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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포트 광부의 아이들

 

 

 

사진은 사북이나 도계가 아니라 1984년 영국 잉글랜드 뉴포트에서 파업중이던 탄광노동자들의 아이들이다. 영국은 광부들에게 실업수당을 받도록 만들 것이 아니라, 석탄산업을 되살려야 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다. 이미 한물 가버린 산업을 되살리라고 요구하니 아무리 석탄 자체가 경제성이 있었다 한들 먹혀들었을까나. 그런 조건이 중요하긴 하지만, 물론 다는 아니다.


누구에게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찡해오는 그런 이름이 있다. 한 사람의 이름일 수도 있고, 여러 사람들의 이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런 이름은 광부인데, 이 이름에 대한 낭만적 집착은 좀처럼 버리기 힘들다.

 

영국의 광부들을 다룬 영화들로는 <브라스트 오프>와 <빌리 엘리어트>가 대표적인 것 같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빌리>에는 마크 볼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매력이 있지만, 광부'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나의 후진 감수성을 양껏 잡아당기지는 못한다.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의 전부였던 광부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까지 아들을 밀어주고, 이들 부자는 '발레'로 상징되는 '남성성의 포기'를 택함으로써 파업대오를 등진다.


광부들의 남성중심주의와 탄광촌 공동체의 전형에서 벗어나는 아들의 성적 지향, 파업대오의 공동체 관계와 아버지-아들이라는 가족관계/개인 간의 관계, 탄광이 자리잡은 '지방'과 왕립발레학교가 위치한 '중앙' ... 이러한 장소들 간의 묘한 긴장이 영화를 본 이들을 당분간 괴롭힌다.
 

반면, 마크 허먼 감독의 <오프>는 좀 ... 투박한 맛이 있다. 사실 이 영화에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흘러간 옛노래를 다시 '틀어주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실제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그림소프 탄광 밴드'가 정말 광부스러운 관악합주 연주를 영화 내내 들려주기 때문이다.


<빌리>와는 달리 영화는 시종일관 "남자가 기죽으면 쓰겠어"라는 태도를 보여준다. 물론 폐광을 앞둔 탄광촌의 브라스 밴드에 다시 열정을 불어넣는 것은 글로리아(타라 핏제럴드)라는 마을 출신 여성이다. <빌리>와는 달리 주인공들의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인물이 지역사회 외부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되돌아온다. (<오프>의 경우에는 "대니 보이" 같은 선곡에서도 지방색의 강조가 드러난다.) 더구나 그녀는 탄광의 경제성 평가를 위해 '회사 쪽'으로 파견을 나온 사무직원이다.
 

금관악기의 투사들이 마지막까지 보는 이의 눈물을 자아내도록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데 결정적인 것은 글로리아의 무성화 내지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의 포기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글로리아가 회사 쪽에서 일하는 것이 밝혀지자 밴드 내에 갈등이 일어난다. 이 갈등을 넘어서고 '회사 쪽'에서 일함에도 그녀를 끝까지 밴드의 일원으로 남게 하는 것은 그녀가 '앤디(이완 맥그리거)의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둘 간의 개인적 관계는 단지 몇 초간의 주목을 받을 뿐이다.


어쨌든 이 밴드의 남성으로서의 자부심은 막판에 가면 롯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과 엘가의 "위풍당당"이라는 선곡으로 깔끔히 마무리된다. 사실 <빌리>보다 <오프>에 더 마음이 가는 이유는 음악 외에도 <오프>가 폐광이라는 동일한 상황 속에서 개인 간의 관계보다는 서로간의 관계에 애정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세계가 '남자들'만의 세계로 남지만 않는다면 광부라는 이름에 더 찡했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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