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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과 이재용,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5월: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
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65호
2014년 5월 <이 달의 역사> 기고글
이재용과 이재용
두 사람의 이재용이 있다. 삼성전자 부회장이자 삼성그룹 기업지배구조의 정점에 서 있는 삼성에버랜드 최대 주주이기도 한 이재용은 이건희 회장으로부터의 편법적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후계자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 그리고 아직 5월을 맞이하지 못한 한 사람이 있다. 1997년 4월 30일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에서 노동조합 결성 활동을 벌이다 해고당한 이재용에게는 5월의 첫 날인 노동절이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해고당한 지 꼭 17년째 되는 날 경남 창원에서 그를 만났다.
이재용은 1959년 부산에서 태어나 가정형편의 어려움으로 인해 중학교를 졸업한 뒤 철공소에 다니는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가 고등학교를 마친 것은 훗날 삼성중공업 입사 후 야간고등학교를 통해서였다. 1982년 군대 전역 후에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하청업체에 근무하였으며, 1986년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에 입사하게 된다. 부산에 거주하던 그가 거제조선소에 취업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선산업의 인력부족 상황으로 인해 하청업체 취업이 쉬웠다는 점과 더불어, 한때 거제조선소에서 일했던 형의 영향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데 형님이 거제조선소에 다녔었어요. 형님도 해고를 당했는데, 지금 같으면 아마 블랙리스트에 올라 저도 입사가 안 되었을 텐데, 기록이 전산화되어 있거나 했던 게 아니라서 ... 형님은 노조결성 활동은 아니었지만, 부당한 대우를 관리자 측에 항의하다가 해고를 당했던 거죠.”
거제조선소 하청노동자였던 이재용은 당시 현장에서 삼성중공업 1공장의 직원 모집 소식을 듣고 입사시험을 치렀다. 그에게는 변변한 자격증도 없었고 학력도 없었으나, 신규 사업으로 인해 인력이 부족했던 터라 도면 보는 방법 등을 포함한 간단한 시험을 치른 뒤 입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사 후 1년여가 지나자 그는 곧 “삼성이 임금은 타 사에 비해 높지만, 인간적인 대우라던지 이런 게 너무 형편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더욱이 1987년부터는 창원지역에서도 노동조합운동의 ‘열풍’이 불었다. 이를 지켜보던 그는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역의 활동가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1988년 하반기부터 1989년에 걸쳐 이재용은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에서 본격적인 노조결성 시도를 하였다. 상경투쟁 등 공개적인 활동과 더불어 현장에서의 조직활동을 거쳐 1992년 들어서는 제도의 변화 필요성을 절감하고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던 노동자협의회 위원장에 ‘노동조합으로의 전환’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하였다. 그러나 그의 당선 이후 노조결성 시도가 가속화되자, 사측은 1993년 10월 어느 날 그에게 보복성 폭행을 가해 노동자협의회 활동을 무력화하였다. 이후로도 사측은 탄압과 더불어 온갖 회유를 시도하였으나 끝내 1997년 4월 30일 그를 징계해고하였다.
삼성중공업 노동조합 결성 시도의 흐름: 창원 2공장과 거제조선소
1980년대 후반 당시 삼성중공업에는 거제조선소, 창원 1공장과 2공장의 3개 사업장이 있었다. 훗날 화력발전용 보일러가 주요 사업부문이었던 창원 1공장은 두산중공업에 인수합병되었고, 중장비를 생산하던 창원 2공장은 볼보와 클라크에 분할매각된다. 그런데 삼성중공업에서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본격화된 것은 1987년 8월 파업이 발생한 창원 2공장에서부터였다. 당시 창원 2공장 노동자들은 부서이동, 납치 등 사측의 탄압과 회유 속에서도 '민주노조 결성방해 중지'. '임금 20% 인상', '인사고과제 폐지' 등의 구호를 내걸고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삼성 사측은 '03작전'(새벽 3시에 실행한다는 의미)이라는 이름의 구사대 폭력으로 탄압을 가하고 이에 더해 사측은 삼성 노동자들이 설립신고서를 제출하기 전날 이미 유령노조 설립신고를 제출하였다. 결국 노동자들의 시도는 노사협의회의 대의원을 확대하고 대표를 직선으로 뽑는 선에서 그치게 되었다.
사진: 1990년 삼성중공업 창원 2공장 노동자들의 천막농성 (출처: <월간 말>)
창원 2공장의 노조결성 시도가 좌절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1988년 4월에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노사협의회 임금협상을 계기로 노조결성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거제조선소 노동자들은 4.16 전면파업을 벌였다. 작업을 거부하고 시위에 동참한 노동자들은 1,500여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삼성은 파업 노동자들에게 구사대를 동원하여 폭력을 가했고, 노동자들보다 한 발 앞서 유령노조 설립신고서를 거제군청에 제출하여 노조결성을 막았다. 결국 4월 25일 노사협의회가 재개되어 농성 참여자 신분보장 및 일정수준의 임금 인상으로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거제조선소를 중심으로 1988년 내내 삼성중공업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결성 시도와 이에 대한 삼성 측의 탄압이 이어졌다.
창원 1공장에서는 1988년 11월 말에 이르러 노동자들의 노조결성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11월 28일 창원 1공장 노동자들 250여명이 농성을 벌였으나 구사대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지도부가 납치되기도 하였다. 12월 들어서는 창원 1공장 노동자 8명이 상경하여 한국노총 점거농성에 참여하였다. 이상과 같은 시도들은 삼성중공업에서 민주노조를 인정받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이듬해인 1989년 6월 거제조선소 노동자들의 파업 등 노조결성 투쟁은 계속되었다.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
이전까지 철구(鐵球) 사업부문이 주를 이루던 창원 1공장은 이재용이 입사하던 즈음 보일러사업부를 신설하며 많은 인력을 모집했다. 이재용 역시 ‘삼성’에 정규직원으로 입사하면서 자부심과 기대가 컸으나, 그러한 기대는 머지않아 무너졌다. 임금수준은 다른 회사들에 비해 높은 편이었지만, 반장들은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욕설과 폭언을 일삼았다. 또한 당시 삼성이 일본식 직능급제를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동료들 간의 경쟁도 심화되었다. 더욱이 숙련도나 작업량보다는 충성경쟁이 핵심이었다.
“윗사람들한테 잘 보이면 고과를 잘 받게 되니까, 그리고 그게 임금에 반영되고 하니까. 그게 굉장히 못마땅했는데, 개인이 어떻게 대응할 방법이 없었죠. ... 동료간 경쟁이 어땠냐면 ... 인사고과가 A, B, C, D 식으로 등급이 있었는데, 내 옆에서 일하는 동료가 자신이 A를 받았는지, B를 받았는지 말을 안 해줘요. 서로가 경쟁 상대이다 보니까. 같이 일을 하면서 인간미 없이 서로가 경쟁을 하게끔 사측이 유도를 한 거죠.”
그렇다고 삼성중공업의 비교적 높은 임금수준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재용 역시 당시 창원 1공장의 비정규직 문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창원 1공장에는 일용직 제도가 있었다. 직영 소속으로 상시근무를 하면서도 일용직으로 분류되어 정규직과는 작업복도 달랐고, 이용하는 식당도 달랐다. 수년을 근무해도 계속 일용직 상태에 머물렀다. 1989년 이들 일용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이자 사측은 약700여명에 이르는 이들 일용직 전체를 정규직으로 전환하였다.
“일용직들이 정사원화를 요구하면서 들고 일어났었죠. 명절 때 선물을 주는데, 당시에 삼성에서는 계열사인 제일제당에서 만든 설탕을 선물로 주곤 했어요. 그런데 그걸 정사원들에게는 15Kg짜리를 주고 일용직에게는 5Kg짜리를 주곤 했죠. 그게 시발점이 되어서 일용직 노동자들이 퇴근길에 ... 그때 일용직은 통근버스도 못 탔어요. 그러다가 정문 앞에서 일용직 노동자 한 분이 5Kg짜리 설탕 포대를 패대기치더니 한 십여 명이 덩달아 패대기를 쳤죠. 그게 시발점이 되어서 집단적으로 정사원화 요구를 한 거죠.”
험한 작업은 일용직 노동자들이 도맡아 하는데, 정작 정사원들에 비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던 일용직 노동자들이 벌인 시위였다. 이후 직영 소속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모두 정사원이 되었지만,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창원 1공장에서는 소사장제가 실시되면서 한 부서가 통째로 소사장제로 전환되기도 하는 등 외주화가 진행되었고, 이후 사내하청 고용형태가 자리 잡았다.
이처럼 노동자들의 불만과 좌절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이재용은 1988년 하반기부터 몇몇 동료들을 설득하여 함께 지역의 노동조합과 노동단체들을 찾아다니며 교류를 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창원 지역에서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저런 곳들에 찾아가 상담해 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초기에는 가톨릭 노동상담소, YMCA 노동교실 등을 찾아 교육을 받고 상담을 하였으나 머지않아 마창노련 활동가들과 만나 교류하게 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는 현장에서 ‘삼성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삼성중공업 사측과 공권력으로부터 온갖 탄압을 겪게 된다.
“1990년에 제가 경남도경 대공분실에 약2개월 동안 11번을 끌려갔어요. 오라고 하길래 안 갔더니 현장에까지 들어와서 납치하다시피 끌고 가고. 그렇게 끌려가서 나도 열이 받아서 위협하고 그래도 말도 안 하고 버티고 있으니까, 담당자가 바뀌어서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존댓말 쓰면서 한다는 이야기가 ... 저랑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를 막 하더라고요. 당시 마산 수출자유지구에 김일성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린 적이 있었어요. 그걸 제가 관여한 것이 아니냐고 엮어가지고 ... 계속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길래 버티고 있다 보니까, 이 사람들이 회사 쪽하고 결탁이 되었는지, ‘지금부터라도 회사 들어가서 말 잘 듣고 하면 없던 일로 해 주겠다’고 그러는 거지.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또 1991년경 일인데, 내가 회사 물건을 들고 나가는 걸 봤다는 목격 확인서까지 받아가지고서는 경찰에서 절도 건으로 조사 받으러 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안 갔더니 또 날 잡으러 온 거에요. 바로 유치장에 수감이 됐는데, 그래서 그 목격 확인서라는 걸 좀 보자고 했더니 바로 내 옆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한테 그걸 받았더라고요. 그 동료랑 반장이랑 두 사람이 목격 확인서를 썼더라고. 그리고는 인사담당 이사가 면회를 왔는데, 한다는 말이 각서 한 장만 써 주면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해 주겠다고. 그래서 화가 나서 ‘너네가 어떻게 공권력과 결탁을 해서 이럴 수가 있냐’고 호통을 치고 돌려보냈죠. 그런데 삼성동지회 동료들이 ‘일단 밖에 나와서 대응을 하자’고 논의를 통해 결론을 내렸길래 각서를 쓰고 나왔죠. 그런데 확인서를 써 줬던 그 친구가 한 달 뒤에 회사를 그만뒀어요. 소문에 따르면 그 친구는 돈을 많이 받고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사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컸던 터이기에, 삼성동지회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는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간간이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노조 왕국’인 삼성에서 노동조합 결성은 쉽지는 않았는데, 가장 큰 장벽이 되었던 것이 사측에 의한 유령노조의 설립이었다. 삼성중공업 사측은 개별 사업장뿐만 아니라 거제조선소, 창원 1공장과 2공장의 3개 사업장 통합 노조 또한 유령노조로 설립신고를 하여, 사업장 단위의 복수노조가 금지되어 있던 당시로서는 합법적 노동조합 설립이 어려웠다. 이와 관련하여 이재용은 3개월간 자료를 준비하여 1991년 국정감사 당시 국회 노동위원회에 제출하기도 하였으나, 삼성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국회에서의 삼성 유령노조 문제에 관한 논의는 결국 무산되었다.
노동자협의회와 삼성동지회, 그리고 그 이후
삼성동지회의 조직 및 활동은 계속되었으나, 도청과 감시 등을 비롯한 사측의 개입으로 인해 내부의 불신이 싹트는 등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이재용은 삼성동지회 내부 논의를 거쳐 1992년 11월 노동자협의회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출마 당시의 공약은 노동자협의회의 노동조합으로의 전환, 단 하나였다.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가 금지되어 있고, 삼성중공업 측이 유령노조를 설립해 놓은 것이 잘 알려져 있던 상황에서 법외노조로라도 활동하겠다는 이재용 후보의 공약이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재용 집행부는 당선 직후부터 사측의 집요한 개입에 맞닥뜨렸다. 삼성동지회 회원들에 대해 협박 등 강경책은 물론 해외출장, 보다 나은 부서로의 전환배치 등 회유책을 통해 조직을 와해시키고자 했다. 1993년 임금협상 시기에도 사측은 노동자협의회 상근간부들에 대한 회유를 통해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당시 노동자협의회의 상근간부는 10명이었는데, 상근 부장 7명 중 5명이 사측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이재용 위원장은 노동자 찬반 투표 실시를 주장하였으나, 사측과 집행부 내부에서 직권조인의 압박이 거세지자 수일 간 잠적하기도 하였다. 결국 기존의 임금(기본급) 산출기준 월240시간을 288시간으로 상향조정하는 조건으로 임금협상이 타결되었으나, 협상이 마무리되자 사측은 구두합의 하였던 타결조건 시행을 거부하였다. 이에 이재용 위원장과 현장 노동자들은 3개월간 부서 내에 선전물을 배포하고 게시판에 대자보를 게시하는 등으로 대응하였고, 마침내 노동조합으로의 전환을 내세우며 작업거부를 시도하려 하자 사측은 합의사항을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삼성중공업 3개 사업장 모두에서 상당 수준의 임금상승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노동자협의회가 노동조합으로의 전환을 추진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사측의 협박, 회유, 폭력의 수위 또한 점점 더 높아져갔다. 결국 1993년 9월 이재용 위원장은 ‘테러’를 당하였고 병원 신세를 지면서 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위원장 활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당시 사측은 이재용 위원장이 폭행당한 일을 개인적 스캔들 때문인 것으로 매도하였으나, 후일 경찰에서 사측의 개입 사실이 밝혀졌다.
“그때 그쪽에서는 저를 죽이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거죠. ... 뒤통수를 맞고 그냥 푹 쓰러져서 한 시간정도 뒤에 정신을 차리고는 스스로 혼자 병원에 갔죠. 그 사람들은 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돌아갔던 것 같아요. ...당시에 지역신문이나 중앙 일간지에도 나왔었어요. 그 전에도 납치 감금은 수도 없이 당했죠. 어디 가려고 하면 그쪽 사람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했고. 그런 일들이 허다했습니다.”
노동자협의회 위원장을 그만두고 현장에 복귀한 이재용에게 사측은 그에게 업무도 주지 않았다. “과장 옆에 자리 하나 주고 거기 앉아있으라는” 식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재용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삼성동지회 조직사업에 집중했다. 사측의 방해가 심하여 명부도 없이 비공개적으로 조직을 해 나갔으나, 사측에서는 그와 접촉하기만 하면 해당 노동자를 다음날 불러 ‘면담’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그와 접촉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노동자들도 생겨났다. 그럼에도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일은 함께 하기로 뜻을 모은 사람들이 사측의 회유로 돌아서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특히 삼성중공업 측은 1996년 명예퇴직을 실시하면서 삼성동지회 회원들에게 집중적으로 많은 보상을 제공하면서 퇴직을 종용하였다. 결국 상당수의 삼성동지회 회원들이 현장을 떠났다. 이재용의 증언에 따르면 이제껏 삼성동지회를 한 번이라도 가입하여 거쳐 간 사람들이 500명이 넘는다고 한다.
해고 이후 이재용의 삶과 끝나지 않은 복직투쟁
삼성동지회 조직활동을 계속하던 1997년 초 어느 날,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이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리고 기자회견 직후 삼성중공업 사측은 이재용에게 금전적 보상과 해외 전환배치를 제시하며 회유하고자 하였다. 이를 거부하자 이재용은 곧 징계해고를 당하였다.
“저한테 현금으로 5억원을 줄 테니 베트남으로 가서 골프장 관리하는 업무를 하라 그러다라고. 그래서 ‘싫다’고 그랬더니, 그러면 ‘얼마나 주면 가겠느냐’고 그러길래 ‘한 50억 정도 주면 내가 가겠소’ 그랬지. 그러니까 피식 웃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경비회사 사람이 ‘당신 퇴근하면 바로 따라붙는 사람이 있다’고 귀뜸을 해주는 거야. 부서장도 절 불러서 너 계속 그러면 해고될 거라고 언질을 주기도 했죠. ‘해고하려면 해고해 봐라’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4월 30일 징계해고 통보를 받았죠.”
징계해고 사유는 작업장 이탈, 근무태만 등이었다. 이재용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기록을 바탕으로, 사측은 법적으로 쓸 수 있게끔 되어 있는 연월차 휴가도 많이 썼다고 트집을 잡고, 또 업무를 주지도 않고 있었으면서 작업장 이탈과 근무태만 같은 이유를 붙였다.
해고 직후부터 이재용은 복직투쟁을 벌였는데,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수배자 생활을 하며 수개월을 숨어 다니기도 하였고, 또 그의 복직투쟁에 함께했던 지역 활동가들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재용은 “1996년 명예퇴직 때 삼성동지회 회원들이 대거 퇴직하면서 세력이 약해진 가운데 1997년 해고를 당했던 것”이라 회상한다. 1999년부터는 삼성생명, 삼성SDI 해고자들을 만나서 삼성해복투와 함께 수년 간 복직투쟁을 함께 했다.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에서 노동조합 활동과 관련한 유일한 해고자인 그는 한동안의 공백기를 거쳐 다시금 본격적인 복직투쟁을 준비 중이다. 한편, 최근에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지역일반노조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노동조합 활동을 빌미로 해고된 김경습이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사진: 2014년 4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집회 (출처: 삼성일반노조)
그의 복직투쟁에 다시금 힘을 실어준 것은 지난해인 2013년에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이명박 정권 초기에 심의에 들어갔던 것이 좀처럼 진행이 안 되다가 지난해에 와서야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무노조 사업장에서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와 관련하여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사례로는 1989-91년 포항제철 노조 민주화 활동으로 해고된 포스코의 전장복 외 4명이 17년간의 복직투쟁 끝에 2008년 인정을 받은 것을 제외하면 삼성에서는 이재용이 유일하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로서 명예회복 및 보상과 더불어 삼성중공업 측에도 복직 권고가 제시되었으나, 법적 강제력이 없는 이 권고에 대해 삼성중공업 측은 복직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보내 왔다. 이후로도 이재용이 개인적으로 몇 차례 복직을 요구하였지만 삼성중공업 측으로부터 답변조차 받을 수 없었다. 해고된 지 17년, 오랜 복직투쟁을 해 오는 가운데 그의 일상생활도 큰 타격을 받았다. 해고 직후부터 수년 동안은 복직투쟁에 집중하느라 생업도 포기해야 했다. 작은 꽃집을 운영하며 가계를 지탱하던 그의 부인도 지금은 초등학교에서 계약직 영어전문강사로 일하는 학교비정규직이다. 무엇보다 그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 줄 수 없었던 일이다.
“한창 애들 공부할 시기에, 아이들이 실력이 되는데도 4년제를 못 보냈습니다. 해고된 시점이 ... 지금은 큰 애들은 다 취업했지만, 그게 가장 가슴이 아프죠. 해고되던 당시에 사원아파트에 있었는데,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도 ‘너네 아빠는 빨갱이다’ 그런 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마음고생이 많았죠. 사원아파트는 해고된 뒤에도 한 2년 동안은 안 비워줬는데, 나중에 소송이 들어가서 결국 법원에서 짐 들어낸다고 해서 나오게 되었고요.”
첫 머리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삼성그룹 후계자인 이재용과 똑같다. 그에 따르면, 과거 권영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선거 유세를 하면서 가는 곳마다 삼성 이야기가 나오면 “삼성에는 두 이재용이 있는데, 한 이재용은 부모 잘 만나서 거액의 재산을 받아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편하게 사는데, 다른 이재용은 해고자 신분으로 어렵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민주노총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아쉬움도 많다.
“해고되던 당시에 전해투 기금도 거의 없었고 ... 제가 해고되던 당시에 권영길 위원장이 뭐라고 했냐면, ‘이재용이 해고되면 민주노총이 생계를 책임진다’고 얘기했었어요. 해고되기 직전에. 그랬었는데, 해고되고 나서 민주노총으로부터 생계지원을 딱 3개월 받았죠.”
복직투쟁과 더불어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이재용은 2000년대 들어 민주노동당 활동을 시작하여 창원에서 웅남동 지회장을 맡기도 했다. 한 번도 당선되지는 못하였지만, 2002년, 2004년 보궐선거, 2006년 세 차례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최근 경남 고성의 시골집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건강도 돌보고 소일거리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본격적인 복직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삼성중공업 노조결성 시도를 돌아보며
짧은 만남의 시간을 마무리하며 그에게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에서의 노조결성 시도는 당신의 인생에 있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돌이켜보면 아이들과 부인에게 많이 미안하지만, 이런 활동을 해온 것에 후회는 없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의 곁에서 함께 싸워 온 분들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못난 아빠’로서 자녀들에 대해 갖고 있는 미안한 마음을 표하며 끝내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그는 곧 목소리를 가다듬고 “단 6개월을 일하고 그만두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복직을 해야겠다”며 굳은 의지를 밝혔다. 그의 곁에서 복직투쟁에 함께 해 준 동지들에 대한 보답,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녀들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이 정정당당한 것이었음을 확인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진: 1981년 미국 항공관제사 노조 파업 당시의 한 장면
(출처: 영화 <Inequality for All> (2013) 中)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 해고자 이재용, 그에게는 그의 곁에서 투쟁에 함께했던 동료들 뿐만 아니라 그의 발자취를 이어가는 수많은 후배들이 있다. 최근 들어 본격화되고 있는 삼성에서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들을 지켜보며 그 역시 감회가 새롭다. 그는 최근 삼성SDI 노동조합 설립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울산에 다녀오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최근 삼성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운동의 배경이나 생각은 과거와 다른 점도 많지만, 후배 노동자들이 보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을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무노조 삼성왕국’은 바로 그 한 사람이 낸 작은 돌파구로부터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리고 삼성의 정상에서 군림하는 이재용이 아닌, 밑바닥에서 삼성에 맞서 온 이재용에게, 그가 17년 동안 맞이하지 못했던 5월이 찾아올 때, 비로소 또 하나의 돌파구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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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는 ㄱ자도 모르니, 앤드루 고드의 책을~ 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