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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와 비정규직 문제의 딜레마

지난 수요일(8월 24일) 비정규노동센터의 포럼에서 "복지와 비정규노동"을 주제로 한 윤정향 박사의 발표를 들었다. 최근 들어 복지를 둘러싼 논의들이 매우 활발한데, 복지라는 의제를 노동문제와 어떻게 연관지어 볼 것인가를 논의하는 장이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자리였다. 물론 발제의 내용은 구체적인 쟁점들을 파고들기보다는 논의의 지형을 살펴보고, 어떤 사항들이 고려되어야 할 지 개관해보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발제와 토론을 통해 어느 정도 합의된 바는 현재 정세국면에서 조직노동의 주도 하에 이른바 '보편적 복지'를 확립해 갈 수 있는 조건은 되지 않는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주체적인 측면에서, 미조직 비정규노동자들의 물질적 조건 개선과 조직화 진전에 '보편적 복지'가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점 정도였다. 그렇지만 문제를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답답함이 커진다.

 

발표문에서 발제자는 "기업복지가 비정규노동 차별과 배제의 실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곧바로 다음 문장에서 "보편적 복지는 이러한 차별을 국가 제도 영역에서 해소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이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일말의 제언조차 없을 경우 다소간 공허한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보편적 복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업복지가 국가제도 영역으로 흡수되어야 할 것이라는 건데, 바로 이 지점이 복지와 비정규직 문제를 연관지어 사고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딜레마인 듯하다.

 

먼저 기업복지에 대해 정규직 노동자들, 특히 조직노동 부문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어찌됐든 그간 노조운동을 통해 확보한 '투쟁의 결과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기업복지가 국가제도 영역으로 이행해 가게 되면 그 과정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들어갈 텐데, 그러한 리스크를 감수하는 선택을 선뜻 하리라 보기는 어렵다. 기업들(주로 대기업)의 경우에도 당장 자신들의 조세부담이 증가하지 않고 그간의 조세 회색지대를 정비하거나 새로운 영역에서 조세를 신설한다 하더라도 기업 내부노동시장 내에서 핵심 정규직 노동자들의 '충성지대(loyalty rent)'의 역할 또한 해 왔던 기업복지가 기업 외부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것을 흔쾌히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직노동이나 자본이 아닌, 개별 노동자들을 고려할 때, 흔히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으로 이른바 '복지체험'이 거론된다. 보편적 복지서비스 수혜를 경험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에는 주관적 측면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노동자계급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적용해 생각해보면 일종의 딜레마에 맞닥뜨리게 된다. '복지체험 가설'을 적용해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이렇다할 복지체험을 해보지 못해 '보편적 복지'에 이해관계를 갖는다 해도 직접적인 유인이 크지 않고, 그 이행에 대한 신뢰 또한 매우 낮다. 반면, 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편적 복지'가 아니더라도 기업복지를 통해 이미 상당한 수준의 복지서비스 혜택을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에 누려 온 복지혜택을 국가를 통한 보편적 복지로 돌리는 데 큰 유인이 없을 수 있고, 나아가 기업 내부노동시장이라는 좁은 바운더리 내에서 제공되던 복지에 비해 서비스의 '맞춤' 정도 또한 떨어질 수밖에 없어 노동시장 '외부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양보(다른 그럴듯한 말로 연대)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복지에 대한 '욕구'(또는 실제로 필요로 하는 복지서비스 수준)에도 실질적인 차이가 어느 정도 확인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대체로 연령대도 다르고 가족구성 또한 다르다. 일상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면 차별의 재생산 구조 자체를 문제삼기에는 자신들의 생활을 꾸려가기에도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회의적인 생각을 늘어놓아도 될지 참으로 고민스럽지만 ... 어찌 보면 조직노동의 과제는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연대의 방향으로 부러 먼 길 돌아가기보다는 구조화된 노동시장 분절의 해소를 위한 연대를 직접적인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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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불경기라도 사랑은 인플레이션?

역시 사람이란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생각도 바뀌고 하는 법인가보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외유를 나섰다가 오도바이 타던 청년들이 커브길에서 자빠져 다치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았다. 한 친구가 왼쪽팔이 부러진 듯했다. 아무래도 광복절 퍼레이드를 앞둔 8월이다 보니 ... 저녁에 길거리에 나가면 제법 눈에 많이 띤다. 암튼 내 생애에 걸쳐 세 번째로 오도바이 자빠지는 장면을 보니 ... 이제는 폭주족들의 질주를 이론적으로는 '긍정'하되 실제에서는 '걱정'해야겠다. 암튼 얘네들은 꼭 커브길에서 자빠진다. 100cc나 125cc 가지고 그것도 두 명 이상(네 명까지 타는 거 봤음) 타고 GP 써킷에서나 볼법한 코너웍을 시도하면 안자빠질 수가 없지.

 

저녁엔 오랜만에 갑자기 꽂혀서 모무스메의 '러브머신' PV 감상질을 했다.

 

거의 10분에 이르러 길기로 악명높은 프로모션 비디오 클립인데, 우와 ... 이건 뭐 ... 듣다보니 입이 딱 벌어지는 게 예전엔 별로 신경도 안 썼던 가사가 정말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이 싱글이 발매되었던 게 1999년이니까 십여년 전 노래이긴 한데, 암튼 대강 줄거리를 내맘대로 해석해 보면 불경기가 와도 여성들에겐 결혼이라는 취직자리가 있으니(그래서 일본은 좋은 나라랜다 ... '아무리 불경기래도 사랑은 인플레이션'이라는 가사가 나올 땐 정말 뒤로 넘어갈 뻔했음) 나이스 바디를 가꾸고 사랑을 찾는 데 올인하자 ... 그리고 댄스! 댄스! 뭐 이런 건데 ... 이 곡이 오리콘을 오랜 기간 평정하고 200만장 이상의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린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음 ... 일단 모무스메 자체가 데뷔 후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어느 정도 인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는 점, 야구치 마리를 비롯하여 멤버의 구성이 탄탄했고, 3기로 들어온 고토 마키(최근의 행적은 좀 안스럽지만)도 '물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곡 자체가 구성도 짜임새 있고 폭넓은 연령대에서 호응을 얻을 만한 것이었다. 얼핏 들어보면 당황스럽기도 한 가사도 생각해보면 호응을 얻을 만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가사를 곱씹어 보면 버블 붕괴 후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동안 울적해 있던 '버블녀'들에게는 다시금 자신감을 심어주고, 절제와 다소곳함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짜증나 있던 한창 젊은 여성들의 속을 풀어줄 만한 부분이 있는 것이었다. 암튼 십여년 간의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모무스메보다 AKB에 보다 애착이 가는 건 아키P가 써내는 가사들이 그래도 괜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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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정리해고라는 이지메 사건

한진중공업 사태를 둘러싸고 김기원과 김대호라는 두 사람이 화끈한(=얼굴이 화끈거리는) 설법을 전파하고 있다.


이미 십 년도 전에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대우자동차 사태 때 "올바른 해법"에 다가서고자 하는 논의 속에서 물을 흐렸던 장본인들이다. 무엇이 어찌도 그리 똑같은가 하면, 뻔히 보이는 이지메 현장에서 '우리 학교에는 이지메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교장선생의 설교 같은 막무가내다.
 

발단은 김기원 교수의 <한진중공업 사태의 올바른 해법은> 이라는 글이다. 희망버스를 '정리해고를 철폐하고 비정규직을 없애자'고 떼 쓰는 집단으로 보는 고압적 시선이 뻔히 보이는데도 "희망버스가 지핀 희망의 불씨를 살리려면"과 같은 화법을 구사하는 위선에 더해 박승호 소장과 허민영 박사에 대한 반박글에서는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완전히 없애자는 구호의 의미를 잘 모른다"고 나무라기까지 한다. 이러저러한 글에서 은근히 자신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뒤를 잇고 있다는 식으로 뽐내온 그는 그때 그 시절 속으로는 시위대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의 의미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정리해고의 정당성 문제와 관련해서 김기원 교수는 '주식배당 문제'를 물고 늘어진다. 이 문제는 이미 허민영 박사의 반박글에서 사실과 다름이 충분히 드러났는데,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간 쭈욱 순이익을 내던 회사가 2010년 들어 갑자기 손해를 봤다고 해서 수년 간 준비해오던 해외이전과 정리해고를 막무가내로 단행한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시장원리에 따른 것이라고 우기는 것도 황당하지만, 어쨌든 간에 결국 구조조정이 이루어진 대우자동차의 경우를 보자. 1750명이 잘려나가며 대우차를 GM이 인수한 결과라는 게 '쉐보레'가 만든 ... 변속도 제대로 안 되고(보령미션), 이번 폭우 때 물이 줄줄 새어들어오던 자동차(크루즈, 올란도)다. 이것을 그가 강조하는 생산성 향상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발전으로 볼 수 있을까. 영도조선소는 경쟁력이 없다고 단정짓는 논의도 역시나 당황스럽다. 수빅 조선소만 해도 열대성 기후에 우기에는 비가 쏟아지는 입지조건에다 조선소 짓기 시작했다가 결국 쉘터를 쳐서 실내에서 배를 만든다. 저임금 노동력 바라보고 필리핀에 조선소 지으려고 했는데 설비투자가 막대해지니 더더욱 현지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그러니 노동자들이 죽어나간다. 십여년쯤 지난 뒤에는 해상이 아니라 해저를 달리는 컨테이너선이 나타날 지도 모를 일이다.

 

일년 반쯤 전 김기원 교수는 <진보와 개혁의 정치경제학>이라는 글에서 이명박 정권이 "독재"로 향하는 방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과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반신자유주의'를 내세운 "진보" 세력이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압축적 불균등발전을 겪어온 한국은 개발독재의 중상주의에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처해 있고 따라서 개발독재, (구)자유주의, 복지주의, 시장만능주의의 각가지 정책이 혼재되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번 박승호 소장과 허민영 박사의 반박에 대한 답글에서는 정색을 하며 "정리해고는 늘 있어왔던 제도"이며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에서도 정리해고를 폐기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잘못"이라고 강변한다.

 

희망버스와 김진숙 지도위원의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요구를 어중이떠중이들의 정리해고 제도 자체와 비정규직의 즉각적 철폐 요구 쯤으로 갑자기 등치시키고 비상식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데에 더더욱 선수는 김대호다. 그의 <희망버스 안에 '희망'은 있는가?>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글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정규직 정리해고에 앞서 수천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잘려나간다며 애써 걱정해 주는 대목이다. 그간 정리해고로 비워진 자리가 비정규직으로 채워져 온 것이 뻔한 사실인데도 사내하청 불법파견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자본의 '정규직 이기주의' 논리에 맞장구쳐주던 행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사양산업인 조선산업은 일찌감치 해외공장으로 돌리고 고부가가치 지식산업으로 전환하여 넘쳐나는 대졸 청년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줘야 한다면서, 기성세대 노동자들이 노동기본권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이 이러한 전환을 가로막는다고 한다. 그러고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엄청난 격차로부터는 진보세력이 눈을 돌리고 있다고 비난한다.

 

사실,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의 시각에서 정규직 정리해고 건에 이르러서야 움직이는 여론이 야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느끼는 야속함은 정규직 노동조합이 그간 비정규직의 노동기본권 요구를 외면해서이지 김대호 소장처럼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그렇게 큰 악덕인가?"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아닐 터이다. 이지메를 하는 양아치들이 재벌대기업들이라면, 모른 척 외면하는 같은 반 아이들이 정규직 노동자들쯤 될 것이고 이지메 당하는 아이들은 정리해고 당한 이들과 비정규노동자들쯤 될 것이다. 자, 이제 조회시간. 결국 문제가 불거지자 학교로달려온 동네사람들(희망버스?)과 전교생을 앞에 두고 김기원 교장선생님과 김대호 교감선생님은 호통친다. "우리 학교에 이지메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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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노동센터 후원의 밤 (7월 6일 수요일 오후5시)

비정규노동센터가 후원행사를 연다. 음 ... 꼭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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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선거의 시기로구나

아아 ... 내일 AKB 총선거, 그것도 가까운 영등포 모 극장에서

 

생중계 해준다는데 하필 그시간에 회의가 잡힐 게 뭐람 ...

 

역시 정치의 무대는 극장인 것이여 ... '총선거'라니 ...

 

먀오짱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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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죽어가는 것과 살아가는 것(서시)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1941.11.20)

 

 

 

 


序詩

 

 

死ぬ日まで天を仰ぎ
一点の恥じなきことを
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
私は心を痛めた。
星をうたう心で
すべての死にいくものを愛さねば
そしてわたしに与えられた道を
歩んでい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

 

 

 

* 蔵田雅彦의 번역본(1995)을 기본으로, 伊吹郷의 번역본(1984)과

茨木のり子의 번역본(1990) 등에 대한 서경식의 비판(2006)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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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연 앞의 인간이란

일본에서 대지진과 쓰나미 소식이 한국에 전해져올 때쯤

나는 동남권 해안에 새로 들어서고 있는 핵폐기장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연이어 신문지면과 지상파를 타고 전해져오는 재해 소식을 보면서

뭐랄까, CNN의 걸프전 보도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인간사를 묘사하는 사필귀정, 인과응보 등등의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정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재해지역에서는 좀 떨어진 곳에 계셔 큰 걱정은 안 했지만

혹시나 하여 일본의 한 선생님께 안부를 물었더니 이런 답신이 왔다.

 

"일본은 파멸적인 타격을 받았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저는 큰 허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른 한 편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간사이 출신의 한 친구에게 95년 고베 대지진의 경험이

일종의 악몽처럼 따라다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인지 자연재해라는 것이 주는 공포는 일종의 숙명적인 무게로 인해 그 차원이 다르다.

어린 시절, 폭우 가운데 윗동네 저수지 둑이 무너져

동네 한가운데를 지나는 다리가 끊긴 적이 있었다.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물난리를 구경하며 ...

나는 뭔가 한없이 낯선 얼굴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그 자그마한 기억이 일본 대지진 소식에 나를 민감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 사람들이 한편으로 이런저런 리스크를 키워가면서

사람은 쉽게 안 죽는다는 것을 확인하며 안도해왔던 시간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내리며 수많은 생명의 일순 사라짐과 함께 '허무감'으로 변한다는 사실.

 

떠난 자들의 명운을 빌며 ... 무엇보다도 ...

살아남은 자들의 영혼의 위안을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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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역시 살아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며 성장했음에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 또한 무궁무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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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에 넘쳐 있던 때가 있었다. 그런 나를 나 자신도 좋아했었고, 모든 것이 쉽지만도 않았다. 뭐랄까, 웅대한 플랜이 있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각종 거대서사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 같다.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이 흐른 뒤 곁에 있던 많은 이들이 일종의 우울증에 시달리는 모습들을 본다.

 

낭만이라는 것은 대부분 퇴행적인 것이라서 '좋았던 한때'와 꼭 이어지고야 만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을 더 이상 찾지 못할 때, 사람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어떤 공간을 찾곤 한다.

 

자신이 속한 문화로부터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새로운 문화 속에 뛰어들어 그로부터 상상력과 삶의 활력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보통 선형적으로 쭈욱 뻗어나아가는 미래를 가정하고 앞날이 이미 그려져 있는 공간을 찾거나, 아니면 자신이 이미 미래가 될 수 있는 과거의 공간을 찾거나 한다.

 

"선진"의 공간이란 전자의 그런 공간, 요컨대 예정된 미래의 공간인 것이다.

 

"저개발"의 공간이란 후자의 그런 공간, 요컨대 모험의 공간인 것이다.

 

함께 즐거웠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히는 그런 그늘들은 언뜻 보면 '불안'이지만,

 

바꿔 말하면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이다. 도대체가 정말 지루하다.

 

최첨단과 모험, 둘 중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이들은 불안해하고 지루해한다.

 

불안과 지루함의 공모 혐의 ... 그것을 밝혀내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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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은 정녕 늙지 않았다

성룡의 필모그래피를 훑다 보면 묘한 감정이 든다.

 

초기의 정통 쿵푸 액션 취권에서부터, 폴리스 스토리로 대변되는 홍콩 경찰의 삼합회 소탕 액션 ... 그리고 홍콩 반환 이후에는 헐리우드식 어드벤처 액션으로 전환, 나아가 본격적인 헐리웃 진출과 맞물린 시기인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중화민족주의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가 티벳 문제에 대해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공산당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물론 이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격동의 중국사를 관통해 온 그의 가족사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중국 내에서 '농민공'으로 표상되는 격차 문제에 대한 인식도 동시에 나타나는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남루한 행색의 중년 노동자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일이 잦아졌다. <신주쿠 사건>이 그러하였고, 최근작인 <가라데 키드>에서도 그러하다. 사족이지만, <가라데 키드>는 그 내용이 가라데와는 거의 전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 제목이 <쿵푸 키드>가 아니었나 하는 점에서 의문을 자아낸다. 헐리웃의 동양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이자 가장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엔딩 크레딧과 함께 보여지는 액션 연기 NG장면들인데, 이 장면들은 크게 세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다.

 

하나는 말 그대로 연기 도중 웃음이 터져나온다거나 하는 식의 실수들이고,

 

둘째는 고난도의 스턴트 액션 중 벌어지는 거의 '안전사고'에 가까운 장면들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미숙한 영어 구사능력으로 인해 벌어지는 NG장면들이다.

 

이 세 번째 요소가 뭔가 짠하면서 씁쓸하고도 아린 그런 감정을 자아낸다. 요컨대 성룡에게는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는 것과 혀를 잘못 놀려 발음이 새는 것이 매한가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훈훈한 점이라면 십수년이 지난 지금이나 예전이나 그의 발음이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일까나.

 

그만이 지닌 소통의 방법인 액션, 특히 신기에 가까운 '주변사물활용' 기술은 한때 옹박이 내걸었던 "이소룡은 죽었다. 성룡은 늙었다. 이연걸은 약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전적으로 옳지는 않음을 여전히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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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 해적의 기원

 

"소말리아에 정부가 없다는 이유로 서구 기업들이 무분별하게 소말리아 앞바다에 쓰레기를 버리고 핵폐기물을 버리기도 한다. 원래 해적 활동이 시작된 이유는 이런 사람들에게 대가를 물게 하기 위해 주민이 나서면서부터였다." - Keinan Abdi Warsame / <시사IN> 2010. 7. 24 제149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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