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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님의 [니콜라이 고골의 "코". 소시민 허위의식를 다룬 괴기화] 에 관련된 글.
김예슬의 대자보에서 내가 그녀의 ‘소심함’에 주목했던 것은 그녀의 글을 ‘이제는 자본에 포섭된 대학이라는 공간을 거부하고 진정한 大학생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선언’이라는 이야기로 구성하는 식의 논의들이 정말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무엇이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계에 공모해왔다는 사실을 ‘소심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보라는 ‘대의’ 앞에 그러한 공모쯤은 ‘대심’하게 덮어두고 우리가 싸워야 할 진정한 적에게 눈을 돌리자는 말들이 얼마나 그 진보의 앞길을 막아왔는지는 두고두고 파헤치고 논쟁할 일일 것이다.
확실히 고골이 보여주고 싶었던 절망은 자신이 기대어 왔던 권위의 소실에 따른 주인공 코발로프의 절망일지도 모른다. 고골이 살았던 시대나 그의 다른 작품들을 고려해 보면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소시민의 ‘허위의식’보다는 관료들의 부패상과 그것이 낳는 그로테스크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고골의 소설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가 그 시대에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가에 주목하자는 뜻에서가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웃음’은 코발로프가 자신의 코가 ‘원래 있어야 할 곳’에서 떨어져 나와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다는 설정에 기인한다. 그것이 코가 되었든, 입이든, 귀든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 온 인간의 신체의 일부분들이라는 것은 붙었다 떨어졌다 하기도 하는 것이구나 하면 되지 싶다.
요컨대 소시민, 혹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소시민이라는 것은 상상의 산물이다.
이른바 ‘사자의 변증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사자가 무서운 동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실제로 사자와 만난다면, 그러한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것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그밖에도 사자에 관한 이야기들이 출현하여 사자를 다루는 방법을 설명하고, 그것이 실제로 사자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을 계기로 사자의 사나움과 그 사나움의 원인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사자에 관한 이야기들의 초점이 사자 그 자신이 아니라 사자의 사나움이라는 주제로 모아짐에 따라 사나운 사자를 다루는 방법이 실제로는 사자를 더욱 사납게 만들고, 사자를 반드시 사나워야 하는 것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사나움은 실제로 사자의 성질이며, 그것이 사자에 관해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의 본질이고, 또는 알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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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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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적인 "대의"와 "대심"에 반하는 개념으로서의 "소심", 즉 개개인이 처해 있는 현실상황에 더 직시하고, 현실에서 진보를 방해하는 우리 마음 안에 존재하는 "심적 보류"를 하나하나를 짚고 따져나가야 한다는 점에는 100% 공감한다. 그러나 그런 "심적 보류" 상황에 "공모"란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소심"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달성하려는 목적에 역행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진보에 "심적 보류"만으로 참여하는 것은 주관적이기 보다는 객관적인 필연성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진보적 사유,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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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객관적인 필연성이 사상된 사유가 바로 추상적인 "대의명분"을 세우는데 한몫한다고 생각한다.마리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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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의 선언을 '자기결정'에 근거한 '소외되지 않은 실천'으로, 또 그녀의 선언이 본질적으로(다시 한 번 덧붙이면 본질이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본과 그에 포섭된 대학에 대항한 투쟁선언인 것으로 다시 써 넣는 것은 ... 불연속적이며 이질적인 것을 연속성(객관적 필연성)으로 가장하고 은폐한다는 점에서 지배적인 논의들과 공모한다. 그렇다면 사유라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다만 본질이라는 것은 전략적으로만 '설정'되어야 하는 것일 텐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체계와의 공모를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좀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운동진영은 학벌주의와의 공모를 인정해야 그 실패의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다.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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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의식"과 "부폐"는, 그것들을 대하는/대항하는 차원에서 차이가 있다. "허위의식"은 전복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부폐"는 점진적인 접근, 즉 개선이 가능하다는 차이다.마리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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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들의 허위의식과 지배집단의 부패를 대립시킨 것은 고골이 허위의식보다는 부패를 고발하려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맥락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나아가 고골이 무엇을 고발하려 했는가 하는 내용보다 그가 독자들에게 안겨주는 웃음이라는 형식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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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의식에 "폭소"같이 시원한 것은 없다. 분석과 대응이라는 차원에서 공감한다. 진보의 카타르시스는 비극보다 한바탕 폭소를 터뜨림으써 일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러니에만 머무를 수가 없다.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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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변증법"은 솔직히 이해 못하겠다. 헤겔 정신현상학 서설 §4와 아직 씨름하고 있는 상황이고, "대상구성"(Gegenstandskonstitution)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명쾌한 입장을 취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보류하겠다. 단, 내가 이해하는 변증법은 "사자가 사자자기와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소시민"도 마찬가지로 소시민이 자기자신과("an ihm selbst") 어떤 관계를 가지고 운동하는가 눈여겨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시민"에 대한 이런 저런, 이리 뒤집어 보고 저리 뒤집어 보고 하는 사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마리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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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자의 사나움이 역사적인 산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 사자는 사자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 사자는 맹수가 된다. 그러나 사자의 으르렁거림이라는 현상과 사자의 사나움이라는 본질 간의 특정한 관계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그 본질은 구성된 것이며, 그 구성과정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자의 변증법은 사자 자기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에서 (사람들의 언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자에 대한 담론의 효과로 인해 사자는 사나운 짐승이 되고, 그에 따라 정말로 사나워지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말이다. 사자가 맹수로 되는 과정을 '사자가 사자 자신과 하는 운동'으로 본다면, 사자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그 과정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 사자는 그 자신에게 맹수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맹수였던 것이다.blind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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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을 인정하기 보다는 부정합니다. 그것이 헤겔이 말한 자기의식은 욕망이라는 말이고 라캉이 말한 상상적 자아입니다.비밀방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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