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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커트 코베인

노무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충격적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이런 느낌은 15년 만이다. 나에게 그의 투신자살은 시애틀 그런지 락의 대표주자였던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의 권총자살 ... 그것과 꼭 같았다. 이러한 노무현의 죽음에 누군가 눈물을 흘리거나 조의를 표한다고 해서 그것을 좌파-우파의 척도에서만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잘못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노무현은 정치인이기에 앞서 '스타'였기 때문이다.

 

공공연한 노무현 지지자가 아닌 이상, 누군가가 느끼는 감정은 '슬픔'보다는 '서글픔' 내지는 '무력감'일 게다. 그를 지지하던 열정과 그에 반대하던 열정이 일순간 사그러들면서 찾아온 무력감. 여기서 슬프다-아무렇지도 않다-기쁘다의 척도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한 감정을 기준으로 정치적 신앙고백을 요구하거나 선언하는 것도 좀 찜찜하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존재의 핵심은 그가 우파(혹은 좌파-신자유주의)이기에 앞서 파퓰리스트라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퇴임 후에도 낙향하여 마을을 조성하고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던 그는 정치자금 스캔들을 맞으며 대중들에게 잊혀져버릴 위기에 처했으나, 검찰청 앞에 선 초라한 이미지를 숭고한 영정 이미지로 바꾸어벼렸다. 결국 노무현은 최후까지 대중적이었다. 과감히 말해보건대 그의 죽음은 정치적 살인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디어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그의 존재감은 이처럼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호학적인 미디어 읽기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은 노무현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새로 쓰기보다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눈물 흘리는 이들'을 계몽적 태도로 꾸짖으려 한다. 노무현 정권의 반민중적 작태를 '모른다'는 것이다. 대중들 사이에서 이런 식의 태도는 다소간 소모적이다.

 

그러나 발언권을 지닌 자들의 경우엔 다르다. 진중권 같은 이가 노무현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사회적 발언권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 기준은 진정성이다. 진정성의 정치는 일정한 시효를 갖는다. 그러나 진정성 자체에는 시효가 없다. 바로 이게 진정성의 정치의 함정이다.
 

 

철저히 미디어를 통해서만 존재했던 락 스타인 커트 코베인의 경우, 진정성의 정치는 그의 존재와 함께 소멸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그의 지지자들은 제도정치 안에서 여전히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성의 이름으로 적을 부르짖기 시작한다. 러시아 혁명기의 볼셰비키와 중국 대장정의 홍군의 진정성은 나치스나 미시마 유키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면서도 적을 쓰러뜨리고자 하는 의지 바로 그 진정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한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대중정당이다. 이들에게 노무현의 빈소를 찾는 것은 쉐보르스키가 지적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의 선거 딜레마와 유사한 상황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그렇지 않다. 지도부 차원의 노무현 조문이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의식한 것이라면, 그것은 부적절한 판단이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필요한 것은 활극이지 번지 없는 주막이 아니다. 설령 한 자리 잡는다 해도 여전히 번지수는 없을 것이며,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총은 하나의 통치기구가 될 것이다. 현 시점에서 활극의 주인공은 이미 노무현이 차지하였다. 이 상황에서 종로(평택과 대전)를 등질 경우, 민주노총은 영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조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적 이익집단이 정치적 행보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 반대로, 노무현의 죽음으로 인해 만들어진 정치적 상황에 비정치적 내지는 반정치적 대응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박종태 씨와 배우 장자연 씨의 죽음은 명백한 정치적 살인이다. 반면, 노무현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스타의 죽음이다. 더구나 그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제도정치의 심장부에 서 있었던 정치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투신자살의 여파는 일상적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겨준 것은 적군과 아군의 명확한 구별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벌써 그런 열정을 드러내고 있다. 노무현의 적들에게는 조문도 허용하지 않았고 대중들 사이에서 다시금 촛불을 통해 반이명박 전선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이들의 관건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반이명박 세력으로 민주당을 견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지지세력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상황에서 새롭게 열리기 시작한 대중적 정치공간을 내버려 둔다면 어디로 흘러갈 지 모른다. 노무현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진정성의 이름으로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이 발흥할 지도 모른다.

 

노무현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또다른 파퓰리스트 정치인으로 박근혜가 있다. 그녀는  "나에겐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국민 여러분들밖에 없다"는 강력한 수사를 지닌 영남권 스타이다. 그녀와 그 지지자들은 노무현의 죽음으로 열린 인민주의 정치의 공간을 노무현 지지자들과 민주당이 선점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일부 '진보적 민족주의자'도 박근혜의 재평가를 호소한다. (5월 30일자 <시사IN>에 실린 <민중의 소리> 편집국장의 글을 보라.)
 

 

아직 장례가 끝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드러내 놓고 움직이는 것은 아직 노사모 정도이다. 인간 노무현의 죽음이 열어젖힌 정치적 공간이 노사모-민주당과 친박연대의 각축장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노무현의 죽음이 더욱 가슴아프고 허무하게 느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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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와 환멸에 대해 논하기

 

 

 

자끄 동즐로, 주형일 옮김. 2005, <사회보장의 발명>, 동문선.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사회적인 것의 발명>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를 ‘사회보장’이라 옮긴 데에서 옮긴이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사회보장이라는 번역어가 주는 어색함이나 거부감이 거의 없이 읽혀진다. 물론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해야겠다.

 

동즐로는 첫머리에서 68혁명 이후 사람들이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상황을 ‘환멸’로 표현한다. 이들은 지독한 냉소주의로 돌아서거나 완강한 현실주의로 나아갔다. 이러한 ‘정치적 열정의 쇠퇴’에 대해 논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다.

 

사회적인 것, 즉 ‘사회적 관계 및 제도들의 총체’(옮긴이의 설명을 빌리자면)는 어떻게 ‘발명’되었는가? 사회적인 것은 공화국의 수립과 더불어 ‘사회계약’의 형식을 띠고 나타났다. 그리고 이것은 ‘시민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교차점에서 나타나 그 둘을 소멸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공화주의자들이 발명해 낸 것이 연대성 개념인데, 동즐로는 “바로 이 연대성 개념을 통해 주권에의 요구가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한다. 물론 이 연대성 개념은 피억압자들의 연대,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와 같이 무엇에 맞선 연대가 아니라 전체 사회구성원들의 연대, 한 마디로 국민의 연대를 말한다.

 

이렇게 출현한 사회적인 것은 어떻게 확대되었는가? 이 확대는 사회적인 것과 경제의 분리에 크게 힘입었다. 동즐로가 사회적인 것과 경제의 분리 메커니즘으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사회법이다. 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법은 기업들의 온정주의라는 기존 관행에 타격을 입혔고, 이를 통해 “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사회적인 것과 경제의 대립으로 전환”(p.141)하였다. 그렇게 사회적인 것이 비대해지고 정치적인 것이 축소된 사회가 유럽의 복지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복지국가도 1960년대 후반에 위기를 맞는다. 이에 대한 동즐로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인 것, 즉 사회 전체의 연대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들은 책임감 개념을 제쳐 놓았다. … 개인의 삶에서 책임을 제거하면서 사람들은 그것을 국가의 차원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 따라서 복지국가 위기의 중심에는 개인과 국가 사이의 유명한 사회적인 것의 부재가 있다.”(p.202)

 

이 부분을 읽으면서 ‘복지병’에 대한 비판들이 자꾸 떠오르기도 했다. 사회적인 것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방식이 그 외부에서 사유하는 방식보다 익숙한 까닭인 듯하다. 그러나 동즐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국가에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고, 개개인에게 책임을 돌릴 것도 아니며, 모두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 같다. 사실 ‘복지병’에 대한 공격을 중심으로 한 도덕주의 담론은 국가를 중심으로 사회적인 것을 남김없이 파괴하여 개개인들 모두를 기업적 주체로 재편성하고자 했던 신자유주의 세력들의 선제공격 무기가 아니었는가.

 

이처럼 “진보와 더불어 결국 실현되는 것은 주권이 아니었다. 주권의 요구 자체가 개인들의 자율성을 교활하게 부정하는 새로운 지배 형태를 위해 사라졌다.”(p.220) 이 ‘새로운 지배 형태’에 대응하여 나타난 운동으로 동즐로는 ‘개혁주의’ 운동과 68혁명 세력의 ‘극좌파’ 운동을 든다. 먼저 개혁주의 운동은 “복지국가에 의해 도입된 위험한 관습들”을 타파할 것을 내세운다. 이들은 “국가의 혜택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것을 통해 모인 개인들의 추상적 집합”이나 “고립된 개인들과 관계하면서 시민적-도덕적 재무장에 호소”한다.

 

내 생각에 영국의 경우 대처리즘은 ‘복지병’을 타파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사회적인 것에 미련이 남은 사람들의 표심으로 집권한 신노동당은 개인들이 기업이 된 상황에서 전국민의 컨설턴트가 된 국가를 물려받고서는 별 수 없음을 절감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노동당의 행보는 완숙한 신자유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68혁명의 극좌파 운동이 논의된다. 동즐로는 이 운동의 핵심으로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을 꼽는다. 소비사회의 불안정에 대한 이들의 주장은 “개인들이 국가에게 모든 것을 기대도록 만들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않은 채 국가에게 자신들의 욕구를 말하도록 만드는 거의 주권적이지 않은 행동을 없애기 위해 우선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권의 요구를 자율성의 명령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또한 욕망의 억압 등을 강조하였던 비판이론이 도마에 오른다. 이들은 “국가개입의 확대와 거부의 양자택일”밖에 제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그 양자 사이에서 체계이론이 부상했다고 지적한다. 이 체계이론의 세련된 형태는 요즘 범람하고 있는 ‘사회자본’ 논의가 아닐까 싶다.

 

이상의 두 가지 정치담론들은 모두 변화에의 요구를 내세웠다.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인 것이 자율화되면서 정치적 열정이 쇠퇴하였다. 그러나 변화에의 요구는 끊임없이 정치의 위기를 발생시킨다. 여기서 동즐로는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이 다시 한 번 필요하다고 한다. 정치적 열정의 쇠퇴는 정치적 사안들의 재형식화가 필요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정치가 위기를 맞으면서 정치적인 것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다시 한 번 촛불에 대해 생각해본다. 촛불이 꺼진 상황, 이것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라기보다는 환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것에 대해 논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환멸이 복지 없는 복지국가의 위기상황에서 등장했다는 점이다. 사회보장이라는 용어가 사회적인 것을 대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촛불시위를 중간계급의 열망의 표현이라든지, 소비자의 욕망의 정치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지적들이 냉소주의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동즐로의 논의에 기대어 볼 때,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변화에의 요구’는 사회적인 것의 자율화보다는 사회적인 것의 확대 내지는 재편에의 요구가 아니었는지 하고 생각해 본다. 이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다시 촛불이 등장할 때 그것을 ‘정치적 사안들의 재형식화’ 계기로 삼기 어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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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롱함에 대하여

다시금 환멸을 마주하는 현실주의(냉소주의)와 신비주의의 틀로 이야기하자면, 몽롱함이 과도할 경우 신비주의가 되고, 몽롱함이 과소할 경우 현실주의가 되는 듯하다. 사람이 몽롱해지면 안 보이던 것도 보이게 되고, 보이던 것도 안 보이게 되는데, 그런 식의 시차 경험을 할 수 없다면 환멸을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몽롱함을 사람들은 환각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환각이라는 용어에는 중독이라는 용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환각을 둘러싼 이 중독의 한편에는 노동중독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약물중독이 있다. 환각이라는 표현에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환멸을 환각으로 전환하는 효과를 낸다. 또한 그 매개체를 마약으로 부르는 것은 그것을 악마화한다.

 

사실 몽롱함의 매개물이라는 것은 참으로 다양하다. 우선 사람의 신체에 작용하는 생화학적 매개물로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추출된 것들이 있다.

 

사실 옛날 시골 어른들은 이걸 그냥 약이라고 부른다. 육신이 노회하면서 찾아오는 고통,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고통을 자연의 산물의 힘을 빌어 견뎌내는 동시에 길고 긴 시간동안 축적된 기억으로 인해 자주 찾아오는 환멸을 마주하게 해 주는 매개물이었다.

 

이것이 악마화 된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윤리를 침식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노동윤리의 두 측면에 모두 타격을 가한다. 노동력을 쥐어짜내고자 하는 측면과 노동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측면. 그래서인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종종 약쟁이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한편으로는 부자연스럽게 대규모 농장에서 길러진 자연추출물들과 각종 염산화합물들과 같이 인위적으로 조제된 화학약품들이 하나의 산업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노동중독의 반대편에 있는 약물중독을 창출하기 위한 산업이다.
 

 

약물중독을 통한 잉여인간들의 신경계 관리는 노동중독을 강화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요컨대 그들은 노동중독자들의 의욕을 강화하는 반면교사들의 존재 같은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의 중독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그러한 산업에 대한 반대 캠페인마저 전유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셀 수 없이 쏟아져나오는 헐리우드 영화와 미국 드라마들에는 마약에 맞서 싸우는 남성 영웅들이 그토록 많이도 등장한다. 오죽하면 DEA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겠는가.
 

 

사실 이것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총을 든 경찰이다. 경찰의 존재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도 아니면 어딘가 약간 모자란 노동중독자들을 보여주거나 일을 너무도 잘 해서(?) 소득도 넉넉하고 여유도 좀 있는 한량들의 이미지가 범람한다. 사실 내게 가장 무서운 건 마지막 이미지이다. 일을 너무 잘 해서 돈도 많고 시간도 많고 모든 것을 잘 하는 자기관리의 달인들 이미지 말이다. 미국의 경우에 멕시코 이민자들만 없었다면 마약과의 전쟁 같은 담론도 더 이상 필요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중독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신경계를 손상시키지도 않으며, 육체적 피로나 스트레스도 훨씬 덜한 중독이다. 이 자기관리 중독은 더 이상 노동중독이 아닌 것 같다.


 

노동중독이라면 노동시간 단축을 향한 집합적 운동으로 도전할 수 있을 것이고, 개인적 차원에서는 마당이나 화분에 적절한 식물도 좀 기르고 그러면 될 것이다. 일 자체보다도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갖가지 시도들과 정신상태 ... 이건 뭐 현실주의와 냉소주의의 두 측면을 동시에 지닌 중독이다. 환멸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중독이라기보다 환멸을 정복하려는 중독이다. 이러한 중독이 만연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환멸을 논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알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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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의 대중심리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는데 C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대중교통. 그는 버스 타면서 열받았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공감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나역시 경기도 모처에 살고 있기에 ... 승객 입장에서 서울 버스와 **시 버스의 승차감은 현저히 다를 뿐더러 기사의 태도도 확연히 다르다. 대중교통이라는 게 거의 매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서 일종의 심리적 타협을 볼 수밖에 없다.

 

나는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고 타협을 보았는데 우선 운전사와의 관계에 있어서 ... 이놈의 **시 버스 운전기사들은 레이서 수준이다. 자리를 잡지 못하면 서핑하는 기분이 된다. 정말 열받을 때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먼 거리를 정말 빠르게 달려준다. 일종의 적대적 공모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 정리했다. 게다가 임금수준도 낮고 노조도 유명무실 한듯.

 

다음으로 승객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모순 비슷한 것이 역전되어 나타난다. 예전에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옆 자리 사람이 남이라기보다는 같은 목적지 내지는 방향을 향해 가는 동료관계 같은 것이었다. 장거리 버스나 기차라도 타면 삶은 달걀도 나누어 먹고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도 개별화되어 있다. 반면에 대중교통, 특히 버스, 그것도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비좁고 불편하다. 이것도 일종의 모순이라면 모순이겠지. 여유 있는 사람들은 자가용 갖고 다니겠지 하면서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지만) 여기서도 자기 위안 삼으며 타협할 수밖에 없다.

 

오늘 아침만 해도 지하철에서 운좋게 자리 잡고 앉았는데, 앉아서 가는 40분 내내 옆자리 앉은 덩치 큰 아저씨가 다리를 쩍 벌린것도 모자라서 몸을 비비 꼬고 난리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매일 지하철 탈 때마다 서울지하철이든 도시철도든 고객님들께 최상의 서비스를 ... 어쩌구 하는 사장 목소리가 흘러나오는데, 거참 시민 여러분도 아니고 고객님들이라고 불러싸니 신경이 곤두선다. 공공시설 이용하는데 졸지에 소비자가 되었다. 사람들의 불만도 소비자의 권리로 번역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 아침의 문제는 옆에 앉은 아저씨가 흔히 하는 말로 제정신이 아닌 아저씨였다는 것이다. 계속 쌍욕을 중얼거리면서 이새끼 저새끼 찾는다. 조금 무섭지만 책을 펴들고 그 속으로 도망가는 수밖에 ... 광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일전에 S가 광인들의 언행에 대해 했던 말이 생각났다. 1980-90년대의 광인들은 전형적으로 무엇인가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피해망상 징후를 보였던 데 반해 1990년대 후반 경제위기 이후 등장한 거리의 광인들은 불특정한 대상을 향해 적대감을 표출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광기도 이토록 변화시킬진대, 광인들에 의해 정상인의 지위를 얻은 보통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나저나 C가 사는 동네는 좀 특이한 것 같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웬 술취한 사람들이 그렇게 버스에 많이 타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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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에 대하여

오늘 읽던 책에서 한 구절 ...

 

"근본적으로 테러리즘은 그처럼 아름다운 환상을 파괴해 버린 세계를 파괴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러한 현실주의와 신비주의는 모두 현대적 환멸에 대한 명백한 방어이다. 그것들은 이 환멸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그것을 합리화시키고, 우리가 그것에서 빠져나오도록 하기보다는 우리가 그것에 머무르도록 한다. 이러한 현시대의 덫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 환멸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몇 개월 전부터 개인적으로 환멸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문제는 그 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세월마저 하수상하여 나 자신과 세계에 지독한 혐오감이 든다. 그래도 저런 몇 문장이 나를 지긋이 붙잡아주어 다행이다.

 

사람들은 이런 환멸감에 어떻게 대처할까. 사람들이 '환멸에 대해 논하는 방식'도 매우 다양한 것 같다. 황석영의 행보를 두고 다양한 논의들이 쏟아져나오고 있길래 눈팅을 하다가 레디앙에 기고된 목수정의 글을 보았다. 그에 대한 반응, 즉 댓글들에서 '현실주의'와 '신비주의'를 모두 찾아볼 수 있었다.

 

(목수정의 글 내용에 대해) 진중권, 목수정 정서불안적 스토커 ... 홍세화, 정태인 속빈강정 유럽문화 제국주의자들 / (유치한 댓글들에 대해) 재섭다. 오빠새끼들 / (부정적 댓글들의 폭발 현상에 대해) 짐승들에게 먹이를 주지 맙시다. ... ... 환멸에 대해 논해야 할 터이지만 댓글기능을 파괴해 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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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에 대한, 녹색을 위한

녹색에 대해 말하는 두 권의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거칠게 말하자면 한 권은 녹색에 대한 책이고, 다른 한 권은 녹색을 위한 책이다.

 

 

 


 

 

 

 

클라이브 폰팅, 이진아 옮김. 2003, <녹색세계사>, 그물코.


 

이 두툼한 책은 저자의 이채로운 이력부터 시선을 끈다. 폰팅은 영국 대처 정권 시기 국방부 차관보로 일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 내부고발자로 기소되기까지 한 인물이다. 평이한 서술로 선사시대부터 최근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환경에 관련된 풍부한 사례들을 제시해준다는 것이다. 환경문제라 하면 엑손 발데스호나 체르노빌 원전사고 같은 사건들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 책은 상당 부분에 걸쳐 선사시대의 생활방식, 농경의 발생, 국가의 성립과 제국의 등장, 산업화와 식민주의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기술한다. 특히 유럽 식민주의와 제3세계의 약탈 문제 등 서구중심적 서술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식적인 노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폰팅의 저서는 그 미덕만큼이나 의심스러운 부분들을 보여준다. 인간과 환경의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시각은 첫 장에 집약되어 있다. 삼림 벌채라는 환경파괴가 부족 간 전쟁으로 이어져 멸망한 이스터 섬의 사례가 소개된다. 한 마디로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를 섬에 비유한 것이다. 지구라는 행성을 하나의 폐쇄체계로 간주하는 이 관점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들이 이루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다. 지리적 경계와 사회적 경계가 일치했던 이스터 섬의 사례를 내세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저자는 인간사회 역시 하나의 체계로, 그것도 균형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유기체의 의미를 강하게 띠는 체계로 파악한다. 전반적인 서술 속에서 그 체계 내에 다양한 메커니즘이 존재한다거나, 분리되는 영역들이 존재한다고 보는 시각 또한 나타나지 않기에, 그가 인간사회를 개방체계로 파악하는 것도 아니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러브록의 <가이아>처럼 지구의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것도 아니고, 미시사의 영향을 받은 환경사처럼 미물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지도 않는다.

 

한편으로 그는 약1만 년 전에 시작된 농업이 인간을 끊임없는 환경파괴로 떠밀어 가는 저거노트인 것처럼 묘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서구 제국들이 제3세계를 약탈하면서 자연에 대한 착취를 강화했다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폰팅이 견지하는 입장은 ‘환경관리주의’로 요약될 수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 그의 저서에서 인간은 행위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은 특정한 사회적 범주가 아니라, 정책을 통한 관리의 대상이 되는 ‘인구’로 나타난다. 후반부에 가서는 어김없이 한 장에 걸쳐 ‘인구폭탄’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기도 한다. 곳곳에 등장하는 자본주의 경제, 근대과학, 진보 개념에 대한 비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서도 폰팅의 전체적인 시각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다. 생태적 위협에 대응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책은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무력감을 안겨준다.

 

 


 

알랭 리피에츠, 박지현·허남혁 옮김. 2002, <녹색희망>, 이후.


 

반면, 리피에츠는 경제학자답게 핵심적인 문제들을 피해 가지도 않으며, 평이하면서도 엄밀한 개념사용으로 생태적 위협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명쾌하게 제시한다. 애초에 그는 조절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 조절이론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치와 경제의 조응이라는 문제에 착목한 접근법이었다. 그러나 조절이론이 고민했던 정치는 국가정치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리피에츠가 생태주의로의 전향 아닌 전향을 하게 된 것은 이 문제에 대한 고민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의 직함은 녹색당의 경제정책 이론가가 되어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서구의 녹색당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전통적인 좌파-우파 내지는 개량 대 혁명의 이분법에 있지 않을까 싶다. 정통 맑스주의자들이 보기에 생태주의자들은 쁘띠부르주아 시민사회론자들이거나, 전선을 교란시키는 아나키스트들이거나, 사회민주주의 내지는 의회주의자들일 것이다. 특히 의회에 자리 잡은 유럽 녹색당들의 경우 개량적 의회주의자들로 치부되어 무시된 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지구가 아프대요.” 그래서 “내일은 늦어요.” 그러니 당장의 정책적 개입이 중요할 것이다. 물론 이들은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영미권의 환경관리주의와는 구별된다. 어쨌든 거칠게 말하면 리피에츠의 입지는 좌파-우파의 가로축에 잉글하트가 제시한 물질주의-탈물질주의 세로축을 교차시켜 볼 경우 ‘탈물질주의적 좌파’ 어디쯤 위치하지 않을까 싶다.

 

한편, 리피에츠는 세심한 이론적 고려에 있어서도 돋보인다. 물론 폰팅의 책과는 저술의 목적과 초점이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폰팅이 폐쇄체계론적-유기체론적 시각에서 지구환경과 사회환경을 바라보고 있다면, 리피에츠는 사회이론의 핵심에 위치한 구조-행위 문제를 생태주의와 맑스주의라는 두 관점을 통해 고찰한다. 물론 그도 ‘균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그는 그 개념이 적용되는 체계로서의 지구, 즉 자연계와 사회세계를 분명히 구분한다. 그는 먼저 구조에 방점을 둔 극단적 설명방식으로 신학적인 초월적 접근법을 지적한다. 일종의 숙명론인 이 시각에서 인간 행위는 의미가 없다. 이에 따르면 어차피 생태적 대재앙이 덮쳐올 것인데, 나 하나쯤 뭘 해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주장도 가능하다. 다양한 생태주의들 중에서 유기체로서의 지구를 유일한 객체이자 주체로 바라보는 시각, 그러니까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맑스주의로 치면 계급결정론이나 혁명적 대기주의 정도가 될 것이다. 반면, 행위에 방점을 둔 극단적 설명방식으로는 칸트의 내재적 접근법이 지적된다. 한 마디로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입장이다. 생태주의라 하기엔 민망하지만, 환경에 착목하는 시각들 중 환경보호론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나아가 이와 관련한 부정적 양태로는 님비현상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맑스주의라 하기엔 민망하지만, 노동운동과 관련된 입장들 중에서는 생디칼리즘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나아가 이와 관련된 부정적 양태로는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서비스 노동조합주의 내지는 정규직 이기주의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리피에츠의 이론적 시각에서 구조와 행위는 무엇에 의해 매개되는가? 바로 인간의 욕구(needs)이다. 물론 이 욕구는 역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보다 정교하게 제시된 논의를 최근에 읽은 서영표의 <런던코뮌>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하는 생태주의의 이론적-실천적 원칙들로는 자율, 연대, 책임, 민주주의가 제시된다. 나아가 그는 흥미롭게도 생태주의와 맑스주의의 공통점 및 차이점에 대해 논한다. 공통점으로는 이론적 측면에서의 총체적 시각, 실천적 측면에서의 국제주의가 거론된다. 이러한 시각은 생태주의에서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지구적으로 행동하고 지역적으로 사고하라”라는 두 구호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차이점은 생산력에 대한 관점이다. 자본주의 체제와 관련하여 생산력보다는 생산관계에 방점을 두는 이 시각에서는 알튀세르의 영향이 드러난다. 물론 그는 ‘맑스주의’라는 표현을 극구 사양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전반적인 그의 논의를 (비-생산력주의적) 생태-맑스주의 정도로 불러두고 싶다.


 

맑스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탈식민주의 등등 우리가 사는 세계에 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이론과 운동들은 참 많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현 시점에서는 각각의 시각에서, 또는 각각의 분야에서의 전문적인 논의 및 실천들보다는 느슨하더라도 이러한 각각의 시각들을 연결지어 현실에 문제들에 거칠게나마 적용해보는 담론 및 실천들이 쏟아져나와야 할 필요성이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환경문제와 관련한 폭넓은 이슈와 사건들을 짚어주는 폰팅의 <녹색세계사>와 생태적 위협의 문제들을 어떻게 사회변혁과 관련지어 사고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시각을 제시해 주는 리피에츠의 <녹색희망>은 두 권 한 세트로 읽기 딱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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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자유주의의 발견

우연찮게 손에 들어오게 되어서 <자유의 권력들>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제 겨우 몇 페이지 넘겼을 뿐이지만 ... 잠깐 훑어보는 가운데 우선 "변화"에 대한 논의가 눈에 띤다. 변화란 인민의 주권 같은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관계의 그물망이 재편되면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것은 미세한 변화들의 효과로 갑자기 나타난다는 ... 주로 푸코의 논의에 의지하면서 글쓴이는 그것을 "분자혁명"과 연결짓는다.

 

국가 중심적 분석에 대한 경계도 눈에 띤다. 오래 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 미국의 경우 1960-70년대에는 다원주의적 정치철학이(롤즈나 왈쩌 같은 이들이 떠오른다) 부상하다가 1980년대 들어서는 국가중심적 분석 경향으로 회귀했다고 지적하면서 거버넌스 이야기를 꺼낸다. 이른바 거버넌스의 사회학이라는 것은 정부(거번먼트)들 간의 협치, 공치를 제시하는 만큼, 국가중심적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던 중 ... 가장 놀라웠던 것은 (최근의 이론적 흐름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현실자유주의"라는 표현이었다. 현실사회주의라는 표현에는 익숙해 있으면서 왜 현재에 이르는 자유주의 사회에 대해서는 그런 개념을 통해 파악해 보지 못했던 것일까. 서구 자유주의 역시 그 이념 그대로 실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망각하기 쉬웠던 것 같다. 암튼 19세기 들어서 "현실자유주의" 국가는 사람들을 일대일로 관리하는 동시에 덩어리로 다루기도 하면서 곳곳에 스며들었다는 듯하다.

 

일단 좀더 진득하게 읽어봐야 쓰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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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촛불, 촛불

80년대 민중가요 중 "횃불을 들자 ... 어둠을 밝히는 횃불을 들자" 그런 노래가 있었다. 최근의 촛불은 그 어둠이 무엇인지에서 조금 다른 것 같다. 그것은 더이상 군주의 뒷편에 드리워진 민중의 그늘이 아닌 듯하다. 그 어둠은 개인들의 내면의 그늘인 것일까, 촛불이라는 말들이 놓여지는 장기판인 것일까.


 

그렇게 오래 전까지 거슬러 갈 필요는 없지만, 세계적 차원에서의 68혁명이 일단락된 지 20여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한번쯤 되새김질 해볼 만하다. 최근에 읽은 <혁명가-역사의 전복자들>에서 홉스봄은 그야말로 '존경스러운' 공산당원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68혁명의 열정을 자신이 개념화했던 '원초적 반란'에 빗댄다. 홉스봄은 원초적 반란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근대적 사회운동, 즉 조직화된 움직임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 68혁명의 경우 마피아나 카모라처럼 갖다 버릴만한 원초적 반란은 아니라고 본다. 근대적 사회운동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학생들의 반란을 아나키즘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맑스주의가 이성에 중심을 둔 반면, 아나키즘은 감성에 중점을 둔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아나키즘은 이론적 측면에 취약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물론 40여년 전에 쓰여진 그의 글들은 보다 성숙해졌지만 예전에 비해 근엄해진 듯한 최근의 글들, 그러니까 <폭력의 시대> 등에서 나타나는 어조와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그의 출발점인 '원초적 반란'(다른 말로 다른 사회조직의 상을 결여한 혁명적 전통주의)의 개념은 적어도 나에게는 좋은 참고가 된다. 지난해 광장에서 타올랐다가 꺼졌느니, 아직 곳곳에서 타오르고 있느니, 의회로 진군했다느니 하는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촛불은 일종의 '원초적 반란'으로 보인다.
 

참, 논쟁에 대해 덧붙이자면, 한동안 광장의 촛불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대의제 정치에의 개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가, 대중들의 욕망에 주목하면서 촛불 자체가 애초에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논의가 부상했던 것 같다. 그러한 가운데 꿋꿋이 거리에 촛농을 더 뿌려야 한다는 아나키스트들도 건재했다.

 

최근 조정환과 이택광의 논쟁도 이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정환이 다중의 역능의 가능성을 강조하며 '자율'을 내세운다면, 이택광은 중간계급의 열망을 강조하며 '욕망'을 내세운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둘 간의 논쟁은 아나키즘-대의제 개입 간의 논쟁과 비슷해 보인다.
 

자율을 강조하는 시각에서 보기에 중간계급 욕망의 한계를 주무르는 논의는 촛불을 든 주체들의 내면에 정부(국가)가 이미 자리잡고 있다는 부당한 전제를 내세우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이택광의 논의가 제도정치에의 개입을 의도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촛불의 주체들로부터 반지성주의를 발견하려 애쓰는 모습이 부적절하게 느껴질 뿐이다.
 

 

다시 홉스봄으로 돌아가자면, 내가 보기에 한국사회의 촛불이 어느 정도 선에서 원초적 반란이자 아나키즘적 요소를 보였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감성적 한계를 지적하는 홉스봄의 논의에는 동감은 하지만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원초적 반란의 가치를 역사적 근거와 기억의 측면에서 평가하고 싶다. 그것이 의적이든, 천년왕국운동이든, 농민반란이든, 68년의 학생혁명이든 말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저항의 역사적 근거를 마련해준다.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는 역사적 기억을 반복적으로 구성해준다. 촛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말하자면, 촛불을 태울 때 화끈하게 불태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2008년 거리에 촛불이 있었다. 그것은 다시 타오를 수 있다. 그것이 타오를 만한 이유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쉬이 잊혀지는 것은 이택광의 지적처럼 대중들의 반지성주의 경향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의 많은 지적들에 동감하면서도 아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망각의 조건들에 대한 공격은 촛불을 든 주체라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해야 한다. 물론 그곳이 정권이나 의회라는 것만은 아니다. 그 장소가 우리들의 일상이라면, 그 일상이 구조화되는 조건들을 좀더 명확히 밝혀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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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포트 광부의 아이들

 

 

 

사진은 사북이나 도계가 아니라 1984년 영국 잉글랜드 뉴포트에서 파업중이던 탄광노동자들의 아이들이다. 영국은 광부들에게 실업수당을 받도록 만들 것이 아니라, 석탄산업을 되살려야 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다. 이미 한물 가버린 산업을 되살리라고 요구하니 아무리 석탄 자체가 경제성이 있었다 한들 먹혀들었을까나. 그런 조건이 중요하긴 하지만, 물론 다는 아니다.


누구에게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찡해오는 그런 이름이 있다. 한 사람의 이름일 수도 있고, 여러 사람들의 이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런 이름은 광부인데, 이 이름에 대한 낭만적 집착은 좀처럼 버리기 힘들다.

 

영국의 광부들을 다룬 영화들로는 <브라스트 오프>와 <빌리 엘리어트>가 대표적인 것 같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빌리>에는 마크 볼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매력이 있지만, 광부'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나의 후진 감수성을 양껏 잡아당기지는 못한다.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의 전부였던 광부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까지 아들을 밀어주고, 이들 부자는 '발레'로 상징되는 '남성성의 포기'를 택함으로써 파업대오를 등진다.


광부들의 남성중심주의와 탄광촌 공동체의 전형에서 벗어나는 아들의 성적 지향, 파업대오의 공동체 관계와 아버지-아들이라는 가족관계/개인 간의 관계, 탄광이 자리잡은 '지방'과 왕립발레학교가 위치한 '중앙' ... 이러한 장소들 간의 묘한 긴장이 영화를 본 이들을 당분간 괴롭힌다.
 

반면, 마크 허먼 감독의 <오프>는 좀 ... 투박한 맛이 있다. 사실 이 영화에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흘러간 옛노래를 다시 '틀어주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실제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그림소프 탄광 밴드'가 정말 광부스러운 관악합주 연주를 영화 내내 들려주기 때문이다.


<빌리>와는 달리 영화는 시종일관 "남자가 기죽으면 쓰겠어"라는 태도를 보여준다. 물론 폐광을 앞둔 탄광촌의 브라스 밴드에 다시 열정을 불어넣는 것은 글로리아(타라 핏제럴드)라는 마을 출신 여성이다. <빌리>와는 달리 주인공들의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인물이 지역사회 외부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되돌아온다. (<오프>의 경우에는 "대니 보이" 같은 선곡에서도 지방색의 강조가 드러난다.) 더구나 그녀는 탄광의 경제성 평가를 위해 '회사 쪽'으로 파견을 나온 사무직원이다.
 

금관악기의 투사들이 마지막까지 보는 이의 눈물을 자아내도록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데 결정적인 것은 글로리아의 무성화 내지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의 포기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글로리아가 회사 쪽에서 일하는 것이 밝혀지자 밴드 내에 갈등이 일어난다. 이 갈등을 넘어서고 '회사 쪽'에서 일함에도 그녀를 끝까지 밴드의 일원으로 남게 하는 것은 그녀가 '앤디(이완 맥그리거)의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둘 간의 개인적 관계는 단지 몇 초간의 주목을 받을 뿐이다.


어쨌든 이 밴드의 남성으로서의 자부심은 막판에 가면 롯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과 엘가의 "위풍당당"이라는 선곡으로 깔끔히 마무리된다. 사실 <빌리>보다 <오프>에 더 마음이 가는 이유는 음악 외에도 <오프>가 폐광이라는 동일한 상황 속에서 개인 간의 관계보다는 서로간의 관계에 애정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세계가 '남자들'만의 세계로 남지만 않는다면 광부라는 이름에 더 찡했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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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와 연구대상

찰스 라이트 밀즈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동자들에 대해 연구하면서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 개선에 기여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착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맞는 말이기도 하나, 이것 참 곤혹스런 말이다. 정말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일까?

 

요즘 세태를 봐서나, 개인적으로나 연구 대상에 다가가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질적방법이니 무슨 방법이니, 연구대상을 연구참여자라 부르니 해도 일단은 대상화라는 걸 거치기 마련인 것은 마찬가지다.

 

지식인으로서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이들을 연구할 때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보다, 그들을 최대한 대상화하지 않으려는 고려를 하면서 그들과의 공감을 통해 타자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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