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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은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소회

최근 한동안의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의 인기는 웬지 집단적 페티시즘처럼 느껴진다. 나도 그 자장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조금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언제부턴가 가수들이 TV에 출현해서 '우리 회사'라든지, '사장님'이라는 단어를 거리낌없이 구사하는 걸 보면서 약간 무서워진다. 한편으로 소시와 원걸을 둘러싼 현상들을 보고 있자면 나이주의의 한 단면이 느껴진다. ... 요즘 젊은 사람들의 추세에 뒤떨어지면 안 된다 ... 그런 감성을 마케팅에 잘 활용한 듯하다.


두 경쟁사 간의 대결구도 식으로 재현된 것도 그렇고 ... 무대에서 '줄도 잘 맞추는' 엘리트 이미지의 소녀시대와 약간 발칙한 구석이 귀여움을 더해주는 원더걸스의 뒤에는 이모씨와 박모씨라는 포주가 있다.
 

어디서든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를 싫다고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은 주로 나같이 록큰롤을 좋아하는 얼빠진 사람이 아닐까 싶다. 재즈나 클래식 팬들은 아예 관심이 없으니까.


그러나 록큰롤이 일상에 파열구를 내려 했던 실험은 90년대 초반 시애틀로 끝난 듯하다. 물론 지금도 나는 매년 4월 8일에 동쪽을 향해 잠시 묵념을 하곤 하지만, 커트 코베인의 죽음은 무엇보다도 끝이 보이지 않는 무기력함의 징표다.
 

펄잼의 경우엔 독점기업 티켓마스터와 싸웠네 어쩌네 하지만, 재판 걸어제끼는 아주 미국적인 소비자 권리 방어 방식이었다. 그들의 첫 앨범 중 "Even Flow"(그저 흘러가네)라는 곡을 참 좋아하는데 노랫말이 전하는 메시지는 노숙자들도 사람이다. 미친 놈들도 아니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게 그들 탓만도 아니다. 이런 정도다. 제2의 부르스 스프링스틴이란 수사가 딱 들어맞는다. 나는 그들의 진정성의 정치를 너무도 좋아하지만, 그것이 일년 내내 유효한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나에게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이들 두 집단은 상징적 의미가 강하지만, 개인적인 선호에 따르자면 브라운아이드걸스를 추가하고 싶다)가 자극하는 로리콘도 일년에 며칠은 매우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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