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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살고 죽을까

언젠가 한 친구가 사회자본 이야기를 하면서 풍부한 사회자본을 누리는 사람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 같은 의문들을 좀처럼 품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는 오지게 짜증이 났었는데, 나 자신이 “사람은 왜 살고 죽을까” 같은 생각을 종종 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권력(힘)의 문제다. 살아가는 힘이 없으면 살 수가 없고, 살아가는 힘이 넘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도 갖게 된다. 이러한 힘은 신체가 지닌, 혹은 신체에 부여된 힘이기도 하다. 주변에서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신체건강하고 성적 욕망도 넘친다.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의 오른팔은 제멋대로 꼿꼿하게 서서 핵미사일 발사 스위치를 향한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벌써 몇 달이 지난 일이지만 꽤 오랜 시간을 곁에서 보낸 사람이 스스로 세상을 져버렸다(물론 노무현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그러한 죽음의 방식에 대해서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 말고는 누구도 내 생명을 앗아갈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본다면 말이다. 그 전후로 나의 아버지는 쓰러지고, 나는 다소간의 빚까지 지게 된데다 곁에서 힘이 되어주던 사람은 멀리 떠나가 비일상적인 경험들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그에 대해 우매하다거나 비도덕적이라 비난하는 이들 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본 것 같다. 가깝게는 노무현이 자살했을 때 "조금만 더 버틸 것이지"라 했던 전두환이 그 전형이다. 스스로 끝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접한 타인들에게 존재에 대한 책임을 상기시키는 몇 안 되는 방법이다. 사실 나의 지인이 떠났을 때에도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타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용산 참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 일전에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인 안학섭 할아버지가 자신이 0.75평 독방에 앉아서도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알아냈다고, 그것은 바로 미제국주의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연쇄살인사건은 사람들에게 가장 혐오감을 주는데, 이는 범인의 타인의 생명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의지가 불특정 다수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쇄살인범은 아파트 창문으로 자신의 아기를 던져버린 어머니라든지, 다른 남자랑 잤다고 부인을 찔러죽인 남편보다 강한 혐오의 대상이 된다. 뒤집어 보면 한 개인이 지닐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불특정 다수를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힘이다.

 

찰스 맨슨 같은 살인마들의 심리 연구를 비롯하여 <아웃사이더>, <살인의 심리>, <잔혹>으로 잘 알려진 콜린 윌슨은 어딘가에서 가방에 폭탄을 넣고 기차역이나 쇼핑몰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 가는 것을 즐기는 한 남자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러한 행위가 바로 그에게 살아가는 힘을 부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좀 거시기한 말로 임파워먼트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힘은 사람 죽이는 데 뿐만 아니라 살리는 데에도 해당되는데, 이를 위한 수단은 핵무기가 될 수도 있고, 불특정 다수에 관한 (주로 숫자로 구성된) 정보를 확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요컨대 가방에 폭탄을 넣고 공공장소에 나서는 행위는 다이어트 또는 몸만들기, 유행하는 신상(품) 구매, 해외여행 가서 찍은 사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올리기, 매너 있게 처신하여 인맥 쌓기, 통계자료나 인터뷰 자료 수집하기 등등과 연장선상에 있다.

 

사람은 왜 살고 죽을까. 어쩌면 내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은 탄생과 죽음에 대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우리가 사는 시간이 순환적이지도, 선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의 방향이 바뀌었는데도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는 순간 비극이 탄생한다. 지리한 무시간적 시간의 흐름은 끊어져야 하며, 또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다. 바로 그 때 사람들이 인간의 유한함을 망각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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