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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촛불, 촛불

80년대 민중가요 중 "횃불을 들자 ... 어둠을 밝히는 횃불을 들자" 그런 노래가 있었다. 최근의 촛불은 그 어둠이 무엇인지에서 조금 다른 것 같다. 그것은 더이상 군주의 뒷편에 드리워진 민중의 그늘이 아닌 듯하다. 그 어둠은 개인들의 내면의 그늘인 것일까, 촛불이라는 말들이 놓여지는 장기판인 것일까.


 

그렇게 오래 전까지 거슬러 갈 필요는 없지만, 세계적 차원에서의 68혁명이 일단락된 지 20여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한번쯤 되새김질 해볼 만하다. 최근에 읽은 <혁명가-역사의 전복자들>에서 홉스봄은 그야말로 '존경스러운' 공산당원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68혁명의 열정을 자신이 개념화했던 '원초적 반란'에 빗댄다. 홉스봄은 원초적 반란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근대적 사회운동, 즉 조직화된 움직임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 68혁명의 경우 마피아나 카모라처럼 갖다 버릴만한 원초적 반란은 아니라고 본다. 근대적 사회운동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학생들의 반란을 아나키즘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맑스주의가 이성에 중심을 둔 반면, 아나키즘은 감성에 중점을 둔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아나키즘은 이론적 측면에 취약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물론 40여년 전에 쓰여진 그의 글들은 보다 성숙해졌지만 예전에 비해 근엄해진 듯한 최근의 글들, 그러니까 <폭력의 시대> 등에서 나타나는 어조와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그의 출발점인 '원초적 반란'(다른 말로 다른 사회조직의 상을 결여한 혁명적 전통주의)의 개념은 적어도 나에게는 좋은 참고가 된다. 지난해 광장에서 타올랐다가 꺼졌느니, 아직 곳곳에서 타오르고 있느니, 의회로 진군했다느니 하는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촛불은 일종의 '원초적 반란'으로 보인다.
 

참, 논쟁에 대해 덧붙이자면, 한동안 광장의 촛불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대의제 정치에의 개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가, 대중들의 욕망에 주목하면서 촛불 자체가 애초에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논의가 부상했던 것 같다. 그러한 가운데 꿋꿋이 거리에 촛농을 더 뿌려야 한다는 아나키스트들도 건재했다.

 

최근 조정환과 이택광의 논쟁도 이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정환이 다중의 역능의 가능성을 강조하며 '자율'을 내세운다면, 이택광은 중간계급의 열망을 강조하며 '욕망'을 내세운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둘 간의 논쟁은 아나키즘-대의제 개입 간의 논쟁과 비슷해 보인다.
 

자율을 강조하는 시각에서 보기에 중간계급 욕망의 한계를 주무르는 논의는 촛불을 든 주체들의 내면에 정부(국가)가 이미 자리잡고 있다는 부당한 전제를 내세우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이택광의 논의가 제도정치에의 개입을 의도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촛불의 주체들로부터 반지성주의를 발견하려 애쓰는 모습이 부적절하게 느껴질 뿐이다.
 

 

다시 홉스봄으로 돌아가자면, 내가 보기에 한국사회의 촛불이 어느 정도 선에서 원초적 반란이자 아나키즘적 요소를 보였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감성적 한계를 지적하는 홉스봄의 논의에는 동감은 하지만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원초적 반란의 가치를 역사적 근거와 기억의 측면에서 평가하고 싶다. 그것이 의적이든, 천년왕국운동이든, 농민반란이든, 68년의 학생혁명이든 말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저항의 역사적 근거를 마련해준다.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는 역사적 기억을 반복적으로 구성해준다. 촛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말하자면, 촛불을 태울 때 화끈하게 불태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2008년 거리에 촛불이 있었다. 그것은 다시 타오를 수 있다. 그것이 타오를 만한 이유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쉬이 잊혀지는 것은 이택광의 지적처럼 대중들의 반지성주의 경향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의 많은 지적들에 동감하면서도 아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망각의 조건들에 대한 공격은 촛불을 든 주체라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해야 한다. 물론 그곳이 정권이나 의회라는 것만은 아니다. 그 장소가 우리들의 일상이라면, 그 일상이 구조화되는 조건들을 좀더 명확히 밝혀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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