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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자기규정, 루저

[세대론, 그 이후 - 김사과] 에 관련된 글
 

 

 - 2003년 리딩 페스티벌에서의 벡 ... 분열증적인 보틀넥 연주

 

 

 

 

 

이젠 막연하게 20대라 이야기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는 일단의 젊은이들 ...

 

이제 30대에 접어들었거나 20대의 막바지를 보내고 있을 이들의 특징이라면 20여년이 지나가는 시점에도 여전히 1990년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들에게 1992년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해였고, 1994년 4월 8일은 커트 코베인을 떠나보낸 가슴저린 날이었다. 어영부영 하다 보니 1997년 말 경제위기가 덮쳐왔고, 머지 않아 돼먹지 않은 새천년을 맞았다. 이들의 자기규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Beck의 Loser의 한 소절. "그래 나 패배자다. 날 잡아 죽여라."

 

수만 명이 떼거지로 모여들어 "Soy un perdedor. I'm a loser, baby. So why don't you kill me!"(Soy un perdedor는 I'm a loser의 스페인어 표현)를 외쳐대는 모습이라니 ... 그러나 이들을 그저 자신이 패배자임을 확인하려 모인 개별자들로 보기엔 어려울 듯하다. 2009년 싸구려 커피를 마시던 한국의 장기하에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세상을 향해 '그래 우리들은 루저다'라고 아주 공격적으로 찔러대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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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은어의 찬물치기

올 여름 폭우로 불어난 한강에서 허탕치고 있는 강태공 ... 사진은 리우식 님

 

 

 

 

섬진강 은어가 사라져간다는 소리는 십수년 전부터 들려왔지만 매년 여름이 되면 은어낚시 소식이 어김없이 들려온다. 은어가 사라져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섬진강 하류 지역이 공단 밀집지역이다보니 수질이 악화된 점이 있을테고, 둘째로는 각종 외래어종이 섬진강에 자리를 잡으면서 생태계가 교란되고 있다는 점이 있을 것이다.

 

여름철마다 은어와 재첩을 잡아 생계를 유지했던 섬진강 어민들이 ... 이제는 뭐 전업으로 담수어업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 은어떼의 위기를 가늠하는 방법 중 하나가 '찬물치기'라는 것이다.

 

특히나 은어는 매우 깨끗한 일급수에서만 살기 때문에 물 속에 산소가 부족해지면 물가로 튀어나온다. 게다가 은어는 바위나 돌에 낀 이끼를 먹고 살기에 흙탕물이 들면 살 수가 없다. 소나기라도 온 뒤면 어민들은 찬물치기를 하는 은어들을 손쉽게 많이 잡을 수 있지만, 그저 좋아할 수 없는 불길한 징조인 것이다. 사실 원래 찬물치기는 무더운 여름철 얕은 물가의 수온이 상승하여 산소가 부족해지면 은어들이 배를 뒤집고 둥둥 떠오르거나 수온이 낮은 물가로 몰려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찬물'을 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빈번해지게 된 것은 수심이 얕아져서라기보다는 수질악화로 인한 전반적인 산소부족 때문이다.

 

찬물치기는 은어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올 여름에도 비가 꽤나 퍼부었는데, 서울 한강의 구석구석에도 어찌 비만 오면 낚시대 들고 줄지어 앉아있는 아저씨들을 보면서, 대체 무엇이 폭우와 낚시를 연결해 주는지 궁금했었다. 농촌생활의 감수성과 기질이 찬물치기 하는 물고기들의 부름에 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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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비둘기, 공존을 꿈꾸다

KBS 환경스페셜 2009년 9월 9일 <도시 비둘기, 공존을 꿈꾸다> ... 사진은 <한겨레>

 

 

 

 

 

평상시 궁금증을 자아내던 사물 중 '하늘의 쥐'라 불리는 비둘기가 있다. 마침 환경스페셜에서 도시 비둘기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더럽고 시끄럽고 북적대는 도시를 중심으로 먹이활동을 하고 번식을 하며 살아가는 비둘기들은 '더럽다'는 이유로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되었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에도 갸우뚱하긴 했다. 사이보그를 다룬 각종 재현물들에서는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프로그램된 로봇들이 인류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위해서는 인간을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사람들을 공격하는 내용을 쉽게 볼 수 있다.

 

과연 비둘기는 인간의 삶을 위협하며, 따라서 잡아 죽여야 하는 동물인가? 환경스페셜이 모처럼 도시의 일상생활환경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만만찮은 주제를 다루었다. 가장 심장을 콕콕 쑤셔댔던 장면은 서울 동대문구에 산다는 어느 청소년의 거리 인터뷰 ... 그나마 비둘기가 있어 이 지구상에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그 한마디가 애잔하게 다가왔다.

 

어찌 보면 평화의 상징이라는 비둘기는 가장 참을성이 좋고 관용을 지닌 조류인 듯하다. 그 지독한 인간들을 곁에서 어찌 그리도 잘 견뎌내는 것일까. 조류 연구자들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새들의 먹이활동이 방해받는 것을 '간섭'이라 하는데, 대부분의 야생 조류들은 이러한 간섭에 매우 예민한 편이다. 비둘기와 마찬가지로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된 까치의 경우에도 참을성 좋고 관용적이긴 마찬가지인 듯하다.

 

비둘기가 각종 세균과 기생충을 퍼뜨리며 인간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가설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이 나와 근거가 없음을 밝힌다. 물론 전문가들의 말이라는 게 원래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기생충에 관해 ... 조류를 숙주로 삼는 기생충이 사람을 숙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지적이었다. 게다가 울산 태화강변에서 매일 비둘기 모이를 준다는 한 아저씨(사진)는 자신이 16년째 매일 비둘기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는데, 비둘기가 그렇게 세균 덩어리라면 자신은 벌써 죽었을 것이라 하기도 ...

 

윤무부 선생에 대해 덧붙여야겠다. 내가 오래 전부터 존경심을 품고 있는 그는 정말 새대가리다.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새처럼 생각하고 새의 입을 빌어 말한다. 한때 그는 각종 TV 오락프로그램에도 단골 게스트로 등장했었는데, 이후 방송을 멀리하는 것은 자신이 이용당했음을 절감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몇년 전에는 뇌경색으로 앓아 눕기도 했단다. 어쨋든 그는 비둘기 유해야생동물 지정에 대해서도 격분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고 강조하는 부분만 빼면, 역시나 새의 입으로 말한다. 도대체 왜 쫓아내느냐고. 그가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이유는 ... 새들의 보금자리가 사라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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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살고 죽을까

언젠가 한 친구가 사회자본 이야기를 하면서 풍부한 사회자본을 누리는 사람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 같은 의문들을 좀처럼 품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는 오지게 짜증이 났었는데, 나 자신이 “사람은 왜 살고 죽을까” 같은 생각을 종종 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권력(힘)의 문제다. 살아가는 힘이 없으면 살 수가 없고, 살아가는 힘이 넘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도 갖게 된다. 이러한 힘은 신체가 지닌, 혹은 신체에 부여된 힘이기도 하다. 주변에서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신체건강하고 성적 욕망도 넘친다.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의 오른팔은 제멋대로 꼿꼿하게 서서 핵미사일 발사 스위치를 향한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벌써 몇 달이 지난 일이지만 꽤 오랜 시간을 곁에서 보낸 사람이 스스로 세상을 져버렸다(물론 노무현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그러한 죽음의 방식에 대해서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 말고는 누구도 내 생명을 앗아갈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본다면 말이다. 그 전후로 나의 아버지는 쓰러지고, 나는 다소간의 빚까지 지게 된데다 곁에서 힘이 되어주던 사람은 멀리 떠나가 비일상적인 경험들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그에 대해 우매하다거나 비도덕적이라 비난하는 이들 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본 것 같다. 가깝게는 노무현이 자살했을 때 "조금만 더 버틸 것이지"라 했던 전두환이 그 전형이다. 스스로 끝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접한 타인들에게 존재에 대한 책임을 상기시키는 몇 안 되는 방법이다. 사실 나의 지인이 떠났을 때에도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타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용산 참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 일전에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인 안학섭 할아버지가 자신이 0.75평 독방에 앉아서도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알아냈다고, 그것은 바로 미제국주의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연쇄살인사건은 사람들에게 가장 혐오감을 주는데, 이는 범인의 타인의 생명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의지가 불특정 다수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쇄살인범은 아파트 창문으로 자신의 아기를 던져버린 어머니라든지, 다른 남자랑 잤다고 부인을 찔러죽인 남편보다 강한 혐오의 대상이 된다. 뒤집어 보면 한 개인이 지닐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불특정 다수를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힘이다.

 

찰스 맨슨 같은 살인마들의 심리 연구를 비롯하여 <아웃사이더>, <살인의 심리>, <잔혹>으로 잘 알려진 콜린 윌슨은 어딘가에서 가방에 폭탄을 넣고 기차역이나 쇼핑몰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 가는 것을 즐기는 한 남자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러한 행위가 바로 그에게 살아가는 힘을 부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좀 거시기한 말로 임파워먼트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힘은 사람 죽이는 데 뿐만 아니라 살리는 데에도 해당되는데, 이를 위한 수단은 핵무기가 될 수도 있고, 불특정 다수에 관한 (주로 숫자로 구성된) 정보를 확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요컨대 가방에 폭탄을 넣고 공공장소에 나서는 행위는 다이어트 또는 몸만들기, 유행하는 신상(품) 구매, 해외여행 가서 찍은 사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올리기, 매너 있게 처신하여 인맥 쌓기, 통계자료나 인터뷰 자료 수집하기 등등과 연장선상에 있다.

 

사람은 왜 살고 죽을까. 어쩌면 내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은 탄생과 죽음에 대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우리가 사는 시간이 순환적이지도, 선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의 방향이 바뀌었는데도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는 순간 비극이 탄생한다. 지리한 무시간적 시간의 흐름은 끊어져야 하며, 또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다. 바로 그 때 사람들이 인간의 유한함을 망각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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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다른 수단을 통한 전쟁의 연속

 

 

 

 

 

 

 

 

어느 동네 청년 밴드(미국 델라웨어 주 어느 소도시의 스톤 시티라는 밴드라고 한다)가 관객도 몇 명 없는 무대에서 연주한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 영의 "Almost Cut My Hair" ... 기타리스트는 스티븐 스틸스가 즐겨 쓰던 화이트 팔콘까지 둘러메곤 아주 용을 쓰는데 꽤 괜찮은 연주를 들려준다. 보컬이 노래를 좀 못 하고 창법도 이상하지만 충분히 사이키한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간간히 이런 밴드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90년대 초반의 시애틀 얼터너티브 밴드들을 생각나게 한다. 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40여년 전의 곡을 다시금 연주하게 하는 것일까. 그것도 장장 10분에 이르는 시간동안 ...

 

사이키델릭 음악들은 뭔가 도피적이면서도 패배주의적이지만은 않은 감성을 보여주는데,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 보자면 ... 외부 도처에서 전쟁을 벌이는 국가의 내부에 사는 젊은이들이 드러내는 신경증이라 할 만하다. 베트남전이 벌어지던 1960년대가 그랬고, 걸프전이 벌어지던 1990년대 초반이 그랬고, 이라크전이 벌어지던 2000년대 초반이 그랬다.

 

전쟁은 미친 놈들이 하는 짓이며, 우리 모두가 미친 것이라는 상처입은 정신의 표출 ...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다. "Almost Cut My Hair"라는 제목에서도 나타나지만, 짧게 머리를 깎고 전장으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의 현실에 어찌 울화통이 터지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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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적 외피 속의 합리적 핵심

나는 몹시 궁금하다. 왜 합리적 핵심을 강조하는 이들이 거기에 씌워진 외피가 신비적인지에 대해서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며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는 이들이 정 반대의 내용과 똑같은 외피를 뒤집어 쓰는 것은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내용과 형식이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저만치 거리를 두었다가 정작 그것이 문제가 되는 때가 오면 우왕좌왕 어색해하다 한참 뒤 후일담 소재로나 써먹는다. 코가 제멋대로 거리를 거닐고 외투가 제 주인을 고른다.

 

아, 덧붙이자면 ... 흔히들 비판은 쉽지만 대안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종종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어진다. 긍정(실증)은 쉽지만 부정(직관)은 쉽지 않다.

 

사실 "비판은 쉽지만 대안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배의 시각과 언어에 대항하는 새로운 시각과 언어의 창출보다는 지배의 시각과 언어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대안이라는 명목 아래 지배의 다양성을 증대시켜주는 방안이다. 이것은 사실 대안이라기보다는 강령이나 지침의 형태를 띤다. 이것이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합리주의자들의 실체다.

 

몇몇 글귀들을 인용해 보자면 ...

 

"합리주의자들에게는 어떤 것도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여러 세대에 걸쳐 존재해 왔다고 해서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다. 친숙함은 어떤 가치도 가지지 않으며, 모든 것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파헤쳐 버린다."(Oakeshott, 1962)

 

"신화는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의 이면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본질적으로 단순하게 하고, 모든 변증법을 제거해 버린다. 신화는 깊이가 없고, 완전히 열려진 세계이며, 자명한 것에만 빠져 있으며, 더없이 즐거운 명증성을 내세우기 때문에, 모순없는 세상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사물이 스스로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Barthes, 1972)

 

 

음 ... 모순 없는 세상이라니 ... 방법 중 하나는 내가 모순덩어리로 살아가는 것.

 

나는 이른바 문제틀이라는 것이 적어도 세 가지 축을 지닌다고 이해한다. 옳다/그르다, 맞다/틀리다, 좋다/싫다가 그것이다. 오늘날 옳다/그르다를 축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반면, 맞다/틀리다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이들은 주로 지배자들이며, 좋다/싫다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이들은 주로 피억압자들이다. 더구나 대세는 좋다/싫다 인데, 시쳇말로 '캐간지' 아니면 '진상'이라는 것이다. 좋다/싫다 쪽은 이른바 사회변혁에 회의적이거나 관심이 없다. 맞다/틀리다 또는 옳다/그르다 쪽은 그것이 맞다-옳다고 생각하는 일부의 경우 변혁에 긍정적이다. 또한 이들은 서로에 대해 고까워하면서도 때에 따라 협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도통 좋다/싫다를 축으로 판단하는 이들을 이해하고 싶어하지도 않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 세 가지 축을 기준으로 할 때 판단의 수준인데, 그것은 바로 그들/우리 또는 이쪽/저쪽이다. 이러한 판단의 수준은 앞에서의 세 가지 축을 떠나서도 복잡한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반정부 집회장에서 연사가 "정부는 ~~하라. -- 반대한다!"고 외치는데, 한켠에서 누군가 "우리 안에도 정부(government)는 있다!"고 외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현실에서는 페미니즘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럴 경우 지도급 인사들은 대부분 '그들'이 문제의 핵심인데, 왜 '우리'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여 분열을 책동하느냐고 한다. 그들과 우리의 경계가 고정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다층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애써 부정한다. '우리' 안에도 '그들과 우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사회변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지도급 인사들은 대부분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며 자신들이 그간 내세우던 옳다/그르다, 맞다/틀리다의 축이 아닌 좋다/싫다의 차원에서 반응한다. 다른 말로 하면, 화를 낸다. 결국 현실에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윤리도 합리성도 아닌 감성이 지배한다.  

 

이럴진대 어찌 세상이 자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현재든, 미래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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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통과 양날백이

 

 

여순사건과 관련한 자료를 뒤지던 중 생존자 구술증언에서 "장구통"과 "양날백이"라는 표현을 발견했다. 좌익과 우익 양편 모두에 협조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던 말이라 한다. 제주 4.3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여순사건의 경우에는 그보다도 더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에 출간된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은 의미 있는 저작이라 생각된다. 이명박 정부 이후로는 내전이 남긴 상흔에 관한 논의들을 더욱 더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 같다. 내 기억으로 그나마 최근에 밝혀진 것이 노근리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여순사건은 외견상 군인들의 봉기였지만, 지역민들이 지지하고 참여했던 민중봉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순히 좌익과 우익이 대립했다고 본다면, 피해자의 90% 이상이 경찰과 우익세력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이러한 우익의 테러는 지역사회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는데, 또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당시의 표현이 "손가락총"이다. 당시 여수의 군청 직원이었던 김계유의 기록에 따르면, "경찰관이나 우익진영 요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소위 '심사'라는 것을 했는데, 시민들 중에 가담자가 눈에 띠면 뒤따른 군경에게 '저 사람' 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즉결처분장으로 끌려가는 판이니 누구나 산 목숨이라고 할 수 없었다."

 

... ...

 

우익의 테러와 '심사'는 계속되고 있다.수단과 방법을 바꿔가면서 ...

그 와중에 장구통과 양날백이들도 적잖이 찾아볼 수 있으니

이건 뭐, 역사라는 것이 반복되기 마련인 것인지, 인간이 원래 그런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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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흐르는 강물에 바친다

 

4:25 쯤 무언가 손에 쥐고 열심히 말아제끼는 모습이 아름답구려 ...

 

 

1969년 캘리포니아 모처에서의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 영의 라이브. 온갖 히피들이 뭔가에 취해서 하늘하늘거리며 춤추는 모습이 압권이다. CSN&Y는 어떤 면에서는 1969년 우드스탁의 이념형에 가장 부합하는 밴드이기도 하다. 데이빗 크로스비는 어딘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여전히 우드스탁의 이상을 지지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억압받고 배제된 자들의 저항과 연대, 그리고 사랑과 평화. 뭐 약물에 대해서는 잘못했다고 후회하는 부분도 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약물'에 대마초나 LSD까지 포함되지는 않을 듯하다. 뭐 돈도 좀 벌었으니 그런 소리 해도 멋져 보이긴 하겠지만, 적어도 이들이 음악에 대해 안이한 태도를 보인 적은 없는 듯하다. 1990년대 이후 각종 미디어에 나올 때마다 청소년들에게 갖잖은 훈계를 늘어놓았던 루 리드와는 비교가 안 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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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근현대 사회사 관련 주요 문헌들

<1>

 

티모시 메이슨,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
: 쇤봄과 다렌도르프의 기능주의적 해석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그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계급투쟁에 초점을 맞춘 책. 원제는 제3제국의 사회정책.

 

데틀레프 포이커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 쇤봄, 메이슨의 해석을 바탕으로 일상사 방법을 비판적으로 도입. 일상사에서 다루어야 할 ‘작은 사람들’의 일상은 체제와 관련되는 일상이라고 규정.

 

알프 뤼트케 엮음, <일상사란 무엇인가>
: 뤼트케, 니트함머 등의 독일 일상사 연구. 니트함머의 경우 루르 지역 구술사 연구자. 포이커트와 뤼트케 등의 일상사 연구들은 80년대 초반에 발견된 사료인 망명 사민당  보고서의 폭넓은 활용에 힘입은 바가 큰 듯함.

 

서동만 편역, <파시즘 연구>
: 고전적 해석들. 마루야마 마사오, 야마구치 야스시 등 일본 학자들의 글이 주로 실려 있으며, 프란츠 노이만의 글도 포함.

 

김세균 편역, <자본주의의 위기와 파시즘>
: 역시 고전적 해석들이나, 상이한 관점의 논의들 일부 포함. 독일공산당 시각의 논의가 주로 실려 있으며, 톨리아티, 포이커트 등의 논문도 포함.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 나치즘에 대한 정신분석적 접근. 노동민주주의 개념에 주목할 필요.

 

니코스 풀란차스, <국가, 권력, 사회주의>
: 나치 독일 시기를 "예외국가"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독점자본주의론을 중심으로 한 경제주의적 해석을 넘어서고자 함.

 

Ernesto Laclau, Politics and Ideology in Marxist Theory
: 파시즘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문 수록. 풀란차스의 논의에 대한 비판적 평가 포함.
 

 

<2>

 

메리 풀브룩, <독일사>
: 독일사의 특수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쓰여진 간략한 독일 통사.

 

하겐 슐체, <새로 쓴 독일사>
: 독일사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대표적 독일 통사. 이른바 ‘생활공간’의 필요성에 의해 나치즘이 발흥하였다는 설명을 배제하지 않음. 지정학적 특수성 강조.

 

데이빗 블랙번 & 제프 일리, <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뜨리기>
: 독일사 특수성 논쟁에 대한 중요한 논평들. 18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민혁명의 부재에서 나치즘의 기원을 찾는 설명들을 반박함. 히틀러의 악마화를 통해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 독일사의 특수성 주장과 그를 둘러싼 논쟁들에 대한 간략하면서도 명쾌한 비평이 포함.

 

한스 울리히 벨러, <독일 제2제국>
: 비스마르크 시대부터 빌헬름 시대에 걸친 독일 제2제국의 역사를 정치경제 영역을 중심으로 탄탄하게 서술한 사회사. 계급관계나 문화적 측면들은 부차적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본적인 안내서로서 충실함.

 

피터 게이, <바이마르 문화>
: 독일 근대사에서 짧지만 중요한 시기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문화사. 대부분의 바이마르 시대 관련 저술들이 헌법 문제나 ‘민주주의의 실패’를 중심에 두는 데 반해 바우하우스의 건축, 토마스 만의 소설, 게오르크 그로츠의 그림, 프리츠 랑과 로베르트 비네의 영화 등으로 널리 알려진 바이마르 문화에 초점을 두고 서술. 특히 정신분석적 설명을 통해 바이마르 시기에서 나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아들의 반역’과 ‘아버지의 보복’으로 설명한 점이 돋보임.

 

Theo Balderston, Economics and politics in the Weimar Republic
: 바이마르 시대에 대한 짧고도 밀도있는 정치경제학적 분석.

 

David Welch, The Third Reich: Politics and Propaganda
: 나치스의 프로파간다를 제3제국의 총체적인 조망 속에서 파악. 괴벨스라는 개인보다는 제국선전부를 비롯한 국가기구들은 물론, UFA 등 문화산업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하려는 노력도 돋보임. 나치 시대에 대중들이 전적으로 관리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전체주의론 비판에 힘을 실어주는 구체적 분석들.

 

David Schoenbaum, Hitler's Social Revolution
: 나치스의 권력장악을 일종의 ‘수동혁명’으로 파악. 나치스의 전제적 통제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권력기구들 간의 경쟁이라는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이후의 역사가들이 나치 시대를 ‘아래로부터’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나, 그 자신은 기능주의적 해석(나치즘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근대화에 기능하였다)에 머무르고 있다는 한계를 보임.

 

 

<3>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캐빈 패스모어, <파시즘>

 

이언 커쇼, <히틀러1-2>

 

라파엘 젤리히만, <히틀러, 집단애국의 탄생>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볼프강 쉬벨부시, <뉴딜, 세 편의 드라마>

 

오인석 외, <바이마르 공화국>

 

오인석,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사>

 

한스 울리히 벨러, <허구의 민족주의>

 

Detlev Peukert, Weimar Republic

 

Siegfried Kracauer, From Caligari to Hitler

 

Michael Geyer & Sheila Fitzpatrick, eds. Beyond Totalitarianism

 

W. L Guttsman, Workers' culture in Weimar Germany

 

Geoff Eley, ed. Citizenship and national identity in twentieth-century Germany

 

Ian Kershaw, Weimar: Why did German democracy fail?

 

 

<4>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에 실린 Kershaw와 Welch의 논문들

Journal of Modern History, European Review of History,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에 실린 논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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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족과 광복절 퍼레이드

 

[사진은 걍 구글에서 퍼옴. 노들길 조~~오치 ... 깜빡이도 넣지 말고 왼쪽으로 꺾어랏!]

 

 

 

 

 

폭주족을 흠모하는 나이지만 '광복절 퍼레이드'에 동참은커녕 구경도 못할 터인지라 아쉬움에 몇 글자 남겨두어야지 싶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기원을 찾을 수 없지만 이제는 한국의 어엿한(?) 연중행사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광복절 퍼레이드는 그 떠들썩함에 비해 별다른 사건사고를 전해주지 않고 있어 두근거리는 마음을 약간의 아쉬움으로 바꿔주곤 한다.

 

며칠 전에는 모 일간지에 10대 여성 폭주족 두 명의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는데, 거기서도 확인되는 것은 폭주족들의 대부분이 뚜렷한 직업이 없거나 배달업에 종사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여성 폭주족 수는 손에 꼽힌다고 한다. 보라색 특공복으로 대표되는 일본 여성 폭주족과는 사뭇 대조된다. 뭐 그래도 폭주족이라는 게 남성주의가 강한 싸나이 문화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쨋든 이 서비스 직종 언더클래스들의 위험한 놀이가 한편으로는 기성세대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이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전에도 폭주족에 대한 메모를 남겨둔 바 있지만, 이들은 무료함과 피곤에 쩐 도시의 일상 풍경에 변형을 가한다. 요즘같이 열대야가 계속되는 한여름에는 창문 열어젖히고 잠을 청하는 이들에게 마후라 뗀 주행소음으로 약간의 고통을 주어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한다.

 

게다가 ...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 이들이 몰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그 자체로 강력한 페티쉬이기도 하다. 제아무리 빨리 달리는 년놈들이라도 그들이 올라탄 바이크보다는 빨리 달리지 못한다. 미끈한 유선형의 차체로 바람을 가르는 오토바이를 떠올리고 있자면 ... 아아 ... 흥분된다. 음흉하게 넙적한 철판으로 엔진을 감추고 네 발로 달리는 자동차들과는 달리 히끗히끗 엔진인지 내장인지 모를 속살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는 바이크는 흡사 근대적 인간 신체를 둘러싼 고상한 아우라를 조롱하며 벗겨내는 듯하기도 하다.

 

폭주족의 하위문화와는 거리가 좀 멀지만, 폭주라는 행위 그 자체를 가장 멋지게 그려낸 재현물로는 역시나 오토모 카츠히로의 1984년작 <아키라>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나 경쟁그룹 폭주족들에게 '짜봉'을 날리며 도심을 휘젓는 그룹의 리더 카네다에게 뒤쳐진 테츠오가 후미를 치고 올라오면서 남긴 백라이트의 잔광은 <마크로스>의 미사일 비행 씬과 더불어 1980년대 초반까지 그 누구도 본 적 없던 장면이었다.

 

다시 광복절 퍼레이드로 돌아오자면, 이것은 폭주족이라는 하위문화 공동체의 '의례를 통한 저항'이자 국가기념일의 '상징적 재전유'라고 할 수도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라서? 빨간 날(공휴일)이라서? 뭐 아무래도 좋을 듯싶다. 태극기는 또 왜 들고 나오는 건지. 역시나 아무래도 좋을 듯싶다.

 

물론 하위문화와 저항이라는 주제는 매우 논쟁적인 것이기도 하다. 가령 스래쉬 메탈 음악의 경우 밴드 메가데스의  데이브 머스테인이 '미국의 힘'을 강조하며 조지 W. 부시 집권 초반 열렬히 지지하다가, 머지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격렬히 반대하는 것처럼 <아키라>의 카네다 역시 진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도 폭력을 휘두르다가 혁명 정치조직의 선봉(?)에 서기도 한다. 앞서 말한 폭주족 인터뷰에서도 이들이 폭주에 빠져드는 이유는 '크랙션을 울리면 행인들이 깜짝깜짝 놀라는 모습이 웃겨서'라든지 '섹스를 즐길 기회가 많이 생겨서'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장물 오토바이를 손쉽게 구할 수 있으니 거리에 나가는 게 아니겠느냐'며 '키박스를 엉성하게 만든 회사가 나쁘다'고 비난하는 뻔뻔함이라니! 그러나 언제나 '의도'가 중요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들의 행위 양식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의미들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국사회에서 폭주족 자체는 존재감도 많이 왜소해지고 성질도 유순해 진 듯하다. 그러나 폭주라는 행위 자체는 여러 면에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폭주라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를 향한 실천을 강조하는 미셸 푸코의 강의록 제목 중에 <인구, 안전, 영토>가 있었던 것 같다. 푸코는 인구, 안전, 영토의 세 가지가 억압-저항과는 뭔가 다른 차원, 즉 통치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이라고 지적했던 듯하다. 이 세 가지 요소를 국민국가(민족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해명하는 데 적용했던(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민(민족) 정체성을 구성해 낸 장치들로 센서스, 박물관, 지도를 꼽는다. 인구-센서스, 안전-박물관(기원을 제시해 줌으로써 정체성에 안전, 즉 안정성을 제공해 줌), 영토-지도가 딱 들어맞는다.

 

폭주족들에게도 하위문화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들은 각 그룹의 구성원을 서로 파악하고 있고(인구), 다양한 폭주전설 및 메카닉 숭배를 공유하며(안전), 집결지와 주요 주행로를 갖는다(영토). 그럼에도 이들의 공동체는 단순한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폭주하기 위해 모인 것인데, 이들이 추구하는 질주라는 행위는 생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투쟁적 소비, 즉 포틀래치다. 구성원-망명자-부랑자-반역자의 틀로 보자면, 폭주족들은 자기관리라는 미덕을 추구하는 구성원들도 아니고, 젠체하는 지식인 망명자도 아니며, 혁명적 투사인 반역자도 아니다. 질주를 통해 끊임없이 도망치는 부랑자다. 이러한 도망은 체제에 맞서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자체로 '사회적 규율화'의 한계를 보여준다.

 

부랑자는 묵시록의 집필자들이며 예언자들이다.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 알 수 없는 예언들을 부르짖던 육교 위의 부랑자처럼 직접적인 언어를 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랑자들은 무언가 말하고 있다. 이들의 메시지는 굳이 귀기울이려 하지 않아도 귓가에 계속 맴도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조금은 폭주족들을 흠모하는 이유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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