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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빌라이가 카간이 되기까지

<등장>

대몽골제국의 네 번째 카간인 '멍케'는 칭기스칸의 손자로서 카간이 되기 전부터 그 능력을 검증 받은 사람이었다. 여러 나라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유클리드 기하학을 비롯해 동·서의 학술과 문화에 능통했다. 동쪽으로는 아버지 톨로이를 따라 금나라의 숨통을 끊어버린 전쟁에 참여했다. 서쪽으로는 바토(Batu, 칭기스칸의 큰아들인 조치의 아들)와 함께 헝가리까지 나아갔다. 멍케는 명실상부한 "준비된 황제"였다. 그는 지난 수년간 정체상태에 있던 세계 정복계획을 다시 추진했다. 동으로는 남송을 정복하고, 서로는 지중해를 넘어 유럽까지 나가고자 했다. 남송 공략의 책임자가 바로 그의 친동생인 코빌라이였다. 코빌라이의 젊은 시절 행적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1251년, 그는 서른 일곱 살의 나이로 세계 무대의 주연으로 급부상한다.

코빌라이는 몽골고원 동남쪽 외각의 금련천(金蓮川) 초원에 동방경영의 본거지를 세웠다. 그의 첫 번째 공격목표는 운남(雲南)과 대리(大理)였다. 최종 목표인 남송을 측면과 배후에서 공격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운남'과 '대리'는 주요 은(銀) 생산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운남과 대리를 첫 공격지로 삼은 배경에는 몽골제국의 중심세력인 '상인'들의 '은' 확보 요구가 한 몫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1257년 멍케카간이 남송 정복전쟁의 친정(親征)을 발표했다. 이 전쟁에 코빌라이가 제외되었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남송정복전>

정복 작전은 몽골의 전통적인 방식을 따랐다. 타가차르(칭기스칸의 동생인 오트치긴의 손자)가 동방 3왕가(칭기스칸이 자신의 세 동생들에게 분봉한 '아우들의 올로스')와 오투하(다섯 개의 유력한 부족집단인 잘라이르·콩기라트·이키레스·우르우트·망구트)를 주력으로 하는 좌익군단을 이끈다. 멍케가 중앙군을, 오리양카다이가 우익군단의 지휘봉을 잡았다.

타가차르의 기본 전략은 원래 한수(漢水)를 타고 남하하면서 양자강 중류 유역을 제압하고 멍케의 본대가 그 뒤를 공격하면서 진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타가차르의 군대는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을 공격하다가 일주일만에 퇴각했다. {원사}는 "두 달에 걸친 장마"를 철군 이유로 밝히고 있지만, 장마 때문에 세계 최강의 부대가 모든 작전을 포기했다는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어떻든 '철군'에 격분한 멍케는 '뜻밖에' 코빌라이를 재기용했다.

정복 작전은 몽골제국 답지 않게 처음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멍케는 한 여름의 무더위를 잠시 피하자는 여론을 무시한 채, 친히 최전선으로 나섰다. 그러나 멍케 카간은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집사" 에서 '바바'라고 기록한 전염병에 걸려 쓰러졌다. 1259년 8월이었다.

<도박>

멍케가 죽었다!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가?. 몽골은 '적임자' 계승 전통을 따른다. 세습이 아닌 호선이며, 카간이 후계자를 정하는 것도 아니다. 차기 대권은 '불혹'(不惑)의 나이와 이에 걸맞는 정치 군사적 자질이 기본조건이다. '40대'로 다양한 정치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군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후보는 모두 '세' 명이었다. 당시 이십대의 청년이었던 멍케카간의 아들들은 자격 미달로 당연히 대권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대권주자는 멍케카간의 친동생인 '코빌라이, 훌레구, 아리크-버케' 세사람으로 압축되었다. 막내인 아리크-버케가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다. 그는 남송원정때 아오로크(留守營)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으며 몽골 본토의 서반부인, '항가이'에서 '알타이'에 이르는 광대한 '톨로이집안'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몽골 고원의 주인이 진정한 몽골 제국의 주인이다. 멍케카간의 측근들도 아리크-버케를 지지했다. 훌레구는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이집트 지역의 맘룩왕조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코빌라이는 목숨을 건 도박을 시작했다. 그는 여러 가지 포석을 염두에 두고 "양자강 도하, 악주 공격"이라는 히든카드를 내밀었다.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코빌라이는 멍케카간의 유지 계승이라는 명분을 확보하게 된다. 난공불락의 자연요새인 '장강' 도하 작전의 성공은 군 지휘관으로서 코빌라이의 위상 또한 드높일 수 있다. 남송 후방에 고립된 오리양카다이 장군 부대를 구출하는 효과가 있다. 오리양카다이는 멍케지지자였다. 만약 그가 혼자 힘으로 몽골로 귀환할 경우 코빌라이에게 좋을게 없었다.

1259년 9월 29일, 양자강 북쪽 도강에 성공해 남송의 의표를 찔렀다. 코빌라이는 작전 시작부터 몽골제국 전역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멍케카간의 죽음으로 지휘관을 잃은 '중앙군'이 코빌라이 군에 합류했다. 동방 3왕가와 오투하의 군단도 곧 코빌라이의 휘하로 들어왔다. 1260년 코빌라이의 군단이 '중도'에 총집결, 겨울을 보낸 뒤 '금련천'으로 북상했다. 이곳에서 "비겁한 코릴타"가 열렸다. 46살의 코빌라이는 운명을 건 승부수를 던졌다.

아리크-버케도 주저 없이 카라코람의 서쪽 근교 알탄강변 여름 숙영지에서 코릴타를 열고 카간에 즉위했다. 아리크-버케는 코빌라이보다 여러 면에서 유리했다. 아리크-버케는 멍케카간 장례식의 상주(喪主)였을 뿐 아니라, 몽골제국의 '중앙'에서 카간에 즉위함으로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조치 올로스의 우두머리인 베르케, 차카타이 올로스의 우두머리인 오르가나, 서남아시아에서 원정 중이던 훌레구도 아리크-버케를 지지했다. 1264년 코빌라이에게 항복하기 전까지, 아리크-버케는 분명 몽골제국의 '정통' 카간이었다. 조치올로스에서는 아리크-버케의 얼굴을 새긴 동전도 발행되었다.

<카간 쟁탈전>

아리크-버케는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겨봐야 본전인 싸움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 줄만한 세력은 자신의 처가인 오이라트(Oirad)족 정도일 뿐.

'반역자' 코빌라이 군은 패전 시 '멸족'을 피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몽골제국전체의 한축을 담당하는 동방 3왕가와 오투하 군단을 주축으로 한 코빌라이 군은 처음부터 아리크-버케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주된 전장은 동(東) 몽골 초원이었다. 초원 전투는 기동성이 생명이다. 따라서 세 차례의 전투에서 양측은 모두 '기마 부대'를 전면에 내세웠다. 두 측의 주력 기마 부대는 모두 순수한 몽골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양쪽이 모두 유목 전투력에 의존했던 셈이다.

코빌라이는 상대편의 전투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화북에서 카라코롬으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차단시켜 버렸다. 이에 다급해진 아리크-버케는 차카타이의 손자 '알루구'를 차카타이 올로스의 우두머리로 삼아 식량 원조를 받고자 했다. 그러나 과거 멍케카간에게 불만을 품고있던 알루구와 차카타이 집안은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아리크-버케에 반기를 들고, 코빌라이와 손을 잡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리크-버케는 카라코롬에서 퇴각해 차카타이 올로스를 점령했다. 1262년∼1263년 겨울, 아리크-버케는 포로가 된 차카타이 올로스의 장졸들을 모두 처형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몽골의 카간은 '몽골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 이미 항복한 공동체 구성원을 죽이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이로 인해 아리크-버케는 민심을 잃었다.

관리들이 떠났다. 어거데이의 후손들도 아리크-버케에게 등을 돌렸다. 조치올로스는 지원을 망설이고 있다. 고립으로 혼자가 된 아리크-버케는 1264년 7월 코빌라이에게 투항하면서, "처음에는 우리가 옳았지만, 지금은 당신이 옳다"는 말을 남겼다. 코빌라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축포였다. 아리크-버케는 유배당한 지 2년만에 사망했다.
몽골제국의 구성원들은 코빌라이를 카간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30여년에 걸친 제위기간을 세계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의 하나로 만들었다. 하지만 몽골제국의 원칙을 깼다는 비난은 영원히 그의 몫이 되었다.

※이 글은 스기야마 마사아키가 쓰고 임대희 등이 번역한 <몽골세계제국>, (신서원, 1999)을 토대로 쓴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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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몽고제국의 형성과 발전], {강좌중국사}Ⅲ, 서울: 지식산업사, 1989.
스기야마 마사아키, 임대희 외 옮김, {몽골세계제국}, 서울: 신서원, 1999.
Morgan, David, The Mongols, (Blackwell, 1990).
Rossabi, Morris, Khubilai Khan: His Life and Times, (Be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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