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신문도 방송도 피곤해서 못 보겠다

아침에 인터넷에서 연보흠 MBC노동조합 홍보국장을 비롯한 집행부 집회 소식을 보았다. 파업 관련 41명 징계 및 해고에 지방의 예상 징계 및 해고자까지 포함하면 106명에 달할 것이라고. 지난 해 신경민 앵커의 마지막 멘트 듣고서는, 사실 지극히 온건하고 상식적인 내용이었음에도 출근 전 주르륵 눈물이 흘렀던 기억이 난다. 아홉시 뉴스가 이지경이니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다는 이야기인가. 어쨌든 정권의 방송장악 시도는 계속되고 있고, MB는 한국의 베를루스코니가 되려 안달인 듯하다. 벌써 천안함 사건 발표를 둘러싸고 외신들은 의뭉스러움을 드러내고 있고, 국내 언론인들도 지칠대로 지친 것인지 하나둘씩 다운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신문을 펼쳐 들어도, 인터넷 뉴스 다시보기도, 그 보도가 전해주는 압박감과 피로 탓에 차분히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다.

 

전국을 극도의 피로로 몰아넣는 가운데 언론탄압도 계속되고 있는데, KBS 역시 지난 4월에 노동조합 활동의 핵심 인물들을 지방으로 좌천시켜버린 바 있다. 그렇게 쫓겨난 사람들 중 하나가 김영한PD다. 이분은 <한국 방송노동시장의 유연화 연구>라는 박사논문을 쓰기도 했는데, 벌써 2년 전인 2008년 이병순 사장 취임 즈음에 그가 KBS 사내 게시판에 올렸던 공개서한을 덧붙인다.

 

.......................................................................................................................................................

 

이병순 사장에게 드리는 글

 

저는 89년에 입사하여 오늘까지 세 번의 사장 취임을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90년 4월에는 관제사장 서기원씨의 취임을 반대하는 노동조합의 출근저지투쟁의 후미에서 선배들의 거룩한 싸움을 지켜봤고, 2003년 서동구 사장이 왔을 때는 노동조합 전임자로서 출근저지 대오의 맨 앞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나이 들어서 그런데 나가면 투쟁에 방해되니까 나가지 말라'는 아내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현장을 두 눈에 담고 기억에 오랫동안 넣어두고 싶은 마음에 정현관으로 나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낙하산 사장을 막기 위해 출입을 막았으며, 대통령의 임명장을 받은 그들은 어떻게든 들어오려고 했고, 결국 청경들을 동원해서 사원들의 저항을 뚫고 KBS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앞선 두 시위에는 노동조합이 선두에 서 있었고, 오늘은 노동조합 전임자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원들이 자발적으로 서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 또 한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서기원 사장이나 서동구 사장은 처음 진입을 시도할 때 적어도 자신을 막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왜 자신을 반대하는지를 묻고, 자신이 사장으로 와서 어떤 일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이런 저런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서로의 입장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자 몇 번을 돌아가고 다시 오고를 반복하면서, 그것이 헐리우드 액션이었든 아니든 사원들의 마음을 읽고 정서를 달래려는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병순 사장은 단 한 번의 대화시도도 없이 군사작전을 하듯 청경들을 동원하여 시위하는 사원들을 한쪽으로 거세게 내동이치며 들어왔습니다. 취임식이 열리는 스튜디오로 통하는 모든 철문을 내려 어떤 소통도 거부한 채 철저하게 '닫힌' 취임식을 가졌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살아 숨 쉬어야 할 방송사에서 사원들의 출입을 막은 채 열린 취임식은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요? 제가 받은 느낌은 비겁함과 독선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의 사장 취임사는 공영방송 KBS 사장의 취임사로는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운 함량미달입니다. 방송을 정권의 홍보도구로 여기는 정권의 바보짓 덕분에 어부지리로 갑자기 사장자리가 떨어져 취임사 준비에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은 알지만, 그래도 KBS에서 31년을 보낸 사람의 글로는, 그것도 취임사로는 너무도 빈곤합니다. 시장의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미디어시장 환경에서 공영방송의 사장으로서 방송의 공공성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대신 정권과 보수신문들이 만들어낸 경영효율화의 덫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비전과 철학의 부재가 빈곤한 취임사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취임사에서 스스로 약속한 과제를 몇 가지 짚어보겠습니다.

 방송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확보하겠다고 하면서 'KBS는 지난 몇 년 동안 공정성과 중립성 시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공정성은 매우 추상적인 단어입니다. 경험적으로 보면 서로 경쟁하는 집단들이 자신에게 유리하면 공정하다고 하고, 불리하면 불공정하다고 주장합니다. 정치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요. 이렇듯 공정성은 인상비평에 가깝기 때문에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도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이념적 지향에 따라 해석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용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근거와 기준에서 KBS 뉴스와 프로그램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공정성의 판단은 누가 내리는 것입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하지 않다고 하면 공정하지 않은 것입니까?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불공정하다고 하면 그 프로그램은 공정하지 않은 것입니까? 한나라당이 공정하지 않다고 하면 불공정한 뉴스가 되는 것입니까? 그도 저도 아니면 사장이 공정하지 않다면 편파방송이 되는 겁니까? 지금까지 KBS 프로그램과 뉴스를 둘러싼 공정성 시비는 다분히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신문들이 설정한 어젠다이며 그들의 프레임입니다. KBS 뉴스와 프로그램의 공정성에 대한 이병순 사장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공정성에 대한 평가는 일부 정치집단과 보수신문이 아니라 다양한 이해를 놓고 경쟁하는 사회의 다원적 주체들에 의해 내려져야 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시청자로 대변되는 국민들이겠죠. KBS가 공정하지 않은 편파방송을 하는데 어떻게 수년 동안 신뢰도와 영향력에서 다른 신문사와 방송사를 제치고 수위를 달리고 있습니까? 국민들은 공정하지도 않은 방송사에 최고의 점수를 주는 바보들입니까? 공정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이념적으로 경도되어 있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공정성을 제고하기 위해 '사전 기획단계에서부터 철저한 게이트키핑이 이뤄지는 제도를 마련'하겠다고 하시는데, 저는 이 대목에서 울화가 울컥 치밉니다. 저에게는 과거의 권위주의로 회귀하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기획 단계는 자유로운 생각들이 브레인스토밍하는 단계인데, 이때부터 철저하게 관리하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병순 사장은 우리 머릿속의 자유로운 생각까지 관리하는 사원들의 정신적 빅브라더입니까?

 철저한 게이트키핑이라는 사장의 말 한마디가 관료주의의 폐해가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KBS에서 어떻게 해석될 지 한번만 생각해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제부터 팀장들은 자신의 판단으로 볼 때 조금만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기획안은 결재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고 다른 아이템으로 유도할 것이 뻔합니다.

그와 더불어 프로그램의 경쟁력도 따라서 추락하겠지요.

 아시다시피 방송사는 창의력을 생명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물론 게이트키핑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유로운 생각과 아이디어가 넘쳐흘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반짝이는 기획이 나오고 프로그램의 성공으로 이어질 텐데, 사전 기획단계부터 상상력을 억압해서 어떻게 최고의 콘텐츠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자기검열에 빠져 부서장 눈치만 보는 직원들만 늘어날까 걱정입니다.

두 번째로 공영성 확보를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공영성이라는 말은 잘못된 단어입니다.

 공영성이란 소유 또는 운영의 공적 성격을 의미하는데, KBS는 공적 기구이며 재원 역시 공적재원인 수신료가 일정 부분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공영적인데, 어떻게 공영성을 강화한단 말입니까? 따라서 공영방송이 나아갈 목표나 지향을 의미하고자 한다면 공영성 대신 공익성 혹은 공공성 등의 구체적인 가치를 담은 표현으로 바꿔 쓰는 게 옳습니다.

 어쨌든 '공영성'을 지키고 시청자의 다양한 욕구와 의견을 수렴하여 공론장의 역할을 하겠다고 하면서 그 방법에 있어서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도 변화하지 않은 프로그램의 존폐'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시사기획 쌈>, <시사 투나잇>, <미디어포커스> 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대내외적으로 어떤 비판을 받고 있는지, 과연 그러한 비판은 누가 제기하고 있는지, 그 비판의 근거는 무엇인지, 비판이 낳은 효과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그리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면 어떤 물의가 빚어졌는지, 그러한 물의에도 불구하고 KBS는 어떻게 수년 동안 신뢰도와 영향력 1위를 고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다는 주장은 일방의 생각을 내면화하여 사원들에게 강요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돌이켜보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KBS의 독립성을 확보하겠다는 약속은 아니한만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사원들의 정당한 항의를 무력으로 짓밟고 불법적으로 사장을 제청하여 해체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이사회도 모자라, 청와대와 방통위원장, 유력한 사장 후보가 참여한 대책회의까지 온갖 부도덕한 과정을 거쳐 임명된 사장이 정치적 독립을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 낙하산의 개념을 과학적으로 따지는 노조는 낙하산이 아니라고 했지만, 낙하산을 역사성과 성찰성으로 받아들이는 사원들은 이병순 사장을 관제사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경영효율화를 통해 구조조정과 고통분담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일종의 슬픔을 느낍니다. 그동안 수신료 인상을 거론할 때마다 방만한 경영이 도마에 올랐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보수신문과 한나라당으로부터 제기되었는데, 구체적인 수치와 근거를 제시하기보다는 막연히 직원들 급여가 많다거나 인력이 많다는 등의 정치적 수사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KBS는 국회, 방통위원회, 이사회, 감사원 등의 중층적인 규제를 받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평균급여는 물론이고 집행간부의 법인카드 사용액까지 KBS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투명하게 예산을 집행하는 기관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직원이 많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KBS는 5,2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고,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영국의 BBC와 일본의 NHK는 각각 25,000여명과 11,800여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서비스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단순 수치로만 봐도 KBS의 인력이 방만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난 10동안 1,000명 이상의 현원이 줄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낮방송 실시, 장애인 채널 출범, 지상파DMB방송 등 매체시간과 신규 채널이 속속 서비스를 개시했습니다. 그 많은 일을 누가 했습니까? BBC 직원들이 와서 했습니까? 모두 KBS 선후배들이 한 일입니다.

 

효율성의 잣대로 공영방송의 성과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공영방송은 이윤을 남기는 것을 존재의 이유로 삼는 상업방송과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공영방송의 경영평가는 효율성이 아니라 재원의 적절성 개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적재적소에 적당한 규모의 재원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이루어졌는가를 그 기준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비용절감이 능사가 아닙니다. 적자를 모면하여 경영능력을 인정받으려고 무리하는 순간 그동안 공들여 쌓아올렸던 KBS의 스테이션 이미지가 추락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욕물과 아이를 잘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합니다. 방송이 뭡니까? 전문가들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선후배가 함께 협업을 통해 만들어갑니다. 탈산업사회의 경쟁력은 단순무식하게 오래 앉아서 일 많이 하는 것이 최고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생명인 기획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병순 사장에게 그러한 기대는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어설픈 개혁으로 조직문화를 망가뜨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비용효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창의적인 조직문화를 망가뜨린 영국의 교훈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BBC는 1990년대 초반 프로듀서 선택제를 도입하여 사내의 경쟁을 유도하고, 노동유연화를 통해 인력을 감축하고 제작비와 간접제작비를 절감하여 생산성을 제고하겠다는 정책을 펴 처음 3년 동안 인력의 19%에 해당하는 4,600명을 감원하였으며, 이익을 내지 못한 텔레비전 스튜디오와 그래픽 디자인부를 폐쇄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은 실패한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버트 사장이 사람의 중요성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구조조정의 칼날이 BBC를 휩쓸고 간 일터에 남은 것은 즐겁고 우호적인 제작 분위기가 아니라 무표정한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불편한 동거였습니다. 직원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작비 삭감을 무리하게 추진한 결과 프로그램 제작이라는 방송사의 핵심역량이 위축되고, 오히려 관리비용이 증가하는 모순이 발생했습니다. 실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대박이 터지는데, 처음부터 돈줄을 죄니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프로그램의 제작기회가 위축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최근 BBC의 내부시장 제도가 경제적 필요가 아니라 방만 경영에 대한 정치권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한 유화정책이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칙허장 개정을 앞두고 BBC를 민영화하려는 정부의 압력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시장과 효율성을 강조하며 구조조정을 단행했다는 해석입니다. BBC는 정부에 압력에 굴복하여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정규직들이 속속 쫓겨났습니다. 1990년대 10년 동안 BBC는 7,000~10,000개의 정규직 일자리를 없앴습니다. 방송사에서 노동의 비정규직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경영효율화가 정답이 아닙니다. 사기가 떨어진 직원들은 프로그램 제작에 쏟아 부었던 헌신과 열정을 거두어 들였으며, 방관자로 떠돌며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내놓지 않게 되었습니다. 언제 해고될지, 언제 비정규직으로 몰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디어를 사유화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프로그램으로 이어지겠습니까? 버트 사장의 뒤를 이은 다이크 사장은 이러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의 BBC(One BBC)' 정책을 모토로 내세우며 BBC를 일하고 싶은 직장, 선후배가 함께 즐겁게 일하는 직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을 줄이고 정규직을 꾸준히 확대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1990년대 중반 50%를 넘었던 비정규직의 비율이 2001년 35%까지 떨어졌습니다. 영국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수신료프로젝트팀에 있는 관계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수신료 현실화는 정연주 사장의 퇴진을 고리로 걸어 공영방송을 정쟁의 도구로 삼은 한나라당의 정파적 입장 때문에 무산된 것입니다. 이제 정권이 바뀌어 수신료 인상이 곧 될 것처럼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물론 정치권이 인상의 마지막 열쇠를 쥐고 있지만,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정권에 코드를 맞춘 방송으로 수신료를 인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수신료 거부운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시청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시청자들의 바람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권력의 잘못에 대해서는 당당히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KBS라야 국민들이 수신료의 가치에 동의하고 기꺼이 수신료 인상에 동의할 것입니다. 이 점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008. 8. 27 수신료프로젝트팀 김영한 드림.
 

출처: http://cafe.daum.net/nutt/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누구나 겪는 지독한 혼란에 대해 생각하다

불현듯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 생생한 삶의 기쁨, 동시에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의 고통. 누구나 겪는 그런 양극단 감정 사이의 팽팽한 줄타기. 모호한 시작과 끝, 그리고 불안정한 협약. 잠시 잊고 있었다 싶으면 다시 고개를 드는 그런 고민이 시작된다.

 

내 경우 그런 불안정한 협약이 무언가 형태를 갖춘 듯할 때마다 그것을 위협하곤 한 것은 실수, 특히 말실수였던 듯하다. 물론 말실수(Freudian Slip)라는 것은 무의식의 증거이기도 한 만큼, 즉각적인 내 의지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본능-자아-초자아의 삼층도식은 역사적 시간의 삼층도식과 겹쳐지기도 하는 듯하며, 근본적인 변화란 각각의 층위의 변화 주기들이 겹쳐지는 어떤 시점에 일어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사건들로부터 잠시 저만치 떨어져 각각의 시간의 흐름들이 어떤 궤적을 그리고 있는지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튼 사랑은 끊임없는 공부와 성찰을 필요로 하는 듯하다.

 

헤겔은 사랑을 서로에 대한 인정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랑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로 인정하게 된다. 즉 사랑은 '자기 자신이 상대방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은 자유와 구속 간의 불안정한 협약에 기반한다.

 

인간은 자유롭고 싶어하지만, 아무리 자유를 추구해도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스스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부터 채워 가고 싶어하는 듯하다. 그것이 사랑이리라. 하지만 다른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찾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는 측면도 지니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서로가 각자 자신이 추구하던 자유가 구속받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사람은 애초에 혼자서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사랑이 지니는 구속의 측면을 넘어서서 하나가 되기를 추구하는 것일 게다.

 

많은 사람들이 연인 또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라고 여기게 되는 그 순간 그 불안정한 '하나' 속에서 나타나는 구속의 문제들을 그냥 덮어두는 듯하다. 이런 문제는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은 사랑의 변증법이 아니라, 다른 변증법으로 풀어야 할 문제인 듯하다. 인간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엔 틀림이 없지만, 그 어떤 둘도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온전한 하나가 되기를 추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며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찾는 만큼, 상대방을 구속하는 부분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랑은 자유와 구속 간의 불안정한 협약'이라는 언뜻 보면 그럴 듯한 언명조차도 부정하고 넘어서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게 바로 사랑이리라.

 

이렇게 정리해 보아도 그 복잡함과 혼란은 쉽게 가시지 않기 마련이다. 깊은 밤,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아낸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몇몇 구절들을 옮겨 둔다.

 

.....................................................................................................................................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강수영 외 옮김.1999(1990),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새물결.

 

처음에는 단지 '나'와 '당신' 간의 어떤 사소한 불일치일 뿐이던 것이 자꾸만 자꾸만 번져나간다. 사랑에는 언제나 이런저런 긴장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늘 사랑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해왔기 때문에 이런 긴장들을 서로 모순된 두 사회적 역햘간의 충돌로 보지 못하고 각자의 성격이나 실수, 부주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라난 작은 삐그덕거림들은 결국 어떤 성격을 가진, 혹은 어떤 실수를 한 두 '사람' 사이의 직접적 충돌로 비화되고, 마침내 사활을 건 상호비방전으로 비화되거나 혹은 지긋지긋하니 헤어지고야 말겠다는 욕망에까지 이르고 마는 것이다(p.24).

 

어쩌면 단지 사람들이 다른 문제로 눈을 돌리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랑', 온갖 기대와 좌절에 짓눌려 버린 이 '사랑'이야말로 전통이 해체된 이 시대의 새로운 삶의 중심일지도 모른다. ... 사랑이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야말로 현 상황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p.25).

 

우리의 일대기는 점점 외부인들에 의해 쓰여지고 있으며, 우리의 사적인 결정들은 우리 손을 떠나고 있다. 개인적인 선택이나 행동 또는 책략들은 사람들을 특정한 삶의 행로로 안내하는 동시에 사회 속에서 그에 상응하는 위치를 부여한다. 특정한 학교에 들어가기, 시험에 합격 또는 불합격하는 일, 이러저러한 직업을 선택하는 일 등을 그런 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명백히 자유롭고 사적인 의사결정이나 행동 방식조차 정치적 정황이나 공적인 기대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p.87). 그런 공식적 의사결정에 더 많이 의존할수록 개인들의 일대기들은 그만큼 더 위기에 민감하게 된다. ... 여기서도 저기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은 사회적-물질적으로 잊혀져 버리고 만다(p.88).

 

우리가 여성에게 매혹당하는 것은 감정적 따스함, 순진함과 신선함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너무 많이 일하는 남자들보다 우월하다(P.114).

 

요즘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보게 되는 주된 매력은 삶에서의 공동의 목표가 아니라 행복의 전망, '제대로 된' 파트너, 꿈의 연인과 최상의 친구를 합친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꿈이 변하고 생각보다 친구들이 매력적이지 않다면 행복은 저만치 달아나 버린다. 좀더 공식적으로 말하자면, 현대사회에서 각 개인이 차지하는 공간은 가까운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p.181).

 

현대적 조건에서 사랑은 한 번 일어나고 마는 사건이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현대사회가 사랑에 부과하는 온갖 불안감들과 좌절들에 맞서 매일 새롭게 싸워 쟁취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하려면 인내와 관대함이 필요하다. 그런 관계는 끈질긴 협상을 필요로 하는데 ...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참가자들은 서로의 약점과 출입금지 영역에 도통하게 된다(p.182).

 

현대적 삶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논리는 외톨이를 전제하고 있다. 시장경제는 가족, 부모되기, 파트너 관계에 대한 욕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사적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노동시장이 아주 유연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시장을 앞세워 가정파탄을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삶을 혼자서 꾸려나가는 데는 몇 가지 원초적인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반드시 예방책을 세워야 한다. ... 우정의 망을 만들고 보호해야 한다(p.252).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소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직업과 자부심 그리고 사회적 지원을 갖고 있어야 하며, 따라서 이것들 또한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 ...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일수록 이것이 모든 가까운 파트너 관계에 대해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될 위험도 더 커지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아무리 열렬히 갈망하더라도 말이다. 외톨이 삶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서 사랑받고 싶은 깊은 갈망을 불러일으키지만 이와 동시에 이 누군가를 진정한 '나만'의 삶 속에 통합하는 것을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외톨이 삶은 타인이 부재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녀에게 남겨진 공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고독감을 피하는 것을 중심으로 계획되어야 한다. ... 독신자가 영위하는 이런 삶의 형태는 사회적 변화의 기묘한 부수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시장경제가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의 원형이다(p.253).

 

.....................................................................................................................................

 

 

저자들은 사랑에 대한 다면적인 탐색을 마무리하며 ‘사랑의 불가피한 전쟁’을 둘러싼 조건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상이한 배경을 가진 커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아주 다른 두 가지 일대기의 원심력을 중지시킬 수 있는 공동의 지반을 찾아내고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관련된 두 남녀의 손에 달려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커플들은 상대방의 노동상황을 거의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므로,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공유된 체험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셋째, 국가와 교회는 결혼과 가까운 관계에서 입법자 역할로부터 후퇴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랑이 친밀성을 철저하게 자기관리 하에 두려고 할 때 나타나는 고유한 갈등의 잠재력이 터져나올 여지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넷째, 개인화, 즉 개인적 훈련, 승진, 그리고 노동시장과 비개인접 법규에 충실하게 되는 것은, 사랑이 외로움에 대한 최상의 해답이며 의미있고 만족스러운 육체적-감정적 체험을 약속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p.335).

 

이들은 나아가 사랑을 둘러싼 세 가지 역설을 보여주는데, 이 과정에서 던져지는 물음들은 누구나 공감할, 그러나 그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마도 그런 물음들을 한켠에 치워두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중요할 듯싶다.

 

세 가지 역설 중 첫 번째는 자유의 역설이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자제해 주기를 욕망한다(p.336). 사르트르에 따르면,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노예화를 욕망하지 않는다. ... 사랑하는 사람의 완전한 노예화는 사랑을 주는 사람의 사랑을 죽인다. ... 따라서 사랑을 주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물건처럼 소유하기를 욕망하지 않는다. ... 그는 자유를 자유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사람은 자유롭고 자발적인 서약인 저 우월한 형태의 자유에 만족할 수 없다."(p.337)

 

둘째로 진정성의 역설이 존재한다. 사랑은 모든 것에 대해 일인칭 단수이다. ... 이것은 원리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모두 진정성을 전제한다. 정직함은 무엇을 뜻하며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 정직함은 그럼에도 계속 의심받을 때 시작되는 자유낙하를 어떻게 멈추는가? 어떤 감정에 대한 나의 태도는 감정 그 자체만큼 확실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저자들은 니클라스 루만의 견해를 빌려 사랑을 함에 있어 우리는 정직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살아가며 사랑하는 과정에서 정직함과 부정직함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 이에 대해 뭔가 다른 처방을 내리려는 시도는 정직함에 대한 부정적한 이해에 기초한 사랑 개념에 따른 것이다(p.338). 아, 이건 정말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믿고 싶다. 정직함이 사랑을 부정할지라도, 정직함 없이 사랑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끝으로 행위의 역설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온갖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아마 바로 그것 때문에 정녕 아무도 자신이 느끼는 것을 전달할 수 없다(p.340). 어떤 메시지가 발신자로부터 수신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는 원래의 메시지가 불투명해질 정도로 수많은 잡음이 틈입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로가 공유하는 ‘흔적’의 면적을 넓혀 가는 수밖에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치적 (무)관심과 안타까움 사이에서

선거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은 지 오래건만, 그래도 제도정치라는 게 워낙 규정력이 큰 것이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선거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상황들을 볼작시면 역시나 하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민주노동당의 반MB연합, 민주노총의 통합압박과 (경기도본의) 민주당과의 정책협약, 심상정 후보의 사퇴 등은 진보정당운동의 제살 깎아먹기가 이제 한계에 이르렀구나 하는 생각을 자아낸다. 이렇게 되면 교육감 선거가 잘 풀린다 하더라도 그 성과는 절반에 못 미칠 것이다.

 

교육감 선거에 비해 후보의 성향이 잘 드러나지 않는 교육위원 선거의 경우, 내가 사는 지역만 해도 모든 후보가 무상급식을 내걸고 있는데, 사실 그중 두 명은 꼭 1년 전 무상급식 예산삭감에 동참했던 이들이었다. 어쨌든 교육위원, 교육감을 위시해 많은 자치단체장 후보들, 특히 민주당 후보들이 명목상으로나마 무상급식을 내세우는 것은 진보정당운동이 행사했던 '영향력'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도 진보정당들이 반이명박 연대라는 정치공학적 명분에 휘말려 야권연대에 동참하는 일은 '영향력의 정치'를 포기하고 '쪽수의 정치'를 택하는 꼴이다. 대선이나 총선이 아닌 지방선거에서 이런 선택은 단기적으로는 물론 장기적으로도 진보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후보가 "국민들은 선거 자체를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야권의 후보 단일화가 자신의 지지율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아주 묘한 자신감의 표현이지만, 이 말에는 뭔가 생각해볼 구석이 있다. 지방선거의 열기가 이렇게 후끈 달아올랐던 적은 거의 처음인 듯한데, 이는 이명박 정부 2년여를 거치면서 그만큼 지역사회의 정치사회적 장으로서의 중요성이 커졌음을 말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사회의 '중앙'에 해당하는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선거가 중요한 까닭은 '지방'의 지역정치 판도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간 '지방'에서 지방선거는 알만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해먹는 자리쯤 되어 왔다. 그런데 이번엔 온갖 자리를 두고 수많은 후보들이 출마한다. 매우 고정적인 투표성향을 지닌 지역주민들의 경우에도 좀더 신중한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수도권에서부터 야권연대니 진보정당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런데 진보정당까지도 반이명박 연대라는 이름 아래 야권 후보로 속속들이 단일화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내가 시골에 계신 내 아버지라 해도, '뭐 역시 그놈이 그놈이구만' 하고 투표를 둘러싼 숙고를 멈춰버릴 것만 같다. 왕당파가 군림하는 상황도 아닌데, 레드셔츠와 옐로셔츠가 격돌하는 상황으로 정국을 바라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시 민주노동당의 반MB연합, 민주노총의 행보 ... 그리고 안타까운 심상정 후보 사퇴라는 상황으로 돌아와서, 이것이 진보정당운동의 제살 깎아먹기인 이유는, 그것이 애초에 민주노총과 양대 진보정당을 탄생시킨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움직임과 거리가 먼 것은 물론,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젊은 세대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동할 리 있겠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요 몇년 간 선거 때마다 추호도 투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선거는 꼰대들의 잔치라는, 다소간 무정부주의적이며 치기어린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투표라는 행위는 어쨌건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의 선택이다. 내가 원하는 무엇이 선택지 안에 들어있다면 망설임 없이 투표할 것이다. 혹자는 그 선택지 안에 내가 원하는 무엇을 집어넣기 위한 활동이 바로 운동이며 정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지금으로서는 ... 나는 그것만이 운동이며 정치인 것은 아니며, 그런 운동과 정치가 지금까지 세상을 변화시켜 온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는, 어느 정도는 뻔한 답변밖에 할 수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소통에의 의지와 개인의 자율성

가끔씩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내가 무언가 말하려는 것 자체가 턱 하고 가로막힐 때가 있다. 이럴 땐 정말인지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당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그런 것일까?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의 표현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타자의 자율성을 침해하기도 하는가?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닫힌 채 반복되는 이야기이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이든 간에 말이다. 그리고 타인과의 소통에 있어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러한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말과 행위야말로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육체는 시간의 흐름 속에 죽어 없어질망정 이야기는 떠돌고 살을 붙이거나 변형되며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더구나 이야기는 그것을 들어줄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한 성립되지 않는다. 결국 소통에의 의지는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하는 의지이며, 누군가와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런데 간혹 누군가와 어떤 과거를 회고하면서, 그 시점에 고착되지 않으려 애쓰며 그것을 계기로 삼아 현재의 소통을 진전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종종 실패를 겪는다. 이는 과거에 대한 기억 자체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소통의 의지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의 소통의 의지는 과거 자체를 변형한다. 과거의 어떤 시점이라는 것은 수많은 이야기들의 교차점일 수밖에 없다. 미래서사 또한 현재의 서사와는 달리 특정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뻗어나간다는 점에서 과거를 포함한다. 현재의 서사가 아닌 그 모든 이야기에 있어서, 그에 대한 배타적인 전유는 단 하나의 서사만을 남기고 다른 이야기를 모두 지워버리거나, 그 모든 이야기에 있어 유일한 저자만을 내세우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소통의 의지가 아니라 지배의 의지이다.

 

다짐하건대 "모든 사람들이 행위와 말을 통해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시작할지라도 ... 어느 누구도 이야기의 주인공일 수는 있지만 이야기의 저자일 수는 없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아니 되겠다. 과거는 위험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복권 한 번 산 게 겁나게 찔리네

 

 

Sleep Now in the Fire ...

 

마이클 무어 아저씨, 잭 델라로차와 월스트리트에서 만나던 날. ... 1999년 발매된 RATM의 앨범 The Battle of L.A.에 실린 곡인데, 2000년에 싱글커트되면서 마이클 무어가 감독을 맡아 만든 뮤직비디오다. 중간중간 계속 나오는 일확천금 퀴즈 프로그램이랑 '잭팟' 이미지를 보고 있자니, 아아 ... 잭은 턱시도까지 입고 나온다. 아아 ... 양복에 주눅들지 말지어라는 메시지가 이리도 강력할 수가. 가사 중 "cost of my desire"라는 말이 계속 귀에 팍팍 꽂힌다.

 

탐 모렐로는 올해 초 한국 콜텍 노동자들의 미국 원정투쟁 때 자작곡을 들려주던 후덕한 모습에 비해 훨씬 날카로운 인상이다. 1994년 앨범 Evil Empire에서 들려주었던, 신기에 가까운 "와우와우 치키치키"의 통통 튀는 상상력과 재능은 여기서도 "삐뽀삐뽀 위이잉~~"을 들려준다. 언제나 카메라 들이밀고는 찬밥신세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마이클 무어. 신작 <자본주의: 러브스토리>는 국내 개봉되기는 하는 걸까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복권에 당첨된 꼰대들과 로보캅

부끄럽게도 지난 주 난생 처음 복권이라는 걸 사 보았다. 늦은 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다가 전자레인지 위에 붙은 나눔로또 포스터를 보고서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계산대로 걸어갔더랬다. 뭐 당연히도 복권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지만, 근 일주일간 그 사실 자체를 잊고 있다가 문득 섬뜩함이 밀려왔다.

 

어떻게든 일주일에 한두 시간 내어서 꼭 해야지 하는 일들 중 아무 것도 안 하고 음악만 듣는 것이 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잠시 1990년대로 돌아갔다. 걸프전쟁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시작된 1991년에 처음 Nirvana의 와 Pearl Jam의 을 접했으니 이제 꼭 20년째 듣고 있는 셈인데, 1993년에 발매된 Pearl Jam의 <Vs.>를 듣던 중 '태어나는 순간 복권에 당첨된 거야'라는 가사를 듣고는 갑자기 동공이 확장됐다.

 

노래의 제목은 "W.M.A." ... 백인 남성 미국인(White Male American)인 자기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복권에 당첨된 거나 마찬가지이며, 그것이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의 어두운 그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1992년 11월 디트로이트에서 경찰관의 폭력으로 사망한 맬리스 그린(Malice Green)이라는 청년과 더불어. ... 이전 같으면 이럴 때 보통 '에잇 몹쓸 인종차별, 몹쓸 백인 경찰놈들' ... 하고 씩씩거렸을 터인데, 몇 곡 더 듣다보니 귀에 들어오는 노래는 제목부터 "카운터 너머의 나이든 여자"다. 밑바닥 서비스 여성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그리는 그 노래를 듣다 보니 나도 어떤 면에서는 나면서부터 복권에 당첨된 놈인데 ... 신세를 한탄하며 복권을 사고 당첨번호 발표를 기다리는 그런 삶은 살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그런 노래들의 가사를 쓴 Eddi Vedder는 더군다나 캘리포니아 토박이다. 이제 갓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을 시점에 LA에선 로드니 킹 구타사건을 발단으로 한 폭동이 일어났고, 불과 몇 개월 뒤에는 디트로이트에서 또 흑인 청년이 경찰에게 두들겨맞아 사망하였으니 충격이 컸으리라. 그것도 무려 디트로이트다.

 

자동차산업이 주저앉고 나서 폐허가 된 도시 ...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 성실한 경찰관 머피를 쏴죽이는 범죄자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도시가 무능한 경찰 대신 전문 경비업체가 치안을 떠맡아 평화를 되찾는다는(그저 재미를 위한 약간의 반전은 숨어있지만) 플롯의 영화 <로보캅>의 바로 그 디트로이트에서(공교롭게도 현재 촬영중에 있고 올해 아니면 내년에 개봉될 예정이라는 <로보캅>은 LA를 배경으로 한다는 소문이 있다.) 사실은 경찰이 청년을 때려죽이고 있었다. 전자가 백인이고 후자가 흑인일 때 말이다.

 

골칫덩이 범죄자들 vs. 평화를 지키는 경찰 / 저항하려 하지도 않은 무고한 흑인 vs. 편견에 사로잡혀 폭력을 휘두르는 백인 / 차분하게 집안살림과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여성 vs. 더러운 도시를 때려부수며 폭동을 일으키는 남성 ... 무수한 대립의 씨줄과 날줄을 교차시키다 보면 '그림'은 나오기 마련이다.

 

선거를 앞둔 묘한 시점에 천안함 사건을 두고 한편에서는 RDX라든지 CHT-02D라든지 하는 대단치도 않은 기술적 용어들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전사니 영웅이니 하는 전쟁서사 용어들이 떠돌고 있다. (1번과 4호는 고도로 추상적인 과학적 용어라서 차마 이야기를 못 꺼내겠다.) 아뭏든 노땅 꼰대들이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은 선거상황판이라는 스크린 위에 <로보캅>의 서사를 따라 상영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 로보캅은 산자와 죽은자 사이에서 탄생했더랬다. 더구나 로보캅은 성실하게도 메모리를 백업하는 도중 자신을 둘러싼 음모를 알게 되고는 꼰대들을 응징했더랬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일할 곳도, 소비할 곳도, 살 곳도 없다

간만에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제목부터 조금은 도발적인 <방, 있어요?>라는 짧은 다큐멘터리가 그것이다. 사실 제목만 보고서는 한때 일각에서 제기되었던 ‘우리에게 사랑할 권리를 허하라’ 식의 문제를 제기(물론 이런 문제제기도 단순히 ‘자기만의 방도 없고, 여관비도 너무 비싸다’는 식으로 요약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로 중요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하는 영화인가 싶었는데, 소개된 시놉시스와 연출의도를 보니 ‘청년세대의 주거권’에 방점이 찍힌 듯하다. 예컨대 “20대인 우리가 ‘내 방이다’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은 없다”라든가, “20대의 현재는 답답하고 기형적인 ‘방’에 갇혀” 있다든가 하는 언급이 눈에 띤다.


풍부한 상상력과 감수성을 지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 20대의 불안함조차 지긋지긋해져 갈 터인 30대 초반의 ... 나의 한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김애란 소설을 읽기 힘든 까닭은 그녀 글의 주인공들이 달랑 방 한 칸에 살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길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인데도 사뭇 낯선 이 동네에는 혼자 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주위의 편의점들은 흔히 보는 것과는 달리 편의점 본연의 기능(백화점)에 충실하다고 한다. 매장이 독거인들을 위한 물품으로 가득 차 있으며 도시락 판매에 관한 광고를 적은 천이 걸려 있었다.”
 

왜 ‘집’이 아닌 ‘방’이란 말인가. 이러한 구분은 공간은 물론 장소의 측면에서도 눈여겨 볼 만하다. ‘집’이란 표상이 돌아갈 곳, 가족관계, 안정감 등과 관계된다면, ‘방’은 거쳐 가는 곳, 개인, 불안정함 등과 관계된다. 집이 아닌 방에 사는 사람들이 늦은 저녁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와 이제는 그 어느 방에서도 조금만 걸어가면 닿을 곳에 있는 편의점에서 이름 없이 마주친다.

 

물론 각종 독신자용 용품들이 기다리고 있는 편의점이 애초부터 작은 백화점 기능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이전부터 들었던 생각인데, 한국에서 24시간 편의점이 생겨나기 시작한 1990년대 초중반은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신경영전략’이 도입되기 시작했던 때이며, 이 편의점들은 유연적-장시간 노동체제의 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들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주거와 일상생활의 공간은 노동의 공간인 작업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실 노동-소비-주거를 연결짓는 이러한 문제제기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사회공간적 측면에서 공간의 차원은 크게 세계(지구)-국민국가-지역 및 도시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세계(지구)-국민국가 차원에서는 자본과 군사력의 이동, 노동의 공간적 분업 등에 초점을 맞춘 논의들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다음으로 도시공간의 측면에서는 작업장, 소비공간, 주거공간의 배치에서 건축양식에 이르는 주제들이 다루어져 왔다. 이에 더해 보다 미시적인 측면에서는 공간적 재현, 공간과 주체형성의 문제 등이 논의되어 왔다. 공장-학교-병원은 규율화라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공간설계(판옵티콘) 측면에서 유사하다는 푸코의 논의는 물론, 도시 소비공간에는 지불능력에 따라 개인들을 걸러내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는 논의도 있었다.
 

이러한 논의들에 근거해 볼 때, 내 방이 없다거나 그나마 있는 방도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목소리가 20대들로부터 터져나오는 배경에 청년실업과 고용불안, 이에 더해 극한적인 경쟁압박이 놓여 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청년실업으로 노동할 장소가 없고, 돈이 없어 소비할 장소가 없고, 독립해서 살 집은 엄두도 안 난다. 잔뜩 주눅들어 친구들 만나기도 싫고 답답한 방구석에 틀어박히면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 인터넷이다. 더구나 인터넷 공간은 ‘공간의 자동생산’이라 할 정도로 끝없이 확장되고 있다. 그런데 네트워크로부터마저 단절되면 정말인지 갈 곳이 없다. 
 

젊은 세대의 ‘불안’과 공간의 부재 또는 공간의 답답함을 연결지어 보려는 시도가 한발 더 나아가야 할 지점들은 이처럼 다방면이지만, 일단은 젊은 세대들이 ‘방’을 둘러싸고 어떤 이야기들을 내놓을지 궁금해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내친 김에 사자의 사나움에 대하여

카네시로의 소설을 읽다가 ... 뒷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구절 ...

 

 

金城一紀. 2000, , 講談社(국역: 金城一紀, 김난주 옮김. 2000, , 현대문학북스). 中

 

"상관없어. 너희들이 나를 자이니치라고 부르든 말든. 부르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불러. 너희들, 내가 무섭지? 어떻게든 분류를 하고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지? 하지만 나는 인정 못 해. 나는 말이지, '사자'하고 비슷해. 사자는 자기를 사자라고 생각하지 않지. 너희들이 멋대로 이름을 붙여놓고 사자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다고 흥에 겨워서 이름을 불러가며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 봐. 너희들의 경동맥에 달겨들어 콱 깨물어 죽일테니까. 알아? 너희들이 우리를 자이니치라고 부르는 한, 언제든 물려죽어야 하는 쪽이라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소시민 허위의식과 사자의 변증법

ou_topia님의 [니콜라이 고골의 "코". 소시민 허위의식를 다룬 괴기화] 에 관련된 글.

 

김예슬의 대자보에서 내가 그녀의 ‘소심함’에 주목했던 것은 그녀의 글을 ‘이제는 자본에 포섭된 대학이라는 공간을 거부하고 진정한 大학생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선언’이라는 이야기로 구성하는 식의 논의들이 정말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무엇이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계에 공모해왔다는 사실을 ‘소심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보라는 ‘대의’ 앞에 그러한 공모쯤은 ‘대심’하게 덮어두고 우리가 싸워야 할 진정한 적에게 눈을 돌리자는 말들이 얼마나 그 진보의 앞길을 막아왔는지는 두고두고 파헤치고 논쟁할 일일 것이다.

 

확실히 고골이 보여주고 싶었던 절망은 자신이 기대어 왔던 권위의 소실에 따른 주인공 코발로프의 절망일지도 모른다. 고골이 살았던 시대나 그의 다른 작품들을 고려해 보면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소시민의 ‘허위의식’보다는 관료들의 부패상과 그것이 낳는 그로테스크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고골의 소설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가 그 시대에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가에 주목하자는 뜻에서가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웃음’은 코발로프가 자신의 코가 ‘원래 있어야 할 곳’에서 떨어져 나와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다는 설정에 기인한다. 그것이 코가 되었든, 입이든, 귀든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 온 인간의 신체의 일부분들이라는 것은 붙었다 떨어졌다 하기도 하는 것이구나 하면 되지 싶다.

 

요컨대 소시민, 혹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소시민이라는 것은 상상의 산물이다.

 

이른바 ‘사자의 변증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사자가 무서운 동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실제로 사자와 만난다면, 그러한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것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그밖에도 사자에 관한 이야기들이 출현하여 사자를 다루는 방법을 설명하고, 그것이 실제로 사자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을 계기로 사자의 사나움과 그 사나움의 원인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사자에 관한 이야기들의 초점이 사자 그 자신이 아니라 사자의 사나움이라는 주제로 모아짐에 따라 사나운 사자를 다루는 방법이 실제로는 사자를 더욱 사납게 만들고, 사자를 반드시 사나워야 하는 것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사나움은 실제로 사자의 성질이며, 그것이 사자에 관해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의 본질이고, 또는 알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성당에서의 코발로프의 절망

ou_topia님의 [김예슬님 마음으로 피리불지 말자] 에 관련된 글.

 

내가 나 자신이 아니라는 인식이 우울의 시작점이라면, 이제 나 자신이 아닌 그것이 본디 나에게 속하는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편이 사는 데 힘이 되지 않을까. 내 얼굴을 떠난 코는 이미 내가 아닌 그 자신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는 데 다른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듯, 이미 나를 떠나 물질화된 무엇이 그 자신을 말하는 데 있어서 원래 속하는 곳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듯싶다.

 

.............................................................................................................

 

코발로프는 마음 속으로 용기를 쥐어 짜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보세요 ......"

 

코는 돌아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코발로프)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여보세요. ... 아무래도 ... 당신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심결에 당신을 보았는데요. 어디선가 하면 이 성당에서지요. 인정하시겠지요."

 

... ...

 

(코)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군요."

 

코발로프는 위엄을 나타내며 말하였다.

"당신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 이번 일은 모두가 명명백백하니까요. ... 그래도 분명히 말해 달라고 한다면 ... 당신은 나의 코가 아닙니까?"

 

코는 소령을 바라보고 다소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 보신 것 같군요. 여보세요. 나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들 사이에는 어떤 밀접한 관계도 있을 수 없어요. ..."

 

이렇게 말하고 코는 돌아서서 다시 기도를 계속하였다.

코발로프는 완전히 머리가 혼란해져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를 몰랐다.

 

... ...

 

이 사태는 코발로프를 절망 속에 빠뜨렸다. ...

 

 

- 니콜라이 고골(N. Gogol')의 <코> 中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