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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곳도, 소비할 곳도, 살 곳도 없다

간만에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제목부터 조금은 도발적인 <방, 있어요?>라는 짧은 다큐멘터리가 그것이다. 사실 제목만 보고서는 한때 일각에서 제기되었던 ‘우리에게 사랑할 권리를 허하라’ 식의 문제를 제기(물론 이런 문제제기도 단순히 ‘자기만의 방도 없고, 여관비도 너무 비싸다’는 식으로 요약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로 중요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하는 영화인가 싶었는데, 소개된 시놉시스와 연출의도를 보니 ‘청년세대의 주거권’에 방점이 찍힌 듯하다. 예컨대 “20대인 우리가 ‘내 방이다’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은 없다”라든가, “20대의 현재는 답답하고 기형적인 ‘방’에 갇혀” 있다든가 하는 언급이 눈에 띤다.


풍부한 상상력과 감수성을 지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 20대의 불안함조차 지긋지긋해져 갈 터인 30대 초반의 ... 나의 한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김애란 소설을 읽기 힘든 까닭은 그녀 글의 주인공들이 달랑 방 한 칸에 살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길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인데도 사뭇 낯선 이 동네에는 혼자 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주위의 편의점들은 흔히 보는 것과는 달리 편의점 본연의 기능(백화점)에 충실하다고 한다. 매장이 독거인들을 위한 물품으로 가득 차 있으며 도시락 판매에 관한 광고를 적은 천이 걸려 있었다.”
 

왜 ‘집’이 아닌 ‘방’이란 말인가. 이러한 구분은 공간은 물론 장소의 측면에서도 눈여겨 볼 만하다. ‘집’이란 표상이 돌아갈 곳, 가족관계, 안정감 등과 관계된다면, ‘방’은 거쳐 가는 곳, 개인, 불안정함 등과 관계된다. 집이 아닌 방에 사는 사람들이 늦은 저녁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와 이제는 그 어느 방에서도 조금만 걸어가면 닿을 곳에 있는 편의점에서 이름 없이 마주친다.

 

물론 각종 독신자용 용품들이 기다리고 있는 편의점이 애초부터 작은 백화점 기능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이전부터 들었던 생각인데, 한국에서 24시간 편의점이 생겨나기 시작한 1990년대 초중반은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신경영전략’이 도입되기 시작했던 때이며, 이 편의점들은 유연적-장시간 노동체제의 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들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주거와 일상생활의 공간은 노동의 공간인 작업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실 노동-소비-주거를 연결짓는 이러한 문제제기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사회공간적 측면에서 공간의 차원은 크게 세계(지구)-국민국가-지역 및 도시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세계(지구)-국민국가 차원에서는 자본과 군사력의 이동, 노동의 공간적 분업 등에 초점을 맞춘 논의들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다음으로 도시공간의 측면에서는 작업장, 소비공간, 주거공간의 배치에서 건축양식에 이르는 주제들이 다루어져 왔다. 이에 더해 보다 미시적인 측면에서는 공간적 재현, 공간과 주체형성의 문제 등이 논의되어 왔다. 공장-학교-병원은 규율화라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공간설계(판옵티콘) 측면에서 유사하다는 푸코의 논의는 물론, 도시 소비공간에는 지불능력에 따라 개인들을 걸러내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는 논의도 있었다.
 

이러한 논의들에 근거해 볼 때, 내 방이 없다거나 그나마 있는 방도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목소리가 20대들로부터 터져나오는 배경에 청년실업과 고용불안, 이에 더해 극한적인 경쟁압박이 놓여 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청년실업으로 노동할 장소가 없고, 돈이 없어 소비할 장소가 없고, 독립해서 살 집은 엄두도 안 난다. 잔뜩 주눅들어 친구들 만나기도 싫고 답답한 방구석에 틀어박히면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 인터넷이다. 더구나 인터넷 공간은 ‘공간의 자동생산’이라 할 정도로 끝없이 확장되고 있다. 그런데 네트워크로부터마저 단절되면 정말인지 갈 곳이 없다. 
 

젊은 세대의 ‘불안’과 공간의 부재 또는 공간의 답답함을 연결지어 보려는 시도가 한발 더 나아가야 할 지점들은 이처럼 다방면이지만, 일단은 젊은 세대들이 ‘방’을 둘러싸고 어떤 이야기들을 내놓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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