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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과 창원으로의 짧고도 굵은 외유

2003년 10월 15일

 

한참 어두워져 울산에 도착한 나는 조** 동지 댁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전** 동지를 비롯한 몇몇 분들이 와 계셨고 저녁밥을 먹고 현대중공업의 노동조합 선거, 사내하청노동조합의 투쟁 상황 등에 대한 동지들의 토론을 지켜보았다.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는 노동자주의(조합주의 또는 경제주의)와 정치투쟁, 반전반세계화 등의 화제가 아직 정신 덜 차린 나의 귀를 후벼파들기도 했다.

 

동지들의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나름대로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기도 했다. 이를테면 계급적 노동운동이 노동조합과 의회주의 정당 가운데서 어떻게 용해되어버리며 따라서 왜 정치조직이 중요한가라든지, 반전반세계화와 같은 과제들이 어떻게 민족주의에 희석되지 않으면서 계급적 투쟁으로 현장에서 조직될 수 있는지, 반전총파업이 '맞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물론 '중요한' 고민들이, 잠시 나로부터 떨어져 나를 지켜보았을 때 가당한 고민인지부터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스물 셋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아직도 갈팡질팡하며, 쉽게 칭얼대고, 쁘띠부르주아의 때를 채 벗겨내지도 못한 탓이리라. 그 몇 시간동안의 동지들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 고민해야 할 것은, 바로 동지들의 그 모습, 조금의 거짓도 틈입하지 못할 것 같은 눈빛들이 보여주는 삶과 사람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동지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L선배는 무언가 풀리지 않는 듯한 고민과 육체적 피로가 역력한 모습으로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나는 조** 동지와 새벽 두 시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동자로서 '학생'에게 들려주는 동지의 이야기를 듣다가 꼭 3년 쯤 전에 정말 그와 꼭같은 얘기를 해 준 사람이 생각났다. 채** 선생님이었다. 그의 조언은 따끔한 일침과도 같았고, 3년 뒤 울산의 만세대 아파트 방 안에서 조** 동지는 침착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기보다는 눈빛으로 그 무엇을 전달해 주려는 것 같았다. 지금의 나에게 대체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나는 장인 밑에서 일하는 견습공, 그것도 잔기술만 속성으로 익혀 하루빨리 치고 올라오려는 그런 견습공의 모습을 보이진 않았을까? 그럼에도 아무 것도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고 변함 없이 그대로이다. 이가 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무뎌졌을 뿐이라면 다시 정성들여 날을 세우면 되지 않겠는가.

 

아침에 눈을 뜨니 여덟 시쯤 되었더라. 같이 가기로 했었는데 조** 동지는 내가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고 혼자 출투를 다녀오셨단다. 오전엔 L선배와 사내하청노동조합 동지들이 있는 사무실과 5공장 근처의 현대차 모 현장조직 사무실에 들른 뒤 창원으로 향했다. 금속노조 경남본부에서는 한진중공업과 세원테크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전날 마셨던 약간의 술 때문인지 하루종일 두통에 시달렸지만 울산과 창원의 그 엄청난 규모의 공장들을 보니 두통마저 잠시 잊혀지는 듯 했다. 인간의 산 노동을 지금껏 집어삼키기만 했던 공장이 새로운 세상의 숙주가 되리라 믿어 본다.

 

돌아오는 길, 초등학교 때 감기걸리면 아프고 열이 나는 것은 우리 몸의 항체와 나쁜 병원균이 마구 싸우고 있어서라고 들었던 기억이난다. 제 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게 사람이듯, 면역이 조금은 약해졌는지 나는 알 수 없는 무엇을 앓게된 기분이었다. 떠날 때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종합병원을 찾은 중년이었는지는 몰라도 돌아갈 땐 스물 세 살로 돌아가야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시간이어야 할 L선배와의 돌아오는 길에서 두통과 그 알 수 없는 앓이로 핑계를 돌려보고도 싶지만, 온전히 솔직하지도 못했고 맞닥뜨리려 하지 못했던 것은 짧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금의 나에겐 아쉬움이자 부끄러움이다.

 

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민주노동당에 당비 내면서 잠시 학생그룹의 일원이었을 때 그들이 '주입'하려 했던 '민주집중제의 원칙'은 내가 지금까지도 '리버럴'하기 때문인진 몰라도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던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후 내가 보아온 또 다른 동지들은 나의 '리버럴'함에 끊입없이 채찍질을 해 나갈 수 있는 무엇을 너무나도 강력한 인상으로 보여주었다.

 

대전에 다다르니 이미 **행 막차마저 모두 떠난 뒤였다. 할 수 없이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고 Y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다음날 오전에 잠시 학교엘 들러 보았다. 중간고사 기간이란다. 이제 스물 셋으로 돌아왔으니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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