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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적 외피 속의 합리적 핵심

나는 몹시 궁금하다. 왜 합리적 핵심을 강조하는 이들이 거기에 씌워진 외피가 신비적인지에 대해서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며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는 이들이 정 반대의 내용과 똑같은 외피를 뒤집어 쓰는 것은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내용과 형식이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저만치 거리를 두었다가 정작 그것이 문제가 되는 때가 오면 우왕좌왕 어색해하다 한참 뒤 후일담 소재로나 써먹는다. 코가 제멋대로 거리를 거닐고 외투가 제 주인을 고른다.

 

아, 덧붙이자면 ... 흔히들 비판은 쉽지만 대안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종종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어진다. 긍정(실증)은 쉽지만 부정(직관)은 쉽지 않다.

 

사실 "비판은 쉽지만 대안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배의 시각과 언어에 대항하는 새로운 시각과 언어의 창출보다는 지배의 시각과 언어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대안이라는 명목 아래 지배의 다양성을 증대시켜주는 방안이다. 이것은 사실 대안이라기보다는 강령이나 지침의 형태를 띤다. 이것이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합리주의자들의 실체다.

 

몇몇 글귀들을 인용해 보자면 ...

 

"합리주의자들에게는 어떤 것도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여러 세대에 걸쳐 존재해 왔다고 해서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다. 친숙함은 어떤 가치도 가지지 않으며, 모든 것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파헤쳐 버린다."(Oakeshott, 1962)

 

"신화는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의 이면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본질적으로 단순하게 하고, 모든 변증법을 제거해 버린다. 신화는 깊이가 없고, 완전히 열려진 세계이며, 자명한 것에만 빠져 있으며, 더없이 즐거운 명증성을 내세우기 때문에, 모순없는 세상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사물이 스스로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Barthes, 1972)

 

 

음 ... 모순 없는 세상이라니 ... 방법 중 하나는 내가 모순덩어리로 살아가는 것.

 

나는 이른바 문제틀이라는 것이 적어도 세 가지 축을 지닌다고 이해한다. 옳다/그르다, 맞다/틀리다, 좋다/싫다가 그것이다. 오늘날 옳다/그르다를 축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반면, 맞다/틀리다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이들은 주로 지배자들이며, 좋다/싫다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이들은 주로 피억압자들이다. 더구나 대세는 좋다/싫다 인데, 시쳇말로 '캐간지' 아니면 '진상'이라는 것이다. 좋다/싫다 쪽은 이른바 사회변혁에 회의적이거나 관심이 없다. 맞다/틀리다 또는 옳다/그르다 쪽은 그것이 맞다-옳다고 생각하는 일부의 경우 변혁에 긍정적이다. 또한 이들은 서로에 대해 고까워하면서도 때에 따라 협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도통 좋다/싫다를 축으로 판단하는 이들을 이해하고 싶어하지도 않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 세 가지 축을 기준으로 할 때 판단의 수준인데, 그것은 바로 그들/우리 또는 이쪽/저쪽이다. 이러한 판단의 수준은 앞에서의 세 가지 축을 떠나서도 복잡한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반정부 집회장에서 연사가 "정부는 ~~하라. -- 반대한다!"고 외치는데, 한켠에서 누군가 "우리 안에도 정부(government)는 있다!"고 외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현실에서는 페미니즘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럴 경우 지도급 인사들은 대부분 '그들'이 문제의 핵심인데, 왜 '우리'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여 분열을 책동하느냐고 한다. 그들과 우리의 경계가 고정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다층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애써 부정한다. '우리' 안에도 '그들과 우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사회변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지도급 인사들은 대부분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며 자신들이 그간 내세우던 옳다/그르다, 맞다/틀리다의 축이 아닌 좋다/싫다의 차원에서 반응한다. 다른 말로 하면, 화를 낸다. 결국 현실에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윤리도 합리성도 아닌 감성이 지배한다.  

 

이럴진대 어찌 세상이 자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현재든, 미래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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