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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다가

2003년 11월 06일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다 한 구절 옮겨본다.

 

"경제적, 정치적 체제가 인간의 자유의 실현을 촉진시킬 수 있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오직 정치적, 경제적 조건만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대답될 수 없는 일이다. 자유의 실현을 위한 유일한 기준은 개인이 그 자신의 생할과 사회의 생활을 결정해가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있는데, 이것은 다만 투표하는 형식적인 행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매일의 활동과 직무에 있어서 그리고 그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계 등에 있어서 그렇게 되고 있느냐 있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근대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만일 그것이 순전히 정치적 영역에만 그 자체를 제한한다면 일반 개인이 가지는 경제적 무력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결과를 충분히 방지할 수 없다. 그러나 생산 수단의 사회화와 같은 순수한 경제적 개념도 역시 충분치 못하다. 나는 여기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을 마치 국가사회주의에 있어서-전략적인 편의를 위하여-사용되고 있는 것과 같은 기만적인 의미로 사용하고자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사회주의가 하나의 기만적인 말로 화해버린 러시아를 기억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생산 수단의 사회화가 실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은 강력한 관료 기구가 평범한 대중들을 교묘하게 조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장부의 지배가 인민 대다수의 경제적 이해 관계에 효과적이게 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자유와 개인의 발달을 저해하게 된다."

 

여기서 "그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부분에 뜨끔하지 않을 수 없다.

"매일의 활동과 직무"에 있어서도 별 다를 바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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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의 마지막 한 시간

2003년 11월 04일

 
집에서 신문 구독을 안 하는 관계로 요 며칠 사이엔 운전학원에 비치된 세계일보를 직원조회가 끝나길 기다리며 읽고 있다. 어제의 어두운 전쟁 소식으로부터의 어두운 분위기를 쇄신하려는지 어째 오늘의 1면엔 그야말로 고품격 코미디가 등장해 있다. 요즘 뉴스의 '기본메뉴'인 정치자금 기사와 일종의 그에 대한 '맞공세'인 공직자 재산 관련 기사의 사이로 불쑥 나의 눈에 들어오는 기사 제목, '경제 5단체 성명 발표'라. 기사 하단의 관련기사 몇 면이라는 곳을 펼쳐보니 손낙구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장과 전경련 법률자문인지 하는 두 사람이 지상논쟁을 통해 '손배가압류'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부당노동행위이자 노동탄압'과 '명백한 법치주의의 결과'라는 이 두 가지의 주장들 사이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시니어의 '마지막 1시간'"이다. 무슨 영화 제목 같은 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19세기 초 영국, 공장법이 제정되고 11.5시간의 노동시간이 법제화 되었지만 10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노동운동은 끊이질 않았다. 이에 공장주들은 이에 대항할 투사를 찾았고 그가 바로 낫소 시니어라는 경제학자였다. 그는 "노동자들은 마지막 1시간에 순이익을 생산하며 바로 그 전의 1시간에 자신의 임금을 생산한다"며 "노동시간이 1시간 줄어들면 순이익이 나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토요일에 은행이 문을 열지 않는다든지 하는 사실로 '아, 주5일근무제였지?'하고 쉽게 생각하는 지금, 일 하는 시간이 줄어 노동자계급의 삶이 과연 나아졌는가? 몇 년 전 '주 5일 근무'등을 중심으로 한 노동시간 단축운동이 주요 쟁점이었던 때, '노동조건의 후퇴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강조했던 이들은 '마지막 1시간'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던 이들일 것이다. 피지배계급이 투쟁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어떤 것이 생각보다 쉽게 얻어진 것이라면 그건 분명 지배계급의 이해에 충분히 부합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지회장의 자살과, 연일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분신, 투신은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손해? 그래서 한진자본은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조건으로 70%의 휴근수당을 지급한 것인가보다)와 가압류에 '법치주의'를 내세우고, '대기업 노동귀족'운운하는 그들이 200여 년 전의 '마지막 1시간'과 마찬가지의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은 우스울 따름인 주장을 해 대며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짓밟는 자본의 본성에 있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럼 어디 노동시간이 줄어서 나아진 건 또 뭔가? 노동귀족은 또 뭐고? 故 김 지회장의 유서를 본 사람이라면 그의 임금내역을 보고 경악했을 것이다. 임금노동자가 한 달 동안 일하고 받는 돈에, 대체 기본급과 수당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한편, 노동귀족이라는 표현이 우스운 근거를 자신들 스스로 제공하고 있음을 그들은 알기나할까? 최근의 정치자금 수사에 '표적수사'라는 비난과 함께 정부 각료의 재산내역과 25년 근속연수의 임금노동자의 그것을 비교해 선전하는 그 내용을 보면 후자의 노동자가 보통 자기 살 집 하나가 재산의 전부이거나 집값도 충당 못 하고 있음을 강조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와중에 토지공개념이 어쩌구 하면서 전매금지 등의 부동산 정책 쇼까지 벌이지만 역시 그것은 한낱 쇼다.

 

시니어의 '마지막 1시간'이 떠오른 것은 정말인지 이딴 거짓들이 지겹기 짝이 없어서이다. 낫소 시니어의 '마지막 1시간'은 마르크스가 그의 저서인 <자본>에서 '잉여가치율'이라는 것을 설명하며 예를 들어 보인 것이다. 그는 당연한 반문을 던진다. '마지막 1시간'이 그 전의 한 시간, 또 그 전 전의 한시간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투입된 자본과 노동력의 가치는 동시에 전화(轉化)한다는 당연한 것을 공장제 '기계'공업은 다르다는 식으로 호도하고 속이는 모습이 어찌 그리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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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새내기 시절의 고민 중 하나

2003년 11월 04일

 

우연찮게 새내기 시절에 썼던 나의 글을 발견했다. 제목도 거창하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란다. 이상할 것까진 없지만, 군대에 다녀 온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그 풋풋한 시절에 으레 그렇듯 그 표현과 주장의 근거도 빈약하고, 힘만 잔뜩 실어 놓고 책임감 부족한 그런 면이 조금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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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나름대로 기대를 품고 시작했던 대학생활도 어느덧 8개월이 흘렀다. 그 동안 한편으로는 스스로 쉽게 허무에 빠지지 않으려 애써 왔던 만큼(?) 나는 개펄 속에서 많은 진주들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저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나에게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은 여지없이 찾아들었고 결코 쉽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는 고민을 던져주었다. 동기들 혹은 선배들과 '우리 학교는 왜 이럴까?'류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여자애들이 많아서 그래'라는 난데없는 결론에 도달해 있는 모습, 때때로 나의 인간에 대한 굳은 믿음마저 뿌리째 흔들고 마는 일상적 성폭력의 모습들은 결코 남성인 나를 피해자의 범주에만 들게 하지는 않았다.

 

어떤 글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남자가' 혹은 '여자가'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지독한 마초이즘에 근거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우리사회의 지독한 남성중심주의, 즉 '자지제일주의'(달갑지 않은 인물이지만 도올 김용옥의 표현을 빌리자면)의 피해자는 남성에 의해 물리적 폭력을 당하고 강제로 성기삽입을 당한 여성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여성, 그리고 가해자와 잠정적 가해자를 포함하는 남성들 또한 해당된다.

 

'남자새끼가'라는 말의 위력은 대단하다. 연초에 군가산점제를 둘러싼 논쟁이 우리 사회를 달구었다. 군대를 다녀 온 남성들에게 기업체 입사시험 등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났다. 이에 많은 남성들은 '군대를 갔다 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손해'라는 점을 강조하며 가산점을 줘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왜 군대라는 곳에 질질 끌려가야만 하는가?'에는 미치지 못할까?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군대를 갔다 와야해'라는 말을 남성들은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 왔다. 그러나 적어도 내 경험상 '군대를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고 말하는 인간들은 거의 모두가 '자지라는 강력한 무기를 탑재한 체제의 가미가제'였다.

 

대학에 들어오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늘 거북했던 때가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특히 대학생들간의 만남에서 '**대학교 **과(학부) **학번 아무개입니다'라는 소개를 듣기도 거북했고 나를 그렇게 소개하는 것이 정말 싫었다. '육군 **사단 **부대 이등병 아무개입니다'라는 식의 소개와 너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식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기는 더욱 힘들다. 어떻게든 출신 성분과 나이를 알아내어 위계를 정하고 한 인간을 틀 속에 집어넣으려 하는 우리들의 습관이란 인간에 대한 존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민주주의가 어쩌고 하면서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언사를 일삼는 이런 어이없는 일들도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수 있다.

 

이렇게 한 인간을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윗분'과 '아랫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여성을 동물 내지는 물건으로 보는 남성들의 지배 전략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우린 젊고 뭔가 '아닌' 것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당당하게 '여성주의적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역사를 쓸 주인공들은 우리 젊은이들이 아닌가. '탁류는 거스르고 역사는 함께 가는 것'이라 했다. 평등한 세상, 진정한 자유인의 공동체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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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학원에서의 단상

2003년 11월 03일

 

웬걸, 주제넘게 놀고먹고자빠져있는 나로 하여금 매일 새벽 6시 기상을 하도록 만든 건 3주전 등록하여 아침마다 나가고 있는 운전면허학원이다. 그 동안 울산이니 서울이니 사북이니 돌아다니면서도 학과시험, 기능시험 통과하고 오늘부터 도로주행연수를 받는 나는 강사들과 직원들이 막 출근할 때인 7시 50분 경 학원 로비에 들어앉아서 이라크에서 테러로, 전쟁개시 이후 미군 최대규모라는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기사를 읽고 있었다.

 

그때 쯤 2층에서는 사장과 노동자들(강사 및 직원)이 참석하는 조회가 끝날 무렵인지 "어서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같은 인사말들이 꽝꽝 울려대고 도로주행연수 담당 강사들도 뭔가 어두운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일반 도로에서의 운전은 처음 경험하기에 강사의 시범을 유심히 보고 1톤 트럭을 몰고 드디어 도로에 나섰다.

 

나는 정해진 코스를 두 번쯤 돌고 출발지로 돌아와서 나와 비슷한 또래인 H군 등과 담배를 피우며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나의 아버지뻘 되어 보이는(사십대 후반 쯤, 우리 아버지는 50대 후반이긴 하지만) 담당 강사가 갑자기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는 것이 아닌가.

 

"에이, 간만에 오전교육 좀 할 만 하네. 이건 뭐 사장놈으새끼는 몇 푼 더 쥐어주면 어디서 장내 코스도 제대로 못허고 기어 변속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 데려다놓고 도로연수 시키라니 길바닥에서 뒈지라는 거여, 뭐여."

 

또 다른 강사 아저씨 왈

 

"아, 누가 아니래. 하여간 나는 아줌마들땜에 미치겄어. 툭 하먼 시동 꺼먹고 불안해서 어디 강사 허겄나그려. 그리고 뭐 알려 주면 욕 해싸코, 뭐 장 본다고 태워다 달라 뭐 하라 참. 오늘은 야 묘허게 젊은사람들만 일찍덜 나와갔고서는 헐만 허네그려."

 

다시 나의 담임 강사 아저씨 계속하시기를

 

"육시럴, 내년이면 도로주행도 2키로(km) 늘어나는디, 코스 교육 준비도 니덜이 알아서 하란 식이고 지대로 교육여건도 안해주면서 아침마다 친절교육 허라고 인사나 시켜싸코, 얼어죽을 그렇게 해갖고 어디 친절교욱 되겄어?"

 

욕설이라든지 성차별적인 표현의 문제는 잠시 접어 두고, 아저씨들간의 대화의 내용이 심상치 않게 들렸다. 운전학원이라는 현장에서 최소한 10년 넘게 일해온 노동자들의 노동강도에 대한 불만이 그렇게 터져 나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운전면허 취득에 있어서는 도로교통법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학과 교육 1시간, 장내기능교욱 25시간을 받아야 검정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규정인데, 대부분의 학원에서는 일단 연습 조금 해 보고 시험에만 통과하면 수강 시간 채워서 적어주고 도장 찍어주는 그런 식이다. 웃돈을 좀 얹어준다던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뭐 '다 아는'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운전면허 취득희망자들은 단시간에 면허를 취득하길 바라며, 이것이 운전학원 홍보에는 최고다. 그리고 얼른얼른 면허 따가지고 나가면 수강생 더 받을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운전면허도 최대한 빨리 따야 하고 특히 화물차는 도로에서 날아다니는 이런 현실들도 먹고 살기 힘든 계급적 현실을 반영하긴 하지만, 다른 한 쪽에서 자본과 권력이 이를 이용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얼마 전엔 경기지역의 어느 자동차학원에서 노동조합의 투쟁이 있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임단투가 아니라면 아마 이런 것들이 주요 쟁점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니고 있는 이 학원은 어용노조조차 없지만, 노동조합 아니더라도 이렇게 충분히 정치적인 아저씨들이 조직화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만' 해 보며, 그래도 내게 '친절교육' 해준 강사아저씨에게 조금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저씨 그럴 땐 싸우자고요."

 

제길, 그래도 이번 주만 보내면 운전면허 나오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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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 대한 두려움과 노동가치이론 연구

2003년 11월 01일

 

 

 


정운영 선생의 <노동가치이론 연구>를 다시 읽고 있다. <자본> 1권 '상품과 화폐'로부터, 자본의 본질인 가치증식, 임금과 이윤, 지대, 재생산 모형, 그리고 <자본> 3권에나 등장하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 이르기까지 노동가치이론에 대한 연구를 한 권에 담고 있는 이 책을 읽다가, 80페이지 쯤을 지나쳤을까? 그만 나는 책을 덮어버렸다. 시그마, 엡실론 같은 그리스인지 로마인지의 문자들이 등장하면서였다.

 

갑자기 수능시험을 며칠 앞 둔 책상에 펼쳐져 있던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두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때 TV시사프로그램 진행하다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모를 정운영 교수가, <자본>의 그 방대한 분량에 담겨져 있는 자본의 동학, 즉 그 메커니즘과 그에 대치하는 노동의 움직임에 대한 서술을 압축적이면서도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그런 수학의 공식들을 들여 썼을거라고 믿고 싶지만, 그렇게 믿는다 해도, 정말 수치(數痴)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거세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학교 졸업 이후에 수학 과서는 본 적도 없고, 참고서라고는 제1장인 '집합' 부분만 시커멓게 때묻은 '일반수학의 정석'이 나의 자화상인걸까? 나는 정말 수치(數痴)인 것인지, 수학의 제도교욱방식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가 이차 방정식까진 풀 수 있다는 사실은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암튼, 내가 자신에 대해 느끼고 있는 문제가 수학적 사고나 수리능력이라는 아비투스(habitus)의 문제에까지 미친다면, TV광고에 나오는 '스스로 학습법' 재능교육 선생님이라도 모셔야 할 것인지 참.

 

가끔식 이렇게 일종의 강박관념과 함께 회의가 찾아들기도 하지만 그 역시 나에게 당연한 대답만을 안겨줄 뿐이다. "목표가 분명하고,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일치하기까지 한다면, 필요한 것을 하라!"

 

다시 '극복해야만 할 패닉'을 뒤엎기 위해 <노동가치이론 연구>의 80몇 쪽으로 돌아가 본다.

"v = nλ₂b"라 ... 친절하게도, 그리고 나에겐 우습게도 "가변자본은 한 생산과정에서 소모되는 노동력의 가치이므로, 그것은 노동자의 수효 n과 노동력의 단위가치로 구성되고 이 후자는 다시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임금재의 수효 b와(그대로 실질임금을 나타내는) 이 임금재의 단위가치 λ₂로 분해된다."고 설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많은 이들이 내가 이유없이 숫자와 수학의 기호들을 피해 왔듯이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이란 측면에 대해, 사회주의에 대해 '패닉'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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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의 시간은 계속된다

2003년 10월 31일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rica). 1989, <집시의 시간>

 

우선 집시를 둘러싼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불과 몇 년 전인 1990년대 말, 체코 북부 국경지대의 집시 마을 부근에 체코인들이 분리벽을 쌓았다. 이에 분노한 집시들은 독일 등지에서까지 몰려와 시위를 했고, 이것이 먹혀들지 않자 캐나다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캐나다 주재 체코 대사가 입국거부를 요청하여 수많은 집시들이 캐나다의 공항에 억류되었고 이에 캐나다 인권운동단체들이 강력하게 비난하여 캐나다 정부는 이들의 입국을 허가하였고 체코 정부는 망신을 당했다.

 

'집시(gypsy)'는 유럽인들이 그들이 이집트인(Egiptian)들과 닮았다 하여 부르기 시작한, 지극히 인종주의적인 개념이다. 나치스의 히틀러는 수백만의 유태인 뿐 아니라 그에 버금가는 집시들 또한 학살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주목받지 못하고, 1990년대 말의 위와 같은 우화를 빚어내고, 지금까지도 차별받고 인권마저도 무시당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그들만의 영토 혹은 국가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 아니 가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백년 전, 인도 북부지방으로부터 소아시아와 유럽을 거쳐 전세계를 떠돌고 있는 집시들이 최근에 이르러서는 국제 집시 연맹을 결성하고 유엔에도 자신들의 대표를 보내고 있지만 이미 그들이 나찌 정권에게 학살당했을 때부터 그들이 원하지도 않았던 '뿌리 내릴' 영토는 국경의 거미줄과 영토의 팻말로 포화되어버렸던 것이다.

 

유고 변방에 머물고 있는 집시 공동체 마을의 한 비극적인, 하지만 집시들이 현재까지 변함 없이 처해 있는 상황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한 가족사를 몽환적인 영상으로 일궈낸 영화 <집시의 시간>의 감독 에밀 쿠스트리차는 아니나다를까 보스니아 내전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간 지난 1995년 <언더그라운드>로 '세르비아 선전물'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클래식 음악을 통해 '헝가리 풍'으로 알려진 집시 음악을 배경으로, 주인공 페르카니의 아코디언 연주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 유랑민의 정서를 듬뿍 담아낸다. 수백년이 지나 21세기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집시들은 도대체 어떻게 영토도 국가도 없이 그들의 정서를 간직할 수 있었을까? 그토록 쫒겨다니고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면서 그럴 수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틀림없이 현명한 사람들일 것이다. 국가라는 것 역시 자신들의 '무엇'을 보장해 준다거나 더 나은 삶으로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경이롭게도 그들은 민족의 혈통조차 그다지 흐려지지 않은 채 세대를 이어간다. 그들의 떠돌고 또 떠도는 생활 속에서 정착민인 타 민족과의 통혼을 금기시하는 일종의 신앙적인 풍습은 자연스레 생겨났을 것이다. 영화 중에서 페르카니가 결혼할 여자를 구해 오라는 아메드의 요구에 자신의 아내만 데리고(자신을 위한 집 따윈 없다는 것 또한 알아채고) 이탈리아로 돌아와서는 "내가 왜 마을에 갔겠냐"고 반문하는 것 역시 그들의 그러한 풍습을 배경으로 한다.

 

한 순수한 마음을 지닌 청년 페르카니가 아즈라와의 결혼을 허락받지 못한 뒤 동생의 다리를 고치고 집을 마련하겠다는 이유로 떠났다가 타락해 가며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자신고 같은 페르카니라는 이름을 가진 네 살바기 아들만 남겨둔 채 목숨마저 잃고 마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에밀 쿠스트리차는 집시들의 운명, 그들에게는 받아들여야 할 하나의 숙명을 그려내고 있다. 페르카니와 같이 집시는 세계의 '사생아'이지만, 그가 가진 초능력처럼 그들에겐 자유로운 영혼이 있으며, 사기를 당하고 아내와 자신의 목숨마저 잃는 그처럼 역경과 비극을 겪어왔지만 페르카니라는 이름마저 똑같은 아이를 남기고 떠났 듯, 집시들은 사라지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이어 온 것이다.
 

집시들은 우리가 흥겨운 춤과 노래로 그들을 떠올리곤 하듯, 낭만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한 풍부한 감수성과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한민족에게 외부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는 말은 우스울 정도로 박해받고 천시당하며 살아왔다. '할 줄 아는 것은 딴따라와 범죄밖에 없다'는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공동체 생활을 영위해 온 그들과 자기의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자기의 집을 짓고 문이란 문은 죄다 꼭곡 걸어잠그고 살아가는 우리들과 소유의 개념부터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에게 '어린 아이를 유괴해 인육을 먹고 산다'는 둥의 악성 루머를 퍼뜨리기도 한 것은 바로 영토와 국가의 틀 안에서의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폭력일지도 모른다.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은 이토록 고통스럽지만 숙명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들의 시간을 잘 담아내고 있다. 나찌 히틀러에게 불성스런 이민족 '노동기피집단'으로 낙인찍혀 수십만, 혹자에 따르면 수백만이 학살당하기도 했던, 현재에 이르러서는 세계적으로 수천만에 이른다는 집시들은 어쩌면 후기자본주의사회의 마지막 유목민이 아닐까?

 

P.S. 집시들은 스스로를 로만(Roman)이라 부른다고 한다. '사람'이란 뜻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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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이방인의 리듬과 선율

2003년 10월 29일
 

Sonny Rollins. 1956, 

 

내가 아직 중학생이었을 때, 친척이라는 까탈스러운 이유라기보다는 비슷한 취향, 그것도 음반을 구입해 듣는다는 아주 간편하면서도 골치아픈 일에 있어서의 공감대 때문에 같은 또래의 무엇 이상의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촌 형은 당시 내가 즐겨듣던 음반이 겟츠 앤 질베르또(Stan Getz/Joao Gilberto)라는 사실에 이런 말을 덧붙였었다. "팝pop에서 락, 그리고 재즈로 가는 게 음악감상의 단계라더라" 그 시절 나는 그리 수준이 높았었나보다.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과 스탄 겟츠(Stan Getz)의 CD들이 먼지에 뒤덮여갈 때쯤 난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몇 장의 재즈 음반들을 더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갖을 수 있었다. 그때 이후로 문화 상품의 홍수와 그로 인한 역설적이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허탈감을 달래주는 색소폰 연주자가 바로 웨인 쇼터(Wayne Shorter)와 소니 롤린즈(Sonny Rollins)였다. 재즈 씩이나 즐겨듣는 나는 안타깝게도 재즈 메신저스(Jazz Messangers) 시절 웨인 쇼터와 함께 연주한 아트 블레키(Art Blakey), 그리고 소니 롤린스와 호흡을 맞춘 맥스 로치(Max Roach)의 리듬감의 차이라던지 이런 것도 잘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재즈 음악의 역사라든지 이런 것은 흔히 장르로 분류되는 그 어떤 음악에 있어서도 쉼게 정의내려지기 어려울 것이다(그런 관심과는 별도로 에릭 홉스봄Eric J. Hobsbawm의 저작 은 관심을 끈다). 블루스가 남부 농장의 흑인 노예들의 애환을 그들의 아프리카로부터의 5음 음계(pentatonic)에 담아낸 노동요로부터 출발한다면, 재즈는 백인들의 교향악단 연주를 보고 악단 음악을 하기 원하면서 타악기들을 현재의 드럼 세트와 같이 구성하고 밴드를 만들면서 그 모양새를 갗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여타의 대중음악과 마찬가지로 여러 모습으로 각각의 선두 주자들을 내세워가며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그 중 버드(Bird)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찰리 파커(Charlie Parker)는 흔히들 밥(Bop)의 개척자로 부르는 연주자이다.

 

대공황을 겪으면서 초기 재즈 이후로 내려오던 빅 밴드(Big Band) 경향이 베니 굿맨(Benny Goodman)으로 대표되는 스윙(Swing)을 주류로 위치시키며 백인들 사교클럽에서 꽝꽝 울려나오던 댄스 음악이었던 것에 반발하여 이른바 아티스트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 바로 밥(Bop) 재즈다. 내가 밥 재즈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소니 롤린스와 웨인 쇼터가 유럽/영미권의 68혁명과 히피 무브먼트를 관통하는 정치사회적 흐름 속에서 비밥(Bee-bop)의 복권(復權)을 선언한 하드밥(Hard Bop)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재즈, 내가 즐겨 듣는 재즈라는 음악은 혹자들은 뭐 하나의 학문이 되었는니 뭐니 해도 어렵고 따분한 음악이 아니다. 흔히 재즈 하면 떠올리는 스타일이 바로 밥 재즈인데, 하드밥의 대표적인 아티스트가 바로 소니 롤린스와 아트 블레키의 재즈 메신저스다. 이 밥 재즈는 초기 재즈로부터 스윙 재즈의 빅 밴드 스타일과도 다르며, 델타 농장에서 흑인들이 부러워했던 교향악단의 음악과도 다르다. 이들 음악이 화성(和聲)을 중시한 반면 밥 재즈는 원초적인 리듬과 풍부한 선율(旋律), 그리고 그것의 자유로운 전개를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인데, 클래식 음악의 화성(和聲)에 훈련되지 않은, 팝(pop)과 락(rock)의 리듬에 익숙한 대중문화 소비자에게 분명 재즈의 리듬과 선율은 접근하기 쉽고도 매력적임에 틀림없다. 이런 재즈가 클래식 만큼이나 음악성을 추구한다지만, 대중적이기보단 '고급스러운 어떤 것'으로 취급받는 상황에서 가까운 일본의 몇몇 밴드와 같은 퓨젼재즈 밴드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소니 롤린즈의 를 오랜만에 꺼내 든 것은 정창화 감독의 <에라이샹>이라는 신성일 주연의 1960년대 영화를 보고 나서다. 여주인공 에라이샹이 일하던 그 술집의 밴드(1960년대 미8군 클럽의 이미지로 그려진)에서 10여명 가까운 트럼펫 주자들이 하모니 없이 같은 멜로디를 울려대다가 한 걸음 앞에 나와있는 솔로 주자가 혼자서 열정적으로 불어제끼는데, 그 곡은 바로 소니 롤린즈도 연주한 바 있던 "Moritat"였던 것이다. 무엇이 1960년대 전후(戰後) 한국의 젊은 트럼펫 연주자를 열정적으로 만들었을까? 라는 음반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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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주고 약 주는 사회

2003년 10월 21일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개인들(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에 대해서 사회는 너무나 잔인할 정도의 요구를 하고 있어서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혁명에 대한 희망은 차치하더라도) 병에 걸리는 것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그 엄청난 질병과 사고에 대해서 사람들은 놀란다. 그것은 일상의 노동에 지친 인간들이 그들의 남아 있는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 다만 질병이라는 그 초라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이란 마치 여행과도 같은 값어치를 지닌 것이다. 그리고 병원에서의 생활이란 곧 성(城)과도 같은 곳에서 누릴 수 있는 사치스런 생활인 것이다. 만일 부자들이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 장 그르니에(Jean Grenier), <섬> 중에서

 

그르니에의 저 단아한 산문집을 그 '부자'라는 자들이 읽어 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다. 주변에 가장 어렵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부모나 친지의 치료비에 등골이 휘고 있는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 사회보장이 잘 발달하여 의료비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던 국가들도 모두들 '괜한 짓을 했거니' 생각하고 있을 참이며, 그들 역시 일부 고질적인 병(?)에 있어서는 철저하리만큼 가혹했기 때문이다.

 

무슨 병이길래 그리 가혹했냐고? 뭐 들먹거리긴 싫지만, 푸코가 그의 저작에서 보여줬던 정신병이 대표적일 것이고, 또 '중독'이라는 무협소설에나 어울릴 이름의 질병 아닌 질병이 있는 것이다. 알콜 중독, 약물 중독, 기타 등등. 다시 저 '지중해의 보석' 그르니에의 산문으로 돌아가서, 현대사회에서 도대체 누가 맨정신으로 삶을 지탱해 나갈 자신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언가들에 대한 중독은 기실 자본주의 사회가 끊임없이 조장 해 가며 스스로를 지탱하는 것이 아닌가? 잔인한 요구로 병들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서 약까지 비싼 값에 팔아먹는 마당에 그 대단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어 의약품규제라는 명목으로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마당이니 원. 명확하게 하고 넘어가자면, '중독'이란 그것이 금단을 통해 신체에 변형 또는 고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문명의 그 어떠한 물질적 혜택(?)과 이질적인 것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갑자기 뭔 소리인지 싶다면, 오늘 신문이라도 뒤져보시라. 어제 저녁 뉴스를 보다가 택시 기사가 러미날을 복용하고 운전하는 걸 승객이 신고하여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미날이 뭐냐고? 다름아닌 감기약이다. 정량의 5배 이상 복용하면 환각작용을 얻을 수 있는 감기약. 일찌기 그 유명한 뽕(필로폰, 염산 에페드린을 가공하여 제조), 헤로인(아편, 몰핀과 마찬가지로 양귀비라는 식물로부터 얻어지며, 이른바 '중독성'이 가장 강하다고 함)과 같은 약에 사람들은 '마약(魔藥)'이라는 섬뜩한 호칭을 붙였건만, 이제는 조금 완곡한 '향정신성의약품'이란 용어가 등장해 감기약까지 마음대로 먹지 못하게 한단다.

 

환각에 취한 운전자가 사고를 내어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심지어 죽인다 하더라도 그런
말이 나올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말하겠다.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과연 그 어떤 물질적
정신적 피해에 국가와 언론이 관심이나 가질 지 의문이다. 밤새 졸음을 쫓아내 가며 교통지옥 속에서 하루 종일 운전대를 잡아야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택시 운전사가 맨정신으로 버텨 나가는 것이 어렵다는 게 사실 아닌가? 중요한 것은 이른바 마약이 정치권력과 자본, 그 자신에게 그만큼 치명적이므로 가장 철저하고 효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감기약 몇 알조차 맘대로 복용하지 못하게 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1960년대 후반 미국의 히피들은 이렇게 금기시 되어 온 것들의 '약발'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에겐 티모시 리어리와 같은 이론가와, 올더스 헉슬리의 메스칼린 임상실험연구서인 <인식의 문>같은 경전과, <호밀밭의 파수꾼>같은 동화가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히피들에 의하여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LSD(Lyseric Acid)를 추출하는 원료식물이 호밀이다.) 그들의 혁명운동은 강력했고, 그 이상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케네디의 죽음(이를 거론하며 히피 혁명운동을 부르주아 정치권의 지각변동 선상에 위치시키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본다)과 함께 하루아침에 씨가 말라버린 것이 아니라, 켄트 주립대의 총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무수한 씨앗을 남기고 제 몫을 다 했을 뿐이다.
 

제국주의 정치권력과 초국적 자본은 그 '약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던 만큼 오래 전부터 그 누구도 쉽게 손대기 어려운 마피아로 대표되는 어두운 세력을 키워가는 동시에 일종의 '사회적 분업'을 통해 그것을 손쉽게 통제해 왔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일부 유럽 국가들은 '합법화'란 다른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다(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경우에도 기껏해야 30g 소지가능하며 역시 매매는 불법이다). 중요한 것은 일부 약물에 대한 통제와 그것이 가진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지, 당장 담배와의 비교 등을 통해 마리화나를 합법화하자는 그런 주장이 아니다. '중독성'의 정도를 가지고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중독될 만큼 중독되어 있다.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로 거기에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열어보고자 했던 이들의 의지가 담겨 있으며, 새로운 움직임에의 필요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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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투병 파병 논쟁을 지켜보며

2003년 10월 20일

 

익숙치 않은 클러치 조작으로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추스리며, 셋째 날 굴절코스를 마치고 운전면허학원을 나서다가 모처럼 자판기 커피 한 잔과 함께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최돈웅 의원 100억 수수 시인, 경북 봉화 버스 전복사고 등 그저 그런 소식들(이런 게 그저 그런 소식인 세상에 살고 있다)을 제쳐두고 내 눈에 확 들어 온 기사는 노통장의 파병 결정 발 표 후 국회의원들의 파병 관련 입장 표명을 실은 기사였다.

 

황당한 것은, '입장 유보'라는 이들을 둘째 치더라도 '전투병 파병엔 반대, 비전투병 파병엔 찬성'이라는 이들이다. 지난 일요일 저녁에 KBS에서 방영된 100인 토론인가 하는 프로그램만 안 봤어도 이런 생각 안 해봤을 텐데, 재신임 정국 어쩌니 하는 주제로 나왔던 패널 중에 개혁국민당의 유시민이 있었던 것이다.

 

일전에 김영환 의원과 둘이서 손석희가 진행하는 토론 프로그램에선 파병 반대를 사회운동진영의 주장 수준으로 밀어부치던 이들이 단식투쟁한다고 난리치던 임종석과 함께 앞서 말한 웃기지도 않은 입장 아닌 입장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찬성을 하건 유보를 하건,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 쳐도 그렇게 그럴 듯 해 보이려던 사람들이 내세운 입장이라는 비전투병 파병에는 찬성이란 말은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아직 전역증에 잉크 냄새도 마르지 않은, 최근의 그 모호한 기준으로는 '비전투병'생활을 했던 나로서는 "도대체 전투 안 하는 군인이 어디 있느냐?"...라는 대한민국 예비군다운 의문밖에 남겨줄 것이 없다.


자세히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파병 사단의 구성은 1개 특공여단과, 1개 공병여단, 의무대 등으로 구성될 모양인데, 여기저기 떠벌리던 사람들 말대로 사정이 바뀌어 건설공병과 의무병과만 파병한다 하더라도 똑같이 얼룩덜룩한 전투복 입고 개인화기 K2소총 죄다 메고 돌아다니는데, 이라크 사람들에게있어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구나 파병을 필요로 하는 지역은 북부 모술이고, 바로 그 곳 때문에 파병을 요구하는 것이고, 한국군 배치 후 이동 예정인 그 지역 현재 주둔군은 101공수사단(101 Air Borne)이다. 비디오와 DVD, 케이블TV를 통해서까지 국내에서 굉장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드라마 를 통해 그야말로 돌아온 영웅으로 한참 '뜨고'있는 그 부대 말이다.

 

몇 달 전, 이라크 추가 파병에 지원한 중대 후임병이 있다. 같은 소대의 다른 한 녀석은 내가 막 뜯어말려서 결국 지원은 안 했지만, 암튼 얼굴을 아는 사람이 전쟁터에 팔려나가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긴 한데 ... 그것도 내 생각일 뿐이다.

 

의무복무 하고 있는 대부분의 현역 군인들은 자격만 된다면 전쟁터로 파병 지원을 하고 싶어 한다. 뭐 대단해 보이고 영웅적인 거 같아서? 대한민국을 빛내고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 죽을 거 같지도 않고 별로 안 위험해 보여서?

 

절대 아니다. 병사들의 경우 한달에 2-3만원 받다가 전쟁터 가더라도 한 달에 100만 원 이상 받는다는 것, 전역 해도 취직도 갑갑한데, 한 밑천(?) 잡는 것,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 이러나 저러나, 군대 말로 ... "죽으면 개값"이니까.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런 부분엔 별로들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싸우느냐 안싸우느냐가 문제라고? 세상에 안 싸우는 군인이 어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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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의 댄서, 세기말 채플린의 귀환

2003년 10월 20일

 
라스 폰 트리에, <어둠 속의 댄서Dancer in the Dark>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을 보고서야 알았다. 이 영화의 감독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 라스 폰 트리에라는 사실을. 그리고 최근에 그가 니콜 키드먼 주연의 <도그빌>이란 영화를 연출했고, 그의 '미국 3부작'이 어쩌니 하는 떠도는 얘기들도 떠올랐다.

 

게다가 저 두툼한 뿔테안경을 눌러 써 제낀 여자는 가수 '뷰욕'아닌가. 이른바 영화의 '히로인'이 미국사회에서의 이민족이며, 프레스 노동자이고 여성인 동시에 미혼모에다가, 시각장애마저 하나뿐인 아들에게 대물림된다면, 결말은 어느 정도 예상되는 바이지만 ...

 

이웃에게 '비밀'을 빌미로 음모에 빠져 교수대까지 가는 이 이야기가 미국 북부(로 추정되는)의 한 마을에서 모두 이뤄지고 있다면, 가뜩이나 겁많은 미국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얼마나 잔뜩 겁을 집어먹고 소란을 피웠을지 알만하다.

 

영화의 '뮤지컬'의 측면에 대해선 길게 할 말은 없다 난 이미 '세기말에 돌아온 채플린'을 잠시 만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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