있는 조직형태를 중심으로 산별노조를 모색하지 않으면, 결국 산업별이든 업종별이든 상층 중심의 분파조직으로 왜소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하나의 답을 내놓는다. 다시 말해 "지역의 중소노조들과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조직형태로 나아가지 않는 한, 대공장이 주도하는 상급조직 중심의 세 불리기 식 분파활동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중소사업장들의 지역연대투쟁"의 '오래된 미래'를 한국 노동운동의 흐름 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면, 많은 이들이 1985년의 구로동맹파업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구로동맹파업은 단지 1987년 대투쟁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거대 산업지역 외에도 이들 지역의 하청공장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소사업장 밀집지역에서는 1987년 대투쟁 이후 다양한 지역연대투쟁이 이어졌고, 지역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와 이들을 기반으로 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건설로 이어지는 전통을 이루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지역연대투쟁이 바로 1989년 부천지역 4.15 동맹파업이다. 4.15 동맹파업은 개별 사업장 단위의 임금인상투쟁을 넘어 지역차원에서 구속자 석방이라는 정치적 요구를 앞세운 정치적 동맹파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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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89년 3월 10일, 부천지역 노동절 기념행사에 참여한 조합원들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15 동맹파업의 배경

 

1989년 봄, 당시 노태우 정권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구실로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있었고,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제3자 개입금지 등을 내세우며 풍산금속, 현대중공업 등 주요 투쟁사업장에 대한 대대적인 노동탄압을 자행하고 있었다. 또한 여소야대 정국 하에서 노동법 개정안이 다루어지고 있었으나, 노태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등으로 주44시간 노동을 중심으로 한 근로기준법만 통과되고 노동조합법 등 개정안은 통과되지 못하였다. 노태우 정권은 1989년부터 경기침체 국면에 들어가면서 정리해고 요건 완화 등 노동법 개악을 시도했다. 경기지역에서는 수원지검이 수원, 안산, 안양 등 지역 노동단체들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이며 탄압을 가하였는데, 당시 종교 및 사회운동 진영 등에서 운영하던 노동상담소가 주요 탄압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1987년의 흐름을 이어받아 대중투쟁으로 자본과 정권에 맞서고 있었다. 경기지역의 대학생들도 학내투쟁과 노학연대의 전통 속에서 29주년 4.19 행사를 계기로 공안정국에 맞서는 투쟁을 벌였다.

 

부천지역에서는 중소 사업장들을 중심으로 1988년 89개 노동조합이 신규 결성되었고, 이들은 1988년 초 임금인상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88년 여름에는 부천지역 민주노조들이 위원단장 수련회를 거쳐 부천지역 금속노동조합연합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그해 전국노동자대회를 거쳐 1989년 2월에는 부천지역 임금인상투쟁본부(부천투본)을 결성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총(한국노총) 민주화론과 민주노조 건설론 등의 의견대립이 불거지고, 결국 부천투본 결성에도 지역 내 일부 대공장 민주노조가 참여하지 않는 등 문제점이 나타났지만, 1987년을 거치면서도 임금인상이 억제되어 고통에 시달리던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임금인상 요구가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1989년 3월 부천투본의 무노동무임금 정책 및 노동운동탄압 분쇄 결의대회를 시작으로 부천지역의 파업투쟁 물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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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89년 3월 10일, 부천지역 노동절 기념행사에서의 노동탄압 사례 소개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15 동맹파업의 전개과정
 

부천지역 노동자들이 부천 곳곳의 거리를 가득 메우게 되는 흐름은 1989년 4월 9일 부천투본의 임금인상투쟁 결의대회 직후 2천여명이 참여한 가두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부천지역 노동자들은 부천역에서 성심여대(현 가톨릭대 성심교정)로 행진하였으나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흩어지지 않고 성심여대로 재집결하여 격전을 벌였다. 이틑날 부천투본 노동자들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부천경찰서 점거농성에 돌입하였고, 4월 11일 당시 부천투본 본부장이었던 한경석과 상황실장 임동섭이 '제3자 개입'을 이유로 구속되자,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투쟁을 계속하다가 4월 15일 신광전자, 대흥기계, 우일 등 50여개 사업장의 노동조합들이 동맹파업에 돌입하였다. 이날 가두투쟁에 나선 4천여명의 노동자들은 가두투쟁을 벌이며 현대자동차 영업소와 현대증권 부천지점을 대상으로 타격투쟁을 벌였고, 또 11명이 연행되고 2명이 구속되었다. 임금인상투쟁을 시작으로 거리에 나선 노동자들이 부천 시내 현대 영업점으로 진격한 것은 언뜻 보면 의아하지만, 당시 3-4월 동안 현대중공업 투쟁이 한국사회 노동자투쟁의 중심에 있었음을 돌이켜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또한 4.15 동맹파업은 단기간의 격렬한 투쟁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투쟁의 결과, 6월부터 9월에 걸쳐 다수의 구속자들이 석방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지역연대투쟁의 흐름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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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15 동맹파업 당시 신광전자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농성
출처: 경향신문

 

 

4.15 동맹파업 이후의 지역노동운동 흐름

 

부천지역 동맹파업은 단발성 파업이 아니라, 지역 차원에서는 부노협 결성으로, 전국적으로는 주요 지역단위 투쟁을 배경으로 한 전노협 결성과 1990년 5월 총파업으로까지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일어난 파업이었다. 1989년 4월 18일에는 계속해서 파업을 벌이던 우일, 새론기계, 대흥로크, 영풍공업사의 4개사업장에 경찰병력 2,200명이 투입되어 178명이 연행되고 5명이 구속되었고, 이튿날인 19일에는 외국자본 철수에 맞서 투쟁하고 있던 한국피코에서 1천5백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외국자본 철수 저지 및 노동운동 탄압 규탄대회가 개최되었다. 특히 한국피코의 외자철수 저지 투쟁은 부천뿐만 아니라 마산, 성남 등 지역 곳곳에서 이어지던 외국자본 철수 저지 투쟁의 맥락 속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띤다. 더구나 한국피코 투쟁은 최근의 기륭전자 투쟁과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끈다. 1985년에 설립된 한국피코는 케이블 및 TV 부품을 생산하던 100% 미국자본 투자회사로서 1988년에서 1989년 사이 노동자들의 납중독 등 안전보건 문제가 끊이지 않았고 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1988년 6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나, 이듬해 3월 사측은 위장폐업 후 자본철수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1989년 4월 1일 한국피코 노동조합은 지멘스, 슈어프로덕츠, 모토로라, TC전자 노동조합과 함께 공동투쟁위원회를 출범시키고 4월 12일에는 한국피코 노동조합 간부들이 미국 본사 원정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부천노동조합협의회(부노협)의 결성

 

1989년 4월 내내 계속된 동맹파업의 흐름을 이어받아 5월 1일에는 3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부천투본 주최로 세계노동절 10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이날에는 부천지역 외에서도 성남노련, 마창노련, 광노협, 전북투본 등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가두투쟁이 전개되었다. 5월 12일에는 당시 파업중이던 부천지역 8개 노조가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18일에는 파업중이던 반도스포츠에서 구속자 석방 및 임투 완전승리 쟁취 결의대회가 열렸다. 6월에는 파업 사업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을 규탄하며 부천지역 위원장단이 4일간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투쟁의 물결이 계속되었다.

 

한편, 부천투본의 동맹파업을 주도했던 한경석과 임동석이 1989년 6월 22일 석방되자, 지도부를 구심으로 부노협 결성 추진이 본격화되었고, 7월 22일 한경석을 초대 의장으로 당시 43개 노조 5,117명 조합원의 참여로 부노협이 결성되었다. 이처럼 부노협, 마창노련 등 지역에서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힘입어 1990년 전노협이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전노협은 결성 직후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전노협은 KBS투쟁과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 등을 배경으로 1990년 5월 1일에는 전국적 총파업투쟁을 통해 강력한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지역사회의 변화와 지역노동운동의 운명

 

당연한 말이지만, 지역 수준의 동맹파업 배경에는 지역사회구조의 특성이 놓여 있었다. 부천지역은 짧은 기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은 지역으로서,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87-1991)과 수도권정비계획 및 경기도 종합개발계획(1982-1991)이라는 도시계획에 따라 압축적 도시화가 이루어지며 1973년부터 1988년까지 인구가 10배 가까이 증가하기도 하였다. 특징적인 것은 부천 거주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경우 서울 및 수도권 지역에서 일하는 비중이 비교적 높았던 데 반해, 부천 거주 생산직 노동자들은 주로 부천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제조업의 경우 금속, 기계, 전기전자 업종을 중심으로 경인공업지역의 부품 하청공장들이 북부지역 공단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중소업체 종사자 비율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등 중소사업장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 생산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처럼 열악한 노동조건이 생산영역과 재생산영역을 긴밀하게 연결시켜 주는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사회 전반의 지역 재구조화 맥락 속에서 부천지역 또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중동 신도시 건설 등 부천지역의 베드타운화가 가속되는 가운데, 주요 대공장들의 사업장 이전이 시작된 동시에 북부지역의 공단 확대가 중소사업장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 아래 동양엘리베이터, 유성기업 등의 주요 사업장이 충남 아산 등지로 이전하였고, 1989년 하반기부터 1991년 상반기까지 20여개 사업장에서 고용조정이 이루어졌다. 부천지역 노동조합 조직률도 하락하기 시작하였는데, 노동조합 수도 감소하여 1989년 200여개에 이르던 노동조합이 1992년에는 80여개로 줄어들었다. 여기에 중소사업장들의 경영악화까지 더해 임금인상 요구 또한 위축되었다.

 

이후 부천지역에서는 도시 재구조화가 이루어지며 화이트칼라와 중간계급 비중이 더욱 증대하였고, 이에 따라 지역 사회운동 또한 시민운동이 주도하게 되었다. 지방자치 또한 민선 5기에 이르며 주민참여의 폭이 넓어진 듯하다. 반면, 여전히 중소사업장이 밀집된 부천 북부의 공단지역에서는 다수의 이주노동자들과 비정규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더욱 어려워진 것처럼 보인다. 거대 산업지역의 대공장 노동자들이 '벌 수 있을 때 벌어놓자'며 작업장 내에서의 이해관계에 '갇혀' 있다면, 중소사업장 공단지역 노동자들은 열악한 고용조건이라는 다른 이유로 작업장 내에 갇혀버리는 듯하다. 일터이자 삶의 터전인 지역에서, 오늘날 지역연대 전통의 새로운 복원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열어낼 필요성은 더욱 켜져만 가는 듯하다. 물론 그것은 노동운동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운동 세력들의 지역적 연대 속에서, 작은 변화들의 축적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참고문헌

 

<부노협 백서>
<전노협 백서>
<부천시 상공연감>
<경인일보> 1989. 4. 12 - 4. 22
김창우. 2007, <전노협 청산과 한국 노동운동: 전노협은 왜 청산되었는가>, 후마니타스.
박양희. 1995, "4.15 부천지역 총파업의 역사적 의의", <현장에서 미래를> 5호. 1995.12.
부천지역금속노동조합. 1989, 기업별 노조의 벽을 넘어, 좋은책.
이혜선. 2003, "부천지역, 지역 노동운동의 전통을 이어 나간다", <노동자의 힘>, 200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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