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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장밋빛 인생이 있었던가

2003년 10월 17일

 

알랭 베를리너(Alain Berliner) 감독. 1997, <나의 장밋빛 인생>


운이 좋은 건지, 시내의 비디오가게 중 나의 단골이자 드나드는 유일한 가게인 '충남비디오'에선 찾아갈 때마다 눈에 확 들어오는 그런 비디오테잎이 꼭 하나씩 있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 중 내 기억을 강렬히 지배하는 영화라면 ... 최근의 영화인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의 <헤드윅>일 것이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하나님의 실수'로 표현하는 모습에선 정말인지 <헤드윅>이 떠올랐다. 물론, 영화를 만든 어른들이 애써 아이의 시선을 포착하려다. 실수한 부분이라 생각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의 장밋빛 인생>은 어른들과는 고도상으로 다른 공간을 통해 살아가는 어린이의 성정체성을 담아냈기에 독특하고 강렬한 느낌을 선사한다.

 

어린 아이의 '성장'을 통과하며 성정체성을 담아내기 때문에, 성정체성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두 배의 고통을 선사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가 남겨주는 최대의 교훈이란 이른바 '시골담론'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이웃을 잘 만나야 내 집안과 동네가 평화롭다"에 다름아니다.

 

주인공 루드빅을 연기한 조르주(Georges du Fresne)라는 꼬마의 눈앞이 아른거릴 정도로 깜찍한 연기와 심지어 자식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시점을 자연스럽게 잡아내고 있는 카메라워크는 정말 놓칠 수 없다

 

가장 골치아프고 복잡한 것은 일상이라 했던가. 영화는 이 모든 것을 한 아이의 눈높이를 통해 관객의 일상과 동일선상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마지막에 옷을 바꿔 입은 여자아이가 못생긴데다 남성의 성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설정이 아니었다면, 결말의 그런 화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이야기는 아쉽게도 '가족'으로의 화해로 귀착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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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랜즈 오퍼스와 콘랙 사이

2003년 10월 15일

 
<홀랜즈 오퍼스>찾아달라니까 비디오가게 아주머니가 이것도 재밌다며 <콘랙Conrack>을 골라주었다. 존 보이트(John Voytt) 주연의, 꽤 오래된 1970년대 영화인데, 팻 콘로이(Phat Conroy)의 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미시시피 하류의 흑인 섬마을로 오게된 젊은 아일랜드계 백인 교사 팻 콘로이, 꼬마들은 그를 '콘랙'이라고 부르게 된다. 주인공과의 첫 대면에서 콘로이(Con"roy")를 콘랙(Con"rack")으로 악의적으로 고쳐 부르던 아이들의 모습은 진절머리가 났을 그들의 고통을 충분히 암시해 준다. 랙(rack)은 일종의 체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히피 세대의 젊은 백인 '콘랙'이 흑인 사회에 흘러들어와 꼬마들과 정들고 또 헤어지는 데서 그치지 않는 것은, 주변부로부터 또 다시 소외된 주변부에서 그가 겪는 희망과 절망, 추함과 아름다움, 교육과 훈육의 모순 등이 경쾌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영화들의 이야기 방식으론 이해가 안 되는 엉뚱한 면이 느껴지는 이 영화에서 '영화의 언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어설프게나마 받았다면 비약일까? 어떻게 흑인 꼬마 아이들로부터 그런 눈빛을 잡아 낼 수 있었단 말인가. <홀랜즈 오퍼스>를 보고 난 뒤의 반작용이 날 이 영화에 이토록 우호적으로 만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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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랜즈 오퍼스의 꼰대주의

2003년 10월 15일

 

처음 보는 인물이지만 리처드 드레퓌스의 깊이 있는 연기, 영화가 끝나고 정신을 차리기 전까진 흠칫 놀라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스토리 전개, 영화 군데 군데 거칠게 덧붙인 <포레스트 검프> 식의 상장 혹은 무공훈장 전시회, 영화 내내 흐르는 바흐와 베토벤과 락큰롤 ... 가끔씩 이런 영화를 보는데, 멜 깁슨 류의 액션스릴러물 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젊은 사람이 보아선 '안 될' 영화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임용고시 준비한다는 친구녀석이 하도 추천하길래 봤는데, 예산축소로 음악 미술과목이 폐지된다고 60먹은 노인네 선생이 혼자 싸우다 퇴직하는 마당에 주지사까지 포함한 제자들이 준비한 건 성대한 환송회였다. 대놓고 조국 아메리카 만세를 외쳐대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포레스트 검프> 식으로 '미국적 가치'를 받아들일 것을 준엄하게 요구하면서, 함부로 건들기 어려운 '예술가-교사'를 내세우는 영악한 방법까지 동원했으니 위협적이지 않은가.

 

왜 중고등학교 때 나름대로 쓸만한(?) 선생들이 수업시간에 <죽은 시인의 사회>같은거 보여주고 그러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에 미치니 갑자기 섬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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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

2003년 10월 15일

 

 

 
 

 

이필렬. 2002,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 녹색평론사.

 

땅을 파면 쇠붙이가 나오기 마련이라던가. 종종 만나는 일이지만 이런 식의 인연이 그리 특별히 여겨진다기보단 이젠 자연스러울 뿐이다. 얼마 전 만난 사촌형과의 대화 중 이라크 파병 문제에서 화제가 부안 위도 핵폐기장 건설유치 문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투철한 예비역 병장 정신과 그의 인생 길가의 코스모스 같은 술병으로 무장한 형은 이렇게 말했다.

 

"새만금은말야, 사업 반대에 대해 원칙적으로 이해가 가는데, 핵폐기장은 도대체 이해가 안 돼. 너 지금 이렇게 당장 쓰고 있는 전기 만드는 데 쓰이는 핵발전 폐기물 당장 가져다가 묻어야 될 거 아냐. 과정이 비민주적이라고 해도 가는 곳마다 반대인데, 우선 만들어 놓고 이후의 폐기장에 대해선 민주적인 과정으로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언제나 그래 왔지만, 이런 부분에서 나는 나의 허약 체질을 드러내고 한계를 드러내 왔는지라 군대 생활동안 뉴스를 통해 그런 일이 있었다 "카더라" 뭐 이런 얘기를 들었을 뿐인, 그래서 그 따위가 변명이 될 수 밖에 없는 나의 현실을 "음, 좀 알아보고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이런 나에게 제목상으로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책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석유의 매장량에 대한 보편적인 예측의 강한 부정으로 시작하며 그리 낯설지 않은 캠벨의 종모양 곡선 등으로 단순명쾌하게 석유시대의 종말을 고한다. 현재의 발전산업과 민영화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는 약간 모호한 접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런 그의 접근방식 또한 여전히 유효했다

 

핵 발전 ... 그 누가 이것을 100% 안전하다고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우라늄 역시 석유와 마찬가지로 제한된 지역에, 제한된(그리 오래 가지 않을)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망각하기 쉬운 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열거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자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이 안겨주는 가장 큰 충격은 바로 에너지 시스템에 대한 분석과 대안인 것이다.

 

석유를 대신할 대체 에너지의 중요성은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고 최근에는 전혀 무공해라는 브라운 가스(수소를 이용한)와 수소를 통해 전기에너지를 전환하는 방식 등이 호들갑 속에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소 역시 사태를 돌파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단호히 못박는다. 수소 역시 수증기라는 온실가스를 배출한다는 점에서 엄밀히 따지면 대안에너지로 보기 어렵다고도 한다.

 

석유시대가 만들어 낸 에너지 시스템의 핵심은 바로 "집중"이라는 것이다. 오일쇼크와 캘리포니아 정전 대란,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실례가 있듯이 석유와 천연가스, 핵으로 이루어진 에너지 시스템은 반환경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대규모로 집중되어 있다는 위험성을 가진다.
 

 

인간 세계의 정치에 있어서의 문제도 화석에너지 시스템과 더불어 권력의 집중 문제이며, 마찬가지로 발악을 하고 있지 않은가. 태양열, 풍력, 소수력 발전과 같은 순수한 대안/대체 에너지가 아닌 '재생가능'에너지와 함께 최대한 마을 단위의 '분산된 시스템' 또한 이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

 

참, 처음의 문제에 대한 답을 깜빡할 뻔했다. 현재의 핵폐기물은 임시 저장 장소에 수용이 충분히 가능하나 2010년까지 5-10기의 원전을 증설할 계획 때문에 정부는 위도 처리장 건설을 서두르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비민주적으로 핵폐기물 처리장 부지를 확보할 필요까진 없으며, 그보다, 원전 건설 계획을 취소하고 단계적으로 현재의 원전 역시 철거해 나가야 한다. 눈 앞의 전력 수요 증강만을 생각한다면 훨씬 더 큰 문제에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부딪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재생가능 에너지 기술과 모델을 연구하고 이것을 통제가능한 분산된 범위에서 적용해 나가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란 인간은 환경에 대해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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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과 창원으로의 짧고도 굵은 외유

2003년 10월 15일

 

한참 어두워져 울산에 도착한 나는 조** 동지 댁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전** 동지를 비롯한 몇몇 분들이 와 계셨고 저녁밥을 먹고 현대중공업의 노동조합 선거, 사내하청노동조합의 투쟁 상황 등에 대한 동지들의 토론을 지켜보았다.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는 노동자주의(조합주의 또는 경제주의)와 정치투쟁, 반전반세계화 등의 화제가 아직 정신 덜 차린 나의 귀를 후벼파들기도 했다.

 

동지들의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나름대로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기도 했다. 이를테면 계급적 노동운동이 노동조합과 의회주의 정당 가운데서 어떻게 용해되어버리며 따라서 왜 정치조직이 중요한가라든지, 반전반세계화와 같은 과제들이 어떻게 민족주의에 희석되지 않으면서 계급적 투쟁으로 현장에서 조직될 수 있는지, 반전총파업이 '맞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물론 '중요한' 고민들이, 잠시 나로부터 떨어져 나를 지켜보았을 때 가당한 고민인지부터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스물 셋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아직도 갈팡질팡하며, 쉽게 칭얼대고, 쁘띠부르주아의 때를 채 벗겨내지도 못한 탓이리라. 그 몇 시간동안의 동지들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 고민해야 할 것은, 바로 동지들의 그 모습, 조금의 거짓도 틈입하지 못할 것 같은 눈빛들이 보여주는 삶과 사람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동지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L선배는 무언가 풀리지 않는 듯한 고민과 육체적 피로가 역력한 모습으로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나는 조** 동지와 새벽 두 시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동자로서 '학생'에게 들려주는 동지의 이야기를 듣다가 꼭 3년 쯤 전에 정말 그와 꼭같은 얘기를 해 준 사람이 생각났다. 채** 선생님이었다. 그의 조언은 따끔한 일침과도 같았고, 3년 뒤 울산의 만세대 아파트 방 안에서 조** 동지는 침착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기보다는 눈빛으로 그 무엇을 전달해 주려는 것 같았다. 지금의 나에게 대체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나는 장인 밑에서 일하는 견습공, 그것도 잔기술만 속성으로 익혀 하루빨리 치고 올라오려는 그런 견습공의 모습을 보이진 않았을까? 그럼에도 아무 것도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고 변함 없이 그대로이다. 이가 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무뎌졌을 뿐이라면 다시 정성들여 날을 세우면 되지 않겠는가.

 

아침에 눈을 뜨니 여덟 시쯤 되었더라. 같이 가기로 했었는데 조** 동지는 내가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고 혼자 출투를 다녀오셨단다. 오전엔 L선배와 사내하청노동조합 동지들이 있는 사무실과 5공장 근처의 현대차 모 현장조직 사무실에 들른 뒤 창원으로 향했다. 금속노조 경남본부에서는 한진중공업과 세원테크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전날 마셨던 약간의 술 때문인지 하루종일 두통에 시달렸지만 울산과 창원의 그 엄청난 규모의 공장들을 보니 두통마저 잠시 잊혀지는 듯 했다. 인간의 산 노동을 지금껏 집어삼키기만 했던 공장이 새로운 세상의 숙주가 되리라 믿어 본다.

 

돌아오는 길, 초등학교 때 감기걸리면 아프고 열이 나는 것은 우리 몸의 항체와 나쁜 병원균이 마구 싸우고 있어서라고 들었던 기억이난다. 제 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게 사람이듯, 면역이 조금은 약해졌는지 나는 알 수 없는 무엇을 앓게된 기분이었다. 떠날 때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종합병원을 찾은 중년이었는지는 몰라도 돌아갈 땐 스물 세 살로 돌아가야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시간이어야 할 L선배와의 돌아오는 길에서 두통과 그 알 수 없는 앓이로 핑계를 돌려보고도 싶지만, 온전히 솔직하지도 못했고 맞닥뜨리려 하지 못했던 것은 짧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금의 나에겐 아쉬움이자 부끄러움이다.

 

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민주노동당에 당비 내면서 잠시 학생그룹의 일원이었을 때 그들이 '주입'하려 했던 '민주집중제의 원칙'은 내가 지금까지도 '리버럴'하기 때문인진 몰라도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던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후 내가 보아온 또 다른 동지들은 나의 '리버럴'함에 끊입없이 채찍질을 해 나갈 수 있는 무엇을 너무나도 강력한 인상으로 보여주었다.

 

대전에 다다르니 이미 **행 막차마저 모두 떠난 뒤였다. 할 수 없이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고 Y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다음날 오전에 잠시 학교엘 들러 보았다. 중간고사 기간이란다. 이제 스물 셋으로 돌아왔으니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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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어와의 조우

2003년 10월 10일

 

음반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저 목소리와의 그것 또한 하나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면 참 묘한 듯 하다. 군대 생활도 일 년이 넘어가고 슬슬 '그곳 생활'에 매몰된다. 싶었던 날들의 어느 비 오는 주말, 강원 산간의 좀처럼 그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이 소도시의 읍내로 나는 외박을 나왔다.
 

비싼 여관비를 내고, 아주머니는 "혼자 잘거면 여기가 좋아. 그림도 좋고, 여기서 묵어"라며 내 덩치의 두 배 만한 여인이 한쪽 벽을 가득 매우고 번쩍거리며 그려져 있는 두 평 남짓한 방으로 안내했다. 한 잔 술도, PC방에서의 온라인 게임 따위도,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던 나는 우습게도 TV를 틀었다. 물론 늘 똑같은 방식의 웃음과 찡함을 선사했던 그 네모난 상자 속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건 젊은 백인 청년 가수의 공연 실황이었다.

 

실로 트레이시 채프먼 이후에 오랜 만에 맛보는, 혹자의 표현을 빌리면 '단아함'이랄까 ... 그와 함께 다가오는 소리의 풍부함 ... 싱어 송 라이터라는 직함 때문인지 어떤이는 데이브 매튜스와 비교하기도 하지만, 레니 크래비츠 이후 가장 공고한 자신의 성을 쌓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은 엘 고어의 "Gore Liberman!" 유세장에 모습을 드러낸 제임스 테일러의 옛 모습과도 '비교'하기엔 뭣한 ... 내면으로 침잠할 줄 알면서 그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아낄 줄 알면서도 절대 인색하지 않은, 고집스러움을 지닌 멋진 젊은이였다.

 

잊고 있었던'소리의 즐거움'을 나는 3층 여관방에서 만났던 것이다. 그의 청중들은 그런 그를 받아들이는 법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여느 라이브 음반이 지닌 웅웅 울리는 사운드와 연주와 노래의 시작과 끝마다 거부감마저 드는 환호성과 같은 것들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 자연스러움으로 라는 라이브 음반을 함께 만들어 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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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앤 더 시티의 찝찝한 솔직함

2003년 10월 10일

 

나는 TV와 별로 친하지 않았었는데, 그것이 유용하게 설치되어 있는 생활을 맞이하게 되면서 종종 그 네모난 상자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물론 가장 짜증나는 것이 재미를 쥐어 짜내는 쇼 프로그램과 그럴 듯 해 보이고 그나마 쓸만해 보이는 교양프로그램일 것이다. 그 가운데 놓치지 않고 보게 된 것이 거의 전 세계의 테레비를 움켜쥔 미국산 드라마라니 이것 참.

 

<프렌즈>의 인기를 되받아 이어가고 있는 <섹스 앤 더 시티>와 제작자의 파워란 이토록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그것이다. 이 HBO의 두 개의 거대한 남근 프로젝트 중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중간쯤부터 본연의 지루함을 드러내어 방송시간을 망각하기에 이르렀으나, 종종 쏠쏠한 재미를 선사하는 무시무시한 연출로 시청자를 묶어놓는 뉴욕의 스타일리쉬한 네 명의 노처녀 이야기 <섹스 앤 더 시티>는 왜, 심지어 스파이크 리 마저 제작 조건 운운하며 필름을 포기하고 케이블 TV로 선회하였는지를 실감나게 한다.

 

예컨대 오늘 방영분의 두 에피소드는 72세 노인인 억만장자를 낚은 사만다가 "old dick"을 감수하고 잠자리까지 가지만 결국 그의 축 처진 엉덩이를 보고는 도망 나오고 / 바텐더와 사랑에 빠진 변호사 미란다가 현대판 카스트인 경제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헤어진다는 두 스토리를 축으로 꾸며진다.

 

이런 것들을 통해 뉴욕이라는 메트로폴리스에서 결혼이라는 '여성의 무덤'에 이르는 조건들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특히 섹스에 있어서도 멋들어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네 명의 노처녀들의 일과 사랑과 섹스를 깔끔담백하게 그려 내는 척 하지만, 결국 그녀들의 미래가 '남자'에게 귀착되어 있고, 뉴욕 중상류층 사회라는 물질적 조건을 망각하게 하여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진지한 성찰보다는 오도된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복잡멍청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매번의 에피소드가 정작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도 이 TV 시리즈물은 솔직하지 않은가. 찝찝하게 솔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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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공공도서관에서

2003년 10월 09일

 
7년 전, 그러니까 내가 막 집에서의 생활을 마무리지었던 그 해 7월에 공공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말하자면 길지만 중학교 졸업 이후 학교생활도 모두 멀리서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군대까지 다녀왔으니 정작 민감한 시기엔 '나만의 공간'을 가져보지 못한 샘이다.) 아쉽게도 그해 가을과 겨울 동안밖에 이용하지 못했지만, 이후에도 잠시잠깐 집에 와 있는 동안에는 찾아가 보곤 했다. 시립도서관이 너무 멀고 좁아 터진 까닭에 전혀 이용을 하지 않다 보니 ... 어쨌든 고향에 이런 게 생겨나니 좋았다.
 

책은 그리 많진 않지만, 버스정류장에서도 멀지 않고  **천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책을 읽곤 하면 무언가 알 수 없는 다급함 같은 것이 좀 가라앉고는 한다. 군대에 갔다 온 동안 바뀐것이라면 ... 미디어 자료실이라는 게 생겨나서 인터넷과 DVD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오늘은 K가 일찍 퇴근한다고 해서 먼저 버스로 시내에 나와 도서관에 들렀는데, 시간 여유도 있고 해서 이진경이 엮은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를 펼쳐보았다. 눈길을 끌었던 글은 고교시절 보았던 <얼트 문화와 록 음악>의 저자로 기억에 선명한 신현준의 것이었다. 생산적 반복구'라는 의미의 리토르넬로 개념을 통해 팝 음악을 되짚어보는 그런 글이었는데, 들뢰즈의 음악에 대한, 아니 음악을 통해 본 철학에 접근하는 데에 60년대의 사이키델릭과 70년대의 펑크를 중요한 두 축으로 설정하고 분석한 것이었다 '탈영토화'가 우주로 팽창했다던가, 블랙홀 속으로 삼켜져버렸다던가 하는 접근 역시 흥미로웠다. 하지만 역시 음악은 음악일 뿐이다. 이왕이면 소울과 힙합으로 접근했다면, 좀더 '탈영토화'에 다가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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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이틀간의 엿보기

2003년 10월 08일

 

8회째를 맞고 있는, 그러나 필자는 처음 가보는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해 뭐 얘기할 것이 있겠는가? 이번 영화제의 상영작을 제외하고 말이다. 다만 6년 만에 다시 밟아 보는 부산의 느낌과, 영화제를 핑계삼아 짧은 시간동안이나마 발품 팔며 곁눈질 해본 풍경들이나 풀어놓아 볼 참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 부산국제영화제에‘나’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우스울 수도 있지만 무섭고도 결정적인 이유였다. 부산이라는 곳에 하룻밤이나마 묵을 곳이 있다는 것. 전역한 지 사흘만에, 부산에 거주하는 군대 동기녀석을 꼬득여 예매해 둔 딸랑 세 편의 영화표를 대기시켜 놓은 터였다. 9월 24일부터 시작된 상영작 예매는 90년대까지 익숙하던 단어인 대입 수헙생들의 “눈치작전”이 떠오를 만큼 당황스러웠다. 부산은행 모 지점에 친구를 대기시켜놓고 영화 주간지를 사면 부록으로 주는 티켓 카달로그의 미리 점찍어둔 상영작 코드번호를 불러대는 족족, “야, 매진이래”라는 한마디만 무수히 들었던 터.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나?

 

처음 접하는 국제영화제를 관람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내심 이 영화제가 아니면 보기 힘들고 그러면서도 꼭 보고싶은 영화를 봐야겠다고 다짐했건만, 사정은 녹록치 않았다. 아시아 단편 영화/다큐멘터리, 월드 다큐멘터리들을 소개하는 “와이드 앵글” 부문의 영화들은 특히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김선 감독의 <자본당 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 지난 제5회 인권영화제에서의 <평행선>으로 뇌리에 깊숙히 박혀 있는 노동자영상사업단 “희망”의 작품인 <소금: 철도 여성 노동자 이야기>, 마흐말바프(Makhmalbaf )자매의(그녀들의 부친은 잠시 제껴 두고) 여동생인 하나(Hana)의 <광기의 즐거움>, 그리고 언제나 엔딩 크레딧과 함께 유려한 아크로바틱 액션의 뒷편 흔적을 보여주는 성룡! 그의 가족사(를 통해 본 중국, 대만, 홍콩의 현대사라나 뭐라나)에 관한 다큐멘터리라는 <용의 흔적: 성룡과 그의 잊혀진 가족>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용납지 않고 내게 남겨진 표는 야외상영관과 남포동에서의 3편뿐이었다.

 

부산, 돌아오다

 

6년 전 나는 건방지게도 말하자면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어느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몹시도 원했었”고, 부산이라는 그 낯선 도시에 왔었고, 또 그르니에의 말을 빌리면, 한달 여 나마 “비밀스러운 삶”을 가져 보았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뒷골을 계속 박박 긁어대는 한편으로 경부선 열차에 올라 책을 읽다 깜박 잠이 들고, 눈을 뜨니 호포-화명동을 지나쳐 저물어 가는 낙동강 하구를 따라 부산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웬지 어색한 아파트단지들을 지나쳐 중심지(?)로 들어서자, 역시나 낮고도 가파른 야산 중턱까지 땅벌집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압도적인 풍경의 주택가를 비롯한 전형적인 항구 도시의 풍경이 내 기억을 끄집어 내었다. 그리 깊지 않은 수심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만들어 낸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접해본 서해와 남해의 항구들인 인천과 여수, 마산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부산진의 부두로부터 눈에 들어오는 부근에의 평지는 사이사이 뚫린 도로와, 저 반대편의 비교적 조그만 어선들이 드나드는 자갈치로부터 남포동 일대 뿐이었다. 화물 부두 쪽으로 들어서서 골목골목을 겁없이 쏘다니다 보면, 가로등 불빛 아래서 센 억양을 주고받는 선원들 서넛이 모여 앉아 지폐 뭉치를 던져놓고 포커를 하고 있다.

 

<굿바이, 레닌>, 10월 3일 저녁, 해운대 야외상영관

 

적어도 내가 겪은 부산 "아"들 사이에선 해운대는 ‘부자 동네’로 통한다. 물론 눈으로 확인한 바로도 수도권의 이른바 신도시 풍경과 비슷했고 뭔가 공사중인 아직 황량하고도 넓은 벌판들도 어찌 변모할 지 눈에 훤한 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길 찾기도 쉽지 않았고 부산 토박이인 친구녀석도 헤매인 통에 조금 늦게 수영만요트경기장 내에 마련된 야외상영관에 도달하였다. 초등학교 때 단체관람갔던 대전 엑스포 이후로 처음 보는 굉장한 인파의 장정이 끝을 보일 즈음 상영관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으나, 맨 앞의 두어 줄은 사람이 드물어 자리를 잡았다. 역시나 필름은 조금도 돌아가지 않은 상태였다. 친근하기 그지없는 짭짤한 내음이 섞인 바람이 약간 쌀쌀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조금은 당황스러운 제목의, 그 덕인지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굿바이, SPD!>도 아닌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볼프강 베커 감독은 오지 않았다. 뭐 바쁘다느니 어쩌니 해서 각본을 쓴 작가만이 무대에서 잠시 인사를 하고,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European Film Promotion의 사업가라는 이들과 함께 얼굴을 비추고 웅웅거리는 이름들을 들려주고 돌아갔다.

 

영화를 이끌어 가는 것은 서사구조를 갖춘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에피소드와 1990년에의 독일인의 추억을 불러내는 키취들이다. 그야말로 쇼킹한 장면인, 베를린 한복판을 와이어스트링에 매달린 채 군용 치누크 헬기에 인양되어가는 거대한 레닌의 동상 역시 이 야심만만한 감독의 연출에 있어서는 별 의미 없는 맥거핀인 것이다. 1989년과 1990년 사이, 코마 상태에 빠져 공연을 보지 못한 어머니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일련의 ‘달콤한 거짓말’ 프로젝트를 완수한다는 설정은 지금의 독일을 보기에 참신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독일이란 어떠한가. 이 영화는 지금 독일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추측하건대, 이것은 동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금기시되는 독일 사회의 가려운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독일? 잘은 모르지만 내게는 히틀러와 나치와 아우토반과 칸트, 마르크스, 베버, 루카치,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이르기까지 서양사상의 거의 절반을 채우는 지성인들과 친환경적인 삶 뭐 이런 것들로 연상되는 그런 곳이 아니던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폐허가 되어가는 동독 지역과 일자리도 없는 데에다 콤플렉스까지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뭐 이런 것들이 있지 않을까.
 

앞서 말했지만, 설정 빼면 시체인 각본에 기민한 감각적 연출이 만들어 낸 것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독일인의 유머감각에 대한 재평가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떠들어대도록 만든 풍부한 볼거리들이며, 그 사이사이에서 영화는 진정한 볼거리들을 제시해 준다. 조금 식상하지만 통일 후 위성TV 회사에 취직한 주인공 알렉스와 버거킹의 점원이 된 그의 누이, 교환기간을 초과하여 종잇장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동독 마르크 화폐,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소년단으로 변신하여 혁명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돈을 요구하는 꼬마아이들, 어디 볼 만 하지 않은가?

 

알렉스는 독일 통일 기념식에 맟추어 어머니를 위한 ‘동독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에의 기획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서의 새로운 독일식 유머는 자꾸만 “음, 그럴 듯 하군”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정말인지 그가 꾸며낸 동독의 승리가 너무나도 그럴 듯 하기 때문이다. 위성TV회사에서 일을 하고,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비슷한 장면에 열광하는 그의 친구에 힘입어 거짓이 탄로난 위기를 넘긴다고 하여 단순히 미디어의 위력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트릭은 언제나 미디어에 의해 그녀의 어머니가 노출되었을 때 사용되어질 뿐이다. 여기엔 분명 공통적인 정서가 존재한다. 다시 말 해 우리는 독일의 통일을 동독의 승리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묵묵히 자신의 기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은 다름 아닌 초국적 자본일 뿐이다. 알렉스의 아버지가 망명한, 아니 ‘월서’한 뒤 어머니에게 찾아들었던 비밀 경찰? 우리 역시 집집마다 네모난 비밀경찰을 두고 있지 않은가. 그의 어머니가 서랍 밑에 쌓아 둔 돈이 휴짓조각이 되는 과정에서도 화폐적 관계라는 것은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지는 않은가. 국가주의는 세계화의 박차를 가하고 있는 자본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것이다. 90년대의 동구권 붕괴, 세계무역기구(WTO), 그리고 전쟁까지도, 우리는 별로 당황해 할 것 없는 것들을 당황해 해 왔으며 무슨 대단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조차도 피해갈 수 없는 세계적 자본의 기획이자 국가주의의 단면이다.
 

다른 한 편으로, 알렉스의 누이는 서독 남자와 결혼하여 눈 앞에 막 펼쳐지는 이른바 물질적 풍요로움을 채 맛보기도 전에 자신의 둘째 아이가 골칫거리가 되고 마는 여성의 현실에 부딫히고, 공산당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어머니 역시 임산부의 옷 색상이 문제가 있다는 건의나 올리는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으며, 한편으로 그녀의 활동 ‘전적’과 더불어 교사라는 사회적 위치는 그녀가 아무리 통일된 독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녀를 집 밖으로 끌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통일 후 지금까지도 동독에서 사회적 지위를 어느 정도 누렸던 이들과 지식인들은 동독의 체제유지에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비밀 경찰에 대한 협조라는 혐의를 벗기가 어려워 집밖에조차 나서기 힘든 까닭이다. 그런 부분까지 건드리는 것은 무리였을까. 영화는 베를린을 수놓는 통일 기념 불꽃으로 막을 내리고 어머니는 ‘뒤끝 없이’ 생을 마감한다. 그야말로 해피엔딩이다.

 

이 웬지모르게 불편한 코미디를 보고 난 뒤 언제인가부터 생겨난 습관대로 엔딩 크레딧까지 모두 본 뒤에, 절반 이상이 빠져나간 관람석에 대고 중얼대는 소리를 들었다. “European Film Promotion의 밤이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오니 참석을 원하시는 분께서는 상영장 입구에 대기중인 셔틀버스를 이용해 주시가 바랍니다.” 나와 동행인은 무섭게 달려갔다. 물론 그 한 대의 셔틀버스를 지나쳐 시내버스 막차를 타러.

 

남포동 그리고 극장

 

대규모의 공단을 뒤로 하고 바다를 가득 품은 다대포에서 아침을 맞은 친구와 나는, 두 편의 영화가 기다리고 있는 남포동으로 향했다. 영화제 상영작의 상영장소는 크게 세 군데, 어제의 해운대 수영만 야외상영장과, 역시 해운대의 스펀지라는 복합상가에 위치한 메가박스, 그리고 남포동이다. 남포동은 서울의 명동과 비슷한 컨셉의 그런 동네인 듯 하다. 어울리지 않게도 바다쪽으로는 바로 짠내가 밀려드는 자갈치 시장이 자리잡고 있고, 육지(바닷가나 섬 지역에선 이런 용어를 쓴다)쪽으로는 번화가인 광복동과 한 블록 더 위로는 국제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 두 편의 영화 상영장소는 부산극장, 대영시네마와 함께 각각 6관씩의 멀티플렉스로 변모하여 아직까지 남포동을 지키고 있는 극장이다.

 

다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적당히 쓰레기가 뒹구는 도시의 거리란 보기 좋은 법이다. 국내외의 영화인들로부터의 몇 개의 핸드프린팅 위로 덮여 있는 쓰레기들을 치워 내고 자신의 손을 갖다 대고는 좋아하며 연신 사진을 찍는 소녀들, PIFF광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뒤집어 쓴 거리의 한복판을 가득 메운 각종 홍보 부스들과 인파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나와 친구녀석의 귀를 붙든, 아무래도 부산에서 오래 살았던 이들로 추정되는 한 패거리의 대화가 있었으니 ... "야, 아카데미 아직 하나보다?" "임마, 간판 잘 봐 봐, 모텔 됐네." 국제영화제라는 간판을 건 거리의 중심부에 모텔로 둔갑한 단관 개봉관이 있었던 것이다.
 

단관 개봉관 시절, 지금의 대영시네마와 부산극장 외에도, 현재 정말 모텔이 되어버린 아카데미 극장과, 지금은 나이트 클럽이 자리잡은 곳에 국도극장이 있었다. 고교시절 '경제' 수업을 들었던 내 또래들은 알 것이다. 그야말로 IMF시대의 한 복판에 있던 시절, 수능에 나올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생소한 경제용어들을 외웠던 일들을 말이다.

 

나는 영화 산업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영화 시장이 시네마서비스와 CJ엔터테인먼트의 양대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얘길 지인으로부터 듣고서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재주의, 히트작의 아류작 찍어내기, 이른바 '한국형' 코미디물 ... 이런 단어가 쉽게 들려온다. 영화관이라고 다를까. 이제 영화관이라든지 극장이란 단어는 사라질 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옮겨다니지 않고 한 곳에서 다양한 영화를 골라 볼 수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주먹만해진 스크린과 조악한 음향'에 돈을 들이느니 "집에서 DVD로 보겠다"고 말한다. 이제 영화라는 건 돈을 지불하고 집에서 혼자 보는 그 무엇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화관들의 추세를 만들어낸 시스템은 상영 편수를 떠나 그리 '다양한' 영화를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고향 동네에는 두 개의 단관 영화관과 한 개의 성인전용관이 있었다. 하지만 **극장을 제외하고는 앞서 말한 90년대 말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어린 시절, 면소재지인 우리 마을에도 꼬박꼬박 영화 포스터가 나붙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간혹 어머니를 따라 시내로 장 보러 나가면 눈길을 끌었던 거대한 간판그림도 있었다. 하지만 홀로 남아, 닫지 못해 열었던 명보극장도 군대에 다녀온 사이 상영관 가운데를 합판으로 나누고 그야말로 2개 관의 멀티플렉스로 변신한 것이다. 실내도 그나마 그럴 듯 하게 재단장을 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이젠, 영사기를 돌리는 두 분의 할아버지들이 필름이 다 돌아가면 극장 안의 쓰레기를 치우고, 아침에는 포스터도 시내의 몇 군데 지정게시판 등에 직접 붙이고 다니신다. 지방 소도시라서가 아니라, 이것이 바로 세계화의 '다양함'이라는 것의 실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2∼30여 명의 조직폭력배들이 영화관을 그야말로 '접수'하고 담배를 빡빡 피워대고 친구들과 한 귀퉁이에서 불안에 떨며 영화를 보기도 했던, 하지만 슬픈 장면이라도 나오면 그 떡대들 중 열 댓 명은 어깨를 들썩이며 흑흑대던 진풍경도 볼 수 있었던 그 극장은 사라졌다.

 

<미국의 광채>, 4일 오전, 부산극장 1관

 

World Cinema 부문의 이 작품은 아리송한 제목으로 눈길을 끌었다. 동명의 만화로부터 아이디어를 끌어와 그 만화를 둘러싼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며 실제 인물인 Harvey Pekar는 '미국에서의, 미국적인, 미국인의 호사스런 삶이란 병원에서 서류 정리나 하며, 재즈 레코드를 모아대고, 이웃과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허접한 살림을 하다가, 골머리아픈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단정적인 어조로, 그리고 감히 흉내내기 어려운 욕구불만 톤의 목소리로 징징거리는 듯 하다.
 

Robert Pulcini와 Shari Springer Berman 감독은 만화 의 장면들과 실제 인물 Harvey Pekar와의 인터뷰, 그리고 너무나도 기막힌 캐스팅으로 입이 쫙쫙 벌어지는 젊은 시절의 피카와 주변 인물들에 대한 픽션 아닌 픽션을 생명력 있는 O.S.T.를 통해 묶어내며 신선한 구성방식과 재미로 한 편의 영화를 묶어내었다. 하비 피카가 정말 데이빗 레터맨 쇼에 출연했는지 뭐 그런 건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 다른 제목을 붙여주자면 은 어떨까. 영화가 지닌 최대의 미덕이자 그 한계점은 바로 하비 피카의 입을 통해 뿜어져나오는 일상사란 정말 복잡한 것이라는 불평 아닌 불평 속에 담겨 있다.
 

<자줏빛 나비>, 4일 오후, 부산극장 1관

 

좌석이 2층으로 옮겨졌을 뿐인 같은 상영관에서 128분이라는 영화의 진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러닝타임은 딱히 한 일도 없었던 나로 하여금 저 내면에 잠재된 피로를 끌어올려 잠시 눈을 붙이게 만들었다. "중국의 레지스탕스 조직 '자줏빛 나비'"라는 티켓 카달로그북의 간단한 소개 문구의 일부조차 없었다면 영화를 함께 본 대부분의 관객, 혹은 모든 이가 '자줏빛 나비'가 무언지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1929∼31년의 중국 아나키스트 레지스땅스 조직에 대해서도, 사랑과 우정 그리고 배신에 대해서도, 총격전의 역동적인 액션에 대해서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수준 낮은 나같은 관객을 위해 자상하게 설명을 해달라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라, 한 컷에 거의 몇 분은 됨직한 시간동안 집요하게 잡고 있는 배우들의 클로즈업은 제아무리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이라 해도, 그 장면들을 충분히 소화해 낸다 해도,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기엔 역부족이었다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또한 장쯔이와 한국 영화에도 출연했던, 유명한 듯한 일본 남자배우의 연기에서도 로우 예 감독에 대한 강박관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또 다른 출품작인 「주말연인Weekend Lover」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이 끝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필름은 계속 돌아가야 한다

 

영화가 끝나고 친구와 나는, 그의 말에 따르면 '온갖 밀수품의 천국'이라는 국제시장을 지나 보수동의 헌책방 골목을 들렀다. 예전만큼 헌책들이 많이 오고 가지 않는다는 그 골목의 모퉁이 책방에서 이십 년 쯤 된 낡은 책 한권을 사들고 걷기 시작한 우리들은 러시아 여성들이 우글거리고, 가로등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총각 놀다가"를 소근거리는 아주머니들을 대면하는 초량동 골목을 지나 부산역에 이르렀다. 2003부산국제영화제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라는 필름 프로모션이라든가, 영화제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다는 PIFF센터 등의 분위기 같은 것은 '감히' 내가 들여다 볼 수 없었기에, 수도권의 여느 굵직한 이름의 역사(驛舍)가 그러하듯 웅장한 유리벽 건물의 민자역사가 들어서고 있는 부산역 안으로 조용히 발을 들여 놓고 떠날 채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부터 영화제가 끝나는 날까지 17개 영화제 상영관에서도, 그리고 살아남았든 집어삼켰든 영사기를 갗춘 수많은 상영관들에서 또한 필름은 계속 돌아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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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 포기하니 좀 살 것 같아

2003년 10월 07일

 
담배를 끊어보겠답시고 지난 주부터 집에 아예 담배를 사 들고 오지 않았다 급기야 녹차 티백을 뜯어내고 녹차잎을 노트 종이에 말아 피워보고 심지어 꽁초를 찾아 화장실 쓰레기통까지 뒤져보았으나 이미 아궁이 속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뒤였다.

 

자전거를 타고 자동차들이 무섭게 달려대는 지방 국도를 한 시간을 내달려 시내에 도착,
비디오 테잎 두 개를 빌리고 담배 한 갑을 손에 넣었으니 ... 온갖 고민과 갈등 속에 한 가치를 피워 문 순간 스스로를 위안하는 문구만이 머릿속에 맴돌고 ... 그래, 2년여 시간동안 나는 일 주일을 견디지 못하는 이 '금단의 고비'를 이미 넘겨버리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와 버린 건 아닌 건지

 

이제 좀 정신이 드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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