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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를 뽑고 나서

2004년 06월 20일

 

끙끙 앓다가 사랑니 하나를 뽑았다. 입을 벌리기조차 힘들었던 부기가 빠지고 통증이 잦아드는 것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앓던니 빠진다'는 표현이 이래서 쓰이는구나 감탄할만한 이 후련함이란. 근데, 하룻밤 자고 나니 그 시원한 기분이 시원한 것이 아니라 '시원섭섭'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 내가 뭔가에 '집착하는 것'이었다면, 후련했을 것이다. 아니, 그 무엇이 '집착'이고 그래서 확 뽑아버린 뒤 후련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왔던 것 같다. 약지 손톱만한 생니를 뽑고 난 자리에 식후마다 끼어 드는 밥풀이나 음식찌꺼기 따위가 신경을 건드릴 때마다 단지 '나의 그 무엇'이 집착은 아니었다는 것을 느낀다.

 

감내해야 할 무엇? 그따위 것도 아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데, 결벽스럽게 계속 물고 늘어지는 내가 이상한 거다. 누구는 이렇고, 무엇은 어떻고, 이 따위 문제들은 역시나 흘러 가는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고. 시끄럽다. 비틀거리면서 한 걸음 나아가는 건 뒷걸음질만 못하다. 주저앉아 잠시 뻗어누워 하늘을 보고 싶다.

 

젠장,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는데 찝찝한 것들은 왜이리 많은 건지. 아아, **천 다리밑에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친구놈들과 잔득 취해 술병 깨면서 노래나 불러제끼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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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머리의 남자아이를 만나다

2004년 01월 11일

 
녀석은 언제나처럼, 그리고 우습게도 당황스럽게도 꼭 나와 같은 방식으로 갑작스레 전화를 해 대곤 "야, 나 서울이야. 여기 종론데 내가 그쪽으로 갈까? 아님 네가 이쪽으로 올래?" 뭐 매번 이런 식이다. 왼쪽 주머니의 약봉투를 주물럭거리다 고심 끝에 그를 외면할수는 없었기에 잠시 발길을 옮기고 말았다. 도대체 어찌 해 볼 기미가 안 보이는 뻣뻣한 직모의 머리칼을 지닌 사내, 그렁그렁한 눈동자는 여전해 보였다. 사실, 그러고보면 녀석이 전화라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공원 벤치에서 눈물이나 질질 짜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부둥켜 안아 회한을 푸는 것이 어색해져버린 내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닌데, 녀석의 넓다란 가슴팍에 내 가슴이 부대꼈을 때엔 살가죽과 갈비뼈 저 아래 깊숙히 속에 박혀 있는 사금파리가 적이 몇 개는 빠져나오는 느낌이었달까. 여행자의 발길과 행군의 발길이 맞닿는 어느 지점, 그 곳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멈추어 보았다.

 

한라공조 공장에서의 계약기간이 애매하게 끝나버리고 잠시 묶여있던 발을 풀고 싶었던 마음에서였는지 서울에 잠깐 들렀다는 녀석에게는 삶의 아픔이라는 그 무엇이 그의 음성과 표정과 발걸음에 조금씩 비쳐드는,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미덕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나는 그를 외면할 수 없고, 그가 사랑스럽다. "정규직 노동조합이라고 말로는 비정규직도 어쩌구 하는데, 막상 보면 우리 계약직들이나 사내하청 사람들한테는 아무 것도 없어. 회사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번에도 5일까지 계약인데 일방적으로 끝내버린 거라니까. 계속 일하다 보니까, 그것들이 어찌 돈을 벌게 되는 지 훤히 보이기 시작하더라."

 

녀석은 최종 조립라인에 있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에 들어가는 에어컨 공장에서 말이다. 하지만 현대의 상표를 달고 있는 그 어떤 자동차에 들어앉아 에어컨을 틀어도 녀석의 체취가 느껴지진 않겠지, 그는 그의 표현 그대로 "기계"였으니. 현대차는 "현대"가 만든 차이고, 오늘 내가 올라탄 지하철 1호선의 차량은 "로템"이 만든 것이 되어버리는 것,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이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속담조차도 곧 "사람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바뀌지 않을까 싶다. 단단한 혹은 물렁물렁한 그 어떤 가죽들.

 

사람들로 가득찬 거리로 다시 나섰을 때, 그는 낯익지만 그리 쉽게 내던지는 듯한 말이 아닌, 목소리가 아닌 숨결로 내뱉었다.

 

"야, 이 많은 사람들이 세상살이의 어마어마한 격차를 진정으로 알아버린다면, 발칵 뒤집히겠지?"

 

"그래, 오래는 못갈 거야. 새로운 세상에서, 아니 그것이 열리는 길목에서라도 다시 널 만나는 순간이 있다면 행복할거야."

 

고교시절 밤새워 옥상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거침없던 그 시간들이 다시 우리를 이 곳에 데려다 놓았다면 너와 나는 그 언젠가에도 거침없는 마주침을 나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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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자 마지막, 아버지의 모습

2003년 12월 24일

 
그래.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른다. 그의 그토록 왜소하고 수줍은 모습, 하지만 너무나도 따뜻해 보이는 눈빛. 도봉동에서 느지막히 나왔는데, 그는 벌써 종로에, 지하철로 한 시간 반을 타고 와 있었나보다. 자꾸 '서울 악기'라고 말하는 바람에 어이없이 조금 헤메기도 했지만, 나도 가끔 들르는 '서울레코드'에 두툼한 황갈색 점퍼를 껴 입고 테이프를 고르는 모습을 보니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뭔가 유심히 고르는 모습을 본 지가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분명 그는 무언가를 고르고 있었다.

 

다가서자 "야, 요즘엔 다 CD로 나온댄다."며 뇌졸중 후유증으로 찡그린 듯한 한쪽 눈에 더해진 눈웃음을 짓는 그 얼굴은, 오래 전 원양어선 타러 떠나기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지어보였던 그 표정과 너무나도 닮아있지 않은가.

 

"아니, 뭐 찾길래 그려요. 이거 아녀? 벤쳐스? 테이프로도 있구만 뭘."

 

그는 이미 첫 트랙이 '하타리(Hatari)'인 영화음악 모음집 테이프를 들고 있었는데, 탄광 아랫마을 단칸방서 이사 오면서 수많은 영화음악 레코드판을 처분하는 데에 일조했던 나로서는 조금은 고역스런 일이었다.

 

"폴 모리아도 여기 있네 ... 그려, 됐다. 어정도 허지 뭐."

 

수십년이 지나는 동안 마천루가 빼곡히 들어선 서울이지만 여전히 종로부터 청계천 지리를 꿰고 있는 그는 내 손을 붙잡고 시계골목으로 들어섰다.

 

"시계 하나 해야쓰겄다. 가만 있어보자. 이거 얼마유?"

 

두 노인네의, 요즈음 이십대의 미덕인 '쿨함'과는 한참 거리가 먼 '흥정'이란 게 시작되었다. 결국 2만 원 부르는 손목시계를 만 6천원에 사면서도 다급했던지 6천원을 쥐어주고 만 원 짜리 건네는 걸 깜빡해서는 되돌아가 만 원 지폐를 주고 돌아서서 둘이 행인으로 가득한 종로의 인도 한복판에서 한참을 서로 부여잡고 웃어대었으니 참.

 

"거 참 2만원짜리 시계 사면서 뭐 그리 ... 저사람도 날 추운디 먹고 살어얄 거 아니유."

 

"야이눔아. 몇 십만원, 몇 백 만원짜리 시계 사는 사람들이 에누리 허디? 다 그런 거여."

 

그도 TV는 즐겨 보는 편이지만 몇 천 만원짜리 시계도 있다는 걸 잘 알겠지?

 

한 시간도 더 전에 세운상가에 왔다길래, "아니, 노인네가 뭐 하고 돌아다니셨쇼?"하고 물어 보니 장사동으로 해서 청계천 쪽 에도 나갔다 왔단다.

 

"장사꾼들 있나 좀 보러 갔더니, 죄다 뜯어발겨놓고 장사꾼들도 안뵈더라. 현인동 옛날 집들도 다 깔아 뭉개 놨드만."

 

"아, 그거 장사꾼들도 이명박이가 다 쫓궈냈슈. 근디 성동공고도 바로 그 근처던디?"

 

"이, 그려. 청계 7가지. 참 내. 거기 성동공고 방송반 할 때가 재밌었는디."

 

상상하기 힘든 60년대식 폼을 잔뜩 잡고 릴 테입 데크를 만지작거리던, 낡은 앨범 속의 흑백사진의 기억이 잠시 스친다.

 

그와 나의 복고풍 조우에 서울지하철도 협조하는 분위기인지, 플랫폼에 들어선 열차는 노상 1호선을 이용하는 나도 요즈음엔 처음 보는, 한 20여 년은 더 된 것 같은 차량이었다. 한여름엔 창문의 양 끝을 눌러 쥐고 위로 열어올리기도 했던, 오후의 노곤한 햇볕이 따갑기라도 하면 차양막을 끌어내려 창틀의 홈에 걸도록 만들어진, 내 어린 시절의 스틸 사진 속 몇몇 장면. 일찌감치 술에 절어 신세 한탄하는 아저씨들과, 성탄절 유흥 계획을 수립하는 젊은이들과,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백발 노인 등, 수 많은 사람들 속에 잔뜩 웅크리고 서 있는 그의 모습.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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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에 바라본 교사라는 존재

2003년 12월 17일

 

고교 시절의 일기에서 발견한 것인데, 그렇게도 선생님이 싫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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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들이란 알 수 없는 도덕적 의무감으로 충만해 '웃자라는 싹'을 골라 줘야 한다며 눈에 거슬리는 것은 모조리 그 오만한 잣대를 들이대며 두들겨 패고 욕을 퍼 붓는 깡패들일 뿐이며 수구 기득권세력의 체제 유지에 몸바치는 돌격대들일 뿐이다. 그러면서 자기 교장시켜주면, 교육부장관 시켜주면 이렇게 저렇게 '진짜' 개혁을 하겠다는 둥, 도대체 우리 나라 교육은 엉망이라는 둥의 말로 아이들을 현혹시켜 놓고는 그걸 면죄부삼아 아이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선생들의 그러한 썩어 빠진 모습에 동조하지 못하겠다는 의사를 조금만 보인다면 "본질은 보지 못하고 왜 현상만을 보냐.", "내가(선생이) 너에게 이런 말을 하(고 때리)는 것의 본질을 너는 올바로 알아야 한다."와 같은 방패를 들고 나온다. 하지만 그들은 알아야 한다. 본질을 압도하는 현상을!

 

난 그들이 현상이니 본질이니 운운하는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들은 뭐 본질 같은 거 우리가 이해하기 바라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그들의 행동의 본질이 교육적인 목적이라는 것은 더더욱 믿을 수 없다. 교단에 올라와서 그들이 하는 말들을 들어 보면, 그들의 권위 의식과 독선과 위선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는 것에 흐뭇해하고, 다달이 들어오는 일정한 금액의 누런 봉투에 아주 만족해 할 뿐이다.

 

경기가 안 좋다며 봉급을 깎는 놈들도 웃기지만 그렇다고 학생들 앞에서 "더러워서 선생 못해먹겠다"는 말을 입에 담고 다니는 작자들 아닌가. 보충수업은 뭐, "나도 하고 싶어 하는 거 아니"라고? 그걸 바꾸지 못하는 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극우보수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충혈된 '마녀사냥꾼'들의 눈을 더이상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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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으로 느끼는 시간과 빼앗긴 시간

2003년 12월 17일

 

 

 

 

미카엘 엔데. 1974, <모모>

 

너무나도 잘 알려진 한 권의 동화책.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모모>를 읽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책 소개 등을 통해 ‘시간’에 대한 ‘철학적’의미를 탐구해 보려 바쁜 머리를 잠시 쥐어 짜 본 경험 또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다. 왜일까? 또 무얼까? 그러나 이것은 저 철학의 근본 문제에까지 우리들을 데려다 준다.

 

미카엘 엔데는 ‘존재’, ‘시간’과 같은 ‘밥 안 되는’ 철학적 문제에 관념적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관념론은 또 무어란 말인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철학, 그리고 철학이라는 단어의 이미지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삶과 뭔가 동떨어져 있는 듯한 그것이 바로 관념론 철학이다. 그럼에도 저 높으신 분들은 철학의 중요성과 절대성을 역설한다. 정작 우리들은, 우리들 바로 곁에 있는 철학의 제 문제와 근본 문제에 다가서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하여 다시, 우리는 바로 우리들 곁에 있는 철학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녹여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카엘 엔데의 ‘철학’은 더욱 빛난다.

 

모모가 던져주는 시간에 대한 철학적 의문에 대한 답은 바로 <모모>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친절하게도 이렇게 답안까지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곧 삶이다.” 시간이 곧 삶인데 어쩌란 말이냐. 미카엘 엔데와 그의 꼬마 친구 모모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골치 아픈 저 높은 사람들의 철학이 아닌 진정한 우리들의 철학을 할 것을 요구한다. “심장으로 느끼는 시간”과 “빼앗긴 시간”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모모와 친구들이 ‘회색인간’들에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사는 삶’을 생각해 보자.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 친구가 뭐가 필요합니까?”라는 개그맨의 철 지난 대사에 모두들 씁쓸한 웃음을 던지고 있지는 않은가. 자, “ㅇㅇ기업의 경영 철학”, “사주팔자 ㅇㅇ철학관”과 같은 문구들이 보여주는 알 수 없는 철학의 모습, 이것이 바로 추락해버린 저 높으신 분들의 철학의 모습이다. 하루쯤 모모의 친구가 되어 ‘삶이 녹아드는 철학’, ‘철학하는 삶’의 즐거움을 느껴 본다면 우울함과 실망감으로 진절머리나는 삶이 아닌, 즐겁고 가슴 뛰는 삶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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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를 사러 나갔다 오는 길에

2003년 11월 14일

 
저녁 여덟 시쯤 되었을까. 아버지는 급히 전화를 받고 일을 나가셨다. 모처럼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시간을 가졌다.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어머니의 모습에 대충 짐작은 하고 안방에 들어갔다. 내년 겨울까진 어디서 대출 받기도 어렵다. 그때까진 좀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다. 뭐 이런 얘기였다.

 

다만 날씨가 조금 추워져 걱정이긴 하지만 당분간 학교에서 생활해야겠다는 계획을 그대로 추진해야 할 듯 싶다. 인천에 이모가 혼자 지내셔서 자주 들르곤 해야겠다. 나이 육십이 다 되어 가는데 술 담배로 사는 이모도 걱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뭐 어디에 떨궈놔도 잘 살아갈 자신이야 있는 나이지만, 언젠가 그랬듯이 가장 두려운 건 외로움이다. 세상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불시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또 혼자서 극복해 나가야만 할 그것.

 

간만에 M과 맥주 한 잔 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갑자기 술 생각이 났다. 캔맥주 하나면 30분 사이에 뻗어버리겠지만 그냥 생각이 났다. 담배 한 대 물고 대문을 나서는데 두통과 함께 손에 땀이 마구 난다. 동네에 딱 세 개 있는 구멍가게 중 '만물슈퍼'란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의 스테인리스 미닫이문을 열어젖힌다.

 

수척한 얼굴의 아저씨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한뼘은 키가 큰, 시원한 외모의 사내가 전화를 끊고 웃음 가득한 얼굴로 나를 맞아준다. 녀석은 나의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다. 2-3주 전까지 새벽 버스에 몸을 같이 실었던 나의 친구. 맥주 한 병을 부탁하고 동전을 헤아리고 있자니, 녀석은 검은 비닐봉지에 새우깡 한 봉지를 더 슬그머니 쑤셔넣는다. 나의 사양은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고맙다는 말을 수줍은 목소리로 건넬 뿐이다. 우리보다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와 있다. 어, 왔니? 하고 어색한 인사를 건넨다. 중학교 땐 통통하던 아이의 얼굴이 주먹만해 보인다.

 

근황을 묻는다. 다시 발전소 알아봤는데 사람 필요 없대. 뭐 빨리 어디든 알아 봐야지. 1년 전 쯤, 휴가 중에 동네에서 녀석을 만나 초등학교 꼬마애들을 데리고 같이 농구를 하던 기억이 났다. 한 달쯤 전, 다시 이곳에 돌아오고 버스에서 우연히 녀셕을 만났을 때, 그는 도회지로 일하러 떠난 여동생과, 아내를 잃고 두문불출하는 아버지를 두고 출근하고 있었다.

 

"어, 근처 발전소에 나가. 계약직이여, 발전기 점검허고 정비해. 거긴 민영화 안됐어? 아, 발전기 몇 개씩 해갖고 나뉘었어. 난 중부발전이여. 그려도 나는 괜찮은 편이여, 계약이 두어 달 밖에 안되지만. 야, 하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일도 배는 위험허고, 돈두 몇 푼 못받더라 야. 나는 양반이쟤."

 

"야, 너같이 계약직이나 하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냐?"

 

"걸 말이라구 혀. 말할것두 읎어."

 

"그나저나 동네에 애들이 뵈덜 않드만? 다 도회지 나갔지 뭘. 아, 저그 아래 밤골 사는 경이는 요 아래 초등학교에 서기 보러 나간댜. 계약직이라던디."

 

까만 비닐봉다리를 부스럭대며 집으로 기어들어왔다. 어머니와 한 잔 달라 안된다 실랑이를 벌이다 병마개를 땄다. 혈압있다는 양반이 참내. 시워언 한데도 촉촉하진 않다. 레너드 코헨의 목소리처럼 드라이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구석이 있다. 갑자기 잠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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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는 모든 나, 나를 모르는 모든 나

2003년 11월 13일

 

 

 

 

전태일의 일기를 읽다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본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그의 외침과 죽음에 마음이 불편했는지, 인간의 가치와 희망과 윤리와, 동시에 금전대의 부피 또한 생각하는 자들이 하나 둘 씩 늘어갔다. 사람들은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하고 맞장구쳤고 서른 세 해가 지난 지금, 금전대의 부피에 대한 생각만이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사람이란 죽으면 '시커먼 뱃대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사라지기 마련 아닌가.

 

"사람들의 공통된 가장 큰 약점이란 것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 톱니바퀴는 거꾸로 돌지 않는다. 한가지 뜻을 세우고 앞으로 가라. 잘못도 있으리라. 실패도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일어나 앞으로 가라."

 

무얼 하고 있는가? '톱니바퀴는 거꾸로 돌 수도 있겠구나' 하고 착각했던 자들의 어리둥절함 속에서, 혹은 불러 터진 금전대에 구멍이 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자들의 노심초사 속에서, 덩달아 주저앉아 서른 세 해 전의 그의 죽음 앞에 훌쩍이고만 있지는 않은가? 다시금 크레인에 목을 메고 분신으로 산화해 간 열사들 앞에서 우리의 '가장 큰 약점'만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자. 다시 한 걸음을 내딛어 보자.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무얼 하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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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증을 받아들고

2003년 11월 12일

 
느지막히 일어나 방청소를 간단히 한 뒤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전면허학원에 들러 면허증을 찾아왔다. 충남 03-XXXXXX-XX라고 큼지막히 기재되어 있는 운전면허증 번호는 다시금 잠시 01-XXXXXXXX이라는 쇳조각에 새겨졌던 지난 시간이 숫자를 상기시키기도 했다.

 

한달 여 간 일용직 아르바이트 수입에다 집에서 수시로 손 벌린 것까지 합한 돈에다가 하루에 몇 시간씩의 교육과 매주 치른 시험으로 스스로 핑계삼아가며 15kg쯤은 무거워진 몸뚱아리를 집에 묶어놓기도 했던 이 운전면허증. 삐그덕거리는 철문소리를 뒤로 하고 일찌감치 쌀쌀해진 산동네를 빠져나오며 손에 쥐었던, '아, 이거 하나 손에 넣자고!'라고 중얼거리게 했던 전역증 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자동차를 탄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불편하고 10분에 한 번은 가슴이 철렁한 내가 운전 배우라는 소리 들었을 땐 정말 삼혼三魂이 날고 칠백七魄은 뛰어 어쩔 줄 몰랐으나, 그냥 면허만 일단 취득해 두라는 집요한 회유에 넘어가고 말았다.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이 운전면허증이라는 것을 손에 넣고 나니 간사하게도 마음 속에 운전면허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 비슷한 마음이 생겨나니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잠시 벽력이 두려워지기도 한다.

 

요 몇 달 사이 이렇게 체제가 쥐고 돌리는 통과의례의 훈장을 두 가지나 손에 쥐고 나니, 정작 그 해괘망칙한 폴리에틸렌 필름 코팅된 딱지들이 무서운 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무기(務器)와 기동 장비를 운용하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되어 장차 유용히 쓸 날이 있겠거니 하더라도 그 두 가지는 각각 양심적 거부에 대한 면죄부로서, 이동권에 대한 한 차원 높은 패스포트로서 기능하는 측면들이 본의 아니게 숨어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진정 그리하여 그 두 개의 딱지엔 국방부장관과 충남지방경찰청장이라는 나으리들의 인장이 명히 찍혀 있는 듯 하기도 하다.

 

무릇 깨부수고자 하는 이는 새로 만듦을 사려해야 하는 법인지라, 그 때이름에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꾸 '세상에 딱정벌레가 만연하는 때에 종말이 올 것이니'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서낭당 메아리같이 들려오는 까닭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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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불빛 아래 시계탑

2003년 11월 11일

 

 

 

 

전소혜. 1986, <내 영혼 대륙에 묻어>를 읽다가 한 구절 옮겨 둔다.

 

가로등이 밤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그들은 소사도(小沙渡)를 지났다. 한길 가운데에 시계탑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었다. 중하는 모자를 벗어들고 오랫동안 그 곳을 쳐다보았다. 진동생도 덩달아 그 곳을 쳐다보았으나 주의를 끌 만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중하를 쳐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중하는 꼼짝도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눈언저리에 흐릿하지만 무언가 뜨거운 격정이 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 때문에 저 시계탑을 넋을 잃고 쳐다보시는 겁니까?" 진동생이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고개를 돌려 진군을 바라보면서 중하는 착잡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이 시계탑을 볼 때마다 유화(劉華)를 떠올리곤 한다네. 벌써 7년이나 됐구먼. 그가 적에게 살해되었을 때 어느 누구 하나 이끌지 않았는데도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이곳에 모여 장차 혁명이 승리하는 날 이 시계탑을 유화의 기념비로 바꾸자고 결의했었지." 그는 가슴 속에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듯 고개를 쳐들어 다시 한 번 시계탑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유화같은 사람이 우리 중국에는 많이 필요해! 우린 더 많은 유화를 찾아내야 할거야.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중국의 혁명은 틀림없이 이루어지고 말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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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밥상에서의 정치토론

2003년 11월 06일

 

뒷산에서 걷어온 아욱을 어머니와 함께 손질해서 점심에는 기가 막힌 아욱된장국을 맛볼 수 있었다. 오전 일 끝내고 들어온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는(이렇게 세 가족이 전부다) 점심을 먹다가 TV를 켜보았는데 마침 리베라호텔 노동자들의 파업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밥상을 마주한 세 사람의 대화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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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요새는 길거리 나서는 게 유행이구만

 

나: 다 나올 만 하니까 거런거 아니유

 

어머니: 노무현이가 대통령 되니까 더 살판났구만

 

나: 노무현이가 더 심허니께 그런거제

 

아버지: 아니여, 대통령이 물러 터져서 그려

 

어머니: 대통령이 확 휘어잡을 줄 알아야지
              어디서 운동권 출신 뽑아가지고는

 

나: 엥?

 

어머니: 야, 테레비 나와갖고 자기 데모할 때 부르던 노래도

              아직 몇 개 생각난다고 그러더라 야
              하여간 입다물고 있음 50점은 받을텐데 그놈의 주둥이는 ...

 

나: 아니 운동권은 무슨 운동권이야
      노무현이가 이회창이랑 다를 게 뭐가데

 

아버지: 어디서 저런 사람을 대통령 뽑아가지구

 

어머니: 잘못 뽑았슈, 잘못 뽑았어

 

나: 듣자듣자허니께 사람 사는 시상이 뭐 군대유?
      나라를 이끌고 뭐 허고 자시게
      대통령이야 누가 해먹든 서민들한티는 다 거기서 거기지

 

아버지: 그려.

 

나: 엄니는 김영삼이 그래 좋다고 환장허던 사람이
      그려 김영삼이 대통령되니까 뭐 좋든감?

 

어머니: 에잉 김대중이나 노무현이도 다 똑같혀

 

나: 근디 아욱국 시원허고 맛있네. 자알 먹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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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갈 길은 왜 이리 멀단 말이냐!! 며칠 전 뉴스에서 비정규직노동자대회 소식이 나오는데, 아주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번 주말에 서울가면 전국노동자대회 갈 것 같은데, 얼굴 잘 가리고 다녀야겠구나 싶었다.

 

점심먹다 뉴스보는데 0.6초쯤 '데모'하는 내 얼굴이 나올 경우

 

아버지: 다친 데는 읎냐?
 

어머니: 어이구 우리 아들 테레비에도 나오네그려

 

뭐 이런 대화패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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