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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새내기 시절의 고민 중 하나

2003년 11월 04일

 

우연찮게 새내기 시절에 썼던 나의 글을 발견했다. 제목도 거창하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란다. 이상할 것까진 없지만, 군대에 다녀 온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그 풋풋한 시절에 으레 그렇듯 그 표현과 주장의 근거도 빈약하고, 힘만 잔뜩 실어 놓고 책임감 부족한 그런 면이 조금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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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나름대로 기대를 품고 시작했던 대학생활도 어느덧 8개월이 흘렀다. 그 동안 한편으로는 스스로 쉽게 허무에 빠지지 않으려 애써 왔던 만큼(?) 나는 개펄 속에서 많은 진주들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저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나에게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은 여지없이 찾아들었고 결코 쉽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는 고민을 던져주었다. 동기들 혹은 선배들과 '우리 학교는 왜 이럴까?'류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여자애들이 많아서 그래'라는 난데없는 결론에 도달해 있는 모습, 때때로 나의 인간에 대한 굳은 믿음마저 뿌리째 흔들고 마는 일상적 성폭력의 모습들은 결코 남성인 나를 피해자의 범주에만 들게 하지는 않았다.

 

어떤 글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남자가' 혹은 '여자가'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지독한 마초이즘에 근거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우리사회의 지독한 남성중심주의, 즉 '자지제일주의'(달갑지 않은 인물이지만 도올 김용옥의 표현을 빌리자면)의 피해자는 남성에 의해 물리적 폭력을 당하고 강제로 성기삽입을 당한 여성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여성, 그리고 가해자와 잠정적 가해자를 포함하는 남성들 또한 해당된다.

 

'남자새끼가'라는 말의 위력은 대단하다. 연초에 군가산점제를 둘러싼 논쟁이 우리 사회를 달구었다. 군대를 다녀 온 남성들에게 기업체 입사시험 등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났다. 이에 많은 남성들은 '군대를 갔다 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손해'라는 점을 강조하며 가산점을 줘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왜 군대라는 곳에 질질 끌려가야만 하는가?'에는 미치지 못할까?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군대를 갔다 와야해'라는 말을 남성들은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 왔다. 그러나 적어도 내 경험상 '군대를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고 말하는 인간들은 거의 모두가 '자지라는 강력한 무기를 탑재한 체제의 가미가제'였다.

 

대학에 들어오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늘 거북했던 때가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특히 대학생들간의 만남에서 '**대학교 **과(학부) **학번 아무개입니다'라는 소개를 듣기도 거북했고 나를 그렇게 소개하는 것이 정말 싫었다. '육군 **사단 **부대 이등병 아무개입니다'라는 식의 소개와 너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식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기는 더욱 힘들다. 어떻게든 출신 성분과 나이를 알아내어 위계를 정하고 한 인간을 틀 속에 집어넣으려 하는 우리들의 습관이란 인간에 대한 존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민주주의가 어쩌고 하면서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언사를 일삼는 이런 어이없는 일들도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수 있다.

 

이렇게 한 인간을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윗분'과 '아랫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여성을 동물 내지는 물건으로 보는 남성들의 지배 전략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우린 젊고 뭔가 '아닌' 것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당당하게 '여성주의적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역사를 쓸 주인공들은 우리 젊은이들이 아닌가. '탁류는 거스르고 역사는 함께 가는 것'이라 했다. 평등한 세상, 진정한 자유인의 공동체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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