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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어야 배반의 경험도 공유할 수 있다

 

 

 

- 석보경, 장경희, 정동욱. 2009, <방, 있어요>

- 최신춘. 2010, <미얀마 선언>

 

예정에 있던 회의가 한 주 미뤄지면서 수첩에 적힌 다음 일정을 향해 무심코 대학로의 작은 극장으로 향했다. 요즘들어 의외로 극장에 가서 영화보는 일이 잦다.

 

오늘도 혼자 늦은 저녁을 분식집에서 먹던 중 TV에서 실업률은 줄어들었지만 청년실업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나 역시 15세부터 넓게는 35세까지로 잡는 청년층에 어쨌든 들어가니, 남 얘기만은 아닌 셈이다.

 

청년세대를 둘러싼 담론은 매우 넘쳐나는 듯하면서도 사실 그 힘은 영 딸려 보인다. 역시 시간의 흐름이란 청년들을 금새 생활에 찌든 어른들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인 것인가. 이런 가운데 청년세대가 스스로를 말한다는 식의 기획으로 <방, 있어요>(이하 <방>)와 <미얀마 선언>(이하 <미얀마>)의 두편을 묶어 상영하는 곳을 찾아갔다. 영화를 보기 전 제목만 갖고 말하자면 <방, 있어요>가 20대들이 독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개인적 공간인 '방'이 과연 있는가 하는 질문과, 어쨌든 '방'이 있긴 한데 그것이 너무도 열악하고 고립되어 있다는 지적이 묘하게 중첩되어 문제의식을 잘 전달하고 있는 데 반해, <미얀마>의 경우에는 '미얀하지만 우린 아마 잘 안 될거야'의 줄임말이라는 점에서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있지만, 유희적인 표현이 되어버리면서 '버마'라는 격동의 역사를 지닌 동남아시아의 한 지역을 은근히 식민화하는 건 아닌지 끝끝내 불쾌감을 준다. 왜 하필 '미얀마'인 것인가.

 

각설하고, 일단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는 점은 20대라는 또래집단 중심의 서사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기성세대에 의해(그것이 '요즘 애들'이 되었든, '88만원 세대'가 되었든 간에) 대상화되지 않으려는, 그리고 자신과 친구들을 대상화하지 않으려는 시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두 작품의 접근은 일정한 차이 또한 분명히 보여준다. 서사의 중심이 되는 또래집단은 <미얀마>에서는 **고등학교 동기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띠는 데 반해, <방>에서는 동료의식과 연대감으로 느슨하게 묶인 담담한 집단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왜 안 될까?'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조건들'에 한 발 더 다가가려는 노력은 <방>에서 보다 돋보인다. 이에 비해 <미얀마>에서는 제목에서처럼 '안 될거야'라는 회의적 태도가 좀더 강하게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왜 안 될까?'라는 물음을 스스로 밀고 나가기보다는, 그 문제에 대해 우석훈, 허지웅 등의 지식인의 입으로 말하게 하고 프레임 뒤로 숨어버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도피는 후반부에 프랑스로 떠나는 한 친구의 모습에서 정점을 이룬다.

 

두 작품들이 공히 드러내고 있는 아쉬운 점이라면 학교, 동네 등을 바탕으로 한, 주어진 틀에 의해 형성된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감히 말해보자면,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대학물 안 먹고 하류에 머무는 폭주족들이 조직적 측면에서나 의식적 측면에서나 훨씬 앞서 있다(폭주를 뛰어 본 적은 없지만, 게다가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한 친인척으로부터 폭주족 생활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폭주족들은 의외로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기도 해서 리더인 '길짱'이 존재하며, 지역색이 강한 곳에서는 넓게는 광역 단위로 '총장'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분'은 총장을 역임한 바 있다.^^;).

 

폭주족 집단 자체가 갖는 룸펜집단으로서의 한계는 차치하더라도 ... 조직적 측면에서 이들은 최소한 읍면동 단위는 넘어서는 시군구 단위로 대면적 공동체를 넘어서는 커뮤니티를 이룬다. 의식적 측면에서 <방>과 <미얀마>의 서사들은 '현재 우리들이 어떠하다'라는 문제의식에 머물고 있다. 물론 <방>에서 "주택정책은 가족을 이루고 사는 배나온 아저씨들이 만든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이 현재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리적 비약이 심한 편이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강한 부정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또한 <방>이 제시하고 있는 '개인들에게 있어서는 자기계발, 지역사회에 있어서는 재개발'이 이들을 개별화하는 주요 메커니즘이라는 언명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다른 방식의 서사가, 최소한 가능함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시니컬한 회의에 불과할 것이다. 개별화되어 통치의 대상으로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에 대한 거부 측면에서 보자면, 폭주족들이 훨씬 강한 반대 정향을 보여주며, 이들은 적어도 지배문화로 코드화된 행위양식들을 독창적으로 재전유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한편, 형식상의 측면에서 두 작품의 시선은 모두 방, 대학 캠퍼스, 술집, 까페 등의 다소간 '진부화된 공간'에 머문다. 이런 측면에서 <방>의 경우는 '20대들의 개별화'의 공간적 메타포인 '텐트'를 등장시키고, 그것을 중심으로 시선이 머무는 장소가 이동한다는 점, 그리고 후반부에는 저 뒤로 국회가 바라다보이는 여의도라는 '트인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보다 새로운 형식상의 시도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서사의 주체와 그 대상 간의 접점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끝끝내 아쉽다. 자기네 동네를 망친 로저에게 끈질기게 카메라를 들고 찾아갔던 마이클 무어의 박력이 조금은 그리워진다.

 

좀더 나의 관심을 끌었던 <방>의 내용들과 관련하여 한두 가지를 덧붙이자면 ... 먼저 (고시원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듯한) 한 인터뷰에서 "옆집에 사는 사람도 모르지 않느냐"라는 반문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시원 옆방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는 것과 청년세대의 개별화 간에는 사실 그리 큰 접점이 없다. 이는 사적 공간의 이중성 때문인데, 기존의 공/사 구분의 틀에서는 사적 영역이 개인 및 가족의 영역뿐만 아니라 시장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 또한 동시에 포괄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일정정도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조직되는 공간이고, 시장이 사적 이윤을 목적으로 조직화되는 공간이라면, 개인적 공간은 개인이 최소한의 자기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공간이다. 산업화 이후 개인적 공간과 시장에 의해 전유된 공간을 주로 가족 단위의 공간이 매개해 왔다면, 신자유주의 이후의 개별화는 개인적 공간과 시장에 의해 전유된 공간 사이의 중범위 공간은 물론, 공적 공간마저 최소화함으로써 강제된다. 앞에서의 질문에 대해 고시원생은 '층 사람들이 모여 회식 한 번 하면 되는데 ...'라고 답한다. 고시원이라는 공간은 애초에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이 오가며 모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고시원 밖에 나가 도시공간을 거닐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한 인터뷰에서는 고시텔 생활과 전월세방을 전전한 경험담 속에서 '혼자 살기 힘들게 만든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이 또한 세대간 불평등의 문제와 재생산의 위기라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것이다. 실제로는 개인들을 혼자 살도록 만드는 개별화의 동력이 더 강하다. 이렇게 보더라도 청년세대가 겪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것이 '스펙쌓아 취업 뽀개기'와 조직적으로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간의 간극이 여전히 커 보인다는 것이다. 전자를 대체할 만한 '꿈'이 없는 것이다. 꿈(Social Dreaming)이 있어야 배반의 경험도 공유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일상생활의 수많은 측면들이 이전 시기에 비해 고도로 시스템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바야흐로 의 시대인 것이다!), 산업화 시기와 1980-90년대에 비해 청년층이 한 발 내딛기는 훨씬 어려움에도 그런 작은 시도들을 담아내려 한 <방>과 <미얀마>는 모두 소중한 기록들이라 생각한다.

 


*덧붙이기: <방>의 주인공 중 하나인 '하다'는 텐트를 참 잘 치더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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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왜 일어날까? - 구춘권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02 - 테러, 왜 일어날까?

 

구춘권. <테러, 왜 일어날까?>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잘 알아야 하는 불편한 진실 - 테러

 

이 책은 아동․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세계적으로 ‘불편한 이슈’인 ‘테러’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테러’하면 대부분 텔레비전에서 본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장면이나 이슬람 무장단체의 공격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과연 그게 ‘테러’에 관한 모든 것일까? 지금까지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테러’에 관한 책들은 거의 없었다. 시중에 나온 ‘테러’와 관련된 책들은 9․11 테러나 이슬람문화와 테러리즘에 관계된 어렵고 딱딱한 인문사회 서적들이 주로 많았다.

 

그러나 이 책은 ‘테러’라는 화두를 어떤 특정 사건과 집단을 중심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테러’라는 큰 주제어를 바탕으로 세계 갈등의 역사를 조망한다. 나아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테러’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이 책에는 테러의 의미, 테러의 역사와 다양한 사건과 사례, 테러의 다양한 원인과 결과, 테러리스트의 정체성 그리고 테러의 예방과 평화를 위한 대안까지 테러에 관한 모든 논란과 진실이 들어 있다.

 

우리 아이들이 세상을 더 잘 알고, 국제사회와 정치의 흐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테러’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세상의 그림자, 즉 불편한 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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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와일드 스피릿이 한 수 위였다

 

 

<엔진포스 vs. 와일드스피릿>이라는 제목은 역시 쌩구라였다. 지력, 체력, 기술, 유머 ... 모든 면에서 게키렌쟈(와일드스피릿)들이 고온쟈(엔진포스)들을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Versus'라는 표현은 예상대로 게키렌쟈와 고온쟈들이 대결한다는 의미보다는, 게키렌쟈와 고온쟈들이 전대로서의 역량을 겨룬다는 의미였으나, 대결이라 하기엔 기운빠지는 내용이었다. 저 게키렌쟈들이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대칭과 절묘한 불꽃을 보라. 쨔자안~~

 

아 ... 나두 저 쫄쫄이 입어보고 싶다. 특히 칸도(레드)가 입은 빠알간 쫄쫄이!! ... 하지만 역시나 가면을 쓰는 이유는 민망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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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 처음 맞이한 어느 봄날,

이렇게도 질긴 인연이 될 줄 몰랐던 두 권의 시집을 만났다.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과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그 뒤로 밤마다 깨끗이 씻고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차곡차곡 이런저런 시인들의 시집들을 읽어 나갔다.

수업시간에는 주로 많이 잤던 것 같다.

이후 몇 개월이 흐른 뒤 한달여 동안 가출한 적이 있는데

뭔 겉멋이 들었었는지 밤에 아르바이트 할 때 빼고는

그곳 부산에 있다던 이윤택을 만나겠다고 싸돌아다녔다.

결국 그를 만나진 못했지만, 몇 주 동안 오후에 국제시장 구석

보수동 헌책방으로 나서 밤일을 마치고 여인숙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십 몇년쯤 뒤 ...

한때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을 썼던

시인이자 극작가인 이윤택은 국립극장장이 되어 있었고

연작시 <발전소>를 썼던 하재봉은 득도를 하는가 싶더니

출발 비디오여행에서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어떤 토론회에서 만난 장정일은 ... 아이쿠 ...

꼰대가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고뇌하는 듯했다.

 

하지만 시는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씩 마음의 휴식이 필요하다 싶으면

누런 표지에 "제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이라고

쓰여진 장정일의 시집을 꺼내들곤 한다.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굴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귾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배개 벨 것인데
한편에서 되게 낮잠 자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을 흘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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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와일드 스피릿은 한번쯤 보고싶다

 

이번 달 <뉴타입> 한국판은 11주년 특집호다. 로리물에 음악이란 소재를 끼워넣은 <케이온!>으로 표지는 물론 지면 사이사이에 유이, 미오, 아즈사, 리츠, 츠무기의 일러스트를 대문짝만하게 끼워넣은 것은 영 탐탁지 않지만, <안녕 절망선생>, <히다마리 스케치>로 주목을 받아온 신보 아키유키 감독의 '다리밑 루저 공동체 생활일지' <아라카와 언더 더 브릿지>도 소개되고 ... 이케부쿠로 도시전설물이자 방황하는 청춘일지인 <듀라라라!>도 살짝 소개된다.

 

뭐, <코드기어스> 새 시즌 소식 등등 까지는 좋았는데, 전대 등장에 입맛이 구려진다.작년에는 일본에서 2007년에 방영된 수권전대 게키렌쟈(獣拳戦隊ゲキレンジャ―, 파워레인져 와일드스피릿)와 2008-2009년에 방영된 염신전대 고온쟈(炎神戦隊ゴ―オンジャ―, 파워레인져 엔진포스)가 스크린에서 만난 "엔진포스 대 와일드스피릿"이 국내 개봉하더니 ... 아, 백수전대 가오렌쟈(百獣戦隊ガオレンジャ―, 파워레인져 정글포스)의 국내 방영예정 소식을 보니, 전대물이 횡행하는 경찰국가 닛폰을 따라가는구나 싶다.

 

백수전대 가오렌쟈는 무려 '오르그'라는 좌빨 삘의 이름을 지닌 '악의 무리'를 헬멧과 제복을 착용하고 곤봉을 든 '정의의 용사들'이 때려잡는 설정이다. 일본에서 방영된 시점이 2001년 고이즈미 총리의 등장과 더불어 '잃어버린 10년' 어쩌구 하면서 일본사회가 사정없이 우경화되던 시점이었는데, 이명박 정부의 행패가 작렬하다가 지방선거 후 잠시 주춤하는 상황에서 7월부터 국내 방영이라니 이런 퇴행에 뒷맛이 씁쓸하다.

 

 

 - 1975년에 방영된 최초의 전대물 <비밀전대 고렌쟈>(秘密戦隊ゴレンジャ―)

 

아, 건프라가 나온 지 30년이 되었다고 한다. 2009년부터는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와 마크로스 프론티어를 보며 전쟁, 폭력, 일상, 사랑,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어 왔던 메카물 전통이 이제 진정 쇠락하는구나 싶었다. 이제 와 남은 게 건프라라면 조금은 슬퍼진다.

 

무엇보다 눈에 띠는 소식은 <강철의 연금술사>의 종결이다.  원작만화는 6월 11일에 나온 <소년 간간> 7월호 연재분을 마지막으로 9년간의 연재가 마무리되었고, TBS에서 1년 3개월째 방영되고 있는 미즈시마 세이지(水島精二) 감독(중간에 이리에 야스히로(入江泰浩) 감독으로 교체)의 리메이크판 애니메이션도 이제 7월 4일로 종영이다.

 

일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강철의 연금술사>는 제한된 원소로 사물을 연성해 낸다는 테마를 비롯하여 순환론적 세계관으로 가득차 있다. 주인공들의 삶에 대한 의지가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타나긴 했지만, 곳곳에서 '혁명적 전통주의'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미 웹에서는 끝자락에 등장한 '국토 연성진'을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비유한 각종 패러디물이 나돌고 있다. 역시나 원작자의 인터뷰를 보니 전원의 향기가 물씬 풍겨난다.

 

 

**원작자인 아라카와 히로무(荒川 弘)와 <뉴타입>의 인터뷰(<뉴타입> 2010년 7월호) 中

 

-언제나 그려진 건 삶에 대한 확고한 의지

 

"그건 아마도 고향에서 낙농업을 했을 때 갖게 된 생각이 강하게 드러난 것 같습니다. 농가에서는 먹는 게 곧 삶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삶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래서 저 자신도 죽는 게 너무 무섭습니다."

 

- 나중에 그 가치관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기회가 되었다.

 

"생산자였던 제가 도쿄로 나와 지금은 소비자로서 슈퍼마켓에 있는 채소나 고기, 우유를 보고 아, 이거 너무 싼 거 아니야? 혹은 너무 비싸! 하는 등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똑같은 일이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시점이 있어야 사람은 사람의, 호문쿨루스는 호문쿨루스의 살아가는 방식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현재 <강철의 연금술사> 외에 <백성귀족>도 연재중인데, 가혹한 농가의 현실을 매우 시니컬하면서도 호쾌하게 그린 걸작이다.

 

"일본 농가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있으니까요. 예전에 우유가 부족해서 버터를 못 산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넘칠 정도로 남아돌아 결국에는 남는 우유를 버리기까지 했는데, 높은 사람들이 갑자기 우유가 부족하니까 어떻게든 해보라며 말하더군요. 채소가 부족했을 때에도 농림수산대신이 농가 여러분은 채소를 앞당겨서 출하해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들쭉날쭉한 날시 속에서 열심히 기르고 있는데 앞당겨서 출하하라니, 말도 안 돼 하고 저도 모르게 욱했습니다. 다음 번 농림수산대신은 반드시 농가 출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입니다."

 

- 하지만 밝게 웃어넘기는 강인함과 용기도 있다.

 

"그거야 소가 바로 코앞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 알려지지 않은 낙농가의 삶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태어나서 한 번도 서본 적이 없는 송아지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이야기,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현실이 담담하게 그려진 것이엇다.

 

"저도 아직까지 그게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잘 모르겟습니다. 선택해야 하는 갈등이나, 입장에 따라 그것이 '정의'가 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는 부분이 말입니다. 하지만 선택하고 나면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결정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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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

사람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 ...

 

 

사람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
사람은 가진 소중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 김규항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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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규모와 주요 실태

비정규직 규모와 주요 실태

- 2010년 3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분석

 

비정규직 규모

 

통계청의 집계기준에 따를 때, 경제활동인구가 28만 7천명 증가하였으나 이중 5만 3천명이 실업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취업자가 24만 5천명 증가한 가운데, 그중 임금노동자 규모는 전년 동월대비 54만 1천명 증가한 데 반해, 고용주, 자영업자, 무급가족종사자가 30만 6천명 감소하고 임금노동자 내 독립도급노동자(한국비정규노동센터 분류 기준) 또한 5만여명이 증가하여 중소규모 사업자 및 자영업자층이 붕괴하여 종속적 노동자층으로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감지된다. 종속적 노동자 내에서는 직접고용이 53만 1천명 증가로 3.8%의 증가율을 보인 가운데 간접고용의 경우 증가규모는 6만 3천명 수준이나 증가율은 직접고용에 비해 높은 4.3%인 것으로 나타났다.
 

 

비정규직노동자는 10만 2천명이 감소(전년 동월대비 1.2%p 감소)하였으며, 정규직노동자는 64만 2천명이 증가(전년 동월대비 8.3% 증가)하였다. 전체 임금노동자 내 비정규직의 비중은 2.3%p 감소한 49.8%이며 정규직의 비중은 50.2%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비정규직의 규모는 2007년 3월을 정점(55.6%)으로 증가추세가 멈추고 소폭이나마 감소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임금노동자 중 여전히 약50%에 이르는 이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사실로부터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개선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정규직의 절대 규모가 2004년 8월 조사 기준 813만명에 비해 여전히 많다는 것도 비정규직 일자리 자체가 크게 줄어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앞서 살펴보았듯 실업자 규모가 100만명을 넘어섰으며 실업자 비율 또한 실업자 규모가 80만 1천명이었던 2004년 8월 3.5%에 비해 높은 4.1% 수준이다.


고용형태별로 보면 정규직이 일정하게 증가하는 가운데, 기간제 고용의 감소가 비정규직 비율 감소를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동시에 일반임시직은 물론 파견근로를 중심으로 한 간접고용과 시간제 고용의 증가가 눈에 띤다. 전년 동월대비 기간제는 34만 9천명이 감소한 가운데, 일반임시직 4만 9천명, 시간제 18만 8천명, 호출근로 8천명, 파견근로 8만 1천명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00년 부가조사 실시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파견근로는 61.8%의 증가율을 보여 상용파트타임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증가율을 드러냈다. 이처럼 정규직 규모가 소폭 증가하는 가운데 비정규직 내에서는 비교적 큰 폭으로 기간제가 감소하고 그에 비해 노동조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간접고용 및 시간제가 증가하고 있어 전반적으로는 고용의 질이 저하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정규직 주요 실태


2010년 3월 정규직의 평균임금은 266만원이며 비정규직의 평균임금은 123만원으로 나타났다. 또 전체 임금노동자의 평균임금은 195만원이다. 매년 전체 임금노동자들의 월평균임금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으나, 정규직의 월평균임금이 작년 동월대비 11만원 증가한 데 비해 비정규직은 3만원이 증가하여 격차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 2000년의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73만원 정도였으나 2010년 3월의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143만원으로 절대적인 금액에서 차이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이후 비정규직 비율 감소와 정규직 비율 증가가 완만하게 꾸준히 진행된 데 반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격차는 급속히 커져 왔다.
 

 

비정규직의 정규직대비 임금비율 역시 2000년 8월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가 시작된 이래로 점차 낮아지고 있다. 2000년 8월 비정규직의 정규직대비 임금비율은 53.5%였으나, 2010년 3월 조사에서는 46.2%로 7.3%p 낮아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비정규직 임금비율 감소는 사회양극화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최저임금제 등의 운영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의 임금격차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당 근로시간은 주5일제 도입 등으로 점차 감소하는 추세이다. 2010년 3월 전체 임금노동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43.6시간을 기록한 가운데, 파트타임을 제외할 때, 정규직의 주당근로시간은 44.0시간이며 비정규직의 주당 근로시간은 46.6시간으로 나타났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평균 주당 근로시간을 비교해 보면, 비정규직의 근로시간이 정규직에 비해 2.6시간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규직의 사회보험 적용률은 국민연금 98.0%, 건강보험 98.6%, 고용보험 82.3%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반면, 비정규직의 사회보험 적용률은 전년 동월 대비 상승했지만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비정규직의 사회보험 적용률은 국민연금 33.0%, 건강보험 36.4%, 고용보험 35.4%에 불과한 수준이다. 정규직의 부가혜택 적용률은 퇴직금 적용률이 99.3%, 상여금 98.0%, 시간외수당 72.9%, 유급휴가 93.1%로 시간외 수당을 제외하면 90%가 넘게 적용되고 있으나 비정규직의 경우에는 퇴직금 27.2%, 상여금 31.8%, 시간외수당 16.3%, 유급휴가 24.0%로 정규직의 적용률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정규직의 경우 노조가입율이 21.9%. 비정규직의 노조가입률은 상용파트와 파견근로(5.4%)를 제외하면 모두 5%를 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기간제 4.5%, 파견근로 5.4%, 용역근로 3.7%만이 3%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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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속의 한국과 일본

모처럼 비 오는 토요일 저녁, 공부쟁이 친구 C에게 이메일이 왔다.

 

전후 일본에 천황제가 존속하게 된 이유에 대해 미국의 반공정책이 거론된다. 이는 일본 국내에서의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실은 해방 이후 한국에서도 미국의 영향력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민주화되었고 한국은 권위주의 체제가 들어선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에서도 권위주의 체제가 이어질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잖는가?

 

이런 내용의 메일은 매일매일 받아도 즐거울 듯하다.

 

일단 대충 생각을 정리해 답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지정학적 맥락이 좀 다른 것 같다. 일본은 미국의 적국이었고, 패전 직후 일본은 미국의 점령국이었다(GHQ가 통치하는 형태로). 이후 일본을 확고한 미국편으로 만들면서도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선 일본 정치체제 민주화라는 게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보여주기 위한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군국주의자들을 그냥 두기엔 위험했던 측면도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한국전쟁이 일단락 된 데에 소련, 중국도 끼어 있었고, 동일한 반공주의가 자리잡게 되었더라도 냉전-휴전 상황에서 4.19 이후 남한 국내정치의 혼란이 심화되는 것보다는 군사정권이 확실히 잡아 주는 것도 괜찮다고 보았을 것이다. 남북 대치 상황이니 국제사회의 눈치를 볼 부담도 없었을 테고 말이다. 한국에는 해방 이전이나 이후나 외세에 끈덕지게 붙어먹던 놈들이야 있었을지 몰라도 일본처럼 '천황만세' 같은 걸 외치는 그런 세력은 적어도 없었으니까. 한편으로 어떤 이들은 헌법1조 '상징천황제'가 성립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거론하면서 일본 내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보다 성공을 거두려면 상징천황의 존재를 어느 정도 수용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친구 덕에 일어난 궁금증이 영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다.

 

이전에 읽었던 고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의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를 다시 뒤적여 본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일본의 근대화란 유럽에서 발기한 ‘세계질서’ 혹은 ‘세계사’에 자신을 편입시켰음을 의미한다.” 확실히 일본에는 굳이 ‘발견’하려 애쓰지 않더라도 서구의 헤겔, 칸트 같은 근대사상가들이 존재한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라든가,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라든가 ... 우연찮게도 머릿속에 떠오른 서구 사상가가 독일인들인데, 확실히 유럽 속의 독일과 동아시아 속의 일본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지니는 듯하다. 비좁은 ‘생활공간’ 문제를 해결하려고 군사적 확장을 시도했다는 면에서까지도 ...

 

일단 근대 유럽사상의 맥락과 관련해서 고야스는 월러스틴의 말을 빌려 “보편주의는 강자가 약자에게 주는 ‘선물’”이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이 ‘선물’은 순순히 수용하는 자에게는 굴종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패자의 불이익을 부과하는 이중 속박적인 증여이다. 근대 일본은 이 ‘문명’이라는 강자의 증여를, 화혼양재(和魂洋才) 전략을 구사하면서 받아들인 능숙한 수용자였다.”

 

더구나 1930년대에 이르면 일본의 이른바 ‘문명’에의 편입은 명확해지는 듯하다. 고야스 역시 “일본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것은 이미 일본이 ‘세계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전쟁은 분명 ‘세계’전이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일본은 1930년대 즈음에 국제사회의 주요 일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고, 공황과 전쟁이라는 격동 속에 세계질서 재구성을 요구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리더였다. 그 과정에서 나온 공간적 개념이 ‘동아’와 ‘대동아’인데, 고야스는 “1930년대부터 일본은 스스로 맹주로서 군림할 수 있는 ‘동아’라는 영역 개념을 형성하였고, 거기에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영역으로 ‘남방’을 부가하여 ‘대동아’를 형성해간 것이 제국 일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이른바 ‘전후처리’ 과정이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의 다자적 관계보다는 미국과의 양자관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이제 폭넓은 합의가 존재하는 듯하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면, 2차 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일본이 (위로부터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룬 데 반해, 한국이 권위주의로 나아간 까닭은 ... 일본은 ‘제국’이었고,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큰 듯하다. 고야스는 바로 이 점을 명쾌하게 정리해 준다. “일본은 아시아와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유보한 채 독일과 함께 대전 후 미국이 주도한 서방의 ‘세계체계’에 복귀했다. 그리고 대등한 미일관계가 논의되던 1960년대 이후 일본은 비군사적인 형태로 ‘세계체계’의 유력한 구성멤버였던 과거의 위치로 복귀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아시아에서 일본의 지위를 이번에는 경제강국으로 부활시켰음을 의미했다.”

 


아뭏든, 요즘 일본 정치계도 복잡한 것 같다. 끝내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 문제를 풀지 못한 채 하토야마는 물러나고 칸 나오토가 총리로 앉고 ... 이번 참의원 선거마저 잘 안 되고 하면 동아시아 쪽보다는 기존 방식대로 미국 쪽에 붙으려는 방향으로부터 변화하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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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과 마다라메 사이의 어디쯤

 

윤성호 감독의 인디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 No Vote No Sex>

 

우디 앨런의 영화들과 일본 애니메이션 <현시연>(現代視覺文化硏究) 사이의 어디쯤 놓여 있는 듯한 작품이다. <은하해방전선>에서도 넘치는 재치와 남성주의 사이에서, 통쾌함과 불편함 사이 어디 쯤에 놓인 느낌을 자아냈었는데, 이 짧은 시트콤에서도 그런 감성이 압축적으로 나타난다. 이제는 노쇠한 우디 앨런이 스칼렛 요한슨 같은 젊고 예쁜 여배우를 졸졸 따라다니며 알 수 없는 멘트들을 주절주절 날린다면(<매치 포인트>, <스쿠프>), <현시연>의 오타쿠 청년들은 동아리방에서 자신들의 사업계획과 섹스에 대한 이야기들을 쉴새 없는 입담으로 주고받는다. 윤성호의 시트콤에서 절묘한 부분은 "창문"인데, 창문 이쪽의 동아리방 느낌의 공간에서 그가 <현시연>의 캐릭터 마다라메가 된다면, 창문 너머 저쪽에서 그는 학보사 여대생을 뒤쫓는 우디가 된다. 그렇다고 꼭 윤성호 감독이 쁘띠부르주아 '속물근성'을 속속들이 까발리고 싶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속물근성이 자아내는 역설을 드러내 보여주고 싶은 것 아닌가 한다. 그는 영화속의 우디처럼 적응 안 되는 대저택에서 어색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리방 같은 친숙한 공간에 머물러 편하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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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관련 5문 5답

 최저임금 관련 5문 5답

 

 

1. 올해 최저임금 인상률이 물가상승률 전망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고 하는데요. 내년에 적용 될 최저임금을 놓고 올해도 노사가 맞서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죠?

 

경영계가 지난 달 28일에 최저임금위원회 전체회의에 최저임금 동결요구안을 제출하면서, 노동계는 지난 4일 이틀간 최저임금위원회 점거농성을 벌였고, 청소용역 노동자들도 거리농성에 나섰습니다. 양대노총도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했고, 민주노총은 월요일부터 경총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2. 그렇다면 노동계와 경영계에서 현재 각각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 상황인가요?

 

경영계는 시급 4,110원인 현재 최저임금의 동결을 주장하고 있는데, 뿐만 아니라 지역별․업종별 차등적용, 감시단속근로 감액적용, 수습기간 10% 감액적용기간 연장 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경영여건 개선과 일자리 유지를 들고 있습니다. 금융위기가 일어났던 지난해에는 5.8% 삭감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노동계는 최저임금 동결안이 물가인상조차 고려하지 않은 실질적인 삭감안이라고 주장하면서 시급 5,180원(한국노총은 5,152원 적용 요구) 적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체 근로자 월 평균임금이 215만원 정도인데, 최저임금을 적용받더라도 한 달에 107만원은 받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경영계는 최저임금 동결 이유로 일자리 유지를 들고 있지만, 최저임금은 일자리 유지․확대를 위한 제도라기보다는 취약계층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보호를 위한 것입니다. 애초에 최저임금 도입 목표도 임금격차 해소와 분배구조 개선이었습니다. 또 최저임금이 갖는 고용효과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합의가 도출되지 않은 상황이고, 노동시장의 상황에 따라 그 영향이 상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평균 임금에 대한 최저임금의 비율도 최저임금제가 처음 도입된 1988년의 28.7%에 못 미치는 27.8% 수준에 머물고 있고, 국제적으로도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88년 이후에 국민소득이 8배 가까이 늘어났다는 걸 고려하면 그간 한국사회가 분배구조 개선에 얼마나 미진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3. 우리나라 저임금근로자의 비중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하던데요?

 

일반적으로 저임금근로자라고 하면, 전체 임금근로자 가운데 중위임금의 2/3 이하를 받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한국에서는 그 비율이 26% 정도로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습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 근로자들은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받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달 발표된 OECD 주요 통계결과에서는 한국 근로자들의 주당 근로시간이 가장 높게, 그것도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격차가 매우 크다는 것도 한국의 특징인데, 대기업 근로자들이 최저임금도 못 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미국의 경우 올해 최저임금이 7.25달러인데, 오바마 정부는 내년까지 9.5달러로 인상하겠다고 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평균임금 대비 최저임금 비율이 50% 수준으로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4. 노동부에 따르면 최저임금법 위반으로 적발 된 사업장도 지난해에 약 2.7배가 증가했다고 하는데요. 매년 최저임금이 오르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점점 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최저임금법 위반 사업장이 지난해에 15,000곳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는데, 노동부를 비롯한 행정당국이 관리감독에 소홀하다는 문제도 있겠습니다만, 저임금근로자들은 노동조합 가입률도 매우 낮아 스스로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는 것도 최저임금 사각지대가 늘어나는 주요 배경입니다. 고령화가 문제되고 있는데, 최저임금 적용대상인 60세 이상 고령노동자 100만여명 중에서 최저임금도 못 받는 분들이 43만명입니다. 그래서 노인가구 빈곤율이 OECD 통계에 따르면 45%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최저임금 적용에서 제외된 장애인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최저임금을 적용받는다 해도 문제는 남습니다. 저임금근로자들의 4대보험 가입률은 전체 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고, 근로환경이나 복지혜택도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5.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근로자가 최근 대폭 늘어나면서 임금격차는 더 커지고 있는 실정인데요. 이런 임금격차와 최저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최저임금 수준이 최저임금위원회라는 기구(노, 사, 공익위원 각 9명씩 총27명으로 구성)를 통해 합의되는 구조도 부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재계는 항상 최저임금 동결이나 삭감을 주장해 왔고, 정부도 양적인 성장에 치우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의견이 반영되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평균 임금수준의 50% 이상으로 일정 비율이 되도록 최저임금을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임금격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최저임금을 적용받는 저임금근로자층과 비정규직근로자층이 대부분 겹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 4월에도 노동부의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고용률이 증가하고 실업이 줄어들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실업률은 3.8%로 IMF 경제위기 이전에 비해 높은 상황이고, 증가한 고용의 내용도 상용직에 비해 임시일용직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서 비정규직 증가 추세와 고용의 질이 떨어지는 게 같이 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을 줄이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IMF 경제위기 이후 경영상의 어려움을 들어 예외적으로 허용된 비정규직이 실상은 무분별하게 확대되었고, 이후 양극화가 정착되면서, 경기가 회복되었어도 경제성장은 고용없는 성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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