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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어야 배반의 경험도 공유할 수 있다

 

 

 

- 석보경, 장경희, 정동욱. 2009, <방, 있어요>

- 최신춘. 2010, <미얀마 선언>

 

예정에 있던 회의가 한 주 미뤄지면서 수첩에 적힌 다음 일정을 향해 무심코 대학로의 작은 극장으로 향했다. 요즘들어 의외로 극장에 가서 영화보는 일이 잦다.

 

오늘도 혼자 늦은 저녁을 분식집에서 먹던 중 TV에서 실업률은 줄어들었지만 청년실업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나 역시 15세부터 넓게는 35세까지로 잡는 청년층에 어쨌든 들어가니, 남 얘기만은 아닌 셈이다.

 

청년세대를 둘러싼 담론은 매우 넘쳐나는 듯하면서도 사실 그 힘은 영 딸려 보인다. 역시 시간의 흐름이란 청년들을 금새 생활에 찌든 어른들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인 것인가. 이런 가운데 청년세대가 스스로를 말한다는 식의 기획으로 <방, 있어요>(이하 <방>)와 <미얀마 선언>(이하 <미얀마>)의 두편을 묶어 상영하는 곳을 찾아갔다. 영화를 보기 전 제목만 갖고 말하자면 <방, 있어요>가 20대들이 독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개인적 공간인 '방'이 과연 있는가 하는 질문과, 어쨌든 '방'이 있긴 한데 그것이 너무도 열악하고 고립되어 있다는 지적이 묘하게 중첩되어 문제의식을 잘 전달하고 있는 데 반해, <미얀마>의 경우에는 '미얀하지만 우린 아마 잘 안 될거야'의 줄임말이라는 점에서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있지만, 유희적인 표현이 되어버리면서 '버마'라는 격동의 역사를 지닌 동남아시아의 한 지역을 은근히 식민화하는 건 아닌지 끝끝내 불쾌감을 준다. 왜 하필 '미얀마'인 것인가.

 

각설하고, 일단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는 점은 20대라는 또래집단 중심의 서사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기성세대에 의해(그것이 '요즘 애들'이 되었든, '88만원 세대'가 되었든 간에) 대상화되지 않으려는, 그리고 자신과 친구들을 대상화하지 않으려는 시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두 작품의 접근은 일정한 차이 또한 분명히 보여준다. 서사의 중심이 되는 또래집단은 <미얀마>에서는 **고등학교 동기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띠는 데 반해, <방>에서는 동료의식과 연대감으로 느슨하게 묶인 담담한 집단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왜 안 될까?'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조건들'에 한 발 더 다가가려는 노력은 <방>에서 보다 돋보인다. 이에 비해 <미얀마>에서는 제목에서처럼 '안 될거야'라는 회의적 태도가 좀더 강하게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왜 안 될까?'라는 물음을 스스로 밀고 나가기보다는, 그 문제에 대해 우석훈, 허지웅 등의 지식인의 입으로 말하게 하고 프레임 뒤로 숨어버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도피는 후반부에 프랑스로 떠나는 한 친구의 모습에서 정점을 이룬다.

 

두 작품들이 공히 드러내고 있는 아쉬운 점이라면 학교, 동네 등을 바탕으로 한, 주어진 틀에 의해 형성된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감히 말해보자면,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대학물 안 먹고 하류에 머무는 폭주족들이 조직적 측면에서나 의식적 측면에서나 훨씬 앞서 있다(폭주를 뛰어 본 적은 없지만, 게다가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한 친인척으로부터 폭주족 생활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폭주족들은 의외로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기도 해서 리더인 '길짱'이 존재하며, 지역색이 강한 곳에서는 넓게는 광역 단위로 '총장'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분'은 총장을 역임한 바 있다.^^;).

 

폭주족 집단 자체가 갖는 룸펜집단으로서의 한계는 차치하더라도 ... 조직적 측면에서 이들은 최소한 읍면동 단위는 넘어서는 시군구 단위로 대면적 공동체를 넘어서는 커뮤니티를 이룬다. 의식적 측면에서 <방>과 <미얀마>의 서사들은 '현재 우리들이 어떠하다'라는 문제의식에 머물고 있다. 물론 <방>에서 "주택정책은 가족을 이루고 사는 배나온 아저씨들이 만든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이 현재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리적 비약이 심한 편이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강한 부정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또한 <방>이 제시하고 있는 '개인들에게 있어서는 자기계발, 지역사회에 있어서는 재개발'이 이들을 개별화하는 주요 메커니즘이라는 언명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다른 방식의 서사가, 최소한 가능함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시니컬한 회의에 불과할 것이다. 개별화되어 통치의 대상으로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에 대한 거부 측면에서 보자면, 폭주족들이 훨씬 강한 반대 정향을 보여주며, 이들은 적어도 지배문화로 코드화된 행위양식들을 독창적으로 재전유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한편, 형식상의 측면에서 두 작품의 시선은 모두 방, 대학 캠퍼스, 술집, 까페 등의 다소간 '진부화된 공간'에 머문다. 이런 측면에서 <방>의 경우는 '20대들의 개별화'의 공간적 메타포인 '텐트'를 등장시키고, 그것을 중심으로 시선이 머무는 장소가 이동한다는 점, 그리고 후반부에는 저 뒤로 국회가 바라다보이는 여의도라는 '트인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보다 새로운 형식상의 시도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서사의 주체와 그 대상 간의 접점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끝끝내 아쉽다. 자기네 동네를 망친 로저에게 끈질기게 카메라를 들고 찾아갔던 마이클 무어의 박력이 조금은 그리워진다.

 

좀더 나의 관심을 끌었던 <방>의 내용들과 관련하여 한두 가지를 덧붙이자면 ... 먼저 (고시원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듯한) 한 인터뷰에서 "옆집에 사는 사람도 모르지 않느냐"라는 반문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시원 옆방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는 것과 청년세대의 개별화 간에는 사실 그리 큰 접점이 없다. 이는 사적 공간의 이중성 때문인데, 기존의 공/사 구분의 틀에서는 사적 영역이 개인 및 가족의 영역뿐만 아니라 시장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 또한 동시에 포괄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일정정도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조직되는 공간이고, 시장이 사적 이윤을 목적으로 조직화되는 공간이라면, 개인적 공간은 개인이 최소한의 자기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공간이다. 산업화 이후 개인적 공간과 시장에 의해 전유된 공간을 주로 가족 단위의 공간이 매개해 왔다면, 신자유주의 이후의 개별화는 개인적 공간과 시장에 의해 전유된 공간 사이의 중범위 공간은 물론, 공적 공간마저 최소화함으로써 강제된다. 앞에서의 질문에 대해 고시원생은 '층 사람들이 모여 회식 한 번 하면 되는데 ...'라고 답한다. 고시원이라는 공간은 애초에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이 오가며 모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고시원 밖에 나가 도시공간을 거닐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한 인터뷰에서는 고시텔 생활과 전월세방을 전전한 경험담 속에서 '혼자 살기 힘들게 만든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이 또한 세대간 불평등의 문제와 재생산의 위기라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것이다. 실제로는 개인들을 혼자 살도록 만드는 개별화의 동력이 더 강하다. 이렇게 보더라도 청년세대가 겪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것이 '스펙쌓아 취업 뽀개기'와 조직적으로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간의 간극이 여전히 커 보인다는 것이다. 전자를 대체할 만한 '꿈'이 없는 것이다. 꿈(Social Dreaming)이 있어야 배반의 경험도 공유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일상생활의 수많은 측면들이 이전 시기에 비해 고도로 시스템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바야흐로 의 시대인 것이다!), 산업화 시기와 1980-90년대에 비해 청년층이 한 발 내딛기는 훨씬 어려움에도 그런 작은 시도들을 담아내려 한 <방>과 <미얀마>는 모두 소중한 기록들이라 생각한다.

 


*덧붙이기: <방>의 주인공 중 하나인 '하다'는 텐트를 참 잘 치더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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