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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심해지는 건망증

지난 주말 이틀 동안 무려 두 차례나 냄비를 태워먹었다. 몇 년 전쯤, 그때만 해도 종종 찾아뵙기도 하곤 했던 어머님이 자꾸만 냄비, 주전자를 태워먹는 것을 보고서는 혹시라도 더 연로하시면 치매라도 찾아오는 게 아닐까 무척 겁먹었던 적이 있는데, 요즘엔 내가 그러고 앉았다. 토요일 저녁에는 미역국을 끓인다고 가스불에 올려놓고선 깜빡 했다가 탄내가 진동하고서야 알아챘다.

 

다행히 미끈미끈한 해조류여서인지 박박 문질러 닦아내니 냄비는 쓸만 한 것 같은데다 내가 건망증이라는 생각까지는 안 했다. 그런데 일요일 저녁, 오뎅국을 끓이려 올려둔 동일한 냄비를 완전 복구 불능 수준으로 태워먹었다. 뭔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곧바로 동네 DC백화점에 달려가 10,800원 주고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냄비를 사들고 왔다.

 

이 일을 계기로 지난 1년여 간의 시간을 돌이켜보니 내 건망증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던 듯하다. 작은 일들부터 역사적 사건들까지 뭔가 머리속이 하얗게 되어 당췌 기억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곰곰히 생각을 해 봐도 잘 모르겠고 무의식적으로 내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실 자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 블로그가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던 듯하다. 부조리한 현실을 토해내고픈 욕망이 가장 질 나쁘게 나타나는 게 망각일진대, 좀 대책을 세워봐야 할 듯하다. 일단, 당분간 국을 안 끓여먹어야겠다. 뭐 더 좋은 방법은 ... 생각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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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하는 방구석에서

 

 

사람은 먹어야 살지만, 먹기 위해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사는 데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하고, 또 사는 데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먹지 않거나 또 다른 방법으로 사는 것을 그만두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몹쓸 구석이기도 하지만, 그 의미 자체가 감당하기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라면 그 의미들을 텅 비워 버리고 잊으려 애쓰기도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하루 하루 살아가며 접하는 일상 세계는 더 이상 '우리 동네'가 아니라 '지구촌' 이지만, 뉴욕, 런던, 파리를 '우리 동네'로 생각할지언정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이나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를 '우리 동네' 쯤으로 생각하지는 않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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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륨을 높여 그의 노래를 들으며

 

  

 

 

 

 

혼자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이런 밤엔 나즈막한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을 걸어주는 듯한 라디오가 듣고 싶다. 그래서 라디오를 듣다보면 또 뭔가 뜨뜻미지근해져 버린다. 또 그래서 생각이 나는 것은 영화 <볼륨을 높여라>(Pump up the volume, 1990)에서 나오는 마크의 해적방송처럼 두근두근거리고 화끈한 무언가이다. 생각해보면 <볼륨을 높여라>라는 영화는 신경증이 도처에서 폭발했던 1990년대의 서곡이었다. 영화에선 젊디젊은 크리스천 슬레이터가 주연을 맡아 치기어린 남성성을 내보이면서도 풋풋하고 섬세한 주인공을 연기했더랬다. 결국 경찰과 연방통신위원회에 연행되어 가면서도 수줍게 던진 마크의 한 마디는 "Talk Hard"였다. 영화 속 젊은이들은 중요한 장면마다 아직 맞이하지 않은 90년대의 노래가 아닌 20년전 노래인 "Kick out the jams"에 몸을 흔들어대곤 했다.

 

1990년대의 현실세계에서 젊은이들의 언어는 하드토킹으로 출발했지만 아쉽게도 냉소로 끝나고 말았다. 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의 마지막은 "I deny all"이란 후렴구로 끝났지만, 우리는 끝내 그 구절을 부르지 못했다. 결국 우린 1990년대를 끝낼 수 없었던 것이다. 내 기억에 1990년대를 제대로 끝낸 이는 역시나 1990년대를 채 반도 채우지 못하고 떠나간 커트 코베인이다. 지금도 나는 매년 4월 8일이면 저 머나먼 동쪽 태평양 연안의 축축한 도시를 향해 잠시 묵념하곤 하는데,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최신 관용구는 1994년의 그 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듯하다. 이런 밤 내 마음이 앉아 쉴 곳은 역시 커트의 노래다.

 

영화 <볼륨을 높여라> 이후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대부분 자기만의 채널을 갖게 되었다. 주파수가 아닌 http에 따라 구성된 것이지만 말이다. 묘하게도 <볼륨을 높여라>에서 마크의 친구들은 저마다 방구석에 처박혀 박스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툭 하면 동네 어귀의 넓은 잔디밭으로 자동차를 몰고 나와 한데 모여 방송을 들었다. 그러나 인터넷이라는, 이미 어느 정도는 진부화되어버린 공간은 '공터의 학삐리'들이 모여들기에는 너무도 드넓어 두 발로 서지 못하고 고꾸라지기 쉽상이다. 대신 단 한 순간 주파수를 타고 흘러가버리는 음성과 달리, 우리들의 새로운 채널은 당장이 아니라도 서로에게 기댈 어깨를 내어 줄 가능성이 더 크다. 밤10시 정각, 레너드 코언의 "Everybody knows"로 시작하던 마크의 해적방송은 1990년의 어느 날엔가부터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Talk H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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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들을 위한 송가

 

 

 

 

 

 

계급에 대한 글을 하나 번역하여 포스팅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그 글을 읽다보면 웬지 기운이 빠진다. 글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동의하지만, 거기서 제기하지 않는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적잖이 회의하게 된다. 마치 설명서에 나오는 놀이동산이나 바이킹 해적선 따위가 아닌 독창적인 무엇이지만, 결국은 주어진 레고 블럭을 갖고 만든 피규어일 뿐인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물론 분석적(혹은 non-bullshit) 맑스주의자들의 강점은 모르는 것이나 알쏭달쏭한 것에 대해서는 섣불리 이야기하지 않고, 경험적인 자료에 기반하여 인과적 설명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내가 다 알지~~" 식의 이야기로 들릴 때가 많다

 

라이트의 경우만 해도, 그가 종종 "세계를 해석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테제를 인용하며 하는 이야기들도 ... 어딘가 꼬여 있는 내가 듣기로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긴 한데, 세계를 변화시키려면 세계를 제대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자칭 맑스주의자라는 이들은 세계를 제대로 해석하지도 못하면서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소리만 꽥꽥 질러댄다"는 말로 들린다. 이른바 부르주아 사회과학을 통째로 매도할 것은 아니라는 말도 일단은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사회학이라는 분과학문 정체성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은 끝끝내 거슬린다. 결정적으로는 과학주의에 대한 반대를 가장한 과학주의가 기존에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영역들을 계속해서 비과학적이며 중요하지 않은 영역들로 남도록 만든다.

 

이런 헛소리(bullshit)을 주구장창 늘어놓는 까닭은 ... 과학을 내세우는 이런저런 논의들이 결국 사람 사는 것 또는 역사에 대해 별로 말해주는 것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노래의 힘' 같은 것이 아닐까? 톰 웨이츠의 노래를 듣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그의 노래들은 부르스 스프링스틴, 닉 케이브, 레너드 코언을 뒤섞어 놓은 듯 하면서도 듣는 이의 혼을 쏙 빼 놓거나, 아니면 속이 안좋아질 정도로 거북하게 하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1976년에 발매된 와 1985년 앨범 에 실린 곡들을 좋아하는데, 특히 후자의 앨범은 한 해 전 발표된 스프링스틴의 앨범과 여러 모로 비교가 된다. "Downtown Train"과 "Downbound Train"은 곡의 분위기조차 비슷하다. 그렇지만 스프링스틴의 앨범은 제목부터 "미국에서 태어나서"이지만, 톰 웨이츠는 태생부터가 달리는 택시 안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가 "너희들"의 세계이지 "우리들"의 세계는 아니라는 감수성을 지닌 이들에게 세계에 대한 설명은 눈앞에서는 몰라도 돌아서는 순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렇게 한숨 한 번 내뱉고 돌아선 "우리들"을 불러모아서 다독여주는 노래가 톰 웨이츠의 곡들이다. 요즘 말로 하면 루저들을 위한 송가인 셈인데, 스프링스틴이 주로 '생활전선'에서의 루저를, 레너드 코언이 '주류에의 진입'을 둘러싼 자발적 패배자들을(그는 <아름다운 루저>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닉 케이브가 '정상적인 인간'으로의 분류를 둘러싼 전쟁에서의 패자들을 그린다면, 웨이츠는 총체적인 루저의 정서를 담담히 노래한다. 물론 최근의 루저 논란이나 루저라는 표현조차도 그리 맘에 들지는 않는다. 며칠 전 동네 분식집에서 일요신문을 뒤적이다 본 칼럼에서 한 교수는 루저 담론이 뭔가 싸워보지도 못한 젊은이들을 패배자로 만든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그 말은 틀렸다. 일상의 정치에서건 제도정치에서건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다.

 

물론 젊은 세대들을 위한 노래는 예전에도 많았다. 예컨대 ...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일어서라 대결의 용기로~ 마침내 열려질 미래 전진하라 청년이여~" ... 이런 노래라든지 ... 아뭏든 청춘, 청년학생, 백만학도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노래들이 참 많았던 것 같은데,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젊은 세대들을 '위한' 노래라기보다는, 이들을 '채찍질하는' 노래들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른 뒤 이 '전쟁상태'에서 '루저상태'를 유지하며 그저 나이만 퍼먹어 온 일단의 어정쩡한 이들을 위한 노래가 필요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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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이해하기 - 에릭 올린 라이트

계급 이해하기: 통합적인 분석적 접근을 위하여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
<뉴 레프트 리뷰> 60호, 2009년 11-12월

 

Wright, Erik Olin. 2009, "Understanding Class: Towards an Integrated Analytical Approach",

                                           New Left Review 60 Nov/Dec pp.101-116.

 


1970년대 중반에 계급에 대한 저술을 시작했을 때쯤, 나는 맑스주의와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이 기본적으로 다르며 상호 대립적인 패러다임들이라고 보았다. 나는 맑스주의가 주류 사회과학과는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독자적인 인식론적 전제들과 방법론적 접근법들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나는 수차례에 걸쳐 내 계급분석의 기반을 이루는 논리들을 재고해 왔다.1 물론 나는 여전히 맑스주의 전통 내에서 속해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맑스주의가 ‘부르주아’ 사회학과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포괄적 패러다임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2
예전에 나는 맑스주의 계급분석이 주류 사회학의 경쟁적 접근법들―특히 베버주의적 접근과 주류 계층연구에서 채택된―에 비해 일반적으로 뛰어나다고 주장했었다. 나는 이제 계급분석에 있어서의 이 상이한 접근법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불평등의 미시적 측면과 거시적 측면들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각기 다른 인과적 과정들을 규명해 줌으로써, 모두가 잠재적으로 보다 완전한 이해에 기여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한다. 맑스주의 전통은 광범위한 주요 문제들의 실재적 메커니즘들을 훌륭하게 규명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사상체계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로지 맑스주의 전통만이 그러한 메커니즘들을 규명하는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맑스주의자들에 의한 실제적인 사회학적 연구는 맑스주의에 의해 규명된 독자적인 메커니즘들을 당면한 설명 과제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여타의 인과적 과정들과 결합해야 한다.3 이제 ‘실용주의적 실재론’이 ‘패러다임들의 대격돌’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간결한 논의를 위해 이하에서 나는 계급분석과 관련한 인과적 과정들의 세 가지 묶음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각각의 묶음들은 사회학 이론의 다양한 조류들과 관련된다. 첫 번째 묶음은 계급을 개인들의 삶의 물질적 조건들 및 특질들과 동일시한다. 두 번째 묶음은 특정 개인들이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다른 이들을 배제하면서 경제적 자원들에 대한 통제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방식들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계급은 ‘기회축적’의 과정과 관련된 것으로 규정된다. 세 번째 접근법은 계급을 지배와 착취의 메커니즘들에 의해 구조화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 접근법은 경제적 위치가 특정 개인들이 다른 이들의 삶과 행위에 대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 주는 요인이라고 본다. 첫 번째 묶음은 계층연구에서 취해지는 접근법이고, 두 번째 묶음은 베버주의적 관점이며, 세 번째 묶음은 맑스주의 전통과 관련된다.

 

특질들과 조건들

 

사회학자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계급은 주로 개인적 특질들과 삶의 조건들의 측면에서 이해된다. 성별, 연령, 인종, 종교, 지적능력, 교육, 지리적 위치 등의 특질들은 건강, 투표행위 등에서부터 자녀양육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특질들의 일부는 생득적인 것이며, 다른 일부는 생애과정에서 획득되는 것들이다. 일부는 고정적인 것인데 반해, 다른 것들은 개인이 처한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 의존하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계층연구 접근에서 사람들은 삶의 물질적 조건에 의해서도 범주화될 수 있다. 열악한 연립주택, 안락한 교외 단독주택, 접근성이 제한된 부자동네의 고급 아파트 등의 범주는 물론 비참한 빈곤, 적절한 수입, 터무니없이 막대한 부와 같은 범주도 가능하다. 그리고 ‘계급’은 사람들의 시장경제 내에서의 기회와 선택을 틀 짓는 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한 특질들 및 그들의 물질적 조건에 따라 규정된다. 계급은 단순히 개인적인 특질들이나 그들의 물질적 조건의 어느 한 측면으로만 규정될 수 없다. 계급은 양자 간의 상호연관에 대해 말해주는 한 가지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접근법에서 선진국의 경우 핵심적인 개인적 특질은 교육이다. 그러나 일부 사회학자들은 보다 정의하기 어려운 특질들을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문화적 자원들, 사회적 연결망, 나아가서는 개인적인 동기들까지도 다룬다.4 이와 같은 다양한 특질들과 삶의 조건들을 광범위하게 한 데 묶고, 그 묶음들을 ‘계급들’이라 부른다. 여기서 ‘중간계급’은 충분한 돈과 교육수준을 통해 흔히 말하는 ‘주류’의 삶의 방식(예컨대 여기에는 특정한 소비유형이 포함될 수 있음)에 합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상위계급’은 부, 고소득,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이들을 지칭한다. 반면, ‘하위계급’은 빈곤선을 벗어나 안정적인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 및 문화적 자원들을 결여한 이들을 일컫는다. 끝으로 ‘최하층계급’은 극단적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로서, 안정적인 고용을 위한 기초적인 교육과 숙련을 결여하여 사회의 주류로부터 주변화된 이들을 말한다.
계급에 대한 개인적 특질 접근법을 취하는 사회학자들의 핵심적 과제는 사람들이 자신을 특정 계급에 위치 짓도록 하는 특징들을 어떻게 취득하는지 이해하는 것이었다. 사회학자들이 보기에 각국의 사람들은 경제적 지위와 보상을 주로 유급고용을 통해 취득하였고, 따라서 이러한 전통의 연구에서 핵심적인 초점은 사람들이 노동시장에서의 그들의 일자리에 영향을 미치는 교육 및 문화적 자원을 획득하고 동기를 부여받는 과정에 모아졌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유년기의 삶의 조건들이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접근법은 이른바 ‘계급적 배경’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헌신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계급적 과정의 인과적 논리를 불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내고 묘사해 보면 <그림 1>과 같다.


<그림 1> 계급과 불평등에 대한 개인적 특질 접근법


숙련, 교육, 동기는 개인의 경제적 전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결정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에서 누락된 것은 사람들이 점유하는 위치의, 또는 그러한 위치들의 관계적 성격의 불평등에 관한 진지한 고려이다. 개인들의 교육수준은 그들이 얻는 일자리의 종류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왜 특정 일자리는 다른 것들에 비해 ‘보다 나은’ 일자리인가? 왜 특정 일자리는 개인에게 상당한 권력을 부여하는 데 반해, 다른 일자리들은 그렇지 아니한가? 나아가 어떤 이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는 것과 다른 이들이 그렇지 못하는 것 간에는 일정한 관계가 존재하는가? 계급분석의 나머지 두 접근법들은 개인들이 각각의 위치들에 배정되는 과정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위치들 자체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기회의 축적

 

두 번째 접근법에서 계급은 특정한 경제적 기회들에의 접근과 그로부터의 배제로 정의된다. 여기서는 막스 베버의 작업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 ‘기회축적’ 개념에 초점이 맞춰진다.5 특정 일자리에 고소득과 특전이 부여되는 데 있어서는 현재 그 일자리를 점유한 이들이 자신들의 일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다양한 배제 수단을 지닌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사회적 폐쇄 과정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특정 위치에의 접근이 제한된다. 사회적 폐쇄의 방식 중 하나는 매우 많은 비용이 드는 자격요건들을 만들어내 사람들이 그러한 요건들을 충족시키기에 어렵게 하는 것이다. 교육과 관련한 증명서들이 종종 이러한 성격을 지닌다. 고등교육 졸업장은 고소득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고등교육 졸업자들의 공급이 상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입학절차, 수업료, 저소득층의 거액 대출 위험회피 등은 모두 고등교육과 그러한 자격을 요구하는 일자리에의 접근을 가로막는 경향을 띤다. 만일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이들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방대한 노력이 집중된다면, 그 자체로 상위 교육수준의 가치를 떨어뜨려 버린다. 그 가치는 상당 수준 그 희소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기회 축적의 메커니즘을 도식화하면 <그림 2>와 같다.


<그림 2> 계급과 불평등에 대한 기회 축적 접근법


혹자는 교육수준의 특징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파악하는 데 반대할 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경제학자들은 교육이 사람들을 보다 생산적으로 만들어주는 ‘인적자본’을 형성하며, 이것이 고용주들이 보다 높은 임금을 지불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라 본다. 그러나 높은 교육수준을 갖춘 고소득자들 가운데에서도 생산성은 차이가 나며, 이것 또한 부분적인 사례일 뿐이다. 사람들을 교육으로부터 배제하고 그에 따라 고소득 직종에의 인력공급을 제한하는 다양한 메커니즘들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간단한 사고실험을 통해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보자. 미국의 국경이 개방되어 의학, 엔지니어링 또는 컴퓨터과학 학위를 가진 세계 어느 곳의 사람들도 미국에서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한 자격을 갖춘 인력공급의 엄청난 증대는 기존에 해당 자격을 갖춘 미국인들의 소득수준을 침식할 것이다. 그들의 지식수준과 숙련도가 실질적으로 떨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말이다. 요컨대 시민권은 특정 노동시장에서 한 사람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자격’의 특수하고도 잠재적인 형태인 것이다.
자격의 인정 및 허가는 기회축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그밖에도 많은 제도적 장치들이 다양한 시공간에 걸쳐 특권 및 기득권을 지닌 특정 집단을 보호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특히 남부에서(그밖의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다양한 직종으로부터 인종적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장벽이 존재하였다. 결혼여부 장벽과 젠더에 따른 배제는 20세기에 대부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특정 직종에의 여성 접근 기회를 제한하였다. 그밖에도 종교, 문화적 범주, 생활습관, 억양 등 다양한 요소들이 배제 메커니즘을 구성해 왔다. 그중에서도 아마 가장 중요한 배제 메커니즘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권일 것이다. 사적소유권은 사회적 폐쇄의 기축적 형태로서 고용주 ‘직무’에 대한 접근을 결정한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인수하여 자체적으로 운영하고자 시도한다면, 그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권으로부터의 배제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소유주의 이윤 취득 역량은 그러한 배제를 방어하는 데 달려있다. 따라서 베버주의와 맑스주의 전통의 사회학의 시각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계급분할의 핵심으로 파악되는 것은 공통적인데, 이를 베버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유권의 법적 규제에 의해 강화된 기회축적의 특수한 형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회축적 접근의 시각에서 계급구조를 형성하는 배제 메커니즘은 특권층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 또한 외부자들과의 경쟁으로부터 조합원을 보호함으로써 배제 메커니즘으로 기능한다. 그렇다고 노동조합이 불평등을 증대시키는 데 작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정치적 행위를 할 수도 있고, 여타의 배제 메커니즘에 기인하는, 특히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관련한 불평등을 효과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은 특정 직종에 대한 진입장벽을 형성함으로써 내부자들의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키는 사회적 폐쇄 형태를 일정 정도 창출한다.
계급에 대한 기회축적 접근법을 채택하는 사회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미국사회를 세 가지 계급범주를 통해 파악한다.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권의 보유로 정의되는 자본가계급, 교육과 숙련 획득에 있어서의 배제 메커니즘으로 특징지어지는 중간계급, 고등교육 졸업장과 자본으로부터의 배제에 의해 규정되는 노동계급이 그것이다. 노동계급 중에서도 노동조합에 의해 보호받는 분파는 노동계급 내의 특전적 부문으로 파악되기도 하고, 때로는 중간계급의 구성부문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계급에 있어서의 기회축적 메커니즘과 개인적 특질 메커니즘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전자의 경우 특권적 계급위치에서 획득된 경제적 이득이 그러한 위치로부터 배제된 이들의 불이익과 인과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개인적 특질 접근법에서는 그러한 이득과 불이익을 단지 개인적인 조건들의 결과로 파악한다. 부자는 뛰어난 자질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부자인 것이고, 빈자는 그러한 특질들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특질 접근법에서는 양자 간의 체계적인 인과관계가 없다고 본다. 교육 및 문화적 수준, 인적자본 등 가난과 관련한 특질들을 개선시킴으로써 빈곤을 제거하는 것은 부자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반면, 기회축적 접근법에서 볼 때, 부자가 부자인 것은 부분적으로 빈자들이 가난하기 때문이며, 빈자들이 직면하는 불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그들의 부를 유지하고자 하는 부자들의 시도 때문이다. 여기서 배제 메커니즘의 제거를 통한 빈곤의 소멸은 잠재적으로 부자들의 기득권을 침식한다.

 

착취와 지배

 

계급분석에 있어서 착취와 지배의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추는 접근법은 맑스주의 전통과 가장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이러한 접근법의 계급개념에는 베버로부터 보다 많은 영향을 받은 사회학자들이 주목하는 메커니즘들이 포함되기도 한다.6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그들을 무시하며, 일부는 양자 간의 관련성을 명시적으로 부정하기도 한다. ‘지배’와 ‘착취’(특히 후자의 경우)는 논쟁적인 용어들인데, 이는 해당 용어들이 중립적인 기술적 용어라기보다는 도덕적 판단을 내포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회학자들은 그러한 규범적 내용 때문에 이러한 용어들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하며, 계급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핵심 이슈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배’는 타자들의 행위를 통제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착취’는 피지배자들의 노동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지배가 착취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착취는 특정 유형의 지배와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집단이 어떤 종류의 자원 혹은 위치에 대한 접근을 제한함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것만이 착취와 지배 간의 관계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착취/지배 집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집단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대조적 사례들을 생각해 보자. 첫 번째 단계에서 대토지 소유자들은 공유 목초지의 통제권을 점유함으로써 농민들이 이를 활용하는 데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배타적인 통제의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뜻대로 토지를 활용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취한다. 다음으로 목초지의 통제권을 점유하고 농민들을 배제한 지주들은 농민들을 그 자리에 농업노동자로서 되돌려놓는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지주들은 토지에 대한 접근의 통제(기회축적)뿐만 아니라 농장노동자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노동을 착취한다. 이는 단순한 배제의 사례보다 관계적 상호의존성이 보다 강한 경우인데, 이는 이익을 얻는 자들과 불이익을 겪는 자들 간에 조건들뿐만 아니라 행위에 있어서도 지속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착취와 지배는 착취자와 피착취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지속적인 협력 행위를 요구하는 구조화된 불평등의 형식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계급분석에 대한 각각의 세 가지 접근법에 있어서의 사회적 관계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대조시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계층연구 접근에서는 사람들의 경제적 삶의 조건은 물론 그들의 행위조차도 사회적 관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이는 세 요소들 간의 관계에 대한 최소주의적 접근이다. 베버주의 접근에서는 사람들의 경제적 조건을 배제 관계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보나, 계급이 행위들 속에서 구체화되는 관계들이라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맑스주의 접근은 두 가지 의미에서 관계적 접근인데, 경제적 조건과 행위들 모두에 있어서의 착취와 지배의 구조화 효과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계급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은 <그림 3>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여기서도 베버주의 전통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폐쇄를 강제하는 권력과 법적 규제들, 특히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권이 사회적 위치들의 기본 구조를 규정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기회축적의 핵심적인 효과는 단순한 시장에서의 우위가 아니라, 바로 지배와 착취이다.
이러한 접근법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중심적인 계급분할은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와 통제를 행사하는 자본가계급과 생산수단을 활용하도록 고용된 노동자들 간의 분할이다. 이러한 분석틀 내에서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계급구조상의 여타의 위치들은 이 기본적인 분할과 어떠한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그 구체적인 특징이 파악된다. 예컨대 경영자들은 상당한 지배권력을 행사하지만 동시에 자본가계급에 종속되어 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최고관리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회사에서 상당한 소유권 지분을 확보해 나갈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보다 자본가계급에 가까워진다. 교육수준이 높은 전문직과 기술직 노동자들의 일부 범주들은 현대 경제에서 핵심적인 자원인 지식과 숙련에 대한 통제를 충분히 행사할 수 있고, 따라서 작업과정에서 지배로부터의 상당한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착취당하는 범위를 실질적으로 감소 또는 중화할 수 있다.


<그림 3> 계급과 불평등에 대한 착취-지배 접근법


베버주의와 맑스주의 접근법 양자 모두에서 권력은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한다. 두 접근법 모두에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은 개인들의 단순한 행위가 아닌 권력의 행사를 통해 유지되는 계급구조에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기회축적에 의해 불평등이 창출되는 과정에는 배제를 강화하는 데 활용 가능한 권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착취에 관련되는 불평등에는 처벌수단을 통한 규율의 강화, 노동에 대한 감시 및 감독이 요구된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러한 형태의 권력에 도전하는 사회적 투쟁들은 유리한 계급위치를 점한 이들의 특권에 잠재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

 

세 가지 메커니즘의 통합

 

일반적으로 사회학자들은 연구를 할 때 계급에 대한 이상의 세 가지 접근들 중 한 가지에만 기초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세 가지 접근법을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여길 실질적인 이유는 없다. 이 접근법들을 통합하는 한 가지 방법은 계급구조의 각기 상이한 측면들을 형성하는 핵심 과정들을 규명해 내는 것이다.

 

• 맑스주의 전통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근본적인 계급분할, 즉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분할을 이들 간의 지배와 착취를 통해 규명하고자 한다.

 

• 베버주의 접근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고용에 대한 인력공급을 제한하는 장벽을 창출함으로써 광범위한 노동계급으로부터 ‘중간계급’ 일자리를 구분짓는 핵심 메커니즘으로서 기회축적을 든다. 여기서 핵심 이슈는 누가 배제되는가가 아니라, 중간계급 위치를 점하는 사람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배제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 계층연구 접근은 개인들이 계급구조상의 각기 다른 위치들로 편입되거나 일괄적으로 배제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기회축적 분석이 중간계급 일자리와 연관된 배제 메커니즘들에 주목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계층연구 접근은 어떤 사람들이 그러한 일자리들에 접근하며, 또 어떤 사람들이 안정적인 노동계급 일자리로부터 배제되는가를 설명해주는 개인적 특질들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상의 세 가지 과정들이 작동한다. 국가간 계급구조의 차이는 이 메커니즘들의 다양한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이론적 과제는 각각의 메커니즘들이 연결되고 통합되는 상이한 방식들을 탐구하는 것이며, 경험적 과제는 각각의 메커니즘들과 이들 간의 상호연관의 연구방법을 개발하는 것이다.
통합 미시-거시 모델의 한 사례로서 <그림 4>에 개략적으로 묘사된 모델이 가능할 것이다. 이 모델에서 생산수단, 금융, 인적자본 등 경제적 자원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를 가능하게 해 주는 권력관계와 법적 규제는 사회적 위치들과 연관된 기회축적과 사회적 폐쇄의 구조들을 창출한다. 그 다음으로 기회축적은 세 가지 인과적 효과의 흐름들을 만들어낸다. 첫째로 기회축적은 개인들이 계급 관련 특질들을 획득해 가는 미시수준의 과정을 형성한다. 둘째로 기회축적은 직업과 직무 등 시장관계 내의 입지들의 구조,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분배갈등을 형성한다. 셋째로 기회축적은 생산 내 관계구조를 형성하는데, 특히 지배와 착취 관계, 그리고 이와 관련된 생산영역에서의 갈등을 형성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과적 흐름들의 첫 번째 흐름은 시장 및 생산 내에서의 계급위치들로의 인적 이동으로 이어진다. 개인들의 계급적 특질들과 계급위치가 결합하여 그들의 경제적 삶의 수준에 영향을 미친다.


<그림 4> 통합적 계급분석: 거시 및 미시적 과정

 


다음으로 광범위한 종합 모델에 있어서의 최종 요소가 필요하다. <그림 4>는 외적 구조로서의 권력관계들과 제도적 규준들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이들은 그 자체가 계급갈등과 계급적 과정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불평등의 구조들이 동적인 체계들이며, 개인들의 운명이 단지 그들이 생활에서 겪는 미시 수준의 과정이나 또는 그들의 삶이 자리 잡고 있는 사회적 구조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체계의 궤적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고정된 변인으로서의 주어진 계급구조를 뒷받침하는 권력관계만을 강조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며, 개인들의 운명이 단순히 그들의 특질과 개인적 상황의 기능인 것으로 잘못 파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투쟁들이 관계들 자체의 궤적을 변화시킴을 보여주는 순환적이고 동적인 거시 모델이다. 이것을 매우 단순화된 형태로 도식화한 것이 <그림 5>이다. 고도로 정교화된 계급분석은 이러한 갈등과 변형의 거시 모델을 각각 거시적, 미시적, 중범위 수준의 계급적 과정 모델 및 개인들의 삶과 통합한다. 이러한 모델에서는 계층연구, 베버주의, 맑스주의 접근법의 핵심적 통찰들이 결합될 수 있다.


<그림 5> 동적 거시 모델

 


미국의 계급

 

사회-경제 체계들은 각각의 체계들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권에 수반되는 권리들과 권력들을 강제하는 수준, 그리고 그에 따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계급분할의 성격에 따라 상이하다. 미국은 오랜 시간에 걸쳐 자본주의적 소유에 대한 공적 규제가 가장 약했던 국가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핵심적인 특징들에 반영되어 있다. 매우 낮은 수준의 최저임금이 매우 높은 수준의 착취율을 가능하게 하며, 이것이 아니라면 착취율이 그 정도로 높지는 않을 것이다. 고소득에 대한 낮은 과세율이 자본가계급의 가장 부유한 분파들로 하여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치스러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 조직들이 취약하여 생산 내 지배에 대한 대항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착취와 지배의 축을 따라 볼 때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가운데 미국은 아마도 가장 양극화된 계급분할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간계급과 그 기회축적 메커니즘들을 통한 형성의 문제로 돌아와서, 특히 교육과 관련한 측면에서 미국은 역사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방대한 규모의 중간계급을 지닌 국가였다. 미국은 고등교육이 대규모로 팽창한 첫 번째 국가였고, 오랜 기간 동안 고등교육을 받는 데 있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접근이 개방된 국가였으며, 이에 따라 그다지 많은 자원을 확보하지 못한 이들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미국은 또한 지방 공립 단과대학, 전문대학, 인문계 단과대학, 종합대학, 기타 공립 및 사립 교육기관 등 다층적인 고등교육 체계를 갖추고 있어 사람들이 뒤늦은 시기에도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하여 학위를 취득하고 중간계급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방대하고 다양한 체계는 다수의 중간계급 일자리들의 창출을 뒷받침하였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고등교육 졸업장을 요구하지 않는 미국경제의 핵심 일자리들에의 경쟁을 완화할 수 있었던, 상대적으로 강력한 노동운동에 의해 보완되었다. 이는 그러한 위치에 있던 조직부문 노동자들이 고등교육 자격을 요하는 중간계급 일자리들과 유사한 소득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미국이 압도적인 ‘중간계급 사회’라는 대중적인 수사는 현실과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미국의 고용구조에 있어서 대부분의 일자리들은 배타적인 자격요건에 우위를 부여하지 않으며, 노동운동 역시 비관리직 노동력의 35% 이상을 조직해본 적이 없다. 나아가 최근 수십 년간에는 중간계급의 배제 과정 중 최소한 일부분은 쇠퇴해 왔다. 1970년대 이후 노동운동은 급속히 쇠퇴하였고, 다수의 중간계급 직종들에서 그 일자리와 관련된 자격요건들에 의한 보호 및 보장 수준은 하락하고 있다. 또한 최근의 경제위기는 여전히 자신의 일자리가 중간계급 직종에 속한다고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경제에서 다수의 최상급 일자리들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데에 고등교육, 나아가 후기고등교육 학위가 여전히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대규모의 안정적인 중간계급이 유지될 것이라는 미래 전망은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7
끝으로, 미국의 계급구조는 개인들의 운명에 관련된 특질들이 형성되는 과정의 잔혹함으로도 특징지어져 왔다. 미국의 교육체계는 중간계급 또는 부유층 가정 출신 자녀들의 경우에 비해 가난한 가정 출신의 자녀들은 질적으로 매우 저열한 수준의 교육밖에 누리지 못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이와 같은 빈곤층 대상 공교육의 부족은 빈곤층 가정에 대한 지원 서비스와 사회안전망의 부재로 인한 자격 박탈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미국경제의 급속한 탈산업화와 공장폐쇄에 따라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을 위한 포괄적인 직업훈련 프로그램의 부재는 곧 상당수의 사람들이 현재 노동시장에서 요구되는 종류의 숙련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미국의 계급구조는 그 어느 국가에 비해서도 빈곤과 경제적 한계선에 놓인 이들의 비율이 가장 높다는 점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상의 모든 과정들을 종합해 보면 21세기 초입의 미국 계급구조의 일반적인 상을 도출해 낼 수 있다.

 

• 최상층에서는 극단적으로 부유한 자본가계급과 기업의 관리자 계급이 그들의 경제적 권력 행사에 대한 상대적으로 약한 제약을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호화 소비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 역사적으로 대규모의 비교적 안정적인 중간계급이 개방적이고 유연한 고등교육 및 기술교육 체계를 바탕으로 다양한 종류의 자격요건들을 요구하는 일자리들에서 자리를 잡아 왔으나, 현 시점에서 이들의 안정적인 미래에 대한 전망은 불확실하다.

 

• 과거에는 중간계급과 거의 유사한 안정성과 생활수준을 누리며 노동계급 내에서 상대적 다수를 이루었던 조직화된 노동계급 분파는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 저임금과 상대적인 고용불안정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노동계급 내의 가난하고 불안정한 분파는 노동시장 내에서 일자리를 둘러싼 무한경쟁에 종속되어 있으며,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만을 받고 있다.

 

• 주변화된 극빈층 인구들은 빈곤선 위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일자리들에 요구되는 교육과 숙련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러한 숙련을 획득하는 것을 극도로 어렵게 하는 조건들 속에서 살고 있다.

 

• 인종과 계급 간의 상호작용은 노동빈곤층과 주변화된 인구가 주로 인종적 소수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유형을 띤다.

 

 

종합을 향하여

 

이상에서 제시된 통합적 계급분석틀은 각각 맑스주의 전통, 베버주의 또는 계층연구 접근의 시각에서 작업하는 학자들의 각기 다른 해결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수많은 맑스주의자들에게 주요 과제는 맑스주의 사회과학의 최대 강점이 포괄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는 것에 대한 열망보다는 인과적 메커니즘들의 특수한 배열로 이루어진 그 이론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메커니즘들의 타당성이 다른 이론들에 대한 맑스주의의 탁월함을 강조하는 수사에 의해, 그리고 다른 경쟁적 이론들과 맑스주의의 인식론 및 방법론이 날카롭게 구분됨을 강변함으로써 방어되어 왔다. 그러한 논변들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맑스주의가 사회과학에서 강력한 전통인 까닭은 그것이 일련의 중요한 현상들에 대해 깊이 있는 설명들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지, 그것이 다른 이론적 조류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방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맑스주의를 독자적이고 포괄적인 패러다임으로 정식화하려는 노력은 앞으로도 언제든 가능하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는 맑스주의를 일단의 특정한 문제들, 메커니즘들 잠정적 가설들에 대한 관심으로 규정되는 연구 프로그램으로 보는 것이 보다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통합적 계급분석은 아마도 계층연구 전통에서 작업하는 사회학자들에게 보다 더 험난한 과제일 수 있다. 맑스주의 계급분석은 결국 실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경제구조 내에 위치지어진 사람들의 물질적 삶의 조건들이나 개인적 특질들에 대한 논의들을 포함해 왔으며, 기회축적은 생산의 사회적 관계라는 개념의 통합적 일부를 이루고 있다. 반면, 계층연구가들은 착취의 문제를 전적으로 무시해 왔고, 기껏해야 ‘불이익’에 대해 이야기하는 정도였으며, 그들의 접근법에는 지배조차도 빠져 있다. 착취와 지배를 계급분석의 중심축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사회적 위치들을 점하고 있는 개개인들과는 구별되는 사회적 위치들의 구조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인데, 이것 또한 계층연구와는 꽤나 거리가 멀다.
어떤 의미에서 베버주의자들에게는 이 문제가 가장 쉬울 것이다. 한편으로 대부분의 베버주의 사회학자들은 포괄적인 패러다임을 창출하고자하는 열망을 갖고 있지 않으며, 구체적인 경험적-역사적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 개념들을 느슨하게 연결시킨 풍부한 일람표를 제공하는 이론적 전통에 만족해 왔다. 이 점은 베버주의 사회학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이기도 한데, 기본적으로 베버주의 사회학은 다른 조류의 사회이론으로부터 개념들을 끌어다 쓰는 것에 관대하다. 반면, 베버주의자들은 항상 사회구조 내에서의 권력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으며, 개인들과 구조화된 위치들을 구분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베버주의 계급분석 내에서 착취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지만, 베버주의 범주들의 논리에는 근본적으로 착취 개념을 포괄하는 데 근본적인 장벽이 놓여 있지는 않다.
끝으로 이상과 같은 평가에 바탕한다면, 간단히 말해 마치 우리 모두가 베버주의자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30여년 전 나와 여타의 맑스주의자들의 작업에 대한 프랭크 파킨이 “네오 맑스주의자들은 하나같이 맑스주의로부터 빠져나와 베버주의자가 되려는 듯 보인다”고 비난하며 낙인찍었던 내용 중 하나이기도 하다.8 그러나 나는 이것이 내가 이 글에서 옹호했던 실용주의적 실재론으로부터 도출되는 내용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맑스주의는 그것이 제기하는 일련의 구체적인 문제들, 그 규범적 기초들, 그것이 개발해 낸 독자적인 개념들과 메커니즘들을 바탕으로 사회과학 내에서 여전히 하나의 독자적인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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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맑스주의와 주류 사회과학에 대한 내 견해가 담긴 초기 저술은 Class, Crisis and the State(London, 1978)의 서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이슈들에 대한 주요 후속작업은 Classes(London and New York, 1985), The Debate on Classes(London and New York, 1989), Class Counts: Comparative Studies in Class Analysis(Cambridge, 1997), Approaches to Class Analysis(Cambridge, 2005) 등이다. 이 글의 초고는 2009년 6월 계급을 주제로 요하네스버그 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의 발표문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나는 ‘맑스주의’보다는 ‘맑스주의 전통’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데, 이는 후자의 경우가 포괄적인 패러다임에 더 가까운 것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맑스주의 전통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단순히 사회과학 또는 말랑말랑한 ‘사회학’으로 용해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맑스주의는 다른 이론적 전통들이 무시하거나 주변화하는 일련의 근본적 질문들 또는 문제들을 둘러싼 의제를 조직화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에 연관된 인과적 과정들의 일단의 독자적인 상호연계를 규명하고자 한다는 점에 있어서 여전히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 피에르 부르디외는 계급 관련 특질들 및 개인적 특질들의 목록을 확장하여 여기에 일정 범위의 문화적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는 현대의 주요 사회학자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5. 미국 사회학자들 가운데에서 ‘기회축적’이라는 용어를 가장 명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는 찰스 틸리이며, 이러한 측면은 특히 그의 저서 Durable Inequality(Berkeley, 1999)에서 나타나고 있다. 자본의 유형들과 장(fields)에 관한 부르디외의 작업 역시 기회축적의 과정과 관련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 물론 베버도 지배, 권력, 권위에 대한 정교화된 일반적 논의들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조직 및 국가에 대한 분석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계급 개념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7. 최근 수십 년간의 일자리 양극화의 양상에 대한 논의로는 Wright and Rachel Dwyer, “The Pattern of Job Expansion in the USA: A Comparison of the 1960s and 1990s"(Socio-Economic Review 1(3), 2003 pp.289-325)를 참조할 것.텍스트로 돌아가기
  8. Frank Parkin, Marxism and Class Theory: A Bourgeois Critique, New York, 1979, p.25.텍스트로 돌아가기

우리 동네 담배 가게에는

주말 저녁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담배 한 갑을 사러 슈퍼에 들렀다. "'시가 1mm' 주세요"  하니까 김장을 준비하시는지 카운터(?)에 앉아 눈도 안 마주치고 마늘을 까던 아주머니는 한 귀퉁이에서 3단변신 로봇 완구와 놀고 있던 대여섯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애야, '시가 1mm' 하나 드려라. 거기 그 누런 거" 그러신다. 오랜만에 보는 진풍경에 멍해졌달까, 기시감이 왔달까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소년은 내게 당당히 원 1mm를 내놓는다.

 

당황한 나는 무심결에 "그거 아닌디"라고 해 버렸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힐끗 내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상체를 왼쪽으로 젖히면서 팔을 주욱 뻗어 내가 원하던 담배를 꺼내 주었다. 거기까진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 소년이 마치 주문을 외듯 "아닌디~~ 아닌디~~ 아닌디~~"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녀석의 재기발랄함에 웃음을 지으면서도 얼굴이 살짝 붉어진 나는 약간 긴장하여 내놓으려던 만원짜리 지폐를 도로 넣고 천원짜리 두 장에 동전지갑을 꺼내어 2500원을 맞춰 주고는 황급히 빠져나왔다. 아무 생각 없는 듯 했던 몇십 초 동안 내 신경계는 무엇에 반응했던 것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생각에 빠져 보았다. "그 꼬마는 그 흔한 학원도 안 다니나? 아뭏든 아이가 담배 상품명을 줄줄 꿰고 있는 건 역시 이상하지?" "어렸을 때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청자 한 보루 사러 신작로 저 아래 **네 구멍가게에 가면 옆반 민정이가 미닫이문을 스윽 밀고 나와 담배를 꺼내주곤 했지." 이런 잡다한 것들을 떠올리느라 채 그럴싸한 답을 내어 보기도 전에, 건널목 신호등이 바뀌는 순간 모든 걸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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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것이 없어진 요즈음

나카무라 마사노리. 2005, <일본전후사>, 논형. 中

 

전후 60년의 변화에 대한 저자의 질문에 대해

 

- 후쿠시마현 아이즈 지방 산골의 80세 촌로 요코야마 테츠오(横山哲夫) 옹의 답변

"우리 같은 농사꾼들은 중세 때부터 수백 년 동안이나 낫, 괭이, 쟁기 같은 것으로 농사를 지어왔어. 그러던 것이 경운기며 콤바인이 도입되면서 모조리 바뀌어 버렸지. 옛날에는 가마니를 어깨에 들쳐 메다가 달구지에 실었는데 지금은 용달로 실어 나르면 되니까 힘깨나 쓰는 농사꾼이 없어져 버렸어. 게다가 요즘 농촌 젊은이들은 집에 것을 놔두고 슈퍼에서 야채를 사다 먹어."

 

- 똑같은 질문을 90세인 메구로 도시에(目黒俊衛) 옹에게 했더니

... 옛날에는 축의금이 50전이었는데 지금은 1만엔이다(화폐가치 변화). 7-8명이던 가족이 없어지고 지금은 할머니 혼자 사는 집도 있다. 아기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젊은 부부는 도쿄로 나가버리기 때문이다. 또 요즘에는 맛있는 것이 없어졌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음식에 대한 고마움이 없어졌다. ...

 

뭐, 대략 노인네들의 고리타분한 말들이긴 하지만 ...

"농촌 젊은이들이 집에 것을 놔두고 슈퍼에서 야채를 사다 먹는다"라든지,

특히 "맛있는 게 없어졌다"든지 하는 지적에는 웬지 가슴이 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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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복근과 꿀벅지

예전의 "미남, 미녀" 수준에서 "섹시"의 강조로 넘어가다가 이제는 아예 "누구누구의 초콜릿 복근 공개", "누구누구 꿀벅지 과시" 같이 신체 부위별 감정 및 평가에 이르는 걸 보니 좀 무섭다. 이건 내가 두툼한 똥배에 짤막한 키, 원시인형 얼굴을 지녔기 때문만은 ... 때문이기도 하지만 ... 아무튼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TV없이 살고 있긴 하지만, 가끔씩 분식집에서라도 TV 쇼프로그램을 훔쳐보게 될 때면 어찌나 잘생기고 잘 빠진 사람들만 등장하는지 ... 일본만 해도 참 제멋대로 개성있게 생긴 분들이 자주 출연하는데, 한국에서는 웬만큼 잘생기고 예쁘지 않고서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다. 꼭 연예계가 아니더라도 길거리에 나서면 어찌 그리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이 넘쳐나는지 ... 외모가 달리면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질 정도다.

 

더 무서운 건 '부위별' 수준까지 나아간 외모의 지표들이 '건강' 담론과 접합되는 경우다. 초콜릿 복근이나 꿀벅지를 갖추지 못한 남녀들은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이들이 되고, 나아가서는 사회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한 이들이 된다.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전쟁에 나선다.

 

이처럼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적으로 삼고 싸우게 만들면 죽는 날까지 승자와 패자는 없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스스로마저 적으로 삼는데, 옆 사람 또는 다른 누군가와 경쟁한다는 게 대수롭겠는가. 경쟁은 이미 내면화되었고, 개인의 내면 속에서도 복수의 자아들이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외모 신경 안 쓰고 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 없나? 당신의 마음가짐에 달렸다든지, 신경 안 쓰면 그만 아니냐라든지, 건강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체형관리는 필요하다든지 하는 그런 되도않은 말들 말고 뭔가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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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단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잘 나간다는 뜻인지, 자기 자신을 도울 만큼 이것저것 갖춘 사람에게 운도 따른다는 뜻인지, 자기에의 배려를 실천하는 이에게 자유가 있으리라는 뜻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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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된 대지의 수탈된 돼지, 차우

- 차우는 덫이라는 뜻의 한국말, 영어로는 씹어먹는다(chaw)는 뜻이란다.

 

 


 

 

장규성 감독의 2007년작 <이장과 군수> 이후 심상찮은 영화를 발견(?)했다. <이장과 군수>는 언뜻 보면 엉성한데다 억지로 웃음을 자아내는 닳아빠진 코믹영화였고, 방폐장 유치라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이슈를 끼워넣었지만, 지역사회의 토호 지배와 후견주의의 양상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눈에 띤 영화가 바로 신정원 감독의 2009년작 <차우>였다. 우선 이 영화는 시골구석을 다룬 여느 영화들과 달리 한적하고 공기좋은 시골동네라는 이미지를 애초에 내세우지 않는다. 물론 산골마을을 음침하고 사람들 속도 알 수 없는 무서운 곳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식민주의적 시선이 느껴지지만(봉준호의 <마더>는 끝까지 이러한 시선을 유지한다), 몇 분만 지나면 이것이 일종의 패러디임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인 김순경(엄태웅)은 지방으로 '좌천'되어온 순경이지만, 서울에서 음주단속 하다 취객에게 뺨이나 맞던 그에게 전입해온 산골동네에서의 삶이 자괴감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에겐 임신한 부인과 치매인 어머니가 있다. 바로 이러한 설정이 그로 하여금 식인멧돼지의 출현이라는 당면과제를 해결할 주체로 만든다. 또한 그와 파트너를 이루는 대학원생 변수련(정유미)은 괴수영화에 단골 등장하는 과학자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만년 조교다.

 

김순경이 도착한 산골마을에서는 이장과 결탁한 개발업자가 주말농장 사업을 벌이고 있었고, 그 가운데 식인멧돼지가 나타난다. 한줌밖에 안 될 잉여를 송출할 통로이자, 토호와 이장에게 이익을 안겨다줄 도시사람들의 방문이 위협받게 되자 민관학협력 작전이 시작된다. 그래봐야 어설픈 경찰, 한물간 사냥꾼, 별 도움 안 되는 대학원생이 모인 것이지만. 여전히 당면과제를 해결하는 데 지역주민들이 나서지는 않는다는 문제가 있지만, 그나마 지역사회에서 주변인이자 손녀딸을 식인멧돼지에게 잃은 왕년에 잘나가던 천포수(장항선)가 토착적 지식을 발휘하여 한몫을 하게 된다.

 

식인멧돼지의 탄생 배경을 굳이 일제시대의 실험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까지는 없다 싶었지만, 삶의 터전이 위협받던 와중에 무덤을 파헤쳐 사람 내장 맛을 본 멧돼지가 사람들을 습격한다는 설정에서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약탈'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 더 곤혹스러운 양상들은 중앙에 의해 수탈당하는 지방이라는 구도에서 드러난다.

 

수탈된 돼지의 습격이 코믹하게 그려지는 것은 바로 지방이라는 수탈된 대지를 둘러싼 관계들을 블랙유머로 처리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장과 개발업자가 불러들인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백포수(윤제문)는 엉뚱하게 허를 찔러대고, 동물행동학을 전공하는 도시처녀 변수련은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캐릭터다. 가장 눈에 띤 장면은 느글느글한 신형사(박혁권)가 마을 일을 걱정하면서도 주민들의 담배, 라이터라든지 작은 물건들을 쉴새없이 주머니로 슬쩍 가져가는 장면인데, 이 행위들 또한 그를 파출소 분소로 파견보낸 읍내 경찰서가 지방 내의 또 다른 중앙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식인 멧돼지는 결국 명을 달리하지만, 그 새끼는 살아남아 마지막 장면에서 눈을 부라린다. 수탈된 대지의 수탈된 돼지의 문제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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