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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은 학교에서 맞은 빈곤한 오후

주말에 오랜만에 학교에 들렀다. 채 졸업하지 못한 그 학교. 언제나처럼 혼자서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예전에 학교에서 함께 밥 해먹었던 후배 두 친구를 마주쳤다. 한 친구는 런던에, 다른 한 친구는 호주에 다녀온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더랬다. 한국을 떠나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 ... 거기 좋지" 하며 대충 맞장구쳐 주는 게 전부인 그런 대화를 시작하다 보니 별 수 없이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들 지방학생이던 탓에 자취방 이야기가 나오더니, 한켠에서 5성급 호텔같이 올라가고 있는 대학 건물 이야기로 흘러갔다.

 

한 학기 기숙사비가 350만원이라니 ... 등록금을 합하면 한 학기에 7-800만원은 된 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거기에 포함된 하루 두 끼 식사는 필수사항이란다. 이젠 정말 노골적이구나 싶다. 이건 멀리서 공부하기 위해 온 학생들에게 먹고 잘 곳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쫓아내는 거나 다름없다.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평택의 공장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듯이 이젠 대학에서도 학생들을 밀어낸다. 뭐 오래 된 이야기지만, 이젠 그런 식의 배제에 대해 비난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최근 들어서 맨날 오가는 길만 정신없이 오가다 보니 주면에 오벨리스크가 올라가는지 피라미드가 세워지는지 신경도 못 쓰다가 요즈음에 그런 낯선 느낌들을 많이 받는다. 얼마 전 몇 년만에 가 보게 되었던 이화여대에서도 깜짝 놀랐더랬다. 낡은 공간을 밀어내고 들어서는 건축물들은 용적률을 고려해서 땅 위로 높게, 땅 밑으로 깊이 들어가 지나는 이들에게 위압감을 준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공기가 달라진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예전과는 달리 높아진 천장으로 인해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들과 주눅들어 있는 이들을 분류해 보면 사회경제적 지위도 확연이 차이 날 것 같다.

 

논리정연하게 분석과 비판을 제시하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사회자본에 관한 논의, 특히 불평등과 사회자본을 관련지어 하는 이야기들에 거부감이 크다. 김소진의 소설에 나오는 도시빈민 공동체를 보면 이런 걸 사회자본이라고 부르나보다 하는 게 느껴지긴 한다. 그러나 구룡마을 주민들의 사회자본 축적수준이 타워팰리스 입주자들의 그것보다 높지는 않을 것 같다. 문화자본이나 사회자본은 한편으로 불평등 재생산 기제로 작동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평등 완화 혹은 사회이동의 자원이 된다. 예컨대 노동계급 출신 청년은 이런 저런 교육을 통해 축적한 문화자본을 경제자본으로 태환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쓴다. 하지만 문화자본이든 사회자본이든 경제자본 자체 없이 그것을 축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 문화자본 논의는 자본주의의 체계재생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사회자본 논의와는 맥락이 다른 것 같다. 문화자본 논의의 경우에는 체화된 문화자본과 제도화된 문화자본을 구분하고 있고, 장을 둘러싼 투쟁의 영역을 고려하고 있어 체계 자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자본 관련 논의들은 실재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며, 바람직한지 어떨지도 모를 물화된 공동체 개념을 내세우고 공동체 회복을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축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듯하다. 어쨌든 실제로 문화자본, 인적자본, 사회자본을 축적하는 것과 축적의 주체가 구성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드는 생각이라고는 학생들이 학교 잔디밭에 모여들어 텐트촌을 이루고 사는 건 어떨까 라든지, 학생회가 결식 대학생 무료급식을 해야 하나 라든지 ... 주머니가 빈곤하니 마음도 빈곤해지고 결국엔 머리속까지 빈곤해지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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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뮤지션의) 꿈과 (비루한) 현실

현실주의자이면서도 불가능한 꿈을 지녀야 한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내 삶에 있어서 음악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었다. 살아오면서 주위를 둘러보면, 음악이라는 것이 그 누가 만들고 어디서 흘러나오는가에 관계없이 그저 때에 따라 즐겁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에 대해 어떤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음악은 삶의 구석구석까지 울림을 주어 그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 방향이 부정적이던, 긍정적이던 간에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그러한 계기가 있었던 듯하다. 초등학교 시절, 참치 잡이 원양어선을 타고 떠났던 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면서 각종 ‘외제’ 물건들(물론 싸구려 물건들이었지만)을 가져왔고, 그 중에는 파나소닉 박스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었다. 한 개의 테입 데크와 튜너가 붙어있고, 스테레오 스피커가 있던 그 박스가 방 한구석에 놓여지면서부터 나는 늦은 시간까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가며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가 공고에 다니던 시절 방송반에 있었던 사실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지만(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아직도 벤처스와 폴 모리아를 죽어라 좋아하신다), 그가 탄광에 다니던 시절 오디오를 구입했다가 사기를 당한 일 이후 오랜만에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부터 시골집 창고를 뜯어고친 작은 나의 방에 틀어박혀 나는 배철수, 전영혁 등이 진행하는 음악방송에 미쳐 살게 되었다. 빌보드 차트를 줄줄 꿰고, 용돈을 모아 시내(지방 소도시)에 나가면 단 하나뿐인 레코드 가게에서 카세트 테잎(아직 CD가 나오지 않았던 시절)을 사 모았다. 그러던 중에 인천에 있는 외갓집에 갔는데, 그동안 전혀 신경 안 썼던 사촌 형의 테잎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한 보따리를 싸 들고 왔다. 오티스 레딩, 제임스 브라운부터 레드 제플린, 퀸 등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나의 초등학교 후반부 시기는 미국의 쟁쟁한 뮤지션들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과, 카세트 테잎 수집, 에어체킹(Air-checking,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테잎에 녹음)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그 어느 날, 몽정과 여드름 등 사춘기 시작의 징표를 1-2년 전쯤 벌서 거쳤던 나는 가슴이 온통 두근두근 거리도록 만드는 노래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서태지와 너바나였다. 그리고 나의 단짝친구와 음악에 빠져들면서 또 용돈을 모으고 모았다. 물론 다른 친구들처럼 삥을 뜯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 동네 아저씨네 가축 먹일 풀을 해 주거나 개를 대규모로 기르는 집에 가서 개똥을 치워주는 등의 일을 하고 용돈을 받는 일들도 많이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름도 찬란한 서울의 종로까지 올라가서 지금 생각하면 왕창 바가지를 쓰고 싸구려 펜더 카피 기타를 사들고 왔다. 우리는 곧 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이 때부터 친구 녀석의 집에서 너바나, 오지 오스본 등의 노래를 흉내 내며 즐거워하곤 했다.

 

물론 당시에 우리 지역에는 ‘까까머리(창단 멤버가 모두 깜방에 갔다 와서 이런 이름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저키’ 등의 로컬 밴드(고등학교 ‘형님들’의)가 있었는데, 나와 친구는 메탈리카, 메가데스, 스키드 로, 헬로윈 등의 음악을 카피하면서 노래는 높이 올라가면 잘 부르는 것이고, 기타는 빨리 치면 잘 치는 것이라는 지배적이던 동네 분위기에 그들을 일명 ‘후루꾸’라 부르며 무시하고는 했던 기억이 난다. 개뿔 실력도 없으면서 딴에는 스티비 레이 본을 모르는 ‘형님과 똘마니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았던 것이다. 그렇게 **천 다리 밑에서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노래 부르면서 중학교 3년 시절이 어느덧 지나갔고, 나는 친구와 헤어져 다른 지역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곳곳에서 모인 각기각색인 놈들을 많이 만났는데, 시골구석에서 올라온 나에게는 별의 별 놈들이 다 있는 것으로 비쳐졌고, 음악을 즐겨 듣는 친구들도 더욱 많이 만났다. 게다가 그 동네는 무지 커서 음반가게도 많았고, 나는 곧 직접 수입을 하는 어떤 아저씨의 음반가게에 단골손님이 되기도 했다. 친구들과 모여서 뮤직비디오도 많이 보고, 스쿨밴드에 들어가 기타도 쳤다. 이건 완전히 내가 아니면 누가 뮤지션이 된단 말인가 하는 불가능한 꿈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이다.

 

제도권 학교의 등급과 학년에 따라 내 삶의 시기를 되돌아보는 것은 구역질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새로운 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삶의 변화들을 가져오는 일이라서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대학 진학이 그러한 사건이었는데, 대학교에 와서 나는 순진했다고 할까, 정말 자유가 숨쉬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빨리 깨진 것이 나에겐 행운인지도 모른다. 나는 계속 꾸준히 그 진리와 자유가 남아 있는 공간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비집고 들어가려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무너져 가고 있던 이른바 ‘운동권’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해야 할 일(할 수 있는 일보다는)을 던져주고 있었고, 노래가 불어넣어 주는 열정들을 쏟아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물론 거기에서 나는 새로운 노래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다. 이른바 민중가요. 물론 음악 자체는 투박하고 거친 것이 많았지만, 그것이 주는 힘과 노랫말의 신선함은 나를 공장의 불빛으로 인도했다.

 

이렇게 지금의 나의 모습과 가까워진 가운데 정말 멋진 아저씨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정태춘이다. 이 분의 노래들은 그야말로 전율이었다. 특히나 <한여름 밤>, <황토강으로> 등의 노래들은 가사의 깊이와 음악적인 매력은 나로 하여금 세계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도 추천해주고 싶은 노래꾼으로 정태춘 아저씨를 손꼽게 만들었다.

 

이 가운데에 남미의 이른바 ‘새 노래’(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빅토르 하라의 음악은 한국의 정태춘에 비교할 만큼 나에게 큰 감흥을 주었다.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는 유럽의 식민지 경험과 그 이후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격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몬 볼리바르, 투팍 아마루, 에밀리아노 싸파타에서 카스트로와 게바라, 싸파티스타와 우고 차베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물론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의 정태춘보다 더 클 테지만 말이다.

 

하라는 칠레의 가수로서 그 유명한 아옌데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아옌데 집권 이후에 이른바 ‘인민연합 천일’ 이후 피노체트를 비롯한 반군의 쿠데타 이후 무참히 살해당한 사람이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영상물로는 <칠레 전투>가 있지만, 나의 경우엔 영화운동가인 레이문도 글레이져의 삶을 다룬 <레이문도>라는 기록 영화를 통해 더욱 실감이 났었다. 네루다의 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책 <칠레의 모든 기록>, 역사서로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수탈된 대지>, 까를로스 푸엔테스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등을 통해서 그 사회적 배경은 훨씬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비올레따 빠라, 인띠 이이마니, 빅토르 하라 등등 수많은 인물들이 관련되어 있는데, 이들에겐 모두 잉카 문명 등 라틴아메리카의 정서를 전통 악기와 음계 등으로 민중의 삶과 밀착된 노랫말로 노래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나 1960년대 이후 혁명이 라틴아메리카를 휩쓸면서 저항의 노래가 많이 불리워졌다.
 

결국 1950-70년대의 영미 록 음악과 블루스, 재즈가 비록 나의 무의식에 가깝도록 여전히 어떤 진정성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문화 산업의 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진정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른바 ‘월드 뮤직’에서 훨씬 더 잘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언제부터인가 해 보게 되었다. 그것은 중남미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느끼게 된 것이었다.

 

뮤지션이 되고싶다던 나의 꿈은 비루한 현실로 대체되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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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과 또 다른 그녀들

 

 

도리스 레싱, 서숙 옮김. 2003, <런던 스케치>, 민음사.

 

 

 

무척이나 런던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려 내는 스테파니 거리, 세인트 존스 우드, 트라팔가 광장은 물론이거니와 런던의 지하철 역, 거리의 카페와 공원, 병원의 응급실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어떤 공간일지 한 번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여행자의 눈에 비친 풍경과 삶의 터전으로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는 점도 되새겨 보았다. 바로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런던 스케치>을 읽다 보면 공간이 이야기를 압도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녀의 단편집은 '이야기'와 '스케치들'이라는 부제에 맞게 “데비와 줄리”, “흙구덩이”와 같은 이야기 중심의 단편들을 포함하여, 대부분 매우 짧은 스케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려지는 공간들은 특별한 공간들이 아닌 ‘일상’적인 삶의 공간들이다.


레싱이 이러한 삶의 공간들을 그려내는 데에서는 어렴풋이나마 어떤 ‘시선’이 느껴진다. 특히 여성들에 대해서는 “품안에 꼭 안아주고 싶은 존재들”이라고 말하면서 ‘네 탓이 아니란다’라고 다독여 주는듯한 느낌이다. 바꿔 말하면, 여성 억압에 대해 레싱이 대응하는 무기는 페이소스(나는 이것을 ‘연민을 자아내는 힘’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이다. 특히 “데비와 줄리”같은 단편에서 대조적인 두 여성을 등장시키고, 줄리의 “난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독백으로 마무리 지은 것은 이중적인 의미라 생각된다. 현실과의 모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라고는 비루한 현실뿐인 주인공의 생각을 내비치면서 마무리하는 방식은 이 단편집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반대로 “장애아의 어머니”와 같은 단편에서는 사회복지사(자주 등장하는 인물설정)가 자신이 보고 느낀 현실에 대응함에 있어 제도적 한계 내에 머무는 모습으로 끝맺고 있기도 하다.


레싱은 이 단편집의 곳곳에서 계급적인 문제는 물론, 그것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른바 ‘차이’의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이 단편집을 처음 접한 것은 군대 생활의 막바지였는데, 그 때에는 페미니즘, 사회주의 등을 다루고 있는 작가라는 소개에 끌려서 읽어 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느낌은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현실사회의 모순을 극명히 대비시켜 일정한 방향으로 해결해 나가는 ‘교훈적인’ 서사가 아니어서 그랬던지 싶다. 얼마 전 다시 이 책을 읽어보고 나서 여기저기 뒤적거리며 내가 찾아보았던 사항은 이 책이 언제 씌어졌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단편집이 영국에서 초판 발행되었던 시기는 1987년이다. 분명 대처 이후의 영국 정책방향 선회가 가져온 여파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 파고들었음직한 시기에 씌어지고 읽혀진 이야기들이라 생각된다. 경험적 혹은 경험주의적이라는 말을 영국적인 것으로 동일시하기는 어렵겠지만, 레싱은 분명 이렇게 변화한 삶의 궤적들을 영국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는 데에 성공한 것 같다.


사실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계속 떠올랐던 현대 영국 작가가 한 명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현대 영국 작가’라기보다는 ‘최근’ 떠오른 작가이며, ‘인도’ 작가일 테지만 말이다. 바로 <작은 것들의 신>을 쓴 아룬다티 로이가 그녀이다. 몇 년 전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받았던 느낌이, 레싱의 소설을 읽으며 받았던 것과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보다 작가로서 ‘쓴다는 것’에 대한 그녀들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참 이상하게도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작가를, 그것도 주로 자신의 모습으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다.


아룬다티 로이는 작가에게 있어서의 두 가지 규칙을 이야기한다. “첫째, 규칙은 없다. 둘째, 나쁜 예술에 대해서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 그녀는 계속해서 “위대한 작가는 힘들게 얻은 자유를 오용하면 그 유일한 결과는 나쁜 예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덧붙인다. 한편으로 흔히 명망 있는 작가들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경우 등에서 엿볼 수 있는 경우에 대해서도 그녀는 언급한다. “작가는 모든 것에 대하여 반드시 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신중함과 분별 있는 태도라는 것이 기실 비열함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이었음은 인류 역사에서 흔히 보았던 일이다. 조심성이 실제 비겁함이 되고, 용의주도함이 기실은 일종의 아첨이 될 때 말이다.”


내가 레싱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흐뭇했던 것은 젊은 인도 출신 작가 아룬다티 로이에게서 당당한 어조로 나타났던 이러한 문제의식이 레싱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레싱의 소설에서도 이러한 부분이 직접 언급되기도 한다. 예컨대 “그 여자”라는 단편의 도입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아무 생각 없이 방문했던 집이 실은 살롱이었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작가들은 자신들이 어떤 운동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녀가 ‘사회 속의 작가’로서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수많은 다른 그녀들(레싱과 아룬다티 로이 같은)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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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88만원 세대에 대하여

 

 

 

 

우석훈.박권일. 2007, <88만원 세대>, 레디앙

 

 

 

무엇이 문제라고 단순히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문제인지 따져 보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문제를 겪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와 관련해서는 항상 ‘같고도 다른’ 이들을 생각해야 하며, 문제를 풀어나갈 이들을 누구로 보는가와 관련해서 ‘따로 또 함께’ 할 이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사회의 젊은 세대들이 겪는 문제들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바로 “88만원 세대론”인 듯하다. 사회적 양극화와 생존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취업의 증가라는 현실 속에서 “88만원 세대” 담론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젊은이들이 이러한 담론을 수용하게 될 맥락을 고려해 보면 몇 가지 의문점들이 생긴다. 궁지에 몰리고 있는 것은 88만원 세대뿐인가?
 

내가 세대 담론에 강한 의심을 품는 이유는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고전적인 명제의 신봉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나이에 따라 집단을 분류하여 하나의 사회적 주체로 호명하는 것은 대부분 그 집단에 의해 자체적으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지배적인 사회적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한국사회에서 가깝게는 1990년대 초중반에 등장한 “신세대”, “X세대” 등이 대표적인데, 이러한 세대 담론은 1980년대의 사회적 격변의 시기 동안 저항의 주체였던 젊은이들을 소비의 주체로 설정하였고 실제로 순응하도록 만들었다.
 

그 밖에도 세대 담론은 특정한 사회적 집단을 사후적으로 명명하는 특징을 지닌다. 서구의 “68세대”나 한국의 “386세대”가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세대 담론에는 일반적으로 특정 세대가 거대한 사회적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 낸 주역이었다는 의미와 함께, 이들이 변절하였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먼저 “68혁명”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68세대가 1960년대 후반에 저항의 물결을 만들어 낸 대학생들을 주로 지칭하는 반면, 당시에 그런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 냈던 이들을 세계적 차원에서 돌이켜보면 베트남과 동유럽 같은 제3세계의 민중들이었음 또한 분명하다.
 

68세대는 다른 측면에서도 재조명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서구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과연 순응하고 변절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68세대 담론에서 유럽의 학생운동 세력들이 새로운 사회운동의 흐름을 만들어 내며 사회적인 세력으로 응집된 것으로 평가되는 반면, 특히 미국사회에서는 이들이 지배질서에 쉽게 포섭되고 순응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나는 미국사회에서도 사실상 ‘변절자’들은 소수일 뿐이라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변화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지배질서 안에 들어가 그 안에서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이들은 쉽게 주목받을 수는 있어도 그 힘 또한 쉽게 잃고 만다. 반면, 68세대에 포함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다른 새로운 변화의 흐름의 밑거름을 만들고 있다.
 

한국의 386세대 역시 이와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386세대는 1980년대 학생운동의 주역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중에서도 제도정치권에 진입한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68세대와 마찬가지로 386세대를 후자의 의미로만 지칭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68세대가 2차 대전 이후 서구사회의 ‘풍요 속의 빈곤’에 저항한 이들이었다면, 386세대에 해당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현실과 군부독재의 권위주의에 도전이라는 시대의 부름을 받은 이들이었다.
 

1970년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남긴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이라는 말에 대학생들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노동현장에 투신하고 사회운동에 헌신했고, 결국 1987년을 기점으로 정치적 민주화와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의 진전을 이뤄냈다. 1990년대 이후 386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힘을 등에 업고 제도권에 진입한 정치인들이며, 오늘날 민주개혁세력이라 자칭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386세대에 해당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별다른 민주개혁도 이뤄내지 못한 ‘민주개혁세력’과 거리가 먼 이들로서, 풀뿌리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68세대와 386세대의 사례가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에게 주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훗날 우리가 ‘무슨무슨 세대’로 불릴 수 있다면,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는 저항적 움직임을 보여주었을 때에 그러할 것이다. 둘째, 변화를 가져왔던 세대들은 그 자신들에 고유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들에 천착하였다. 요컨대 “88만원 세대” 담론이 오늘날 젊은 세대들을 순응이 아닌 비판과 저항의 주체로 설정한다 하더라도, 그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이 특정 세대에 고유한 문제들을 중심으로 고민하는 것은 젊은 세대들의 문제는 물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는 우리 세대에 고유한 문제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고민할 때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폭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예컨대 “88만원 세대”라는 외부로부터 부과된 문제설정에 집착할 경우, 억압받고 배제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대부분 “기성세대”라는 점을 간과할 수 있다. 특히 대학생들의 경우 세대라는 문제의식은 쉽사리 “몰락의 두려움”에 영합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보기에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는 절대적인 생존권의 문제라기보다는 특정한 구조 속에서의 문제이다. 즉 다른 가능성들이 존재함을 은폐하면서 우리가 겪는 문제들을 어쩔 수 없는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오늘날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회로부터 부과되는 경쟁의 강요보다는 경쟁의 내면화가 문제일 수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경쟁을 쉽게 내면화하고, 따라서 저항적 세대 담론조차도 왜곡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문제는 좀 더 장기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전통의 측면에서도 파악될 수 있다. 한 마디로 한국사회에는 집단적 자기존중의 전통이 취약하다. 이는 식민 지배와 미군정, 군부독재 등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자산과 지위를 소유하지 못한 이들의 자기존중이 짓밟혀 왔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는 국가, 가족, 회사와 같은 허구적 동질성을 강요당해 왔고, 이러한 자기존중 전통의 부재는 자신을 존중하기보다는 “위만 바라보는” 부정적 전통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대 담론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문제들이 개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라는 인식에는 “88만원 세대론”에 동의한다. 분명 현재의 젊은 세대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는 적다.
 

한편, 88만원 세대론에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집단들 중 하나가  대학생들일 터인데,  최근 대학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다름’이 부각되면서 무언가 ‘함께’ 하기 어렵다는 지적들이 많다. 그런 지적들은 ‘개인화’를 문제의 원인으로 파악하는데, 나는 이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개인이 온전한 개인이지 못한 상황이 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함께’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자신의 내면에 충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거나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함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1970-80년대에 한국사회의 변화의 원동력이 된 학생운동의 ‘함께’ 함의 힘은 시대가 대학생들 개인에게 부과한 고뇌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개인화되어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모두들 ‘함께’ 하고 싶어 하고 함께 할 필요성을 느끼지만, 너무나도 하고 싶은 것이 많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아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을 갖추려는 노력보다는 ‘포기할 것은 포기하려는’ 노력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모든 면에서 주변 사람들과 맞춰 가려고 하면 내 중심을 잃게 될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중심을 찾아가는 구심력이 아닐까? 오늘 우리들을 ‘무슨무슨 세대’로 부르는 논의에 고개를 끄덕이기보다 자기 자신을 찾아 나가며 함께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훗날 우리가 어떤 세대로든 기억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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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메탈과 뽕짝의 창법

(동네 아저씨들이 된 섹스 피스톨즈)

 

 

김종광의 소설을 두고 평론가 김사인이 "헤비메탈을 뽕짝의 창법으로 부른다"고 한 것을 보니, 이 표현의 원조가 떠오르면서 갖은 생각이 다 든다. 유하의 "세상의 모든 저녁3"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헤비메탈을 부르다 뽕짝으로 창법을 바꾸는 그런 삶은 살지 않으리라" 유하의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이 1993년에 나왔으니, 필시 1991년 트로트 뽕짝 음반을 낸 유현상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백두산의 유현상은 한때 전설이었다고 한다. 김종서도 어디선가 그에 대한 회상을 끄집어낸 적이 있는데, "마샬앰프에 걸터앉아 펜더 기타를 들고 지미 헨드릭스의 '퍼플 헤이즈를' 연주하며 부르던 모습이 정말 비범했다"고 하더라.

 

사실 창법 논란이라는 게 참 진부하기 짝이 없다. 기타 수련(?)을 위해 절간에 100일 동안 틀어박혀 피크 100개를 다 닳아 없애고 돌아와 신기에 가까운 속주를 뿜었다던 김도균 역시 1990년대 후반에는 "천사가 된 너에게"라는 락 발라드곡을 들고 나왔다가 쫄딱 망했더랬다. 시나위의 임재범, 손성훈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특히나 신대철의 제왕적 통치에 반기를 들고 팀을 박차고 나왔던 손성훈의 경우에는 좀더 잘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처럼 헤비메탈-발라드-뽕짝 간에는 묘한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는데,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이러한 대중문화 코드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우선 영미권에서 LA메탈, 팝 메탈이 뜨기 시작하면서, 메탈 밴드들이 발라드를 비롯한 대중적인 노래를 부르는 데 대한 거부감이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보컬리스트가 초 고음의 샤우트 창법을 구사하면 그에 대한 거부감이 없긴 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의 이러한 징후들 중 비범한 것으로 1994년 멍키헤드라는 밴드의 등장을 꼽고 싶다. 노래 제목부터 "부채도사와 목포의 눈물"이라든지 ... 이들은 "헤비메탈을 뽕짝의 창법으로" 부른 게 아니라 뽕짝을 헤비메탈의 창법과 연주로 들려주었다.

 

헤비메탈(주로 Thrash Metal을 지칭)은 "White Boys Blues"라고도 일컬어진다. 그 이름부터 매우 산업적(industrial)인 메탈 음악은 백인 노동계급 청년들의 저항적 하위문화이면서 반기성세대 정신+근육질 남성성+출세욕망의 산물이자 연주와 노래실력(특정 코드 내에서의)을 강조하는 묘한 엘리트주의도 띠는 등 아주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때 헤비메탈은 나름의 진정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1990년대 들어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시효가 다 된 진정성을 내세우는 문화(혹은 정치)라는 것은 솔직하지 못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백두산의 재결성과 그것을 "안티 에이징"으로 포장하는 미디어는 솔직하지도 못한데다가, 그들이 원한 것처럼 그리 장사가 잘 될 것 같지도 않다.

 

헤비메탈과는 달리 룸펜들의 (마찬가지로 백인들의) 음악인 펑크는 근육질 남성성을 내세우지도 않고 그리 권위주의적이지도 않은 편이다. 다만 좀 대책없이 회의주의적이어서 그렇지 ... 암튼 이들의 대명사였던 영국의 섹스 피스톨즈도 1996년 재결성 공연을 한 바 있다. 공연 제목이 무려 "부정수입 라이브(Filthy Lucre Live)"였는데, 먹고살 돈이 없어 딱 한 번만 공연 하자고들 모였다고 한다.
이런 게 바로 헤비메탈과 뽕짝을 가로지르는 (자본주의) 정신이다.

 

결국 또 씁쓸해지지만 이제껏 새로운 흐름들을 만들어왔던 것은 끊임없는 "재발견"과 대안적 생산-유통체계 구축이었던 것 같다. 골방에서 녹슨 기타줄을 갈아끼우는 이들이여, 주눅들지 말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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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노협 청산과 한국 노동운동

 

 

 

김창우. 2007, <전노협 청산과 한국 노동운동>, 후마니타스.

 

 

<전노협 청산과 한국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위기론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러한 위기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전노협이라는 변혁지향적 조직의 실천과 그 청산과정에 중심을 맞추어 검토한다. 나아가 현재의 시점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분석의 담론분석적 성격 또한 돋보인다. 당사자들과의 생생한 인터뷰, 각종 선언문, 성명서를 통해 전노협 강화론/한계론/대세론 등의 담론을 추적 및 분석하고 있다.

 

핵심적인 논의를 나름대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한편으로 노태우정권을 지나 문민정부로 이어지며 합법정치공간을 확장하였다. 여기에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외적 조건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대투쟁은 계급적 노동운동으로 이어져 전노협이라는 조직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대기업, 업종회의 등은 전노협으로 통합되지 않았다.

합법정치공간 확장과 현실사회주의 붕괴라는 조건 하에서 등장한 전노협 한계론은 전노대라는 조직으로 이어졌으며, 전노협 내 전노협 강화론 세력이 이에 맞섰다. 그러나 전노대가 민주노총 준비위의 주도권을 장악한 가운데 전노협 강화론 세력은 전노협 한계론 세력 견제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이에 따라 기층노동자들을 외면하고 오도된 위기의식을 조장하며 대세론으로 변질되었다.

대세론과 전노협 한계론이 주류를 이루게 된 가운데 정권과 자본의 합법개량세력 비호와 계급적 노동운동 탄압(전국노운협 사건 등)으로 인해 전노협은 결국 청산되었다. 이렇게 전노협 정신이 상실되고 상층 중심의 졸속적인 민주노총 건설이 이루어진 결과 연대의식과 민주성이 실종되며 현재의 노동운동의 위기로 귀착되었다.

......

 

굵직하고 무게 있는 주장들과 꼼꼼한 근거제시에 감탄하게 되면서도 몇 가지 의문이 밀려든다. 이 책에서의 ‘전노협’이라는 표현은 전노협 산하 단위노조 소속의 ‘노동자 대중들’로 대체될 수 있는가? 활동가들과 각 분파 지도부들의 타협적 태도와 비교할 때, 노동자 대중들은 언제나 급진적이고 변혁지향적이었나?

 

여기에는 조직 중심의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고 본다. 노동운동의 외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노동운동의 노선과 조직이 제대로 되었다면 변혁적 지향의 노동운동이 성과를 거두고 전진하였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세계자본주의와 한국자본주의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조건들에 대한 검토 내지는 평가를 바탕으로 노동자들에게는 그러한 변화가 일상적 수준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지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전노협 출범 이후 노동운동의 전진에 대해서도 자본의 방해전략이 노동운동의 조직와해 공작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기층노동자들의 지향이 전노협 정신이었다는 것인지, 전노협이라는 조직이 초기에 지향했던 바가 전노협 정신이라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전노협 정신을 둘러싼 갈등 또한 조직 및 활동가들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예컨대 ㅇㅇ노조의 투쟁 철회가 당시 노동운동의 후퇴를 가져왔다는 식의 서술만으로는 저자가 말하는 합법개량주의와 전노협 정신 침해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당의 관료주의에 의해 크론슈타트 봉기가 짓밟혔다는 사실만으로 러시아 혁명과정을 비판한다면 불충분할 것이다. 크론슈타트의 수병과 노동자들이 어떠한 실천들을 하였으며,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듯이, ㅇㅇ노조에 대해서도 노동조합 관료들과 활동가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 당시의 조합원 노동자들이 어떤 조건에 있었으며, 어떠한 실천을 하였는지, 그것이 억압당하였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등에 대한 검토는 부분적으로나마 필요한 것이 아닐까?

 

전반적으로 상층 중심의 활동양태에 대한 비판은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지만, 그에 대비되는 아래로부터의 활동양태에 대한 분석 및 방향제시는 부족하다. 이처럼 노동운동 위기의 기원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조직’의 문제에서 찾는 것은 결국 현재의 위기를 일시적인 문제로 보는 계급주의적 시각에 기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또한 사업장-지역-전국-세계라는 연대성의 확장 경로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로설정 역시 단일한 노동계급 정체성을 전제한 것이라 생각된다. 여성,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정체성들 간의 소통이 고려될 여지는 협소하다. 한편, 지역이라는 공간의 강조는 분명 전노협을 통해 재발견되고 복원해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이 저자가 제시하는 지역일반노조라는 해법으로 시원하게 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뭐, 아무래도 좋다. 근자에 이처럼 굵직하고 진지한 문제제기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가 제시한 출발점으로부터 하나둘씩 고민을 진전시켜 가 봐야겠다.

 

 

 

<참고>

 

김준. 2007, "비주류적 노동운동사 서술의 가능성과 한계", 산업노동연구 13권 2호,

         한국산업노동학회. 中 비판적 평가 부분

 

서평: 김창우. 2007, 전노협 청산과 한국노동운동: 전노협은 왜 청산되었는가?, 후마니타스.

 

이 책에서 저자는 전노협 청산과정의 책임을 전적으로 소수의 상층간부에게 돌리고 있으며, 그 소수의 상층간부들이 전노협을 청산하고 민주노총건설로 조직을 몰아간 것을 마치 개인적인 혹은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소집단(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렇게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만큼 저자는 기층 노동자들이나 조직들에 대해서는 한없는 신뢰를 보이고 있다. 노동운동 위기론이 횡행하던 90년대 중반에도 노동자들의 투쟁의 결의와 변혁적 잠재력은 아직도 높았고 따라서 마치 상층간부들만 올바른 노선을 취했다면-즉 전노협을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확대 강화하고, 지노협 등 지역연대조직을 강화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산별조직을 먼저 건설한 뒤 민주노조 총단결의 길로 나아갔다면-노동운동의 위기나 변혁적 노동운동의 후퇴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입장은 극히 도그마틱할 정도로 한국노동운동사를 정리하고 있는 보론에서도 읽힌다.
그러나 과연 9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민주노조 진영의 상층간부들이 '사회개혁적' 노선을 채택하게 된 것을 과연 그들만의 '투항'으로 볼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시점까지도 계속되었던 기층 노동자들의 투쟁의 열기를 '변혁적 잠재력'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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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방위는 이제 기업이 맡는다

 

 

 

 

얼마 전 오랜 오타쿠 친구들과 만나 이곳저곳 순례(?)를 한 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노래방에 갔다. 나오는 레퍼토리들이래야 가오가이거, 울프스 레인 같은 애니 주제곡들이니 뭐 분위기가 영 ... 그 와중에 나는 두터운 난수표를 뒤적이며 애니 주제곡을 찾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지구방위기업 다이가드>의 주제곡이었다.

 

사실 이 애니는 "뒷골목의 우주소년"이라는 오프닝 곡을 빼면 별 끌리는 데가 없다. 메카물과 용자물의 외양을 띤 이 기묘한 애니는 일본에서도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외면당했다고 한다. 다이가드는 메카 면에서는 철인28호의 맥을 잇는 깡통에다가 용자라기엔 느릿느릿한데다 날렵한 맛이라고는 전혀 없다.

 

대부분의 메카물이 그러하듯이 다이가드 역시 메카를 매개로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그럼에도 일단은 전투의 지형이 중요하다. 메카물에서 주인공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는 핵심적인 형식 요소이다. 예컨대 <패트레이버>의 주인공들은 아나키스트들('바다의 집') 또는 경찰조직 내부의 관료주의자들과 싸우고 건담 시리즈의 경우에는 지들끼리 싸우며(그래서인지 건담 팬들은 연합 지지자들과 지온 지지자들로 갈린다. 스타워즈 팬들이 다쓰 베이더와 제다이를 두고 갈리듯이) 에반게리온이나 라제폰의 주인공들은 알 수 없는 존재와 싸운다.

 

그러나 에바와 라제폰에서는 적의 본질을 밝히고 싶어하는 욕망이 끊임없이 드러나며, 어느 정도는 실마리도 제시된다. 반면에 <지구방위기업 다이가드>는 적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적을 섬멸하기 (그래야 이야기가 계속되니 ...) 위해 적의 신진대사 메커니즘에만 관심을 둔다.

 

일단 제목이 좀 무시무시하다. 지구방위는 이제 기업이 맡는다. 일본에서 나타나는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일본에 본부를 둔 거대 경비회사가 다이(大)가드를 동원하지만, 지구를 지키느니 하는 식의 거대담론은 일절 피하고 있다.

 

게다가 주인공 아카기는 "긍정의 힘"을 체화한 인물이다. 아카기를 중심으로 한 21세기 경비보장 회사의 일부 세력들은 기업 내 관료주의자들과 군부 관료, 그리고 정체불명의 괴물이라는 3중의 적과 싸운다. 이들은 다만 열정적일 뿐 결코 고뇌하지 않는다.
 

다수의 되먹지 않은 애니들과 마찬가지로 이 주인공들 또한 관료주의를 거부하는 유연적 인간들이면서도 묘하게 권위주의적이다. 시로타라는 군부 내의 "착한" 인물과 선을 대고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초반에는 군대는 글러먹었으니 이제 기업이 나서야 한다는 분위기도 후반에 가면 기업이 앞서서 나가고 군대가 따라온다는 식으로 바뀐다.

 

<지구방위기업 다이가드>는 "방위력"의 "폭력"으로서의 측면은 전적으로 외면하고 무시한다. 요즘 같은 테러리즘 시대에 "폭력의 사유화"를 우려하는 지식인들이 보면 놀래자빠질 애니다. 그런 측면에서 비교해 볼 때 <에바>나 <라제폰> 같은 애니들은 그나마 존재에 대한 성찰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듯하다. 한 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어두운 측면의 포스를 제대로 보여주는 애니다.

 

그런데 요즘 애니들 답지 않은 선 굵고 단순명쾌한 작화와 오프닝 테마 노래는 와이리 좋은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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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연금술사와 자율적 기술

  

 

 

이른바 판타지물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데, 특히 중세적 배경에 매우 현대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 예컨대 <웰베르> 같은 포스트모던한 애니들은 인내심을 시험하곤 한다. 그럼에도 리메이크되어 TBS에서 방영중인 <강철의 연금술사>만큼은 다시 보게 된다.


제목은 좀 오타쿠스럽지만,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강철"은 주인공이 자유자재로 다루는 소재를 일컫는다. 물, 불, 돌 ... 등등의 연금술사들이 대거 등장한다. 방송 첫머리에 거창하게 설명이 제시된다. 연금술은 어쩌고 저쩌고 ... 어쨌든 무언가를 만들거나 "알게 되면"(이것도 특이하다) 반대급부가 따른다는 '등가교환의 원칙'과 사람을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인체연성의 금기'. 이게 핵심이다.
 

주인공 소년들인 에드와 알은 어린 시절부터 연금술이라는 과학에 끌려 학구열(?)을 불태우는데, 그 와중에 어머니를 잃게 된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를 연금술로 만들어내려 시도함으로서 인체연성의 금기를 범하게 되어 에드는 팔과 다리 하나씩을 잃고, 알은 몸 전체를 잃게 되지만, 다행히도 텅 빈 갑옷 안에 알의 영혼만은 붙잡아 둘 수 있게 된다. 이 형제들이 "몸"을 되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이 장장 51화에 걸쳐 펼쳐지는데 ... (이 점이 리메이크판을 다시 끝까지 보아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에드는 몸을 되찾기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해 '군대의 개'로 불리는 "국가 연금술사"가 되어 국가에 의해 자행된 학살, 폭력, 추문, 부패, 음모의 실상들을 보게 되면서도 묵묵히 자신과 동생의 몸을 되돌려줄 '현자의 돌'을 찾아 여행을 계속한다.

 

사실 제목부터가 좀 끌린다. 연금술이라 ... 연금술이라는 명칭부터가 솔직담백하지 않은가. 모든 물질은 다섯 가지 기초원소 ... 땅-불-바람-물-마음(?)으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이 원소들을 잘 배합하면 금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명실상부한 과학. 무엇보다 과학임을 내세우면서 솔직하게 '금'을 원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게 맘에 든다.

 

<강철의 연금술사> 또한 알 수 없는 판타스틱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데, 극장판에서는 이것이 나치스 독일의 평행우주 세계임을 암시한 바 있다. 어쨋든 나를 끌었던 것은 '자율적 기술'이라는 전공투스러운 테마였다. 물론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키라>, <스팀 보이> 등을 만들어낸 오토모 카츠히로 님이시다.

 

이런 종류의 '기술사회' 디스토피아물에서 전형적인 등장인물은 미친 과학자와 괴물이다. 기술사회 비판 또는 자율적 기술론은 하이데거, 오르테가 이 가셋부터 자끄 엘륄에서 마르쿠제까지 수많은 철학자 및 사회이론가들에게 주요 테마였지만, 그중에서도 자율적 기술의 문제를 "프랑켄슈타인의 문제"라 부른 랭던 위너의 통찰이 돋보인다.
 

원래 소설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부제가 중요하다!)는 메리 월스톤크래프트 셸리의 작품이다. 잘 알려진 페미니스트 메리 월스톤크래프트의 딸이기도 한 메리 셸리는 열혈 계몽주의자인 남편 셸리의 열정에 대한 걱정과 의구심에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위너에 따르면 닥터 프랑켄슈타인은 근대적 과학자를 표상하며, 그가 '과학적으로' 만들어낸 이름없는 생명체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자율적 기술'(내지는 도구적 합리성)을 표상한다. 근대성의 이면에는 그것을 추구해 온 인류를 되려 위협하는 괴물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통째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여기서도 걸리는 것은 '괴물'이다. 다행히도(?)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이성의 소유자이며 언어를 구사한다. 그러나 그 '괴물'은 여전히 이름없는 존재이다. 메리 셸리도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나타난 괴물에 감히 이름을 부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적 기술은 통제 불가능한 괴물만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압축적 근대를 살아냈던 한국사회의 수많은 '피조물들'은 자신들의 창조자들에게 위협적인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통제의 대상이었고, 이름은커녕 목소리조차 빼앗긴 이들이었다.
 

공돌이, 공순이, 병신, 계집 ... 그밖에 수많은 ... '못 배운' 천한 언어로 웅얼대는 쬐그만 것들 ... 이들이 자신의 창조자들에 대해 진정 위협적인 존재로 나서고, '배운 말'을 구사하게 될 때, 지배적인 기술은 다른 선택지를 향할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배적인 기술'이다. 이들에게는 나름의 과학과 나름의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과학기술은 그것이 자체적인 논리를 가지든,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든 정치적 인 것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장황하게 과학기술에 대해 늘어놓은 까닭은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애니인 <강철의 연금술사>가 갖는 부조리한 정치적 함의 때문이다. 주인공 에드가 인체연성의 금기를 범한 것은 아직 뭣모르는 어린 시절이었다. 사실 이 점은 에드로부터 과학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빌미가 된다.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에서 '스스로 성장을 멈춰버린' 주인공 오스카를 내세우면서 독일의 특수성이라는 명목 뒤에 숨어 나치스에 동의했던 책임을 회피하는 소시민성을 비판한 바 있다. (이 소시민들이 독일 일상사에서 말하는 "작은 사람들"이다) 반면, <강철의 연금술사>의 에드는 그러한 소시민성을 부정하고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체화한 인물이다. 한 마디로 그는 '대시민'인데, 바로 이 점이 문제다. 그의 존재론적 각성이 학살의 전력을 지니고도 여전히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군부에의 동참(국가 연금술사가 됨)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에드가 연금술의 금기를 범함으로써 '등가교환'의 원리에 따라 잃게 된 것은 자신의 팔과 다리 하나씩에 혈육인 동생의 몸이었다. 위험 앞에 자기 자신을 내걸었던 것이다. 더구나 금단의 연금술에 휘말려 몸을 잃고 깡통 갑옷이 된 동생 알에 대한 죄책감은 에드의 고통의 일부를 이룬다. (주인공은 일부나마 육신을 ... 특히 잘 생긴 얼굴을 지녀야 시청률이 나오지 않겠는가) 오만한 과학기술의 피해자이자 피조물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따라서 '현자의 돌'(원자력이든 생명공학이든 암튼 궁극의 기술)을 찾아 자신과 동생의 몸을 되찾겠다는 변명을 통해 군부에의 동참 또한 정당화된다. 게다가 군부는 에드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다. 여기서 군부 또한 과거의 과오에 대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착한 군부'의 모습을 띠는데, 과거에 자신들이 이민족들을 학살한 것도 '음모세력'의 탓이라는 핑계를 끊임없이 댄다. 전쟁의 피해자들은 자기 자신들이며, 따라서 군대를 보유해야 한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논리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아아 ... 이런 불편함을 다시금 즐겨야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신작들은 좀처럼 맘에 드는 게 없고 ... 언제까지나 샤아 아즈나블과 아무로 레이의 망령에 사로잡혀 살 수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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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스프링스틴의 &quot;마타모로스 강둑&quot;

"보스(Boss)"라 불리는 남자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은 흔히 미국 백인 남성 노동계급 정서의 대변자로 일컬어진다. 이라는 음반을 통해 대중적인 스타로 떠올라, 지금은 닐 영, 펄 잼 등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록커 중 한 사람이다. 무명 시절부터 '보스'가 되기까지 그는 정말 쉴새 없이 달려온 듯하다. 그는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한때는 그도 뭔가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1970년대를 마감하면서 그는 레이건을 지지했다. 그때까지 미국이 내세우던 가치와는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그는 예민한 사람이었고, 머지않아 메스꺼움을 느꼈던 듯하다. 이러한 레이건 집권 전반기의 경험은 1984년에 발표된 앨범 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런 그이기에 ... 요즘 정말 신이 난 듯하다. 오바마의 당선 이후 발표된 음반 제목은 심지어 이었다. 동명 영화 주제곡으로 사용된 "The Wrestler"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곡들에서 승리주의적 감성이 철철 넘쳐난다. 아무튼 스프링스틴의 곡들은 정말 빼놓을 구석이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사가 독보적이다. 하루 종일 도로공사판에서 일한 이야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하나같이 좋았던 옛 시절 이야기를 하더라는 이야기, 쓰라린 실패를 맛보고 '남행열차'를 타고 떠나는 이야기, 60년대 중반의 인종갈등에서부터 풍요로웠지만 어딘가 허전했던 시대를 거쳐 산업이 쇠퇴하며 폐허처럼 되어버린 자기네 동네 이야기 등등 지금까지 '보스'의 노랫발은 정말 쉴 틈 없이 뿜어져나왔는데, 비교적 최근 음반인 에서도 여전히 건재하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곡인 "Matamoros Banks"는 좀처럼 실감하기 어려운 미국의 멕시코 이민자들의 삶의 출발점을 잘 보여준다. 마침 '보스'를 좋아라 모시는 어떤 분이 가사도 옮겨주셔서 함께 올려 둔다.

 

"매년 많은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미국) 남부 국경지역의 사막과 산맥, 그리고 강을 건너다가 목숨을 잃는다. 여기, 강 아래에 가라앉은 한 구의 시체에서부터 시작하여 리오 그란데의 강둑을 향해 사막을 건너는 한 남자에 이를 때까지, 나는 그의 여정을 거꾸로 따라가본다."

 - Bruce Springsteen

 

 

Matamoros Banks

 - Bruce Springsteen  

 

For two days the river keeps you down
Then you rise to the light without a sound
Past the playgrounds and empty switching yards
The turtles eat the skin from your eyes, so they lay open to the stars

 

Your clothes give way to the current and river stone
'Till every trace of who you ever were is gone
And the things of the earth they make their claim
That the things of heaven may do the same

 

Goodbye, my darling, for your love I give God thanks,

Meet me on the Matamoros
Meet me on the Matamoros
Meet me on the Matamoros banks

 

Over rivers of stone and ancient ocean beds
I walk on twine and tire tread
My pockets full of dust, my mouth filled with cool stone
The pale moon opens the earth to its bones

 

I long, my darling, for your kiss, for your sweet love I give God thanks
The touch of your loving fingertips
Meet me on the Matamoros
Meet me on the Matamoros
Meet me on the Matamoros banks

 

Your sweet memory comes on the evenin' wind
I sleep and dream of holding you in my arms again
The lights of Brownsville, across the river shine
A shout rings out and into the silty red river I dive

 

I long, my darling, for your kiss, for your sweet love I give God thanks
A touch of your loving fingertips
Meet me on the Matamoros
Meet me on the Matamoros
Meet me on the Matamoros banks

 

Meet me on the Matamoros
Meet me on the Matamoros
Meet me on the Matamoros b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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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모로스 강둑

 

- 브루스 스프링스턴 (구춘권 옮김)  

 

이틀 동안 너는 강물 속에 잠겨 있었다
그리곤 너는 소리 없이 빛을 향해 떠오른다
아이들의 놀이터와 텅 빈 선로 교체 지역을 지나며 너는 흘러간다
거북이들이 너의 눈꺼풀을 먹어치웠기에
너의 두 눈은 활짝 열린 채로 별들을 바라본다.

 

너의 옷들은 강물과 돌멩이에 쓸려가버렸고
너의 모든 흔적은 사라지고 말았다
땅이 낳은 것들은 땅이 가져갈 것이고
하늘이 만든 것을은 하늘이 가져갈 것이다.

 

안녕, 내 사랑, 너의 사랑에 대해 나는 신에게 감사하마
마타모로스에서
마타모로스에서
마타모로스의 강둑에서 나를 만나다오

 

돌멩이의 강과 오래 된 바다 바닥을 건너
나는 타이어와 새끼줄로 만든 샌들을 신고 걷는다
먼지만 가득 찬 내 호주머니, 차가운 돌을 물고 있는 나의 입
창백한 달은 대지를 뼈 마디마디 비추고 있다

 

내 사랑, 너의 키스와 사랑에 대해 나는 신에게 감사하마
너의 사랑스러운 손끝 감촉에 대해서도
마타모로스에서
마타모로스에서
마타모로스의 강둑에서 나를 만나다오

 

저녁 바람에 실려오는 달콤한 너의 기억
나는 잠들어 너를 다시 안는 꿈을 꾼다
브라운스빌의 불빛이 강 저편에 비치고
고함소리가 터져나오며
나는 질퍽한 강 속으로 뛰어든다

 

내 그리운 사랑, 너의 키스와 달콤한 사랑에 대해 나는 신에게 감사하마
너의 사랑스러운 손끝 감촉에 대해서도
마타모로스에서
마타모로스에서
마타모로스의 강둑에서 나를 만나다오

 

마타모로스에서
마타모로스에서
마타모로스의 강둑에서 나를 만나다오

 

P.S. 그렇게 그는 마타모로스의 강둑에서 시체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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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에 대한 글쓰기의 부러움

우연찮게 오래 전에 알고 지내던 선생님 한 분이 "맥주와 시장의 정치적 구성"이라는 제목으로 쓴 논문 초고를 보게 되었다. 단일유럽시장 프로젝트와 독일 맥주시장의 재편이 그 내용인데, 시장의 정치적 구성과 관련한 논의 자체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삶과 긴밀한(했던) 주제에 대해 이러한 고민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 아뭏든 요즘 발견하기 쉽지 않은 글이었다.

 

초록을 옮겨 보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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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들 및 사회세력의 갈등과 투쟁이 국가에 의해 매개되면서 정치적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독일의 맥주시장은 수 세기 동안 독일 청정법이라는 제도적 조절을 통해 독특하게 구조화되었다. 맛의 수월성과 다양성은 물론, 거대자본의 참여가 자제되고 압도적으로 중소자본의 참여가 활발한 맥주시장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단일유럽시장 프로젝트가 추진되면서 독일 청정법은 사실상 무력화된다. 1987년 유럽법원의 판결은 독일 청정법이 역내 교역의 자유를 명시한 유럽공동체조약에 위배됨을 확인하였다. 단일시장과 함께 독일 맥주시장의 제도적 조절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독일 맥주시장에 마치 지각변동처럼 작용했다. 거대 초국적 맥주 기업들에 의해 일련의 독일 맥주회사들의 인수‧합병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독일의 큰 맥주기업들도 대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수입맥주의 시장점유율 또한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역설이라면 독일의 맥주소비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윤의 논리를 축으로 맥주시장이 재편되면서 맛의 다양성이 훼손될 위험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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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읽고 "기어이 이 양반이 일을 냈구나" 싶어서 이메일을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그 내용 일부를 공개하자면 ... "언제 만나 맥주 한 잔 하면 좋겠다마는, 내가 살아오면서 맥주를 워낙 많이 마셔 맥주로 인한 병이 생겼다. 그 논문이 맥주에 대한 나의 작별의 글이 된 셈이다. 물론 소주는 마실 수 있다. 언제 소주 한 잔 하자." ... 정치학 공부하는 분인데, 이 사람 참 재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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