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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주고 약 주는 사회

2003년 10월 21일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개인들(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에 대해서 사회는 너무나 잔인할 정도의 요구를 하고 있어서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혁명에 대한 희망은 차치하더라도) 병에 걸리는 것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그 엄청난 질병과 사고에 대해서 사람들은 놀란다. 그것은 일상의 노동에 지친 인간들이 그들의 남아 있는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 다만 질병이라는 그 초라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이란 마치 여행과도 같은 값어치를 지닌 것이다. 그리고 병원에서의 생활이란 곧 성(城)과도 같은 곳에서 누릴 수 있는 사치스런 생활인 것이다. 만일 부자들이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 장 그르니에(Jean Grenier), <섬> 중에서

 

그르니에의 저 단아한 산문집을 그 '부자'라는 자들이 읽어 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다. 주변에 가장 어렵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부모나 친지의 치료비에 등골이 휘고 있는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 사회보장이 잘 발달하여 의료비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던 국가들도 모두들 '괜한 짓을 했거니' 생각하고 있을 참이며, 그들 역시 일부 고질적인 병(?)에 있어서는 철저하리만큼 가혹했기 때문이다.

 

무슨 병이길래 그리 가혹했냐고? 뭐 들먹거리긴 싫지만, 푸코가 그의 저작에서 보여줬던 정신병이 대표적일 것이고, 또 '중독'이라는 무협소설에나 어울릴 이름의 질병 아닌 질병이 있는 것이다. 알콜 중독, 약물 중독, 기타 등등. 다시 저 '지중해의 보석' 그르니에의 산문으로 돌아가서, 현대사회에서 도대체 누가 맨정신으로 삶을 지탱해 나갈 자신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언가들에 대한 중독은 기실 자본주의 사회가 끊임없이 조장 해 가며 스스로를 지탱하는 것이 아닌가? 잔인한 요구로 병들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서 약까지 비싼 값에 팔아먹는 마당에 그 대단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어 의약품규제라는 명목으로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마당이니 원. 명확하게 하고 넘어가자면, '중독'이란 그것이 금단을 통해 신체에 변형 또는 고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문명의 그 어떠한 물질적 혜택(?)과 이질적인 것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갑자기 뭔 소리인지 싶다면, 오늘 신문이라도 뒤져보시라. 어제 저녁 뉴스를 보다가 택시 기사가 러미날을 복용하고 운전하는 걸 승객이 신고하여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미날이 뭐냐고? 다름아닌 감기약이다. 정량의 5배 이상 복용하면 환각작용을 얻을 수 있는 감기약. 일찌기 그 유명한 뽕(필로폰, 염산 에페드린을 가공하여 제조), 헤로인(아편, 몰핀과 마찬가지로 양귀비라는 식물로부터 얻어지며, 이른바 '중독성'이 가장 강하다고 함)과 같은 약에 사람들은 '마약(魔藥)'이라는 섬뜩한 호칭을 붙였건만, 이제는 조금 완곡한 '향정신성의약품'이란 용어가 등장해 감기약까지 마음대로 먹지 못하게 한단다.

 

환각에 취한 운전자가 사고를 내어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심지어 죽인다 하더라도 그런
말이 나올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말하겠다.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과연 그 어떤 물질적
정신적 피해에 국가와 언론이 관심이나 가질 지 의문이다. 밤새 졸음을 쫓아내 가며 교통지옥 속에서 하루 종일 운전대를 잡아야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택시 운전사가 맨정신으로 버텨 나가는 것이 어렵다는 게 사실 아닌가? 중요한 것은 이른바 마약이 정치권력과 자본, 그 자신에게 그만큼 치명적이므로 가장 철저하고 효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감기약 몇 알조차 맘대로 복용하지 못하게 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1960년대 후반 미국의 히피들은 이렇게 금기시 되어 온 것들의 '약발'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에겐 티모시 리어리와 같은 이론가와, 올더스 헉슬리의 메스칼린 임상실험연구서인 <인식의 문>같은 경전과, <호밀밭의 파수꾼>같은 동화가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히피들에 의하여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LSD(Lyseric Acid)를 추출하는 원료식물이 호밀이다.) 그들의 혁명운동은 강력했고, 그 이상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케네디의 죽음(이를 거론하며 히피 혁명운동을 부르주아 정치권의 지각변동 선상에 위치시키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본다)과 함께 하루아침에 씨가 말라버린 것이 아니라, 켄트 주립대의 총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무수한 씨앗을 남기고 제 몫을 다 했을 뿐이다.
 

제국주의 정치권력과 초국적 자본은 그 '약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던 만큼 오래 전부터 그 누구도 쉽게 손대기 어려운 마피아로 대표되는 어두운 세력을 키워가는 동시에 일종의 '사회적 분업'을 통해 그것을 손쉽게 통제해 왔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일부 유럽 국가들은 '합법화'란 다른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다(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경우에도 기껏해야 30g 소지가능하며 역시 매매는 불법이다). 중요한 것은 일부 약물에 대한 통제와 그것이 가진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지, 당장 담배와의 비교 등을 통해 마리화나를 합법화하자는 그런 주장이 아니다. '중독성'의 정도를 가지고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중독될 만큼 중독되어 있다.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로 거기에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열어보고자 했던 이들의 의지가 담겨 있으며, 새로운 움직임에의 필요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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