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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겪는 지독한 혼란에 대해 생각하다

불현듯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 생생한 삶의 기쁨, 동시에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의 고통. 누구나 겪는 그런 양극단 감정 사이의 팽팽한 줄타기. 모호한 시작과 끝, 그리고 불안정한 협약. 잠시 잊고 있었다 싶으면 다시 고개를 드는 그런 고민이 시작된다.

 

내 경우 그런 불안정한 협약이 무언가 형태를 갖춘 듯할 때마다 그것을 위협하곤 한 것은 실수, 특히 말실수였던 듯하다. 물론 말실수(Freudian Slip)라는 것은 무의식의 증거이기도 한 만큼, 즉각적인 내 의지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본능-자아-초자아의 삼층도식은 역사적 시간의 삼층도식과 겹쳐지기도 하는 듯하며, 근본적인 변화란 각각의 층위의 변화 주기들이 겹쳐지는 어떤 시점에 일어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사건들로부터 잠시 저만치 떨어져 각각의 시간의 흐름들이 어떤 궤적을 그리고 있는지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튼 사랑은 끊임없는 공부와 성찰을 필요로 하는 듯하다.

 

헤겔은 사랑을 서로에 대한 인정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랑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로 인정하게 된다. 즉 사랑은 '자기 자신이 상대방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은 자유와 구속 간의 불안정한 협약에 기반한다.

 

인간은 자유롭고 싶어하지만, 아무리 자유를 추구해도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스스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부터 채워 가고 싶어하는 듯하다. 그것이 사랑이리라. 하지만 다른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찾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는 측면도 지니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서로가 각자 자신이 추구하던 자유가 구속받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사람은 애초에 혼자서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사랑이 지니는 구속의 측면을 넘어서서 하나가 되기를 추구하는 것일 게다.

 

많은 사람들이 연인 또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라고 여기게 되는 그 순간 그 불안정한 '하나' 속에서 나타나는 구속의 문제들을 그냥 덮어두는 듯하다. 이런 문제는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은 사랑의 변증법이 아니라, 다른 변증법으로 풀어야 할 문제인 듯하다. 인간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엔 틀림이 없지만, 그 어떤 둘도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온전한 하나가 되기를 추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며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찾는 만큼, 상대방을 구속하는 부분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랑은 자유와 구속 간의 불안정한 협약'이라는 언뜻 보면 그럴 듯한 언명조차도 부정하고 넘어서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게 바로 사랑이리라.

 

이렇게 정리해 보아도 그 복잡함과 혼란은 쉽게 가시지 않기 마련이다. 깊은 밤,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아낸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몇몇 구절들을 옮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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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강수영 외 옮김.1999(1990),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새물결.

 

처음에는 단지 '나'와 '당신' 간의 어떤 사소한 불일치일 뿐이던 것이 자꾸만 자꾸만 번져나간다. 사랑에는 언제나 이런저런 긴장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늘 사랑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해왔기 때문에 이런 긴장들을 서로 모순된 두 사회적 역햘간의 충돌로 보지 못하고 각자의 성격이나 실수, 부주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라난 작은 삐그덕거림들은 결국 어떤 성격을 가진, 혹은 어떤 실수를 한 두 '사람' 사이의 직접적 충돌로 비화되고, 마침내 사활을 건 상호비방전으로 비화되거나 혹은 지긋지긋하니 헤어지고야 말겠다는 욕망에까지 이르고 마는 것이다(p.24).

 

어쩌면 단지 사람들이 다른 문제로 눈을 돌리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랑', 온갖 기대와 좌절에 짓눌려 버린 이 '사랑'이야말로 전통이 해체된 이 시대의 새로운 삶의 중심일지도 모른다. ... 사랑이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야말로 현 상황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p.25).

 

우리의 일대기는 점점 외부인들에 의해 쓰여지고 있으며, 우리의 사적인 결정들은 우리 손을 떠나고 있다. 개인적인 선택이나 행동 또는 책략들은 사람들을 특정한 삶의 행로로 안내하는 동시에 사회 속에서 그에 상응하는 위치를 부여한다. 특정한 학교에 들어가기, 시험에 합격 또는 불합격하는 일, 이러저러한 직업을 선택하는 일 등을 그런 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명백히 자유롭고 사적인 의사결정이나 행동 방식조차 정치적 정황이나 공적인 기대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p.87). 그런 공식적 의사결정에 더 많이 의존할수록 개인들의 일대기들은 그만큼 더 위기에 민감하게 된다. ... 여기서도 저기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은 사회적-물질적으로 잊혀져 버리고 만다(p.88).

 

우리가 여성에게 매혹당하는 것은 감정적 따스함, 순진함과 신선함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너무 많이 일하는 남자들보다 우월하다(P.114).

 

요즘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보게 되는 주된 매력은 삶에서의 공동의 목표가 아니라 행복의 전망, '제대로 된' 파트너, 꿈의 연인과 최상의 친구를 합친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꿈이 변하고 생각보다 친구들이 매력적이지 않다면 행복은 저만치 달아나 버린다. 좀더 공식적으로 말하자면, 현대사회에서 각 개인이 차지하는 공간은 가까운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p.181).

 

현대적 조건에서 사랑은 한 번 일어나고 마는 사건이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현대사회가 사랑에 부과하는 온갖 불안감들과 좌절들에 맞서 매일 새롭게 싸워 쟁취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하려면 인내와 관대함이 필요하다. 그런 관계는 끈질긴 협상을 필요로 하는데 ...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참가자들은 서로의 약점과 출입금지 영역에 도통하게 된다(p.182).

 

현대적 삶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논리는 외톨이를 전제하고 있다. 시장경제는 가족, 부모되기, 파트너 관계에 대한 욕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사적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노동시장이 아주 유연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시장을 앞세워 가정파탄을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삶을 혼자서 꾸려나가는 데는 몇 가지 원초적인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반드시 예방책을 세워야 한다. ... 우정의 망을 만들고 보호해야 한다(p.252).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소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직업과 자부심 그리고 사회적 지원을 갖고 있어야 하며, 따라서 이것들 또한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 ...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일수록 이것이 모든 가까운 파트너 관계에 대해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될 위험도 더 커지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아무리 열렬히 갈망하더라도 말이다. 외톨이 삶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서 사랑받고 싶은 깊은 갈망을 불러일으키지만 이와 동시에 이 누군가를 진정한 '나만'의 삶 속에 통합하는 것을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외톨이 삶은 타인이 부재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녀에게 남겨진 공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고독감을 피하는 것을 중심으로 계획되어야 한다. ... 독신자가 영위하는 이런 삶의 형태는 사회적 변화의 기묘한 부수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시장경제가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의 원형이다(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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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사랑에 대한 다면적인 탐색을 마무리하며 ‘사랑의 불가피한 전쟁’을 둘러싼 조건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상이한 배경을 가진 커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아주 다른 두 가지 일대기의 원심력을 중지시킬 수 있는 공동의 지반을 찾아내고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관련된 두 남녀의 손에 달려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커플들은 상대방의 노동상황을 거의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므로,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공유된 체험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셋째, 국가와 교회는 결혼과 가까운 관계에서 입법자 역할로부터 후퇴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랑이 친밀성을 철저하게 자기관리 하에 두려고 할 때 나타나는 고유한 갈등의 잠재력이 터져나올 여지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넷째, 개인화, 즉 개인적 훈련, 승진, 그리고 노동시장과 비개인접 법규에 충실하게 되는 것은, 사랑이 외로움에 대한 최상의 해답이며 의미있고 만족스러운 육체적-감정적 체험을 약속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p.335).

 

이들은 나아가 사랑을 둘러싼 세 가지 역설을 보여주는데, 이 과정에서 던져지는 물음들은 누구나 공감할, 그러나 그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마도 그런 물음들을 한켠에 치워두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중요할 듯싶다.

 

세 가지 역설 중 첫 번째는 자유의 역설이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자제해 주기를 욕망한다(p.336). 사르트르에 따르면,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노예화를 욕망하지 않는다. ... 사랑하는 사람의 완전한 노예화는 사랑을 주는 사람의 사랑을 죽인다. ... 따라서 사랑을 주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물건처럼 소유하기를 욕망하지 않는다. ... 그는 자유를 자유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사람은 자유롭고 자발적인 서약인 저 우월한 형태의 자유에 만족할 수 없다."(p.337)

 

둘째로 진정성의 역설이 존재한다. 사랑은 모든 것에 대해 일인칭 단수이다. ... 이것은 원리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모두 진정성을 전제한다. 정직함은 무엇을 뜻하며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 정직함은 그럼에도 계속 의심받을 때 시작되는 자유낙하를 어떻게 멈추는가? 어떤 감정에 대한 나의 태도는 감정 그 자체만큼 확실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저자들은 니클라스 루만의 견해를 빌려 사랑을 함에 있어 우리는 정직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살아가며 사랑하는 과정에서 정직함과 부정직함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 이에 대해 뭔가 다른 처방을 내리려는 시도는 정직함에 대한 부정적한 이해에 기초한 사랑 개념에 따른 것이다(p.338). 아, 이건 정말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믿고 싶다. 정직함이 사랑을 부정할지라도, 정직함 없이 사랑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끝으로 행위의 역설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온갖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아마 바로 그것 때문에 정녕 아무도 자신이 느끼는 것을 전달할 수 없다(p.340). 어떤 메시지가 발신자로부터 수신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는 원래의 메시지가 불투명해질 정도로 수많은 잡음이 틈입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로가 공유하는 ‘흔적’의 면적을 넓혀 가는 수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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