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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의 마지막 한 시간

2003년 11월 04일

 
집에서 신문 구독을 안 하는 관계로 요 며칠 사이엔 운전학원에 비치된 세계일보를 직원조회가 끝나길 기다리며 읽고 있다. 어제의 어두운 전쟁 소식으로부터의 어두운 분위기를 쇄신하려는지 어째 오늘의 1면엔 그야말로 고품격 코미디가 등장해 있다. 요즘 뉴스의 '기본메뉴'인 정치자금 기사와 일종의 그에 대한 '맞공세'인 공직자 재산 관련 기사의 사이로 불쑥 나의 눈에 들어오는 기사 제목, '경제 5단체 성명 발표'라. 기사 하단의 관련기사 몇 면이라는 곳을 펼쳐보니 손낙구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장과 전경련 법률자문인지 하는 두 사람이 지상논쟁을 통해 '손배가압류'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부당노동행위이자 노동탄압'과 '명백한 법치주의의 결과'라는 이 두 가지의 주장들 사이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시니어의 '마지막 1시간'"이다. 무슨 영화 제목 같은 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19세기 초 영국, 공장법이 제정되고 11.5시간의 노동시간이 법제화 되었지만 10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노동운동은 끊이질 않았다. 이에 공장주들은 이에 대항할 투사를 찾았고 그가 바로 낫소 시니어라는 경제학자였다. 그는 "노동자들은 마지막 1시간에 순이익을 생산하며 바로 그 전의 1시간에 자신의 임금을 생산한다"며 "노동시간이 1시간 줄어들면 순이익이 나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토요일에 은행이 문을 열지 않는다든지 하는 사실로 '아, 주5일근무제였지?'하고 쉽게 생각하는 지금, 일 하는 시간이 줄어 노동자계급의 삶이 과연 나아졌는가? 몇 년 전 '주 5일 근무'등을 중심으로 한 노동시간 단축운동이 주요 쟁점이었던 때, '노동조건의 후퇴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강조했던 이들은 '마지막 1시간'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던 이들일 것이다. 피지배계급이 투쟁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어떤 것이 생각보다 쉽게 얻어진 것이라면 그건 분명 지배계급의 이해에 충분히 부합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지회장의 자살과, 연일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분신, 투신은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손해? 그래서 한진자본은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조건으로 70%의 휴근수당을 지급한 것인가보다)와 가압류에 '법치주의'를 내세우고, '대기업 노동귀족'운운하는 그들이 200여 년 전의 '마지막 1시간'과 마찬가지의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은 우스울 따름인 주장을 해 대며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짓밟는 자본의 본성에 있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럼 어디 노동시간이 줄어서 나아진 건 또 뭔가? 노동귀족은 또 뭐고? 故 김 지회장의 유서를 본 사람이라면 그의 임금내역을 보고 경악했을 것이다. 임금노동자가 한 달 동안 일하고 받는 돈에, 대체 기본급과 수당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한편, 노동귀족이라는 표현이 우스운 근거를 자신들 스스로 제공하고 있음을 그들은 알기나할까? 최근의 정치자금 수사에 '표적수사'라는 비난과 함께 정부 각료의 재산내역과 25년 근속연수의 임금노동자의 그것을 비교해 선전하는 그 내용을 보면 후자의 노동자가 보통 자기 살 집 하나가 재산의 전부이거나 집값도 충당 못 하고 있음을 강조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와중에 토지공개념이 어쩌구 하면서 전매금지 등의 부동산 정책 쇼까지 벌이지만 역시 그것은 한낱 쇼다.

 

시니어의 '마지막 1시간'이 떠오른 것은 정말인지 이딴 거짓들이 지겹기 짝이 없어서이다. 낫소 시니어의 '마지막 1시간'은 마르크스가 그의 저서인 <자본>에서 '잉여가치율'이라는 것을 설명하며 예를 들어 보인 것이다. 그는 당연한 반문을 던진다. '마지막 1시간'이 그 전의 한 시간, 또 그 전 전의 한시간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투입된 자본과 노동력의 가치는 동시에 전화(轉化)한다는 당연한 것을 공장제 '기계'공업은 다르다는 식으로 호도하고 속이는 모습이 어찌 그리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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