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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자 마지막, 아버지의 모습

2003년 12월 24일

 
그래.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른다. 그의 그토록 왜소하고 수줍은 모습, 하지만 너무나도 따뜻해 보이는 눈빛. 도봉동에서 느지막히 나왔는데, 그는 벌써 종로에, 지하철로 한 시간 반을 타고 와 있었나보다. 자꾸 '서울 악기'라고 말하는 바람에 어이없이 조금 헤메기도 했지만, 나도 가끔 들르는 '서울레코드'에 두툼한 황갈색 점퍼를 껴 입고 테이프를 고르는 모습을 보니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뭔가 유심히 고르는 모습을 본 지가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분명 그는 무언가를 고르고 있었다.

 

다가서자 "야, 요즘엔 다 CD로 나온댄다."며 뇌졸중 후유증으로 찡그린 듯한 한쪽 눈에 더해진 눈웃음을 짓는 그 얼굴은, 오래 전 원양어선 타러 떠나기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지어보였던 그 표정과 너무나도 닮아있지 않은가.

 

"아니, 뭐 찾길래 그려요. 이거 아녀? 벤쳐스? 테이프로도 있구만 뭘."

 

그는 이미 첫 트랙이 '하타리(Hatari)'인 영화음악 모음집 테이프를 들고 있었는데, 탄광 아랫마을 단칸방서 이사 오면서 수많은 영화음악 레코드판을 처분하는 데에 일조했던 나로서는 조금은 고역스런 일이었다.

 

"폴 모리아도 여기 있네 ... 그려, 됐다. 어정도 허지 뭐."

 

수십년이 지나는 동안 마천루가 빼곡히 들어선 서울이지만 여전히 종로부터 청계천 지리를 꿰고 있는 그는 내 손을 붙잡고 시계골목으로 들어섰다.

 

"시계 하나 해야쓰겄다. 가만 있어보자. 이거 얼마유?"

 

두 노인네의, 요즈음 이십대의 미덕인 '쿨함'과는 한참 거리가 먼 '흥정'이란 게 시작되었다. 결국 2만 원 부르는 손목시계를 만 6천원에 사면서도 다급했던지 6천원을 쥐어주고 만 원 짜리 건네는 걸 깜빡해서는 되돌아가 만 원 지폐를 주고 돌아서서 둘이 행인으로 가득한 종로의 인도 한복판에서 한참을 서로 부여잡고 웃어대었으니 참.

 

"거 참 2만원짜리 시계 사면서 뭐 그리 ... 저사람도 날 추운디 먹고 살어얄 거 아니유."

 

"야이눔아. 몇 십만원, 몇 백 만원짜리 시계 사는 사람들이 에누리 허디? 다 그런 거여."

 

그도 TV는 즐겨 보는 편이지만 몇 천 만원짜리 시계도 있다는 걸 잘 알겠지?

 

한 시간도 더 전에 세운상가에 왔다길래, "아니, 노인네가 뭐 하고 돌아다니셨쇼?"하고 물어 보니 장사동으로 해서 청계천 쪽 에도 나갔다 왔단다.

 

"장사꾼들 있나 좀 보러 갔더니, 죄다 뜯어발겨놓고 장사꾼들도 안뵈더라. 현인동 옛날 집들도 다 깔아 뭉개 놨드만."

 

"아, 그거 장사꾼들도 이명박이가 다 쫓궈냈슈. 근디 성동공고도 바로 그 근처던디?"

 

"이, 그려. 청계 7가지. 참 내. 거기 성동공고 방송반 할 때가 재밌었는디."

 

상상하기 힘든 60년대식 폼을 잔뜩 잡고 릴 테입 데크를 만지작거리던, 낡은 앨범 속의 흑백사진의 기억이 잠시 스친다.

 

그와 나의 복고풍 조우에 서울지하철도 협조하는 분위기인지, 플랫폼에 들어선 열차는 노상 1호선을 이용하는 나도 요즈음엔 처음 보는, 한 20여 년은 더 된 것 같은 차량이었다. 한여름엔 창문의 양 끝을 눌러 쥐고 위로 열어올리기도 했던, 오후의 노곤한 햇볕이 따갑기라도 하면 차양막을 끌어내려 창틀의 홈에 걸도록 만들어진, 내 어린 시절의 스틸 사진 속 몇몇 장면. 일찌감치 술에 절어 신세 한탄하는 아저씨들과, 성탄절 유흥 계획을 수립하는 젊은이들과,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백발 노인 등, 수 많은 사람들 속에 잔뜩 웅크리고 서 있는 그의 모습.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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