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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에 당첨된 꼰대들과 로보캅

부끄럽게도 지난 주 난생 처음 복권이라는 걸 사 보았다. 늦은 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다가 전자레인지 위에 붙은 나눔로또 포스터를 보고서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계산대로 걸어갔더랬다. 뭐 당연히도 복권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지만, 근 일주일간 그 사실 자체를 잊고 있다가 문득 섬뜩함이 밀려왔다.

 

어떻게든 일주일에 한두 시간 내어서 꼭 해야지 하는 일들 중 아무 것도 안 하고 음악만 듣는 것이 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잠시 1990년대로 돌아갔다. 걸프전쟁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시작된 1991년에 처음 Nirvana의 와 Pearl Jam의 을 접했으니 이제 꼭 20년째 듣고 있는 셈인데, 1993년에 발매된 Pearl Jam의 <Vs.>를 듣던 중 '태어나는 순간 복권에 당첨된 거야'라는 가사를 듣고는 갑자기 동공이 확장됐다.

 

노래의 제목은 "W.M.A." ... 백인 남성 미국인(White Male American)인 자기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복권에 당첨된 거나 마찬가지이며, 그것이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의 어두운 그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1992년 11월 디트로이트에서 경찰관의 폭력으로 사망한 맬리스 그린(Malice Green)이라는 청년과 더불어. ... 이전 같으면 이럴 때 보통 '에잇 몹쓸 인종차별, 몹쓸 백인 경찰놈들' ... 하고 씩씩거렸을 터인데, 몇 곡 더 듣다보니 귀에 들어오는 노래는 제목부터 "카운터 너머의 나이든 여자"다. 밑바닥 서비스 여성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그리는 그 노래를 듣다 보니 나도 어떤 면에서는 나면서부터 복권에 당첨된 놈인데 ... 신세를 한탄하며 복권을 사고 당첨번호 발표를 기다리는 그런 삶은 살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그런 노래들의 가사를 쓴 Eddi Vedder는 더군다나 캘리포니아 토박이다. 이제 갓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을 시점에 LA에선 로드니 킹 구타사건을 발단으로 한 폭동이 일어났고, 불과 몇 개월 뒤에는 디트로이트에서 또 흑인 청년이 경찰에게 두들겨맞아 사망하였으니 충격이 컸으리라. 그것도 무려 디트로이트다.

 

자동차산업이 주저앉고 나서 폐허가 된 도시 ...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 성실한 경찰관 머피를 쏴죽이는 범죄자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도시가 무능한 경찰 대신 전문 경비업체가 치안을 떠맡아 평화를 되찾는다는(그저 재미를 위한 약간의 반전은 숨어있지만) 플롯의 영화 <로보캅>의 바로 그 디트로이트에서(공교롭게도 현재 촬영중에 있고 올해 아니면 내년에 개봉될 예정이라는 <로보캅>은 LA를 배경으로 한다는 소문이 있다.) 사실은 경찰이 청년을 때려죽이고 있었다. 전자가 백인이고 후자가 흑인일 때 말이다.

 

골칫덩이 범죄자들 vs. 평화를 지키는 경찰 / 저항하려 하지도 않은 무고한 흑인 vs. 편견에 사로잡혀 폭력을 휘두르는 백인 / 차분하게 집안살림과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여성 vs. 더러운 도시를 때려부수며 폭동을 일으키는 남성 ... 무수한 대립의 씨줄과 날줄을 교차시키다 보면 '그림'은 나오기 마련이다.

 

선거를 앞둔 묘한 시점에 천안함 사건을 두고 한편에서는 RDX라든지 CHT-02D라든지 하는 대단치도 않은 기술적 용어들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전사니 영웅이니 하는 전쟁서사 용어들이 떠돌고 있다. (1번과 4호는 고도로 추상적인 과학적 용어라서 차마 이야기를 못 꺼내겠다.) 아뭏든 노땅 꼰대들이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은 선거상황판이라는 스크린 위에 <로보캅>의 서사를 따라 상영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 로보캅은 산자와 죽은자 사이에서 탄생했더랬다. 더구나 로보캅은 성실하게도 메모리를 백업하는 도중 자신을 둘러싼 음모를 알게 되고는 꼰대들을 응징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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