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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 처음 맞이한 어느 봄날,

이렇게도 질긴 인연이 될 줄 몰랐던 두 권의 시집을 만났다.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과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그 뒤로 밤마다 깨끗이 씻고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차곡차곡 이런저런 시인들의 시집들을 읽어 나갔다.

수업시간에는 주로 많이 잤던 것 같다.

이후 몇 개월이 흐른 뒤 한달여 동안 가출한 적이 있는데

뭔 겉멋이 들었었는지 밤에 아르바이트 할 때 빼고는

그곳 부산에 있다던 이윤택을 만나겠다고 싸돌아다녔다.

결국 그를 만나진 못했지만, 몇 주 동안 오후에 국제시장 구석

보수동 헌책방으로 나서 밤일을 마치고 여인숙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십 몇년쯤 뒤 ...

한때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을 썼던

시인이자 극작가인 이윤택은 국립극장장이 되어 있었고

연작시 <발전소>를 썼던 하재봉은 득도를 하는가 싶더니

출발 비디오여행에서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어떤 토론회에서 만난 장정일은 ... 아이쿠 ...

꼰대가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고뇌하는 듯했다.

 

하지만 시는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씩 마음의 휴식이 필요하다 싶으면

누런 표지에 "제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이라고

쓰여진 장정일의 시집을 꺼내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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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굴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귾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배개 벨 것인데
한편에서 되게 낮잠 자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을 흘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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