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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에의 의지와 개인의 자율성

가끔씩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내가 무언가 말하려는 것 자체가 턱 하고 가로막힐 때가 있다. 이럴 땐 정말인지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당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그런 것일까?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의 표현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타자의 자율성을 침해하기도 하는가?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닫힌 채 반복되는 이야기이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이든 간에 말이다. 그리고 타인과의 소통에 있어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러한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말과 행위야말로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육체는 시간의 흐름 속에 죽어 없어질망정 이야기는 떠돌고 살을 붙이거나 변형되며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더구나 이야기는 그것을 들어줄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한 성립되지 않는다. 결국 소통에의 의지는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하는 의지이며, 누군가와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런데 간혹 누군가와 어떤 과거를 회고하면서, 그 시점에 고착되지 않으려 애쓰며 그것을 계기로 삼아 현재의 소통을 진전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종종 실패를 겪는다. 이는 과거에 대한 기억 자체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소통의 의지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의 소통의 의지는 과거 자체를 변형한다. 과거의 어떤 시점이라는 것은 수많은 이야기들의 교차점일 수밖에 없다. 미래서사 또한 현재의 서사와는 달리 특정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뻗어나간다는 점에서 과거를 포함한다. 현재의 서사가 아닌 그 모든 이야기에 있어서, 그에 대한 배타적인 전유는 단 하나의 서사만을 남기고 다른 이야기를 모두 지워버리거나, 그 모든 이야기에 있어 유일한 저자만을 내세우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소통의 의지가 아니라 지배의 의지이다.

 

다짐하건대 "모든 사람들이 행위와 말을 통해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시작할지라도 ... 어느 누구도 이야기의 주인공일 수는 있지만 이야기의 저자일 수는 없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아니 되겠다. 과거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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