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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연금술사와 자기 땅에서 쫓겨난 자들

마리화나님의 [강철의 연금술사와 자율적 기술] 에 관련된 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철의 연금술사' 시리즈의 새로운 극장판 "슬픔의 계곡의 성스러운 별"은 극장판 전편의 배경인 평행우주 세계의 저쪽 나치스 독일로부터 다시금 이쪽 세계로 돌아오지만, 엘릭 형제가 속한 아메스트리스의 국경을 넘어서는 영역이 무대가 되면서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이번에도 크레타, 밀로스와 같은 지명이 쓰이면서 나치스의 지배와 내전을 겪은 그리스가 오버랩된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건담 더블오 시리즈를 연출했던 전편 감독 미즈시마 세이지로부터 무라타 카즈야라는 사람으로 감독이 바뀌어서인지, 작화나 스토리 전개에서의 세심함은 좀 떨어진 느낌이다. 그럼에도 제작사인 본즈 특유의 탄탄한 기본기가 밑받침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대사로 시작된다.

 

"하나가 있음으로 전체가 있고, 또 그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 문을 열어젖힌 연금술사는 악마와 다름없다."

 

연금술(과학기술)은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 괴물은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으로서, 우리 시대에도 거대한 도시경관이나 산업경관은 종종 초자연적인 무엇처럼 다가오곤 한다. 연금술은 일견 그 내적 논리에 따라 그러한 초자연적인 힘을 산출해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그렇게 보인다는 것 때문에) 연금술을 둘러싼 인간들 사이의 투쟁이 벌어진다. 물론 연금술도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영역 앞에서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다. '강철의 연금술사' 시리즈에서는 그 불안한 지점이 선혈의 별(현자의 돌)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연금술의 세계를 지배하는 '등가교환의 법칙'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 "인간은 희생 없이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새로운 극장판 포스터에 삽입된 문구이기도 하다.) 연금술은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의지에 따라 질료를 특정한 형상으로 빚어내는 힘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등가교환'이 작용하는 지점은 '생명의 영역에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극장판의 기본 설정은 아메스트리스와 크레타의 경계에서 자신들의 땅을 잃고 두 대국에 종속된 채 살아가는 밀로스 사람들이다. 이번 이야기는 결국 밀로스인들의 국민국가 건설로 이어지는데, 이들의 삶은 그러한 서사(국민국가 건설의 서사)가 갖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땅에서 쫒겨난 피식민자들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한편, 침략과 전쟁의 시대에 이산을 경험한 과학자(연금술사)의 자녀 애쉴리와 줄리아 남매의 개인사와 밀로스인들의 독립전쟁의 서사가 겹쳐지며 흥미를 자아낸다.

 

극중 줄리아의 동료 바타넨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다고 말하는데, 이처럼 목숨을 건다는 것은 자신의 종족이 추방당한 삶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삶 속에서 체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현자의 돌을 손에 넣기 위해 목숨을 건다.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의 흐름 중 하나인 현자의 돌을 둘러싼 억압자와 피억압자, 그리고 망명자쯤 될 엘릭 형제의 사투는 새로운 극장판에서도 이처럼 핵심 줄기를 이룬다.

 

결국 현자의 돌은 살아 있는 인간 생명, 더 직접적으로는 피의 결정체인데, 이 인간 생명의 결정체를 손에 쥔 자는 지배력을 얻는다. 대신에 그는 인간의 마음을 잃게 된다.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이처럼 다소 낭만적(퇴행적인 측면도 물론 있음)인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리즈 원작자의 세계관이 다분히 반영된 것이다. 또 특이한 점은 새로운 극장판에서 밀로스인들의 생존과 독립의 과정에서 현자의 돌이 사용됨에도 일정한 선에서 정당화 된다는 점이다. 이 점이 끝끝내 보는 이를 찝찝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것은 밀로스인들이 겪어온 식민화의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보여주는 측면도 지닌다. 물론 줄리아는 진리의 문을 열어젖히지는 않았다. 그 앞에서 되돌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엘릭 형제는 그 시도를 인정할 수 없었고, 또 어딘가로 끝모를 여행길을 떠난다.

 

결국 다시금 확인되는 유일한 진리는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강철의 연금술사'는 역시 실망을 안겨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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