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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적 파견·사내하청을 양성화하자는 건가

비정규직 종합대책 무엇이 문제인가
불법적 파견·사내하청을 양성화하자는 건가

 

매일노동뉴스 기고글(2015. 1. 5)


2015년에도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쟁점은 비정규직 문제가 될 듯하다.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변함없이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다. 이제껏 한국에서 비정규직의 대명사는 계약직이나 임시직과 같은 직접고용 비정규직이었다. 이는 달리 말해 중간착취 가능성이 있는 간접고용 형태가 지금까지는 적어도 드러내 놓고 활용되지는 않았음을 말해 준다. 사내하청과 용역을 비롯한 비정규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투쟁과 최근까지 이어진 법원의 사내하청 불법파견 판결이 정부나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시장 유연화의 족쇄로 작용해 온 셈이다. 지난달 29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은 정부가 나서 이 '족쇄'를 풀겠다는 선언으로 보인다. 수년 뒤면 서구 국가들이나 가까운 일본에서처럼 '파견사원' 내지는 '파견노동자'가 비정규직의 대명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간접고용 관련 정부 대책의 핵심은 한마디로 파견과 사내하청의 양성화다. 기간제 노동자의 근속기간별 정규직 전환율을 근거로, 정규직 전환율 제고를 위해 기간제 사용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려는 정부 대책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한편으로 여전히 절반에 못 미치는 정규직 전환율은 정부가 편법적 또는 불법적인 기간제 사용을 눈감아 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가 기간제 노동자의 무기계약직 전환율 제고라는 목표를 부정할 수 없으며 차라리 보다 저비용으로 용이하게 기간제 노동을 활용할 수 있는 기간을 연장하는 쪽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목표 달성의 여지가 큰 쪽이 기간제보다는 간접고용 규제완화라고 본 것이다. 기업들 또한 비용절감과 고용조정의 용이함은 물론 사용자 책임의 부담까지도 덜 수 있는 간접고용 활용을 선호한다.

 

파견과 관련한 정부 대책의 핵심 내용은 고령자와 고소득 전문직을 대상으로 한 파견 허용업무 확대다. 무엇보다 55세 이상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파견 허용 확대는 2013년 정년연장법(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됨에 따라 제기된 재계의 우려에 대한 반응이다. 2016년부터 정년이 만 60세로 의무화되긴 하지만 임금피크제 도입 등으로 인해 당분간 실질적인 퇴직연령이 55세 전후가 될 것임을 고려할 때 중고령층 노동시장은 파견노동자의 급속한 증가와 임금 및 노동조건 저하로 얼룩질 것이다.

 

문제는 고령자 대상 파견 확대가 중고령층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가운데 더 이상 가족에 의존할 수도 없는 청년층의 실업과 비정규 노동 문제가 심화할 것이다. 미래는커녕 당장 내일이 없는 청년층에게 중고령층 노동시장 유연화는 '내일 없는 오늘'이 죽을 때까지 계속됨을 의미한다.

 

인력난이 심한 업종부터 파견허용 업종을 확대하겠다는 계획 또한 정부가 인력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보상과 연계된 숙련의 미스매치가 원인임을 외면한 채 일자리 정보 부족이 인력난의 원인인 듯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정부 대책에서 파견노동 양성화에 수반돼야 할 파견사업에 대한 규제를 찾아보기 힘들다. 우수 파견업체 인증제 도입이나 표준계약서 도입이 고작이다. 파견업체가 파견노동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하도록 하고, 파견 대기기간 동안에도 임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등 파견노동자의 고용 및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최소한의 규제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다.

 

정부 대책의 간접고용 활성화 의도는 파견 확대방안 외에 사내하청 활용 양성화 방안에서도 드러난다. 파견과 도급의 판단기준을 명확화한다는 미명하에 원청기업이 불법파견 징표가 될 수 있음을 우려해 회피해 온 '배려' 사항들을 징표에서 제외하겠다는 것이다. 기존 불법파견 판결들에서 징표로 여겨지던 것들을 제외함으로써 사실상 사내하청을 합법화하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한 셈이다. 그 밖에 사내하청 안전보건과 관련한 몇몇 대책들도 ‘처벌규정 강화를 통한 원청책임 강화’라는 핵심에서 비껴 나 있다.

 

결국 정부 대책은 그간 묵인해 오던 편법적이고 불법적인 파견과 사내하청 관행을 인정해 주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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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유니온과 알바노조에 대해

청년노조운동의 의미와 전망


* 제112차 노동포럼 "청년유니온과 알바노조, 깊이 들여다보기" 토론문


청년노조운동의 때늦은(?) 등장과 기존 노동조합운동

 

청년노조운동이 2010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다소 늦은 감이 있으나, 늦어진 이유가 분명히 있다. 1990년대 말 이후 2000년대 중-후반 시기까지는 비정규직 규모 자체가 급증하였고, 이를 배경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전사회적으로 급부상하였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에서도 기존의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대한 대응으로서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발생, 성장하였다. 반면, 지속적인 청년실업과 그 이면에 놓인 노동시장 내 교육-보상 불일치, 유동적 노동시장의 고착화로 인한 경력경로 단절 등의 문제에 대한 주목도는 적었다. 기존 노동조합운동 또한 정규직 중심으로, 또 기업별 관행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상태로 고착화되면서 정규직 운동과 비정규직 운동 간의 괴리가 쉽게 메워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었고, 이러한 현상이 기존 노동조합운동의 조합원 구성의 중고령화와 병행하여 나타났다.

 

한편으로 2000년대 후반 들어 ‘세대론’이 부상하는 가운데 기존 정규직 중심 노조운동이 청년노동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하기보다는 ‘세대론’을 알리바이로 삼는 경향이 나타났다. 물론 기존 노조운동이 청년노조운동에 대해 여전히 ‘무시’나 ‘동정’의 시선을 갖고 있는 것에도 ‘합리적’ 이유는 존재한다. 조합원 자신들이 젊은 시절 투쟁을 통해 획득한 교섭력을 바탕으로 이룬 일정 수준의 임금소득의 상당 부분을 현재 청년층에 해당하는 자녀들의 교육에 투자해 왔기 때문이다. 청년실업 또는 청년노동의 문제를 ‘눈높이’의 문제 또는 ‘일시적-개인적’ 문제로 한정하는 자본의 시각에 형식적으로 반대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가족 단위의 교육투자라는 개인적 접근을 통해 자신의 자녀 문제에 있어서는 학력별 및 대학서열에 따른 격차의 구조화에 대응하는 모순적 관행이 나타났다.

 

다른 한편, 새롭게 등장하는 청년노조운동을 ‘젊음’이나 ‘신선함’의 이미지로 소비하는 데 머물며 청년층 불안정노동 문제에 대한 기존 노조운동 스스로의 책임의 문제는 경시해 온 측면도 있다. 중장년층 정규직 노동자들도 더 이상 고용이 안정적이지도 않으며 먹고 살기도 힘들다는 ‘변명’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청년노동 문제는 ‘세대’ 문제만으로 보기보다는 새로운 유형의 불안정 노동자층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나, 기존 노조운동의 이러한 인식수준은 낮은 상태라 할 수 있다.

 

일반노조운동의 침체와 청년노조운동의 부상

 

한편, 일반노조운동은 기존 노조운동의 기업별 관행에의 도전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기업별 경계로 묶을 수 없는 유동적 노동자들의 조직화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운동이 직종별 운동을 거쳐 나아가 노동시장 규제력까지 갖출 수 있는 산업별 운동으로 확장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산별운동은 기존 기업별 조직이 ‘전환’하는 형태로 형성되어 온 데다 기업별 조직 내부의 정규직-비정규직 괴리의 문제 또한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 공공부문이나 제조업 부문의 대기업 사업장들만 보더라도 일반 조합원들은 물론 간부 활동가들까지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원칙적 수준에서는 적극적이나, 구체적 사안에서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노조운동은 기존에 조직화 자체가 미비하였던 주변적 직종을 중심으로 시도되어 왔다. 그러다보니 직종별 운동을 바탕으로 산업별 수준의 운동으로 성장해 나간다는 전망 자체가 구조적으로 차단되었다. 그나마 노동시장 유동성이 낮고 현장 기반 조직화 접근이 가능한 공공서비스 부문에서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간 최저임금 투쟁이 청소노동자들의 직종임금 투쟁의 성격을 띠어 온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현장 기반 조직화가 거의 불가능한 유동적 노동시장의 불안정 노동자층을 대변하고자 하는 시도는 청년유니온과 아르바이트노동조합 등 청년노조운동이 거의 처음인 듯하다.

 

청년노조운동의 기존 노조운동에의 시사점

 

청년노조운동이 기존 노조운동에 대해 지니는 의미와 관련하여 이론적으로는 ‘인정’과 ‘분배’의 두 차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기의 청년노조운동을 세대론에 기반한 인정투쟁으로 국한시키던 기존 노조운동이 이들을 재평가한 계기는 청년노조운동이 각종 캠페인 사업 등을 통해 불안정노동 문제가 ‘인정’과 ‘분배’의 접점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노동운동이 분배를 둘러싼 경제투쟁을 넘어선 계급적 정치사회적 투쟁에 포괄되는 부차적인 것으로만 ‘인정’의 문제를 바라보다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최근에 이르러 노조운동 내에서 젠더, 인종, 고용형태의 신분화 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상하게 된 과정과도 연관된다. 이후 청년노조운동이 초기의 인정투쟁 중심 접근에서 교섭 등 분배투쟁 접근에 보다 밀접해지고 있는 경향 또한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청년노조운동의 발전 전망에 대한 몇 가지 단상

 

문제는 청년노조운동의 조직확대 기반이 주로 인정의 논리에 바탕하고 있는 데 반해, 조직의 확대와 성장, 대안적인 운동 방향 제시, 그리고 기존 노조운동의 쇄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영향력 형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분배 측면에서의 효과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수의 조합원들이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청년노조에 가입하고 있는 가운데, 청년노조운동이 조직대상으로 삼고 있는 도시 청장년층 불안정 노동시장 영역은 그 유동성으로 인해 현장 기반 조직화가 어렵다는 구조적 제약이 존재한다. 따라서 청년노조운동의 발전은 ‘노동조합’으로서의 분배적 기능의 강화만으로는 이루기 어려우며, 집합적 정체성의 형성 측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합원 규모가 확대되어 가면서 나타나는 ‘연결의 과잉, 관계의 결핍’ 경향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조직화 측면에서는 청년유니온은 취업준비생과 청소년 등 다양한 집단으로 조직대상을 확장해 가고, 알바노조가 대학을 거점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가는 등 대상과 방법의 측면에서 조직화 전략을 갖추어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현장 기반 조직화’ 접근의 제약을 온전히 넘어서기는 어려우며, 중장기적으로는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 청년 불안정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최소한의 생활’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의미(미래 전망 포함)’이다. 이들은 청년노조 조직에 대해서도 ‘서비스’뿐만 아니라 조직 구성원으로서의 ‘충실감’과 ‘자부심’을 기대한다. 그러나 노동시장 특성상 현장 기반(사업장 중심) 조직을 바탕으로 임단협 중심의 노사관계를 통해 경제적․정치적 성과들을 확보하는 데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제기, 제도개선 투쟁, 초기업적 교섭과 협약 등 청년노조운동의 사회적 영향력 강화를 통해 청년노조 조직 멤버십이 갖는 의미를 제고하는 것이 오히려 조직 외연의 확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조합원들이 청년노조 가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해 재고해 본다면, 청년노조 조직이 ‘해 줄 수 있는 것’ 또한 새롭게 재정의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직운영 측면에서도 재정기반 확충과 조합원 및 간부 교육을 통해 활동에의 참여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 접근의 역발상 역시 필요하다. 다시 말해 청년노조운동의 활동이 갖는 사회적 ‘의미’의 확장을 통해 자발적 참여수준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불안정한 노동현실의 개선뿐만 아니라, 기존 노조운동의 쇄신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새로운 노조운동을 주도한다는 적극적 의미의 강화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존의 비정규직 노조운동과의 연대의 접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도시지역 민간서비스 부문 중심의 청년층 불안정 노동시장의 문제들이 공공서비스 부문의 주변적 노동자층의 문제나 제조업 부문의 대기업 사내하청, 중소영세사업장 문제 등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활동이 필요해 보인다. 이는 현재 청년노조운동의 상황을 고려하면 무리한 주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역수준의 활동 강화 등 다양한 가능성은 존재한다. 지역활동의 경우, 일반시민들의 우호적 여론이나 청년노동 문제에 적극적인 지방자치단체 및 시민사회단체들로부터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방식뿐만 아니라, 지역 내 기존 노조조직들의 활동을 사업장 영역 밖으로 이끌어내는 방식 또한 시도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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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과 이재용,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5월

이재용과 이재용,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5월: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

 

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65호
2014년 5월 <이 달의 역사> 기고글

 

이재용과 이재용


두 사람의 이재용이 있다. 삼성전자 부회장이자 삼성그룹 기업지배구조의 정점에 서 있는 삼성에버랜드 최대 주주이기도 한 이재용은 이건희 회장으로부터의 편법적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후계자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 그리고 아직 5월을 맞이하지 못한 한 사람이 있다. 1997년 4월 30일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에서 노동조합 결성 활동을 벌이다 해고당한 이재용에게는 5월의 첫 날인 노동절이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해고당한 지 꼭 17년째 되는 날 경남 창원에서 그를 만났다.


이재용은 1959년 부산에서 태어나 가정형편의 어려움으로 인해 중학교를 졸업한 뒤 철공소에 다니는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가 고등학교를 마친 것은 훗날 삼성중공업 입사 후 야간고등학교를 통해서였다. 1982년 군대 전역 후에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하청업체에 근무하였으며, 1986년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에 입사하게 된다. 부산에 거주하던 그가 거제조선소에 취업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선산업의 인력부족 상황으로 인해 하청업체 취업이 쉬웠다는 점과 더불어, 한때 거제조선소에서 일했던 형의 영향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데 형님이 거제조선소에 다녔었어요. 형님도 해고를 당했는데, 지금 같으면 아마 블랙리스트에 올라 저도 입사가 안 되었을 텐데, 기록이 전산화되어 있거나 했던 게 아니라서 ... 형님은 노조결성 활동은 아니었지만, 부당한 대우를 관리자 측에 항의하다가 해고를 당했던 거죠.”

 

거제조선소 하청노동자였던 이재용은 당시 현장에서 삼성중공업 1공장의 직원 모집 소식을 듣고 입사시험을 치렀다. 그에게는 변변한 자격증도 없었고 학력도 없었으나, 신규 사업으로 인해 인력이 부족했던 터라 도면 보는 방법 등을 포함한 간단한 시험을 치른 뒤 입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사 후 1년여가 지나자 그는 곧 “삼성이 임금은 타 사에 비해 높지만, 인간적인 대우라던지 이런 게 너무 형편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더욱이 1987년부터는 창원지역에서도 노동조합운동의 ‘열풍’이 불었다. 이를 지켜보던 그는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역의 활동가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1988년 하반기부터 1989년에 걸쳐 이재용은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에서 본격적인 노조결성 시도를 하였다. 상경투쟁 등 공개적인 활동과 더불어 현장에서의 조직활동을 거쳐 1992년 들어서는 제도의 변화 필요성을 절감하고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던 노동자협의회 위원장에 ‘노동조합으로의 전환’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하였다. 그러나 그의 당선 이후 노조결성 시도가 가속화되자, 사측은 1993년 10월 어느 날 그에게 보복성 폭행을 가해 노동자협의회 활동을 무력화하였다. 이후로도 사측은 탄압과 더불어 온갖 회유를 시도하였으나 끝내 1997년 4월 30일 그를 징계해고하였다.


삼성중공업 노동조합 결성 시도의 흐름: 창원 2공장과 거제조선소


1980년대 후반 당시 삼성중공업에는 거제조선소, 창원 1공장과 2공장의 3개 사업장이 있었다. 훗날 화력발전용 보일러가 주요 사업부문이었던 창원 1공장은 두산중공업에 인수합병되었고, 중장비를 생산하던 창원 2공장은 볼보와 클라크에 분할매각된다. 그런데 삼성중공업에서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본격화된 것은 1987년 8월 파업이 발생한 창원 2공장에서부터였다. 당시 창원 2공장 노동자들은 부서이동, 납치 등 사측의 탄압과 회유 속에서도 '민주노조 결성방해 중지'. '임금 20% 인상', '인사고과제 폐지' 등의 구호를 내걸고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삼성 사측은 '03작전'(새벽 3시에 실행한다는 의미)이라는 이름의 구사대 폭력으로 탄압을 가하고 이에 더해 사측은 삼성 노동자들이 설립신고서를 제출하기 전날 이미 유령노조 설립신고를 제출하였다. 결국 노동자들의 시도는 노사협의회의 대의원을 확대하고 대표를 직선으로 뽑는 선에서 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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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90년 삼성중공업 창원 2공장 노동자들의 천막농성 (출처: <월간 말>)

 

창원 2공장의 노조결성 시도가 좌절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1988년 4월에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노사협의회 임금협상을 계기로 노조결성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거제조선소 노동자들은 4.16 전면파업을 벌였다. 작업을 거부하고 시위에 동참한 노동자들은 1,500여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삼성은 파업 노동자들에게 구사대를 동원하여 폭력을 가했고, 노동자들보다 한 발 앞서 유령노조 설립신고서를 거제군청에 제출하여 노조결성을 막았다. 결국 4월 25일 노사협의회가 재개되어 농성 참여자 신분보장 및 일정수준의 임금 인상으로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거제조선소를 중심으로 1988년 내내 삼성중공업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결성 시도와 이에 대한 삼성 측의 탄압이 이어졌다.


창원 1공장에서는 1988년 11월 말에 이르러 노동자들의 노조결성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11월 28일 창원 1공장 노동자들 250여명이 농성을 벌였으나 구사대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지도부가 납치되기도 하였다. 12월 들어서는 창원 1공장 노동자 8명이 상경하여 한국노총 점거농성에 참여하였다. 이상과 같은 시도들은 삼성중공업에서 민주노조를 인정받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이듬해인 1989년 6월 거제조선소 노동자들의 파업 등 노조결성 투쟁은 계속되었다.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


이전까지 철구(鐵球) 사업부문이 주를 이루던 창원 1공장은 이재용이 입사하던 즈음 보일러사업부를 신설하며 많은 인력을 모집했다. 이재용 역시 ‘삼성’에 정규직원으로 입사하면서 자부심과 기대가 컸으나, 그러한 기대는 머지않아 무너졌다. 임금수준은 다른 회사들에 비해 높은 편이었지만, 반장들은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욕설과 폭언을 일삼았다. 또한 당시 삼성이 일본식 직능급제를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동료들 간의 경쟁도 심화되었다. 더욱이 숙련도나 작업량보다는 충성경쟁이 핵심이었다.

 

“윗사람들한테 잘 보이면 고과를 잘 받게 되니까, 그리고 그게 임금에 반영되고 하니까. 그게 굉장히 못마땅했는데, 개인이 어떻게 대응할 방법이 없었죠. ... 동료간 경쟁이 어땠냐면 ... 인사고과가 A, B, C, D 식으로 등급이 있었는데, 내 옆에서 일하는 동료가 자신이 A를 받았는지, B를 받았는지 말을 안 해줘요. 서로가 경쟁 상대이다 보니까. 같이 일을 하면서 인간미 없이 서로가 경쟁을 하게끔 사측이 유도를 한 거죠.”


그렇다고 삼성중공업의 비교적 높은 임금수준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재용 역시 당시 창원 1공장의 비정규직 문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창원 1공장에는 일용직 제도가 있었다. 직영 소속으로 상시근무를 하면서도 일용직으로 분류되어 정규직과는 작업복도 달랐고, 이용하는 식당도 달랐다. 수년을 근무해도 계속 일용직 상태에 머물렀다. 1989년 이들 일용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이자 사측은 약700여명에 이르는 이들 일용직 전체를 정규직으로 전환하였다.

 

“일용직들이 정사원화를 요구하면서 들고 일어났었죠. 명절 때 선물을 주는데, 당시에 삼성에서는 계열사인 제일제당에서 만든 설탕을 선물로 주곤 했어요. 그런데 그걸 정사원들에게는 15Kg짜리를 주고 일용직에게는 5Kg짜리를 주곤 했죠. 그게 시발점이 되어서 일용직 노동자들이 퇴근길에 ... 그때 일용직은 통근버스도 못 탔어요. 그러다가 정문 앞에서 일용직 노동자 한 분이 5Kg짜리 설탕 포대를 패대기치더니 한 십여 명이 덩달아 패대기를 쳤죠. 그게 시발점이 되어서 집단적으로 정사원화 요구를 한 거죠.”


험한 작업은 일용직 노동자들이 도맡아 하는데, 정작 정사원들에 비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던 일용직 노동자들이 벌인 시위였다. 이후 직영 소속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모두 정사원이 되었지만,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창원 1공장에서는 소사장제가 실시되면서 한 부서가 통째로 소사장제로 전환되기도 하는 등 외주화가 진행되었고, 이후 사내하청 고용형태가 자리 잡았다.

 

이처럼 노동자들의 불만과 좌절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이재용은 1988년 하반기부터 몇몇 동료들을 설득하여 함께 지역의 노동조합과 노동단체들을 찾아다니며 교류를 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창원 지역에서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저런 곳들에 찾아가 상담해 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초기에는 가톨릭 노동상담소, YMCA 노동교실 등을 찾아 교육을 받고 상담을 하였으나 머지않아 마창노련 활동가들과 만나 교류하게 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는 현장에서 ‘삼성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삼성중공업 사측과 공권력으로부터 온갖 탄압을 겪게 된다.


“1990년에 제가 경남도경 대공분실에 약2개월 동안 11번을 끌려갔어요. 오라고 하길래 안 갔더니 현장에까지 들어와서 납치하다시피 끌고 가고. 그렇게 끌려가서 나도 열이 받아서 위협하고 그래도 말도 안 하고 버티고 있으니까, 담당자가 바뀌어서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존댓말 쓰면서 한다는 이야기가 ... 저랑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를 막 하더라고요. 당시 마산 수출자유지구에 김일성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린 적이 있었어요. 그걸 제가 관여한 것이 아니냐고 엮어가지고 ... 계속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길래 버티고 있다 보니까, 이 사람들이 회사 쪽하고 결탁이 되었는지, ‘지금부터라도 회사 들어가서 말 잘 듣고 하면 없던 일로 해 주겠다’고 그러는 거지.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또 1991년경 일인데, 내가 회사 물건을 들고 나가는 걸 봤다는 목격 확인서까지 받아가지고서는 경찰에서 절도 건으로 조사 받으러 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안 갔더니 또 날 잡으러 온 거에요. 바로 유치장에 수감이 됐는데, 그래서 그 목격 확인서라는 걸 좀 보자고 했더니 바로 내 옆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한테 그걸 받았더라고요. 그 동료랑 반장이랑 두 사람이 목격 확인서를 썼더라고. 그리고는 인사담당 이사가 면회를 왔는데, 한다는 말이 각서 한 장만 써 주면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해 주겠다고. 그래서 화가 나서 ‘너네가 어떻게 공권력과 결탁을 해서 이럴 수가 있냐’고 호통을 치고 돌려보냈죠. 그런데 삼성동지회 동료들이 ‘일단 밖에 나와서 대응을 하자’고 논의를 통해 결론을 내렸길래 각서를 쓰고 나왔죠. 그런데 확인서를 써 줬던 그 친구가 한 달 뒤에 회사를 그만뒀어요. 소문에 따르면 그 친구는 돈을 많이 받고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사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컸던 터이기에, 삼성동지회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간간이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노조 왕국’인 삼성에서 노동조합 결성은 쉽지는 않았는데, 가장 큰 장벽이 되었던 것이 사측에 의한 유령노조의 설립이었다. 삼성중공업 사측은 개별 사업장뿐만 아니라 거제조선소, 창원 1공장과 2공장의 3개 사업장 통합 노조 또한 유령노조로 설립신고를 하여, 사업장 단위의 복수노조가 금지되어 있던 당시로서는 합법적 노동조합 설립이 어려웠다. 이와 관련하여 이재용은 3개월간 자료를 준비하여 1991년 국정감사 당시 국회 노동위원회에 제출하기도 하였으나, 삼성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국회에서의 삼성 유령노조 문제에 관한 논의는 결국 무산되었다.


노동자협의회와 삼성동지회, 그리고 그 이후


삼성동지회의 조직 및 활동은 계속되었으나, 도청과 감시 등을 비롯한 사측의 개입으로 인해 내부의 불신이 싹트는 등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이재용은 삼성동지회 내부 논의를 거쳐 1992년 11월 노동자협의회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출마 당시의 공약은 노동자협의회의 노동조합으로의 전환, 단 하나였다.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가 금지되어 있고, 삼성중공업 측이 유령노조를 설립해 놓은 것이 잘 알려져 있던 상황에서 법외노조로라도 활동하겠다는 이재용 후보의 공약이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재용 집행부는 당선 직후부터 사측의 집요한 개입에 맞닥뜨렸다. 삼성동지회 회원들에 대해 협박 등 강경책은 물론 해외출장, 보다 나은 부서로의 전환배치 등 회유책을 통해 조직을 와해시키고자 했다. 1993년 임금협상 시기에도 사측은 노동자협의회 상근간부들에 대한 회유를 통해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당시 노동자협의회의 상근간부는 10명이었는데, 상근 부장 7명 중 5명이 사측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이재용 위원장은 노동자 찬반 투표 실시를 주장하였으나, 사측과 집행부 내부에서 직권조인의 압박이 거세지자 수일 간 잠적하기도 하였다. 결국 기존의 임금(기본급) 산출기준 월240시간을 288시간으로 상향조정하는 조건으로 임금협상이 타결되었으나, 협상이 마무리되자 사측은 구두합의 하였던 타결조건 시행을 거부하였다. 이에 이재용 위원장과 현장 노동자들은 3개월간 부서 내에 선전물을 배포하고 게시판에 대자보를 게시하는 등으로 대응하였고, 마침내 노동조합으로의 전환을 내세우며 작업거부를 시도하려 하자 사측은 합의사항을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삼성중공업 3개 사업장 모두에서 상당 수준의 임금상승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노동자협의회가 노동조합으로의 전환을 추진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사측의 협박, 회유, 폭력의 수위 또한 점점 더 높아져갔다. 결국 1993년 9월 이재용 위원장은 ‘테러’를 당하였고 병원 신세를 지면서 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위원장 활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당시 사측은 이재용 위원장이 폭행당한 일을 개인적 스캔들 때문인 것으로 매도하였으나, 후일 경찰에서 사측의 개입 사실이 밝혀졌다.

 

“그때 그쪽에서는 저를 죽이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거죠. ... 뒤통수를 맞고 그냥 푹 쓰러져서 한 시간정도 뒤에 정신을 차리고는 스스로 혼자 병원에 갔죠. 그 사람들은 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돌아갔던 것 같아요. ...당시에 지역신문이나 중앙 일간지에도 나왔었어요. 그 전에도 납치 감금은 수도 없이 당했죠. 어디 가려고 하면 그쪽 사람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했고. 그런 일들이 허다했습니다.”


노동자협의회 위원장을 그만두고 현장에 복귀한 이재용에게 사측은 그에게 업무도 주지 않았다. “과장 옆에 자리 하나 주고 거기 앉아있으라는” 식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재용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삼성동지회 조직사업에 집중했다. 사측의 방해가 심하여 명부도 없이 비공개적으로 조직을 해 나갔으나, 사측에서는 그와 접촉하기만 하면 해당 노동자를 다음날 불러 ‘면담’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그와 접촉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노동자들도 생겨났다. 그럼에도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일은 함께 하기로 뜻을 모은 사람들이 사측의 회유로 돌아서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특히 삼성중공업 측은 1996년 명예퇴직을 실시하면서 삼성동지회 회원들에게 집중적으로 많은 보상을 제공하면서 퇴직을 종용하였다. 결국 상당수의 삼성동지회 회원들이 현장을 떠났다. 이재용의 증언에 따르면 이제껏 삼성동지회를 한 번이라도 가입하여 거쳐 간 사람들이 500명이 넘는다고 한다.


해고 이후 이재용의 삶과 끝나지 않은 복직투쟁

 

삼성동지회 조직활동을 계속하던 1997년 초 어느 날,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이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리고 기자회견 직후 삼성중공업 사측은 이재용에게 금전적 보상과 해외 전환배치를 제시하며 회유하고자 하였다. 이를 거부하자 이재용은 곧 징계해고를 당하였다.

 

“저한테 현금으로 5억원을 줄 테니 베트남으로 가서 골프장 관리하는 업무를 하라 그러다라고. 그래서 ‘싫다’고 그랬더니, 그러면 ‘얼마나 주면 가겠느냐’고 그러길래 ‘한 50억 정도 주면 내가 가겠소’ 그랬지. 그러니까 피식 웃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경비회사 사람이 ‘당신 퇴근하면 바로 따라붙는 사람이 있다’고 귀뜸을 해주는 거야. 부서장도 절 불러서 너 계속 그러면 해고될 거라고 언질을 주기도 했죠. ‘해고하려면 해고해 봐라’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4월 30일 징계해고 통보를 받았죠.”


징계해고 사유는 작업장 이탈, 근무태만 등이었다. 이재용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기록을 바탕으로, 사측은 법적으로 쓸 수 있게끔 되어 있는 연월차 휴가도 많이 썼다고 트집을 잡고, 또 업무를 주지도 않고 있었으면서 작업장 이탈과 근무태만 같은 이유를 붙였다.


해고 직후부터 이재용은 복직투쟁을 벌였는데,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수배자 생활을 하며 수개월을 숨어 다니기도 하였고, 또 그의 복직투쟁에 함께했던 지역 활동가들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재용은 “1996년 명예퇴직 때 삼성동지회 회원들이 대거 퇴직하면서 세력이 약해진 가운데 1997년 해고를 당했던 것”이라 회상한다. 1999년부터는 삼성생명, 삼성SDI 해고자들을 만나서 삼성해복투와 함께 수년 간 복직투쟁을 함께 했다.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에서 노동조합 활동과 관련한 유일한 해고자인 그는 한동안의 공백기를 거쳐 다시금 본격적인 복직투쟁을 준비 중이다. 한편, 최근에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지역일반노조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노동조합 활동을 빌미로 해고된 김경습이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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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14년 4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집회 (출처: 삼성일반노조)

 

그의 복직투쟁에 다시금 힘을 실어준 것은 지난해인 2013년에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이명박 정권 초기에 심의에 들어갔던 것이 좀처럼 진행이 안 되다가 지난해에 와서야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무노조 사업장에서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와 관련하여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사례로는 1989-91년 포항제철 노조 민주화 활동으로 해고된 포스코의 전장복 외 4명이 17년간의 복직투쟁 끝에 2008년 인정을 받은 것을 제외하면 삼성에서는 이재용이 유일하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로서 명예회복 및 보상과 더불어 삼성중공업 측에도 복직 권고가 제시되었으나, 법적 강제력이 없는 이 권고에 대해 삼성중공업 측은 복직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보내 왔다. 이후로도 이재용이 개인적으로 몇 차례 복직을 요구하였지만 삼성중공업 측으로부터 답변조차 받을 수 없었다. 해고된 지 17년, 오랜 복직투쟁을 해 오는 가운데 그의 일상생활도 큰 타격을 받았다. 해고 직후부터 수년 동안은 복직투쟁에 집중하느라 생업도 포기해야 했다. 작은 꽃집을 운영하며 가계를 지탱하던 그의 부인도 지금은 초등학교에서 계약직 영어전문강사로 일하는 학교비정규직이다. 무엇보다 그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 줄 수 없었던 일이다.

 

“한창 애들 공부할 시기에, 아이들이 실력이 되는데도 4년제를 못 보냈습니다. 해고된 시점이 ... 지금은 큰 애들은 다 취업했지만, 그게 가장 가슴이 아프죠. 해고되던 당시에 사원아파트에 있었는데,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도 ‘너네 아빠는 빨갱이다’ 그런 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마음고생이 많았죠. 사원아파트는 해고된 뒤에도 한 2년 동안은 안 비워줬는데, 나중에 소송이 들어가서 결국 법원에서 짐 들어낸다고 해서 나오게 되었고요.”

 

첫 머리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삼성그룹 후계자인 이재용과 똑같다. 그에 따르면, 과거 권영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선거 유세를 하면서 가는 곳마다 삼성 이야기가 나오면 “삼성에는 두 이재용이 있는데, 한 이재용은 부모 잘 만나서 거액의 재산을 받아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편하게 사는데, 다른 이재용은 해고자 신분으로 어렵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민주노총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아쉬움도 많다.

 

“해고되던 당시에 전해투 기금도 거의 없었고 ... 제가 해고되던 당시에 권영길 위원장이 뭐라고 했냐면, ‘이재용이 해고되면 민주노총이 생계를 책임진다’고 얘기했었어요. 해고되기 직전에. 그랬었는데, 해고되고 나서 민주노총으로부터 생계지원을 딱 3개월 받았죠.”

 

복직투쟁과 더불어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이재용은 2000년대 들어 민주노동당 활동을 시작하여 창원에서 웅남동 지회장을 맡기도 했다. 한 번도 당선되지는 못하였지만, 2002년, 2004년 보궐선거, 2006년 세 차례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최근 경남 고성의 시골집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건강도 돌보고 소일거리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본격적인 복직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삼성중공업 노조결성 시도를 돌아보며

 

짧은 만남의 시간을 마무리하며 그에게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에서의 노조결성 시도는 당신의 인생에 있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돌이켜보면 아이들과 부인에게 많이 미안하지만, 이런 활동을 해온 것에 후회는 없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의 곁에서 함께 싸워 온 분들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못난 아빠’로서 자녀들에 대해 갖고 있는 미안한 마음을 표하며 끝내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그는 곧 목소리를 가다듬고 “단 6개월을 일하고 그만두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복직을 해야겠다”며 굳은 의지를 밝혔다. 그의 곁에서 복직투쟁에 함께 해 준 동지들에 대한 보답,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녀들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이 정정당당한 것이었음을 확인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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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81년 미국 항공관제사 노조 파업 당시의 한 장면
      (출처: 영화 <Inequality for All> (2013) 中)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 해고자 이재용, 그에게는 그의 곁에서 투쟁에 함께했던 동료들 뿐만 아니라 그의 발자취를 이어가는 수많은 후배들이 있다. 최근 들어 본격화되고 있는 삼성에서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을 지켜보며 그 역시 감회가 새롭다. 그는 최근 삼성SDI 노동조합 설립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울산에 다녀오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최근 삼성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운동의 배경이나 생각은 과거와 다른 점도 많지만, 후배 노동자들이 보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을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무노조 삼성왕국’은 바로 그 한 사람이 낸 작은 돌파구로부터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리고 삼성의 정상에서 군림하는 이재용이 아닌, 밑바닥에서 삼성에 맞서 온 이재용에게, 그가 17년 동안 맞이하지 못했던 5월이 찾아올 때, 비로소 또 하나의 돌파구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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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남, 되돌아옴, 그리고 SWV

엊그제 일 때문에 안산에 다녀오면서 계획에는 없었지만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들렀다. 그토록 어린 친구들의 영정이 그토록 많이도 모여있는 것을 보니, 더구나 커다란 체육관의 한 벽면을 가득 메운, 아직 채워지지 않은 영정들의 빈자리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아찔했다. 뭐랄까 ... 슬프다거나 가슴이 아프다거나 한 어떤 감정이 찾아오기에 앞서 내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떠난 사람들과 떠나보낸 사람들 모두 상실의 아픔과 망연자실 속에서 되살아났으면 좋겠다. 좀 막연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힘과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오랜만에 SWV의 노래를 들었다.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줄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건 노래이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 목소리 자체가 세월 속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있다가 되살아나고 되돌아온 무엇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듯하다.

 

 

 

SWV는 1990년대 초중반 활동했던 3인조 여성 보컬그룹인데, 이 시기에 메인스트림을 이루고 있던 얼터너티브 내지는 그런지 락, 힙합, R&B 가운데 마지막의 R&B의 흐름을 대표했던 뉴 잭 스윙, 뉴 질 스윙의 흐름 속에서 뛰어난 가창력을 보이며 인기를 얻었던 이들 중 하나이다. 당시 내가 즐겨 들었던 곡들만 떠올려봐도 남성 보컬그룹으로는 Jodeci, Shai, Boyz II Men, 남성 솔로로는 Tevin Campbell 등이 있었고, 여성 보컬그룹으로는 En Vogue, TLC, SWV, Brownstone, 여성 솔로로는 Toni Braxton, Aaliyah 등이 있었던 듯하다. R. Kelly의 발탁으로 어린 나이에 데뷔하여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Aaliyah가 가장 안타까웠더랬다.

 

1990년대가 저물어가면서 대중음악은 생산방식도 변화하고, 소비양식도 변화하였다. 더 이상 메인스트림과 서브컬쳐의 변증법은 작동하지 않는 듯 보인다. 오랜만에 SWV의 데뷔 시절 곡들을 유튜브에서 찾아 듣던 중 묘한 감정을 자아냈던 것은 그녀들의 모습보다는 비디오 클립 밑에 달린 덧글들이었다. 대부분 1990년대라는 '그 시절'을 언급하는 것들이었다. 노래를 빼면 삶에 다른 어떤 것도 없을 것 같은 뒷골목 출신 소년 소녀들이 음악산업의 기획과 대중들의 반응 속에서 만들어진 어떤 '흐름'을 타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널리 퍼뜨릴 기회를 갖게 되는 일은 사라지고, 서바이벌 오디션 TV 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대신해갔다. 특정한 '전통'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며 그것을 재전유함으로써 집합적 정체성을 지니곤 했던 '잭'과 '질'들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그러던 가운데 중년이 되어 돌아온 SWV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되살아난다는 것'을 통해 묘한 감정을 전해주었다. 활동을 중단한 17년만인 2012년 새 싱글인 Co-Sign을 발표했고, 비디오 클립에서는 어느새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 또 다소간 후덕해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녀들의 노래하는 모습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명멸하는 별빛들처럼 수많은 요즘 가수들을 향해 "너네 그걸 노래라고 하니? 언니들이 한 수 가르쳐줄게"라고 하는 듯 당당한 모습도 멋지다. 이른바 '7080'처럼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구매력과 여유를 되찾은 소비자들이 그때 그 시절 아티스트들을 되불러오는 형태가 아니라, 어떻게든 다시 노래하고 싶고, 무대에 서고 싶어했던 이들의 도전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도 SWV는 감동을 준다.

 

올해 초부터는 이들의 재결성 및 활동 과정이 SWV Reunited라는 제목의 리얼리티 쇼로 방영되고 있다.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몇 편을 보면서 확신하게 된 것은, 이들의 가창력과 하모니가 그리 녹슬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먹고 살만 해 지니까 다시 노래나 불러볼까 하고' 재결성을 시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남성 락 밴드의 재결성에 비해 여성 보컬그룹의, 그것도 오랜 공백기간을 가진 뒤의 재결성이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녀들의 부활과 회복의 내러티브는 어느 정도는 리얼리티 쇼의 시대에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지 모르지만, 되살아나 되돌아온 그녀들의 생생한 목소리, 그것만으로도 오늘 우리는 치유받고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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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성의 시대: '현실'로의 도피 - 오사와 마사치

불가능성의 시대: '현실'로의 도피

 

오사와 마사치. 2008, <불가능성의 시대>

 

서문: ‘현실’로의 도피

 


‘전후’라는 시대구분

 

현실(reality)은 언제나 반(反)현실을 참조한다. 우리에게 현실은 의미부여된 사건 또는 사물들의 질서로서 나타난다. 의미의 질서로서의 현실은 항상 그 중심에 현실이 되지 못한 것, 즉 반현실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현실 속의 다양한 ‘의미’는 그것의 반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할당된다. ‘의미’의 집합은 동일한 반현실과 관계맺고 있기에 통일적인 질서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반현실이란 무엇인가. 미타 무네스케(見田宗介)에 따르면, ‘현실’이라는 말은 ‘(현실과) 이상’, ‘(현실과) 꿈’, ‘(현실과) 허구’라는 세 개의 반대말을 지닌다. 이들 세 가지 반대말은 그 자체가 세 종류의 반현실에 대응한다. 미타에 따르면, 그러므로 반현실은 세 개의 중심적인 양식(mode)을 지닌다.

 

그런데, 일본근대사 전문가인 캐롤 글럭(Carol Gluck)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60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전후(戦後, post war)'라는 시대구분이 살아있는 것은 일본 뿐이다. 예컨대 동일한 패전국이라 하더라도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는 하나의 시대구분이 지속되고 있다는 감각은 사라진 상태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아직도 ’전후‘라는 구분이 유효하다. 예를 들면,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수상으로서 ’전후 체제의 해체‘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때, 그것이 통했던 것은 일본인들의 내면에 아직 ’전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전후’라는 한 시대를,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심적인 반현실의 양식을 기준으로 조망해 보면, 미타가 지적한 대로 그 반현실의 양식은 ‘이상→꿈→허구’로 전이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전후는 ‘이상의 시대’, ‘꿈의 시대’, ‘허구의 시대’의 세 가지로 다시 구분할 수 있다. 미타가 이와 같은 테제를 제기한 것은 전후 45년을 맞이한 1990년의 일이다. 그는 전후의 45년을 3등분하여 각각을 ‘이상의 시대(1945-60년)’, ‘꿈의 시대(1960-75년)’, ‘허구의 시대(1975-90년)’에 대응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5년 뒤, 즉 전후 반세기를 경유한 시점에서 필자는 미타의 테제를 계승하는 논의를 제기한 바 있다. 그것은 한신-아와지(阪神・淡路) 대지진과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이 있었던 해인 1995년의 일이다.

 

우선 유의해야 할 점은 ‘꿈’이라는 양식은 ‘이상’과 ‘허구’의 양자의 분기점을 이루며 양의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예컨대 ‘꿈’이라는 말은 “당신의 장래의 꿈”이라는 표현에서는 ‘이상’에 가까운 의미를 지니고, “꿈인지 환영인지”와 같은 표현에서는 ‘허구’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단순화해 보면, 시대구분의 핵심을 보다 분명히 강조하고자 한다면, 중간에 놓인 ‘꿈의 시대’는 ‘이상의 시대’와 ‘허구의 시대’ 양측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렇게 크게 보면 전후 시대는 ‘이상의 시대’에서 ‘허구의 시대’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당시 전후 50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1970년이 전환점을 이룬다고 말한 바 있다. 나아가 필자는 그 20년 뒤에 일어난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에서 ‘허구의 시대’의 ‘극한=종언’을 보았다.

 

‘현실’로의 도피

 

각각의 시대의 내용에 대해서는 후반부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그에 앞서 기준이 되는 ‘반현실’은 ‘이상→(꿈)→허구’의 순으로 반현실의 정도를 높여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미래에 현실화될 것으로 기대되는 반현실인 반면, 허구는 그것이 현실화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 반현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상은 보다 광범위한 현실을 포함하는 반면, 허구는 그야말로 현실의 범주 외부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보다 강한 반현실성을 띤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반현실이 더욱 ‘반(反)’의 정도를 높여 왔다고 하는 방향성을 전제로 한 경우, 이해하기 어려운 역전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현실’로의 도피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실도피’라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 즉 현실로부터 이상이나 허구의 세계로의 도피이다(“이상만을 좇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 등).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 방향의 도피, 즉 ‘현실’로의 도피가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물론 이 경우 ‘현실’은 통상적인 현실이 아니라, 현실 이상으로 현실적인 것, 현실 속의 현실, “이것이야말로 현실!”이라 여기고픈 현실이다. 다시 말해 극도로 폭력적이거나 격렬한 현실로의 도피라 볼 수 있는 현상을 다양한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예로 손목 긋기(wrist-cut)로 대표되는 자해행위의 유행을 들 수 있다. 자신의 신체로부터 직접 느껴지는 고통은 그 어떤 현실보다 현실적이며, 현실을 현실답게 하는 순수한 결정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세계최종전쟁(아마겟돈)이나 테러, 혹은 전쟁과 같은 극한의 폭력에의 지향성을 지닌 종교적 내셔널리즘의 열광 또한 '현실'로의 도피의 한 종류다. 혹은 격렬한 사건이나 전쟁의 현장을 찾아가보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충동 역시 동일한 지향성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청년층의 문화를 중심으로 이와 같은 종류의 격렬한 '현실'에의 애착과 정열의 예는 일일이 셀 수가 없다. 한편, 일본보다 서구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이긴 하나, '허구'의 드라마에 성이 차지 않는 시청자들은 '리얼리티 드라마'(특정 남녀의 실제 생활을 있는 그대로 '드라마'로서 방영하는 TV 프로그램)와 같은, 그야말로 '현실' 그 자체를 쇼나 드라마로서 향유하고 즐기지만, 이 도한 '현실'에의 열광의 하나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이상의 시대에서 허구의 시대로'라는 전후사의 전환에 관한 필자의 논의를 받아들여, 허구의 시대에 뒤이어 '동물의 시대'라 그가 이름붙인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논한다. 여기서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중 하나) 역시 '현실에의 도피'이다. 아즈마에 따르면, 오타쿠들은 대부분이 마약중독자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게임이나 아니메에 빠져든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허구의 의미(이야기)의 이해(理解)를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닌, 신경계를 직접 자극하는 듯한 강렬함이다. 그것은 자해행위 중독과도 닮아 있다. 여기에는 미래에 기술발전에 따라 자해 대신에 뉴런에 직접 강력한 자극을 가하는 것에 빠져드는 중독증이 출현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인간은 신경계를 갖춘 생리적 신체로서, 즉 동물로서만 살아있는 것과도 같다.

 

‘우리들’의 사회의 ‘현실’

 

현실로의 도피를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은 일본의 전후사라는 틀을 넘어선다. 현대사회에 있어 '현실'로의 회귀, 현실에의 지향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형상은 '원리주의자'라 불리는 이들(의 일부)에 의한 테러 도는 폭력일 것이다. 9.11 테러로 국제무역센터(WTC) 빌딩이 무너지는 모습을 담은 영상은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현실'에의 지향을 상징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무차별 테러를 불사하는 원리주의자들은 주로 ‘뒤쳐진 제3세계’로부터 출현하는 것이지, 선진자본주의 국가인 ‘우리들의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현상이라 보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란 원리주의와는 정반대편에 놓인 다문화주의가 아닌가.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재반론을 해두어야겠다. 이슬람제국은 원래 원리주의적이기는커녕 종교적 관용을 핵심으로 한다. 어찌 보면 다문화주의적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원리주의적인 불관용은 어떻게 출현하였는가. 궁극적으로는 그 원인을 서양근대와의 접촉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요컨대 원리주의는 서구에서 유래한 근대와, 그러므로 ‘우리들의 현대사회’와 무관하게 출현한 것이 아니다.

 

원리주의로 구체화된 폭력이 우리들의 사회의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폭력이 아니라, 우리들의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명제는 다른 각도에서도 지지될 수 있다. 9.11 테러에 관해, 필자는 일찍이 이것이 어떤 의미로 현대 선진자본주의에 내재된 것이라는 점을 신중히 논한 적이 있다(<문명 속의 충돌>).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른 예를 들어보자.

 

2005년 8월말 ‘카트리나’라는 이름의 초대형 허리케인이 미국 동남부를 덮쳤다. 허리케인 강타 직후 정부의 늑장 대응으로 인해 유독 뉴올리언즈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정부가 신속히 대응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원인이 자리잡고 있다. 뉴올리언즈의 참상은 필시 미국인들에 대해 일종의 트라우마와 같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충격이 일종의 사고정지상태를 낳았고, 초기 대응에 있어 일시적인 지체를 낳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어찌하여 그토록 강한 충격을 받은 것일까.

 

뉴올리언즈를 궤멸시킨 허리케인은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은 '현실', 즉 파괴적이며 폭력적인 현실의 일종이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가져온 참상이 미국인들에게 있어 트라우마가 된 것은, 그것이 바로 '여기',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뉴올리언즈의 파멸적인 참상은 예컨대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분쟁지역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요컨대 허리케인은 중동과 같은 아득한 저편에서나, 혹은 TV나 영화와 같은 허구의 공간 속에서나 일어날 터인 일이 바로 '여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허리케인 그 자체는 자연재해이지만, 그것이 가져온 파멸적인 재해의 실상을 통해 미국인들이 은밀히 지니고 있던 불안 혹은 예감, 즉 원리주의나 자폭테러와 연결된 폭력적인 '현실'이 이미 '우리들'의 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 혹은 예감을 직접적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그야말로 트라우마가 될 만한 점은 뉴올리언즈의 참상이 전혀 예상밖의 우발적인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부인하면서도 예상해 왔던 일이었다는 점이다.

 

이와 똑같은 양상을 2005년 10월에서 11월에 걸쳐 프랑스에서 일어난 폭동, 즉 파리 교외에서 경찰에게 쫓기고 있던 북아프리카계 청년 세 명이 변전소에 숨어들어 그 중 두 명이 감전사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 전역으로 번진 청년 이민자들의 폭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폭동을 1968년 5월 혁명의 폭력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5월 혁명에서는 유토피아적인 전망과 더불어 폭력에도 이유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상의 시대'에 내재한 폭력이었다. 그러나 2005년 프랑스 폭동에 그와 같은 전망은 없었다. 불타는 자동차에 이유는 없었다. 그 폭력은 오히려 자기파괴적인 것이었다.


 

 

저자소개: 오사와 마사치(大沢真幸)

 

1958년 나가노현 출생
도쿄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박사과정 수료
치바대학 문학부 조교수 등을 거쳐,
현재 교토대학 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 교수로 재직, 사회학 박사
전공은 비교사회학, 사회체계론
저서로는 <행위의 대수학>, <성애와 자본주의>, <제국적 내셔널리즘> (세도샤),
<신체의 비교사회학 I․II> (케소쇼보), <전자미디어론> (신요샤)
<허구의 시대의 끝>, <전후의 사상공간> (치쿠마쇼보)
<문명 속의 충돌> (NHK북스), <사상의 케미스트리> (키노쿠니야쇼텐)
<내셔널리즘의 유래> (고단샤, 마이니치출판문화상 수상)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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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8월 무더운 여름을 '쇳물처럼' 달군 한 노동자의 단식투쟁

1994년 8월 무더운 여름을 '쇳물처럼' 달군 한 노동자의 단식투쟁

 

 

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56호

2013년 8월 <이 달의 역사> 기고글

 

 

올 여름은 유난히도 무덥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과 더불어 삼성전자 서비스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은 이토록 무더운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다. 제왕적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재벌그룹 대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투쟁과 노조결성을 지켜보고 있자니 난공불락의 또 하나의 왕국인 포스코를 생각하게 된다. 삼성왕국에 삼성일반노조라는 게릴라가 있다면, 포스코에는 노정추(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가 있다. 1991년 포항제철 사측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민주노조가 자취를 감춘 이후 최근의 노정추까지 이어져 온 포스코 노조민주화 운동의 과거를 거슬러오르다 보면 남규원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20여년 전 해고자의 신분으로 한철 여름을 목숨 건 단식투쟁으로 보내고 아직까지도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잡부’로 살아가고 있다.

 

1994년 남규원의 단식투쟁

 

포항제철 해고노동자 남규원은 1994년 8월 13일 새벽 형산강 로터리에서 유령노조 해산 및 노조 정상화를 위한 노상 아사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그는 쇠사슬로 온 몸을 결박한 채 29일간 단식투쟁을 계속했다. 단식농성 기간 동안에 남규원은 포항제철 서울사무소 앞에서 진행된 해고자 노상 철야농성에 결합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를 포함한 해고노동자 4명이 강제연행되었고, 결국 남규원은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단식을 계속하였다. ‘포철 유령노조 해산 및 올바른 노사관계 정립을 위한 시민-노동단체 연석회의’가 결성되면서 단식을 중단할 것을 설득하자, 그는 9월 9일에야 단식투쟁을 마무리하였다.
 

단식투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휴면노조 상태의 유령노조인 포항제철노조의 총회 개최 시도였다. 조합원 14명에 불과한 유령노조는 7월 29일 총회 소집권자 지명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불법적으로 노조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남규원은 총회 저지를 위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포항제철소 측문을 돌파하여 노조 사무실 앞까지 질주하였으나 사무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경비원들에 의해 끌려나왔고 이후 사측에 의해 고소당하였다. 포항제철 사측은 유령노조의 총회 개최에 앞서 “구국전위 조직원 포철침투, 노사분규 조정기도”와 같은 내용으로 여론공작까지 시도한 터였다. 이윽고 8월 4일부터 포철해협(포항제철해고노동자협의회)은 형산강 로터리에서 유령노조 해산과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를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시작하였고, 일주일 뒤에는 포항시청에서 천막을 철거해 갔음에도 농성은 남규원의 단식투쟁으로 이어졌다. 농성이 이루어진 형산강 로터리는 1년여 전인 1993년 3월 전해투(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 창립 직후 지역조직인 경주-포항지역 해고노동자 복직추진위원회의 35일간 천막농성이 이루어졌던 곳이었다.
 

이러한 투쟁의 배경에는 구조조정의 위협, 노동강도 강화, 퇴직금 누진제 시행 등 신경영전략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포철해협과 노건추(포항제철노동조합재건추진위윈회)의 활동 등이 있었다. 1993년 3천억원의 흑자를 내었음에도 1994년 1월 포항제철 사측은 1998년까지 6,200여명의 추가 감원계획을 발표하였다. 당시 2만 3천여명의 포항제철 노동자들 가운데 약4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주된 감원대상 또한 상대적 고임금층의 주임 및 반장급으로 적시되었다. 1991년 민주노조 탄압 이후 3,500여명 규모의 감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온 데에다 추가 감원계획이 발표된 것이었다. 나아가 비교적 저항 없이 도입된 4조 3교대 근무 또한 노동강도 강화로 이어지고 있었고, 사측이 퇴직금 누진제를 입사년도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하자 현장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93년 말부터 1994년 초에 걸쳐 일부 해고노동자들의 해고무효 소송이 경주지법에서 승소를 거두며 사측이 노조재건 활동을 방해하고 협박하다 사유를 조작하여 부당하게 해고한 것이 밝혀지면서 포철해협과 노건추의 활동이 힘을 얻었다. 그럼에도 1994년의 투쟁은 무노조 성역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남규원의 단식투쟁이 마무리된 이후로도 해고노동자들의 포항제철 서울사무소 앞 노상 천막농성은 계속되었으나, 노동부가 유령노조에 대해 소집권자 지명을 함에 따라 결국 9월 29일 포항제철의 유령노조는 임시총회를 개최하였고, 이후 현재까지도 유령의 모습으로 현장을 배회하고 있다.

 

‘잡부’ 남규원이 말하는 포항제철

 

남규원은 누구인가? 단식투쟁 당시 31세였던 남규원은 포철공고 졸업 후 1984년 9월 포항제철에 입사하여 1990년 7월 민주노조 설립 시기 민주파인 ‘민족포철’ 그룹의 선봉대장을 맡은바 있고, 같은 해 포항제철 독신자기숙사 자치회장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인 1991년에도 독신자기숙사 자치회 선거에서 포철자치회민주세력통합추진위원회 측의 후보로 나서 당선되었으나, 당시 선거운동에 함께하였던 일부 노동자들이 해경 공안분실로 강제연행되어 협박을 당하는 등 사측과 공안기관의 탄압에 따라 1991년 2월 해고당하였다. 해고된 이후 남규원은 복직투쟁을 전개하였고 전해투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포항제철 복직투쟁 과정에서 받게 된 벌금형을 감당할 수 없어 건설현장 일을 시작하여 2002년 이후 현재까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건설일용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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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KBS. 2006년 포항건설노조 포스코투쟁 당시 남규원의 인터뷰 모습.

 

한편, 노무현 정권 들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에 의해 2008년 광양제철소의 전장복 등 5명을 시작으로 2010년 3명, 2013년 3월에 3명 등 1989년에서 1991년 사이 노조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해고노동자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았으나, 남규원은 아직까지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그저 꾸준히 자칭 ‘잡부’로서 살아가며 노동현장의 경험들을 기록하고 시를 썼다. 포항제철에서 해고된 지 19년을 맞는 2008년, 그는 시집 <개 잡부 해부학>을 출간했다. 그가 써내려간 시들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하나하나가 한 편의 시라기보다는 밑바닥 인생과 노동운동을 주제로 한 처절한 절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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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포항제철 35년사>. 포항제철소 준공식 당시 모습.

 

그의 시들 가운데 “포항제철과 나”라는 한 편의 서사시에는 무노조의 성역에 도전하며 현장에서 겪은 생생한 경험과 느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는 불길을 뿜어내는 거대한 제철소의 굴뚝과, 반복적 노동 속에 왜소해진 노동자의 모습을 대비시킨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박태준과 고준식의 라이타는 여전한데, 우린 그리스 건에 묻혀 인생이 피스톤질 하며 간다.” 강도 높은 병영적 통제와 그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양상들도 드러난다. 경영진이 공장을 방문한다고 하면 청소는 물론 공장운영의 효율성을 보여주기 위해 여분의 작업도구, 부속, 자재 등을 태우거나 처분하는 등을 빗대어 “하늘로 10억, 땅으로 10억 날린다”는 표현이 돌고 도는 실태를 고발하기도 하며, ‘대빵’이라 불리는 나이 든 주임들에게 부동자세로 ‘안전’을 외쳐 인사를 하고 ‘제일’로 화답받으며 따라다니는 군사주의적 작업장 문화에 거부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는 관리자에 대한 불만을 비공식적으로밖에 표출하지 못하는 작업장 분위기 속에서 현장 노동자들이 공장장의 새 자동차를 긁어놓고 통쾌해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를 회상하며 ‘잡부’ 시인 남규원은 “누런 황소가 노란 병아리가 되어간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유독 선명한 노란 줄이 들어간 포항제철 작업복을 빗대어 사측에 길들여져 가는 노동자들이 자조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이 바로 ‘노란 병아리’였다. 또한 민주노조 파괴 당시 주임 및 반장급 노동자들이 사측의 사주에 의해 조합원들에게 노조탈퇴를 강요하던 과정에서 자신이 받아 보게 된 한 노동자의 노조탈퇴서의 탈퇴사유란에 적혀 있던 “짐승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말을 되뇌이며 “가슴을 후빈다”고 비통해한다. 그에겐 민주노조를 사수하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되었다. 다음은 그의 시 “포항제철과 나”의 한 구절이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폐(포)철의 소리 없는 노동자
시키는 대로 조련되어 짖지 못하고
달 보면 설움만 토해낸다

 

...

 

포철에 민주노조가 재건되고
민주노조가 강화 발전되어
노조에서 복직 명령이 떨어지면
난 그냥은 못 간다

 

감옥에 있을 때 돌아가신
부모님 산소를 들르고
고향에서부터 카 퍼레이드를 시작해서
포항시내 아홉 바퀴 돌고
보고 싶고, 한없이 가고 싶었던 내 현장

 

...

 

노조를 지켜내지 못한 오명을 벗고
우리 투쟁가인 “철의 노동자”함께 부르며
동지들의 무등을 타고 들어가련다

 

그땐 계장, 과장이
매일 나이 드신 주임에게 인사를 하는
인간다운 현장을 위해
다시 한 번 단련된 투사가 되어
죽으면 죽었지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현장’을 너희들에게 내 주지 않으마

 

포항제철의 노조탄압 발자취

 

1987년 대투쟁을 계기로 포항지역 내 철강산업 부문에 6개의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연관단지에서도 32개 업체의 파업투쟁이 벌어졌으나 포항제철에는 민주노조가 들어서지 못했다. 물론 대투쟁 이후 포항제철에도 민추위(민주노조건설추진위)가 결성되나 사측의 개입으로 곧 해체되었다. 1년여 뒤인 1988년 6월에야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나, 간접선거를 통해 임원이 선출된 데에다 여전히 친기업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민주노조의 설립은 1990년 7월에야 이루어진다. 조합원 직접선거로 이루어진 3대 집행부 선거에서 민족포철 그룹의 박군기 후보가 53.1%라는 높은 지지율로 위원장에 당선된 것이다. 물론 이조차도 같은 시기 민주노조들과 비교할 때에는 온건한 성향을 띠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해 12월 포항제철 노조가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16개 대기업 노조들이 연합하여 구성한 대기업 연대회의에 결합하자, 이후 공안기관과 포철의 노동탄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1991년 1월부터 포항제철 사측은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포철공고 출신 노동자들의 병역특례 취소, 주택융자금 혜택 제외, 포항제철소 조합원들의 광양제철소 전출 등 협박을 가했고, 주임 및 반장급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측 충성파 노동자들을 사주하여 조합원들을 괴롭히도록 했다. 1985년경부터 가동된 광양제철소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러한 가운데 1991년 1월 포항제철 민주노조의 한 간부가 사기혐의로 구속되면서 터진 비리사건은 노조의 도덕성에도 타격을 가했다. 물론 이 사건은 후일 공안기관과 포항제철 사측에 의해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남규원이 독신자기숙사 자치회장에 당선되고 사측의 탄압에 의해 해고된 것은 비리사건이 발발한 바로 며칠 뒤였다. 이른바 ‘공안파 노무팀’에 의한 탄압 속에서 결국 1991년 1-2월의 약2개월에 걸쳐 약16,000명의 조합원들이 노조를 탈퇴하였고, 2월 20일에는 박군기 위원장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8월에 이르자 포항제철 민주노조의 조합원은 20여명만 남게 되고, 곧이어 친기업적 유령노조로 전환되었다. 이후로도 노건추를 중심으로 민주노조 재건이 수차례 시도되었으나, 계속 실패를 겪었고 사측의 강도 높은 관리와 통제 속에서 현장 노동자들은 노건추의 활동조차도 접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유령노조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포항제철 사측은 임의단체인 직장협의회를 구성하였고, 1993년에 들어서자 ‘노무2부’로 불리던 직장협의회가 임금 및 성과금 배분 협상주체가 됨으로써 무노조 체제가 고착되어 갔다. 이처럼 포항제철에서 민주노조가 와해되고 무노조 체제가 고착된 원인으로 많은 이들은 사측의 강도 높은 노무관리와 더불어 ‘분할지배’를 꼽는다. 안타깝게도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노조탄압에 따른 패배의식의 이면에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우월의식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작업장 밖인 지역사회에 대한 포항제철의 장악력 또한 대안적 전망을 어둡게 했다.

 

노동자 분할지배와 사내하청 노조운동

 

잘 알려져 있듯이 포항제철은 박정희 정권 시기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설립되었고, 설립 당시 일본의 철강 설비를 도입하면서 일본 철강업계의 경영기법과 관행들도 동시에 수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철강업계의 체계적인 사외공 관리제도 또한 수입되었고, 따라서 포항제철에는 이른 시기부터 사내하청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사내하청 규모는 꾸준히 확대되어 최근에 이르러서는 정규직 노동자 규모가 1만 6천여명인데 비해 사내하청 노동자 규모는 2만여명에 이른다. 이처럼 폭넓은 사내하청의 존재는 동일 사업장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분할을 통한 포스코의 지배의 확대재생산 기반이 되고 있다.
 

한편, 1987년 이후 철강산업의 초기 민주노조운동은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1988년 6월 포항제철의 27개 하청업체 중 4개 업체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1개 업체에서는 사측에 의한 조합원 납치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나머지 3개 업체를 중심으로 협력업체 노동조합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포항제철의 자회사였던 또 다른 업체에서는 사측이 복수노조 불허 상황 하에서 유령노조를 설립하자 이에 대응하여 하청노동자들이 6월 28일 평민당 지구당사 점거농성을 벌였다. 이튿날인 6월 29일에는 하청노동자 2,0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포항제철 사내하청 노조가 사업장내 점거농성에 돌입하자 즉각 6월 28일자로 작성된 박태준 회장 명의의 노조인정 담화가 발표되었다.
 

사내하청 노동조합들은 1988년 말에 이르면 20여개 이상의 업체에서 7천여명 이상 규모로 전체 사내하청 노동자의 약50%를 포괄하며 포항제철협력업체노조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포항제철 측의 하청업체 분할, 노조활동가 고용승계 거부 등 탄압 속에서 다수의 사내하청 노동조합들이 사라지거나 한국노총 산하 노조로 전환하였다. 포스코 사내하청업체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은 2000년대 들어 일부 사내하청 업체들에서 투쟁이 벌어지고 민주노조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되살아났다. 2001년부터 2005년 사이 삼화산업, 덕산 등의 노동조합이 민주노조로 전환하며 장기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도 포스코는 계약해지를 무기로 탄압을 가했으나, 2006년 몇몇 사내하청업체 노조들이 금속노조 광양지역지회(현 포스코사내하청지회)로 통합 전환하였다. 이후로도 포스코는 사내하청업체 재계약시 노사관계 평가가 포함된 핵심성과지표 평가를 반영하면서 금속노조 소속 사업장 노조로 하여금 한국노총 기업별노조로의 전환을 유도하는 등 지속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2008년에는 사내하청 업체 해고노동자들이 포스코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원하청복직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포스코사내하청지회는 집요한 탄압 속에서 조직 약화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현장을 지켜오고 있다.

 

계속되는 포스코의 노조탄압

 

국영기업이었던 포항제철이 2000년 10월로 민영화를 완료하고 2002년에는 포스코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과거와 같은 ‘제철보국’ 이데올로기는 약화되었지만, 새롭게 내건 “소리없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슬로건에 걸맞는 소리없는 무노조 경영과 노조탄압은 지속되었다. 2000년 7월 노정추가 건설된 후 2003년 4월에는 포항제철소에서 노정추 소속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건설 추진과정에서 징계 등 탄압을 받았다. 이듬해인 2004년에는 광양제철소에서도 노정추에 의해 민주노조 건설이 추진되나, 사측 간부들의 협박과 강요 끝에 전원이 노동조합을 탈퇴하였다. 2006년에는 광양제철소 노정추가 재건되어 10월에는 직장협의회의 후신인 노경협의회 선거에 노정추 소속 노동자들이 출마하여 민주노조 재건을 위한 현장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하였다. 2007년에는 포스코의 자회사인 포철기연 노동자들의 금속노조 가입을 계기로 광양제철소 노정추 노동자들이 결합하여 금속노조 포스코지회를 출범시켰으나 다시금 포스코 측의 탄압이 가해지며 해체되었다.
 

그밖에도 포스코의 강도 높은 노조탄압이 여지없이 드러난 사건으로 2006년 플랜트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다. 2006년 6월 하순부터 부분적으로 파업을 벌였던 포항지역건설노조는 7월 들어 주5일 근무, 시공참여자제도 폐지,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청의 지위에 놓인 전문건설업체를 상대로 한 투쟁에 한계를 느낀 포항지역건설노조는 포스코 측의 대체인력 투입을 계기로 포스코 점거투쟁을 감행하였고, 이에 대해 경찰력을 투입한 진압 과정에서 8월 1일 하중근 열사가 운명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특히 포항지역건설노조의 파업투쟁 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포스코의 지역사회 장악이었다. 포스코는 지역언론에 개입하여 특정 내용을 기사화하도록 하였고, 파업 진행 중 당시 포항시 박승호 시장을 만나 입장을 전달하자 이튿날 박승호 시장이 지역 언론사 간부 및 포항상공회의소 관계자들과 '노사분규에 따른 지역안정대책회의'를 주관하는 일도 있었다.

 

삼성왕국과 포스코왕국에 대한 도전

 

삼성과 포스코는 한국사회 내에 각자의 ‘왕국’을 지니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제왕적 통치’와 일가 족벌경영 방식이 삼성‘왕’국을 특징짓는다면, 지역사회를 물샐 틈 없이 장악하는 방식은 포스코왕‘국’을 특징짓는다. 포스코의 제철소가 위치한 포항과 광양은 1960년대까지 소도시 내지는 촌락이었으나 1990년대에 이르면 이미 대규모 산업도시로 성장하였다. 지역사회 전반이 포스코에 강하게 의존하는 가운데, 포스코 또한 일관제철 생산의 특성상 조업중단시 발생할 막대한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노동자 및 지역사회에 대한 강도 높은 관리로 일관해 왔다. 동시에 포스코 내부노동시장의 경계를 따라 지역사회 내 불평등 또한 심화되어 왔다.
 

이들 두 왕국은 각각 두 유령의 무노조 경영원리를 신조로 삼고 있다. 삼성왕국을 떠도는 유령이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 된다”던 고 이병철 회장이라면, 포스코왕국을 떠도는 유령은 1960년대 대한중석 사장 시절 노조 문제로 골치 아팠다던 고 박태준 회장이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의 발자취는 무노조 경영에 바탕한 기업 ‘왕국’에 대한 도전이 끊이지 않아 왔고, 따라서 언젠가 성역은 무너질 것임을 시사한다. 지난 7월에도 삼성전자 서비스 하청노동자 400여명이 금속노조 삼성서비스지회를 창립하고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무너져야 할 성역은 삼성만이 아니다. 삼성과 마찬가지로 포스코는 포항과 광양에 기업도시를 건설하고 지역사회를 장악하고 있음은 물론, 한국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무노조의 성역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민주노조, 남규원의 단식투쟁을 비롯한 포철해협의 복직투쟁, 노정추와 포스코사내하청지회의 활동 등은 포스코 노조민주화 운동의 발자취는 새로운 도전이 끊이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전노협백서>
<매일노동뉴스>
포항제철해고노동자협의회. 1994, <철의 노동자> 1-8호
인권운동사랑방. 1994, <인권하루소식> 제239호. 1994.9.1
광양제철소 노무부. 1994, <직원관심사항 종합해설>
포스코. 2004, <포스코35년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2007, <포스코와 포항시 지역경제>
금속노조 포스코 현장위원회. 2008, <쇳물처럼> 1-6호
정희태. 1988, “노동조합의 발생을 통해 본 한국철강산업의 노동과정과 노동통제”
손정순. 2011, “후발 산업화와 금속부문 대공장내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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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으로 만든 방패와 폭력의 모자이크

짚으로 만든 방패와 폭력의 모자이크

 

제17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그간 손꼽아 기다리던 영화 <짚의 방패>(藁の楯)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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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으로 만든 방패를 든다"는 속담이 있다. 전쟁에서 짚으로 만든 방패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이 영화는 타인의 생명을 강제로 빼앗은 이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지키는 이들의 사투를 그린다. 이들은 경시청 경호과의 시라이와 순사부장과 메가리 경부보. ... 둘 모두 강한 원념을 지닌 이들이다. 시라이와는 피해자 소녀와 같은 어린 나이의 아들을 둔 싱글맘이고, 메가리는 부인을 극악 범죄자에게 잃은 경험이 있다.


영화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 영화 아니랄까봐 첫 장면이 한 소녀의 시신과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붉은 피로 시작된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살해당한 한 소녀의 할아버지인 니나가와가 현상금 10억엔을 걸고 용의자 키요마루를 살해할 것을 공개 의뢰한 설정 자체가 거의 영화의 전부를 규정짓는다.


미이케 다카시가 만든 거의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하듯 <짚의 방패>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라는 것이 그러한 폭력의 얼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강변한다.


첫째, 날것의 폭력. 키요마루가 저지른 폭력은 가진 것 없는 밑바닥 인생의, 추락할 대로 추락하여 막장에 몰린 한 개인이 저지르는 그야말로 날 것의 폭력이다. 키요마루의 홀어머니에 대한 연민이나 학력에 대한 언급, 그의 언행 등에서 그의 밑바닥 범죄자 인생의 면면들이 엿보인다.


둘째, 사회의 폭력. 사이코패스로 그려지는 범죄자의 폭력은 유전과 같은 것으로 사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며, 결국 사회 구성원인 개개인들의 암묵적 폭력과 그로 인해 재생산되는 사회구조의 폭력의 산물임이 끊임없이 암시된다. 영화에 몰입하다 보면 곳곳에서 등장하는 핸드폰 카메라를 든 군중들의 모습에 종종 속이 확 끓어오른다.


셋째, 돈의 폭력. 10억엔이라는 천문학적 금액 앞에 시민들의 상식은 물론 국가권력과 그 중핵인 치안조직마저도 흔들린다. 아니, 이제 우리의 상식이란 돈만 있으면 사람 하나 죽이고 살리는 것쯤 간단한 일이라는 것이 되어버린 지도 모르겠다. 돈의 폭력 앞에 법전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되려 형법에 따라 용의자를 법정에 세워야 할 경찰조직의 최대의 적이 경찰조직에 속한 무수한 개인들이 되어버리면서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의 독점이라는 비가시적 구조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며 위기를 맞는다.


넷째, 국가의 폭력. 주인공인 메가리와 시라이와는 외형상 범죄자를 10억엔에 눈먼 이들로부터 안전히 경시청으로 이송하여 검찰에 송치하기 위한 경호업무를 수행한다. 범죄자를 지키는 것은 법에 따른 심판이라는 논리 외에도 조직 보위의 논리에 따라서도 이루어진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찰조직이 현상금을 노리고 공격해오는 이들로부터 키요마루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인공들은 목숨과 맞바꾸어 키요마루를 경시청까지 호송한다. 결국 예상대로 키요마루는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는다. 짚의 방패를 드는 것의 무의미함에 대한 의문은, 키요마루와 같은 극악한 범죄자를 지키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 하는 의문과도 연결되지만, 결국 법의 심판과 국가의 법 집행이라는 이름 아래 키요마루라는 한 사람의 생명을 강제로 빼앗는 일 또한 살인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으로도 연결된다.


미이케 다카시는 '충무로의 남기남'처럼 몇 개월의 한 편씩 영화를 쏟아내는 감독이면서 오락성 짙은 영화들을 만드는 가운데 종종 문제작들 또한 만들어내는 묘한 감독이다. <짚의 방패> 역시 말끔한 A급 영화의 외관을 하고 있지만, B급의 정서와 클리셰가 자연스럽게 섞여들어가 있다. 전작인 <악의 교전> 또한 <짚의 방패>와 마찬가지로 원작 소설의 구성과 스토리에 크게 힘입은 작품이지만 '폭력의 모자이크'를 통해 인간 사회를 적나라하고도 힘있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특히나 <짚의 방패>는 마츠시마 나나코, 오오사와 타카오, 키시타니 고로, 야마자키 츠토무, 후지와라 타츠야와 같은 쟁쟁한 배우들의 이름값 하는 연기가 돋보인 작품이다. 특히 후지와라 타츠야는 어린 시절부터 연극판에서 성장해 온 경력이 증명하듯,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강한 흡인력의 광기어린 연기를 멋지게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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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신이 되려다간 '과로사'한다

직장의 신이 되려다간 '과로사'한다

 
드라마 <직장의 신>과 관련하여 비정규직 노동자와 '직장'의 재현을 둘러싼 문제점들 중 다른 문제들보다 그러한 재현이 집단적 노사관계라는 가능성의 영역을 지워버린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 바 있는데, 그렇다고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연한 노동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체현한 '자발적' 비정규직"의 모습이 보기 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직장 내 인간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위한 설정이라고는 하나, '미스 김'의 당당한 존재는 현실에서 그녀처럼 살다가는 '과로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과잉노동과 관련하여 일 중독이나 장시간 노동 문제에 관한 논의들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접근들은 고용의 질 또는 '일 다운 일(decent work)'의 추구라는 문제의식에서부터 '노동사회로부터의 탈피'라는 문제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에서 시도되고 있다. 한편, 한국과 유사헤게 장시간 노동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일본의 경우, 장시간 노동체제 일반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과로사'에 대한 문제제기가 두드러진다. 과잉노동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의 삶과 관련된 가장 근본적이고 극단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생애주기에 따른 비교적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닌 다른 형태의 죽음이란 죽은 자와 그를 둘러싼 인간관계, 즉 사회적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사건이다. 더욱이 한 개인을 '노동자'로 본다면 그의 죽음은 노동-자본 관계를 떠나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한 노동자의 죽음을 둘러싼 사람들의 대응도 마찬가지이다. 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대응에도 죽음이라는 한 사건 자체를 중심으로 한 개별적 접근이 있는가 하면, 그 죽음의 배경에 놓인 사회관계에 대해 보다 폭넓게 접근하는 집단적 접근이 있다.

 

일본의 경우 과로사 문제는 일찍부터 제기되어서 1970-80년대부터 몇몇 사례들이 과로사 인정을 받고 그에 따라 유족들이 보상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개별적 접근이었다면 이후 발전해 온 과로사방지법 제정운동은 그러한 사회적 문제의식과 대응이 집단적 접근으로 확장된 결과라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노동자의 죽음은 셀 수 없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여전히 수많은 중공업 사업장에서 계속되고 있고, 최근 들어서는 대표적으로 조선이나 철강 등의 산업부문에서 산재 및 산재사망이 하청노동자들에게 집중되며 "위험은 물론 죽음까지 하청된다"는 문제제기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보다 직접적으로 노동-자본 관계에 관련된 노동자의 죽음으로는 정리해고를 배경으로 한 노동자 자살이 2000년대 초반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를 비롯하여 최근의 쌍용차,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싸운 노동조합에 대한 기업측의 손배가압류 등을 통한 탄압이 노동자들의 절망을 더욱 깊게 만들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생산직 여성노동자들의 돌연사가 이어지고 있는데, 무노조 기업인 삼성에서 노동조합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지역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문제제기와 대응이 이루어져 '반올림'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들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가운데 한편으로 유해물질을 다루는 노동자들의 건강권 문제가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떠오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살인법' 제정운동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반면, 한국에서는 일본에서처럼 '과로사'에 대한 사회적 문제제기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장시간 노동문화 속에서 과잉노동으로 인한 노동자의 죽음이 '과로사'라는 형태로 법적 대응이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과로사 문제가 사회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어 왔다. 일본에서는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노동자의 죽음이 사회운동과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과로사'라는 용어 또는 개념으로 비로소 포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과로로 인한 돌연사와 같은 죽음이 없을 리 없다. 오히려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장시간 노동은 사실 한국의 경우가 더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OECD 노동통계만 보더라도 한국은 일본을 일찌감치 제치고 가장 노동시간이 긴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는 과로사에 대한 논의가 없을까?

 

거칠게나마 추론해 보자면 ... 한국에서는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기업이나 국가를 대상으로 한 개인이 '권리'나 '인정'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었고, 이처럼 법적 소송을 중심으로 '정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기회의 평등 중심의 자유주의가 폭넓게 자리잡지도 못했으며, 어느 정도는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민주화 이후에도 그러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조직된 노동이나 조직된 시민사회 정도일텐데, 가시적인 재해가 아니라 입증이 어려우며 특히 화이트칼라 직무에서 발생하는 문제인 과로사가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그간 대기업 생산직 남성 노동자들 중심이었다. 게다가 워낙 화이트칼라와 생산직 간의 임금격차가 컸다. 여기에 경제위기 이후 정리해고와 고용불안이 문제가 되면서 주로 노동시간 단축을 일자리 확보로 연결짓는 논의가 제기되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조업 사업장들을 중심으로 교대체 개편 논의가 제기되어 최근 피크를 이루고 있으나, 아직까지 '시간기획'의 문제가 중심적으로 제기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정교한 논의를 위해서는, 먼저 한국과 일본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장시간 노동관행을 보다 세부적인 측면 및 요인들로 분해하여 비교 분석해 보고, 그것을 넘어 한국에서는 왜 과잉노동으로 인한 죽음이 포착되지 못하고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고 있지 못한가를 탐구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장시간 노동자체는 물론, '일'의 반대 개념으로 규정되곤 하는 여가, 휴가, 생활 등을 둘러싼 이른바 '시간의 정치'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일과 여가(휴가, 생활) 간의 이분법 자체가 무엇을 은폐하고 있는지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장시간 노동 문제 외에도 개별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문제제기와 대응, 달리 말하면 '죽음의 정치' 또한 다른 차원에서 일본의 '과로사'를 둘러싼 정치와의 비교 분석의 대상이 되는, 또 다른 차원의 중요한 문제이다.

 

 

 

덧붙임: 한국과 일본의 장시간 노동 연구

 

장시간 노동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있다. 노동시간 문제를 다룬 논의는 특히 경제위기 직후인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에 급증하였는데, 당시의 논의들은 노동조합운동의 핵심 이슈이기도 했던 정리해고 도입 이후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확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후 장시간 노동의 주체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주목할 만한 논의들로 '일 중독'의 문제를 제기한 강수돌의 <일 중독 벗어나기>(2007)을 비롯하여 김왕배의 연구 등이 있다. 장시간 노동문화를 다룬 보다 최근의 논의로는 김영선의 <잃어버린 10일>(2011)이 있다. 그는 흥미롭게도 '휴가정치'를 통해, 그것도 경영담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장시간 노동문화의 핵심을 꿰뚫는다. 그의 <과로사회>가 곧 출간될 예정이라 하니 매우 기대된다.

 

일본의 경우 장시간 노동, 과잉노동, 과로사 등에 대한 최근의 주목할 만한 연구로는 사회정책학회가 엮은 <과잉노동: 노동-생활시간의 사회정책>(2006), 쿠마자와 마코토의 <과로로 쓰러지다: 과로사와 과로자살의 노동사>(2010), 모리오카 코지의 <과로사가 없는 사회를>(2012)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간사이대학 교수인 모리오카 코지는 꾸준히 과잉노동과 과로사 문제를 연구해온 대표적인 학자이며, 항상 현장 및 운동과의 끈을 놓지 않는 모범적인 연구자이기도 하다. 쿠마자와 마코토 또한 일찍이 <일본의 노동자상(像)>(1993)을 통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바 있으며(이 책은 미국의 탁월한 일본 연구자인 앤드루 고든에 의해 1996년에 Portraits of the Japanese Workplace라는 제목으로 영역 소개되었다.),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을 폭넓게 연구하는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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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신을 둘러싼 논의들의 불편함

 

어제 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직장의 신>이 직장 내 권력관계를 잘 다루고 있다는 그분의 말씀에 입이 근지러워 한 마디 했더랬다. 한편으론 참 불편하다고. <직장의 신>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은 물론 긍정적인 현상이다. 매회마다 드라마 속 사건이나 스토리가 대중적 관심사로 부각하면서 노동조합이나 노동단체들은 그에 관한 의견을 묻는 언론의 인터뷰 전화로 바빠지는 현상도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은, 한 선생님의 말씀대로 <직장의 신>이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주관성과 직장 내 인간관계를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직장의 신>은 그 설정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들의 지형에 있어서도 많은 불편함을 준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연한 노동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체현한 '자발적' 비정규직이라니. 여성 비정규직 일자리 선택의 자발성이라는 게 어느 정도 강제된 자발성이거나 체념적 자발성이라는 점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대다수의 비정규직 일자리는 직무 성격이 주변적이거나, 핵심적이더라도 보상 수준이 낮아도 너무 낮다. 그런 건 다 어느 정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직장의 신>을 모두 챙겨보지는 않았고, 원작인 <파견의 품격>은 몇년 전 보았던 기억이 있긴 해도 한국판과 일정 부분 다르다고 하니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두 드라마 모두 작업장 내 사회관계를 '개별적 근로관계'에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이 가장 불편하다.

 

변화한 고용체제 하에서의 직장 내 인간관계를 잘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효과는 직장 내에 당연히 존재해야 하고 보장되어야 하는 '집단적 노사관계'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하다못해 비정규직을 포괄하지 못하는 정규직 노동조합을 등장시켜 기업뿐만 아니라 이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배제한다거나 '정규직 이기주의'를 비난할지라도, 작업장 내 사회관계의 핵심 축이 집단적 관계라는 점이 드러난다면, <직장의 신>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관심의 방향도 달라졌을 거라 본다. 물론 테레비 드라마 가운데 노동조합이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못 봤지만 말이다. 이 모든 배경에는 한국 자본의 극렬한 반노조주의와, 특히 비정규직의 노동조합 조직화 시도에 대한 강도 높은 이념공세 및 물리적 탄압이 자리 잡고 있다.

 

어제 저녁 한 선생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바로 그 순간, 다른 누군가는 나의 답답함과 불편함을 어느 정도 시원하게 긁어 주는 칼럼을 쓰고 있었던 듯하다. 천정환 교수는 "직장의 신은 어디 있나"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타당하게도 진정한 직장의 신은 노동조합이라 지적하며, "2012년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률은 1.7%, 정규직은 14%를 기록했다 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사회의 모순과 고통이 이 낮은 수치에 집약돼 있는 것 같다"고 결론짓는다.

 

* 덧붙이자면 ... 보다 정확히 말해 그 '선생님'은 <직장의 신>이 직장 내에서의 복잡하게 얽힌 '갑을관계'를 잘 보여준다고 했다. 물론 동의하지만, '갑을관계'라는 말 또한 불편하다. 요즘 어디서든 '갑'과 '을'이라는 말을 부쩍 많이 쓰는데, '직장생활'에 관한 한 이런 표현이 좀 자제되었으면 한다. 안그래도 고용관계에 자꾸 민법상 계약관계 개념이 끼어들어와 특수고용이나 프리랜서 같은 불안정한 일자리를 양산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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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직장의 신은 어디 있나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한국일보 2013년 5월 7일

 

직장인과 대학생들에게 다 인기 높은 웹툰 <미생>은 인턴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장그래를 비롯한 20대 후반의 젊은이들은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 인턴일 뿐인데, '스펙' 뿐 아니라 벌써 대기업이 자기들 정규직사원에게 요구하는 마인드와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거나 또는 그러려고 분투한다. 과연 그게 바람직한지, 또 <미생>이 그리는 회사가 얼마나 현실에 가까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대다수 대기업과 공공기관에 생겨난 인턴이라는 제도가 싸고 편하게 젊은이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제도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착취의 명목을 '산학협동'이니 '스펙'이니 '현장실습'이니 치장하지만 듣기 좋은 허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다. 다만 그런 현실을 바꾸지 못할 뿐이고, 모든 '절대 갑(甲)'의 자리를 자본과 고용주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바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고생스런 인턴 생활을 몇 개월씩 하고 그냥 '버려진' 대학생들의 실화를 나도 여러 번 들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이야기가 정말 셀 수없이 많을 것이다. 최근 편의점 학원 미용실 등에서 일하는 청년노동자를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73%가 최저임금 4,860원보다 낮은 급여를 받고 시간외수당은 꿈도 못 꾼다고 응답했다.(노컷뉴스 2013.4.30) 청소년이나 학생들을 착취하고 인격을 침해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은 관행과 일상으로 만든 이 문화는 죄가 많다. 이런 일은 내 주변에도 널려 있다. 대학 조교들의 상당수는 사무직 풀타임 노동자가 하는 일을 똑같이 하지만, 아주 싼 임금을 받는다. 그 임금은 대개 장학금 명목으로 되어 있고 신분을 '학생'으로 분류해두었기에 근로기준법 바깥에 있다.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문제제기하거나 해결책을 찾고 싶지만, 젊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업계에서 찍힐까봐"이다. 경험이 부족하고 아직 순진한 그들은 고용주나 어른들의 엄포나 술수에도 쉽게 진다. 기성세대의 죄가 정말 크다. 나 또한 공범인지 모른다. 이 사회가 누리는 번영은 여전히 부끄러운 갈취와 억압의 문화 위에 구축돼 있는 것이다. '싸움의 철학'과 기술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누가 대신 싸워주기란 매우 어렵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실에서는 <직장의 신> '미스김씨'가 없다. '미스김'은 모든 면에서 전지전능한 '자발적 비정규직'이다. 그녀는 겉으로는 까칠하지만 사실 속도 깊은 '진짜 동료'라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서 나설 뿐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충까지도 해결해준다. 그야말로 그녀는 '직장인'의 신이다. 이 인기 드라마는 잘 된 드라마의 원리를 충실히 구현하는 것 같다. 디테일이 살아있고 '현실'을 반영한다. 그를 통해 보통사람들의 원망을 담아내고 위로한다. 그러나 '레알' 세계에서는 전혀 불가능하며 기실 별로 위험하지도 않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드라마는 초과근무 정리해고 회식 시간외수당 생리휴가 등 노동자들이 늘 맞닥뜨리는 현실과 차별 전반을 문제 삼고 시원한 멘트를 날려주기는 하지만, 그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서는 말 못한다.

 

현실에서 '미스김' 같은 '직장인의 신'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제대로 된 노조뿐일 텐데, 많은 사람들은 노조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의 '을'들이 노조라는 미스김을 동료를 두지 못하는 것은, 권력자와 사장님들이 노조를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2년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률은 1.7%, 정규직은 14%를 기록했다 한다. 나는 한국사회의 모순과 고통이 이 낮은 수치에 집약돼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각고의 노력 끝에 청년유니온이 드디어 전국 단위 법내 노조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다.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나 아르바이트생을 주된 가입대상으로 하는 청년유니온 같은 노조가 30개, 50개로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또 거기 강사나 조교들이 대거 가입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10,20대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과 대학이 훨씬 나아질 것이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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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곳에 있던 작은 ‘희망’ : 1985년 부산 공단지역 노동자 투쟁

이미 그곳에 있던 작은 ‘희망’ : 1985년 부산 공단지역 노동자 투쟁

 


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52호
2013년 4월 <이 달의 역사> 기고글

 


최근 들어 1985년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재조명되고 있으며, 그 기억의 중심에는 대우자동차 투쟁과 구로동맹파업이 놓여져 있다. 1980년대 초반에 걸쳐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이루어진 학생운동과 노동법 개정투쟁은 1984년 들어 이른바 '유화 국면'을 맞이하였고, 이에 따라 민주노조운동은 신규노조 결성 및 노동쟁의의 급증이라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듬해 4월에는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를 비롯한 다양한 공개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곧이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였다. 뒤이어 6월에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구로동맹파업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이 시기의 민주노조운동은 기업 단위를 넘어서 지역 수준에서의 연대 투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최근 들어 노동조합운동이 현장은 물론 전국 수준에서도 구심점의 '공동화' 현상을 보이는 가운데 다시금 많은 이들이 '지역'에 주목하고 있는 만큼, 1985년의 경험은 재발견되어야 할 전통으로서 여전히 중요하다. 이 시기의 민주노조운동에서 새롭게 발견되어야 할 것은 그 내용뿐만이 아니라, 이 시기의 투쟁들이 구로공단이나 인천지역에 국한된 특수한 경험이 아닌, 매우 광범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5년 4월 부산 지역의 노조결성 및 노조민주화 투쟁, 같은해 8월 성남과 안양의 공단지역 연대투쟁 등이다.

 

이들 중 부산 지역은 식민지 시기 공업화를 거치며 해방 이후로도 수도권 지역과 더불어 핵심 공업지역이었다. 1985년 당시 약350만명의 인구 가운데 제조업 노동자가 35만여명에 달하여 동남권 공업지역의 중심을 이룩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35만여명 가운데 약3분의 1이 사상공단에 집중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 또한 간헐적으로나마 계속되었다. 1980년 4월 동국제강 노동자들의 투쟁 이후, 1983년에는 금성알프스와 대우정밀 등에서 노조결성 시도가 있었다. 1984년 6월에는 직전에 일어났던 대구지역 택시 파업을 뒤이어 택시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1985년 봄, 노동자 투쟁의 물결은 부산 곳곳의 공단지역으로 이어졌다. 물론 부산 지역 노동자 투쟁은 서노련이나 인노련과 같은 조직을 남기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1987년과 이후의 민주노조운동으로 그 성과를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그럼에도 이들 투쟁은 지역적 차원에서 노동자들의 집합적 경험으로 남았다는 점에서 이후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부산 지역의 노동조합 결성 및 노조민주화 투쟁의 다양한 사례들 가운데, 특히 부산 지역 민주노조운동이 미약하나마 기업수준을 넘어선 연대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사례로 1985년 4월 세화상사와 삼도물산의 해고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신민당사 농성을 들 수 있다. 세화상사 해고자 7명과 삼도물산 해고자 3명은 1985년 4월 9일부터 14일까지  신민당 박찬종 의원 사무실을 점거하여 해고자 복직과 최저임금 월13만원 보장, 민주노조 인정, 노동부 장관의 사과, 노동부 장관 및 부산시장 면담 등의 요구와 더불어 상급단체인 화학연맹과 섬유연맹에 대한 규탄 메시지를 제기하였다. 세화상사와 삼도물산의 해고노동자들은 당시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던 신민당의 지구당 당사에서 진행된 이 농성을 통해 정치적 요구를 제기하였고, 학생운동 및 지역 사회운동과의 연대투쟁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이 투쟁은 성공을 거두지도, 광범위한 대중투쟁으로 확산되지도 못하였으나, 이후 지역 내 곳곳의 사업장에서 여론을 환기하고 일상적 투쟁을 자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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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부산 지역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전설의 여공>(박지선 감독, 2011)의 주인공들.
      출처: http://meditory.tistory.com/

 

세화상사의 경우 1985년 초 사측의 강제저축에 따른 임금수령액 감소를 계기로,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과 부당해고 철회 요구를 중심으로 2월에 노동조합을 설립하였으나 나흘 뒤 설립신고서가 반려되고 사측의 탄압이 계속되며 핵심 간부들이 해고되었다. 이후 신민당사 농성 등을 통해 일부 간부들은 복직되었으나, 민주노조 결성은 성공에 이르지 못하였다. 삼도물산 영도공장의 경우 1970년대 공장새마을운동을 배경으로 설립되어 가부장적 통제를 발전시킨 업체이다. 1984년 9월, 몇몇 노동자들이 인근 사업장의 노동조합 간부들과 만나면서 노동조합 결성을 모색한 결과, 노동조합 결성이 시도되었다. 이에 사측은 조합원들의 개별면담과 방문을 통해 노조탈퇴를 종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 가운데 삼도물산 부설 영도 남여상에 재학중인 학생들에게는 제적 처분의 위협을 가하기도 하였다. 결국 지역사회 수준으로 문제가 확산되자 10월에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노조인정 직후부터 노조활동에 대한 사측의 탄압은 본격화되었다. 1985년에 접어들면서 주요 간부들에 대한 일방적 부서이동, 3월에는 간부 3명에 대해 해고통보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 하에 세화상사와 삼도물산 노동자들은 공동투쟁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밖에도 노동조건을 둘러싼 투쟁이 빈발하였다. 1985년 3월부터 4월 초에 걸쳐 사상공단 내 최대 섬유업체인 국보직물에서는 체불임금 확보 투쟁이 이루어졌고, 5월 중순에는 나이키 신발을 주문생산하던 풍영에서 '30분 임금 확보 투쟁'이 일어났다. 풍영 노동자들은 "우리의 30분을 돌려달라"는 구호 아래 하루 30분간의 초과수당 미지급분에 대한 지급과 더불어 충분한 점심시간 확보를 요구하며 투쟁하였다.

 

이 시기 투쟁의 요구조건들은 비슷한 시기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던 투쟁들과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부산의 공단지역은 노동집약적 경공업, 특히 신발 산업과 섬유산업에 집중되어 있었고, 여성노동자 비율이 매우 높았으며, 노동자 평균임금 수준도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작업장에서의 일상적 투쟁의 초점은 종종 부산 지역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른바 '셰파드'(개)로 통했던 중간관리자들에 의해 ‘안전관리’라는 이름하에 자행된 욕설, 구타, 폭행, 몸수색 등 인격적 모욕에 대한 반대였다. 노동시간 또한 주당 60시간을 넘어서며 부산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긴 평균 노동시간을 보였다. 이에 따라 최소한의 식사 및 휴식시간의 확보에 대한 요구가 많았으며, 임금인상 요구와 더불어 "최소한 명절 때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수준의" 상여금에 대한 요구도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여타 지역에 비해 높았음에도 임금수준은 낮았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부산지역의 노동조합은 친기업적 한국노총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항운노조와 화학노조가 그 중심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민주노조운동 사례가 삼도물산과 세화상사였다. 두 사례 모두 한국노총 부산시협의회의 지원 아래 노조 결성이 시도되었으나, 어용화를 겪었던 사례들이다. 삼도물산은 1983년 8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나, 사측의 개입 아래 어용화되었고, 이후 노조민주화 투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세화상사의 경우 1985년 2월 노조결성을 시도하였으나 신고필증을 교부받지 못한 채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이 시기 투쟁들이 미약하나마 기업수준의 경제적 요구 중심의 투쟁을 넘어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배경 또한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 사례들과 유사성을 지닌다. 학출 노동자들의 활동과 종교단체의 지원, 당시 부산 지역에 10여곳 존재했던 노동야학의 역할, 여성노동자가 제조업 노동자들의 다수를 이루고 있던 상황에서 여성평우회 등 여성운동의 역할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밖에도 다수의 사례에서 농성 노동자들이 <부산일보>를 방문하여 호소하였던 점 등을 통해 볼 때, 많은 노동자들이 지역 수준의 여론 형성에 민감하였음 또한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기 집중적으로 발생한 신발산업 등 경공업 부문의 노동자 투쟁은 이후 산업구조의 변화에 의해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던 신발산업은 산업공동화가 진행된 국내의 대표적인 산업이기도 하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지역의 신발산업은 OEM 생산을 중심으로 저임금 노동력에 의존하여 발전을 이루어 왔으나, 1990년대 들어 중국 및 동남아 지역으로 생산이 이전되면서 공동화가 발생한 것이다. 신발산업이 주문하청생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쇠퇴하는 가운데 많은 노동자들에게 실업이라는 희생이 강요되었다.

 

이와 같은 산업구조조정의 여파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부산과 더불어 나이키 신발이나 조선소를 떠올리기보다는 말끔히 새단장을 한 해운대를 떠올린다. 그러나 부산 곳곳의 공단과 거리들은 이 시기 노동자 투쟁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2011년 이후 계속되고 있는 희망버스가 노동운동에, 나아가 한국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면, 그것은 전국 곳곳에서 버스를 타고 온 희망들뿐만 아니라, 이미 그곳에 있던 희망이 되살아나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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