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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머리의 남자아이를 만나다

2004년 01월 11일

 
녀석은 언제나처럼, 그리고 우습게도 당황스럽게도 꼭 나와 같은 방식으로 갑작스레 전화를 해 대곤 "야, 나 서울이야. 여기 종론데 내가 그쪽으로 갈까? 아님 네가 이쪽으로 올래?" 뭐 매번 이런 식이다. 왼쪽 주머니의 약봉투를 주물럭거리다 고심 끝에 그를 외면할수는 없었기에 잠시 발길을 옮기고 말았다. 도대체 어찌 해 볼 기미가 안 보이는 뻣뻣한 직모의 머리칼을 지닌 사내, 그렁그렁한 눈동자는 여전해 보였다. 사실, 그러고보면 녀석이 전화라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공원 벤치에서 눈물이나 질질 짜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부둥켜 안아 회한을 푸는 것이 어색해져버린 내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닌데, 녀석의 넓다란 가슴팍에 내 가슴이 부대꼈을 때엔 살가죽과 갈비뼈 저 아래 깊숙히 속에 박혀 있는 사금파리가 적이 몇 개는 빠져나오는 느낌이었달까. 여행자의 발길과 행군의 발길이 맞닿는 어느 지점, 그 곳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멈추어 보았다.

 

한라공조 공장에서의 계약기간이 애매하게 끝나버리고 잠시 묶여있던 발을 풀고 싶었던 마음에서였는지 서울에 잠깐 들렀다는 녀석에게는 삶의 아픔이라는 그 무엇이 그의 음성과 표정과 발걸음에 조금씩 비쳐드는,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미덕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나는 그를 외면할 수 없고, 그가 사랑스럽다. "정규직 노동조합이라고 말로는 비정규직도 어쩌구 하는데, 막상 보면 우리 계약직들이나 사내하청 사람들한테는 아무 것도 없어. 회사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번에도 5일까지 계약인데 일방적으로 끝내버린 거라니까. 계속 일하다 보니까, 그것들이 어찌 돈을 벌게 되는 지 훤히 보이기 시작하더라."

 

녀석은 최종 조립라인에 있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에 들어가는 에어컨 공장에서 말이다. 하지만 현대의 상표를 달고 있는 그 어떤 자동차에 들어앉아 에어컨을 틀어도 녀석의 체취가 느껴지진 않겠지, 그는 그의 표현 그대로 "기계"였으니. 현대차는 "현대"가 만든 차이고, 오늘 내가 올라탄 지하철 1호선의 차량은 "로템"이 만든 것이 되어버리는 것,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이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속담조차도 곧 "사람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바뀌지 않을까 싶다. 단단한 혹은 물렁물렁한 그 어떤 가죽들.

 

사람들로 가득찬 거리로 다시 나섰을 때, 그는 낯익지만 그리 쉽게 내던지는 듯한 말이 아닌, 목소리가 아닌 숨결로 내뱉었다.

 

"야, 이 많은 사람들이 세상살이의 어마어마한 격차를 진정으로 알아버린다면, 발칵 뒤집히겠지?"

 

"그래, 오래는 못갈 거야. 새로운 세상에서, 아니 그것이 열리는 길목에서라도 다시 널 만나는 순간이 있다면 행복할거야."

 

고교시절 밤새워 옥상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거침없던 그 시간들이 다시 우리를 이 곳에 데려다 놓았다면 너와 나는 그 언젠가에도 거침없는 마주침을 나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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