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특집] 밀양과 핵발전, 그리고 가부장체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비생산적이고 약탈적인 전유양식은 인간 사이의 모든 착취관계의 역사에서 패러다임이 되었다. 주된 메커니즘은 자율적인 인간 생산자를 타인을 위한 생산의 조건으로 변형시키는 것, 혹은 그들을 타인을 위한 '자연 자원'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다큐멘터리 영화 <밀양전>을 보면 한 노년의 여성 주민이 "어느 날은 그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젯밤에는 마누라한테 꽂았는데 오늘은 어디다 꽂을까'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증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밀양에서 벌어지는 숱한 폭력의 장면들 속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이 말은 단지 한 명의 개인이 내뱉은 성희롱이 아니라 어쩌면 현재 밀양이 겪고 있는 상황 전체를 상징적으로 관통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가부장체제의 역사는 '파내고', '깎고', '부수고', '뚫고', '짓밟고', '죽인' 후 끊임없이 무언가를 '꽂고', '다지고', '획일화하고', '점유하는' 과정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꽂는다'는 말을 할 때, 그가 꽂겠다는 것은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남성성의 상징으로서의 남성 성기이기도, 동시에 그가 어떻게든 밀어붙여야 할 송전탑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과정을 통해 그의 임무로써 완수되어야 하는 국가와 자본의 총체적 플랜으로서의 핵발전, 그 자체이다. 


이것은 결코 무리한 상징적 해석이 아니다. 밀양 주민들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표면적으로는 경찰, 한전, 정부이지만 사실 그 실체는 이 투쟁의 근본적 원인인 에너지 시스템과 핵발전, 그리고 결국 이 시스템을 움직이고 있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체제의 한 국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 최전선에 밀양의 주민들, 할매들이 있다. 

 

 

착취의 근간으로서의 가부장체제

 

 

마리아 미즈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성별 노동 분업의 사회적 기원을 탐색하면서 남성들이 여성과 자연을 약탈함으로써 생산을 전유하고 가부장제를 발전시켜온 과정을 분석한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힘이 본질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과 자연이 지닌 자립적 생산성을 남성들이 약탈적 생산성 아래에 종속시키는 치열한 계급투쟁의 과정을 통해 남성을 중심으로 한 토지, 가축,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재산 관계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남성들이 사냥도구 등의 무기를 점유하면서 이를 통해 중개되는 자연에 대한 대상-관계는 협력이 아니라 지배 관계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런 지배관계가 모든 남성 중심 생산관계의 일부로 자리를 잡아왔다는 것이다. 미즈는 결국 이것이 남성들이 주도하는 생산성의 주된 패러다임이 되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남성중심의 약탈적인 전유 양식이 모든 문화권에서 동일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것이 착취 관계의 역사적 패러다임이 되면서 자율적인 인간 생산자를 타인을 위한 생산의 조건으로 변형시키고, 그들을 타인을 위한 ‘자연 자원’으로 규정하는 가부장적 패러다임으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약탈의 패러다임이 자본주의에 이르면 아예 처음부터 스스로를 자연과의 관계에서 떨어뜨리고, 자연의 지배자이자 주인으로 나서는 자본가 계급이 등장한다. 폭력은 점점 대규모화되고, 약탈한 대지에서 그곳의 지역과 주민들은 이들에게 ‘착취할 수 있는 자연’이 된다. 1


한편,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타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기반을 둔 이러한 역사적 패러다임을 분석하면서 인간과 자연을 나누고, 자연과 문명을 나누는 이원론과 가치-위계적 사고를 서구 근대화의 특징으로 잡아낸다. 가치이원론을 통해 세계를 서로 배타적이고 대립적인 두 개의 항으로 개념적으로 조직하고, 둘 중 한쪽에만 가치를 부여해 왔다는 것이다. 발 플럼우드는 이를 자연으로부터 소외와 지배를 촉발하고 지속시키며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주인모델(master model)’이라 불렀다. 이러한 이원화 된 주인모델에서 문화, 이성, 합리성, 문명, 주인, 생산, 공적, 주체, 자아와 같은 개념들은 남성적 가치와 연결되고, 자연, 동물성, 원시, 노예, 재생산, 사적, 객체, 타자와 같은 것들은 여성적 가치와 연결되면서 위계화된다  . 2 이런 분석에 따르면 개발되고 문명화된 공간으로서의 도시와 덜 개발되고 덜 문명화된, 혹은 아직 원시적인 공간으로서의 농촌 역시 같은 이분법적 가치 체계에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자본주의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이분화 된 가치 체계를 가지고 여성과 자연, 주변부 지역을 끊임없이 비가치화하고 착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초국적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시스템을 국제적인 분업 체계를 통해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저개발 국가들에게 요구되는 경제 개발과 자유무역은 서구식의 근대화 모델과 패러다임을 따라가도록 강제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현지 자연 자원의 막대한 착취와 사유화, 민영화를 통한 전유, 여성을 비롯한 주변부 노동력의 착취, 농업과 지역 공동체의 파괴를 동반한다. 직접 생산자들의 위치는 세계적 분업 시스템을 통해 파편화 되고, 점점 주변화 되며 저가치화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착취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전쟁 수행 또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게다가 전쟁의 방식은 더욱 고도화 되어, 이제는 무기를 쏟아 붓는 전면전 대신 기술력과 정보력, 그리고 이를 지속할 수 있는 무기 개발과 군사력 강화를 위한 자원 확보, 이를 위한 외교적 압력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정갑희는 이와 같은 일련의 패러다임과 역사성을 짚으면서, 노동을 성애화/성별화 하고 인간 남성의 노동만을 생산으로, 여성의 출산, 돌봄 노동과 자연의 노동을 재생산으로 규정하며 이를 통해 특정한 가부장적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를 구축해 온 과정을 ‘성체계’로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체계가 군사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를 통해 지구지역적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현재의 체제를 가부장체제라고 정의한다. 3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할 때, 생산과 이윤추구를 통한 발전의 패러다임뿐만 아니라 계급적-성적-생태적 착취 그리고 생산과 노동에 대한 가치 위계화를 통해 전 지구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재의 폭력적 세계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해볼 수 있다. 그리고 핵발전과 연관된 지구지역적 시스템은 이러한 가부장체제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밀양 투쟁을 보며 핵발전의 문제를 가부장체제의 관점에서 짚어보고자 하는 이유는, 핵발전이 소수의 지배계층에 의해 통제되는 가부장적 시스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위에서 살펴본 가부장적 파괴와 약탈의 패러다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핵발전은 전 지구지역적으로 이분법적 가치-위계화를 통해 자연과 주변부 지역, 여성을 비롯한 주변부 하층계급의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착취하는 시스템을 압축적으로 극대화해온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 중 중요한 몇 가지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핵발전의 가부장체제적 속성4

 

 

첫째, 핵발전소는 파괴를 위한 핵무기 생산의 기반 시설이다. 

 

가부장체제의 핵심이 ‘약탈을 통한 전유’를 근간으로 유지되는 패러다임이라고 보면, 핵발전은 그 자체로 가부장체제의 상징이다. 애초에 핵발전은 전력 생산이 아닌 무기 개발을 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8년 우라늄 핵분열 반응을 발견하게 되면서 나치 독일을 비롯해 미국, 일본에서 경쟁적으로 핵분열의 폭발력을 무기화하기 위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있던 미국은 2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과 10만 명의 과학자, 기술자,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맨하탄 프로젝트를 실행한 끝에 플루토늄탄인 ‘트리니티’를 성공시키고, 이어서 플루토늄탄 ‘뚱보’와 고농축 우라늄탄인 ‘꼬마’를 개발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이렇게 폭탄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개발했던 것이 바로 핵발전 기술의 3대 핵심인 핵농축 기술과 원자로, 재처리이다. 폭탄 제조를 위해 핵분열성 우라늄인 우라늄 235를 농축하기 위한 농축 기술과 연쇄 핵분열반응 실험에 필요한 원자로를 개발하고, 비핵분열성 우라늄인 우라늄-238을 플루토늄-239로 변환시키기 위해 재처리 기술을 개발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영국, 프랑스 등 각국에서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은 대형 잠수함의 동력원으로 이용하기 위한 원자로 개발을 완성시킨 후, UN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선언한다. 핵폭탄의 가공할 위력과 위험성이 세계적으로 증명되었음에도,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원자력이 발전을 위한 에너지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미국이 잠수함용 원자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동력용 원자로를 완성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을 위해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렸던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이제 원자력을 이용한 막대한 이윤을 끌어 모으기 위해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경쟁적으로 대용량의 상업용 원자력 에너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한편, 핵발전 공정 이후에 나오는 물질은 플루토늄만이 아니라 열화우라늄과 감손우라늄도 있다. 이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미국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열화우라늄탄이다. 미국은 이 열화우라늄탄을 이라크,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 등에 투하했고, 이 지역의 주민들과 참전 군인들은 ‘걸프전 증후군’, ‘발칸증후군’으로 불리는 암, 백혈병, 면역부전 등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열화우라늄탄이 집중적으로 투하되었던 이라크의 바스라 지역의 어린이들에게서 악성 종양이 다발하고 있다. 
결국 핵발전은 애초에 평화가 아닌 전쟁을 위해 개발된 것이고, 원자력은 파괴적인 에너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지금은 마치 핵무기와 원자력 발전이 다른 목적을 지닌, 완전히 다른 속성의 것인 양 이야기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원자력 발전은 핵발전이고, 핵발전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무기 개발로 전환할 수 있는 강력한 기반시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핵발전은 에너지 생산을 위한 전 과정에서 자연과 인간을 파괴하고 위험을 수반한다. 

 

핵발전은 원재료의 획득에서부터 폐기물 처리까지의 전 과정이 자연과 지역을 파괴하고, 특히 하층계급 노동자들과 지역 토착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며 위험을 수반하는 과정이다. 


핵발전은 원재료인 우라늄 채굴에서부터 자연과 인간에 상당한 방사능 피폭 피해를 입힌다. 우라늄 광산의 독성 진흙은 사람과 환경을 위협한다. 우라늄광 1톤에 998톤의 독성 진흙이 되돌아오며 이는 구덩이와 인공호수에 옮겨지는데 광미라고 부르는 이 암석의 잔여물의 85%에는 여전히 방사능 물질과 비소 같은 독성물질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우라늄 광산의 노동자들은 엄청난 방사능 위험을 안고 일을 하고 있으며, 광산 주변 주민들 역시 암 발병률이 매우 높다. 일례로 옛 동독 비스무트 지역의 우라늄 광산에서는 1만 명가량의 노동자들이 폐암으로 투병했으며, 카르키수 우라늄 채굴로 생긴 도시 마이우우-수의 주민들은 2배의 암 발생률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광미에서 나온 방사능 물질은 공기와 지하수를 수천년 간 오염시키며 미국 유타 주에서는 이 지하수가 상수원인 콜로라도 강으로 흘러들어가 강을 오염시킨 사례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한 과정을 통해 채굴이 이루어짐에도 양질의 우라늄은 100톤의 광석에서 겨우 많게는 10톤, 적게는 100킬로그램 밖에 얻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이렇게 얻은 양질의 우라늄 원석 중에서도 핵분열이 가능한 우라늄 235는 전체 우라늄의 0.7% 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수많은 지역 주민들과 노동자들, 생태계의 파괴를 담보로 우라늄 채굴을 통해 핵발전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라늄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이 아니다. 현재 세계의 우라늄 매장량은 석탄이나 석유보다도 훨씬 적다. 그나마 전체 채굴량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우라늄의 양이 매우 적기 때문에 오히려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양이 석유의 몇 분의 1, 석탄의 수십 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 정부는 마치 핵발전이 미래의 지속가능한 에너지이고 친환경적인 에너지인 양 계속해서 거짓 선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이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말도 진실이 아니다. 원자로를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우라늄을 채굴하는 단계에서부터, 제련, 농축, 가공하고 이후 재처리하는 모든 단계에서 방대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며, 이 에너지는 결국 화석연료를 통해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핵발전의 전 과정에서 오히려 더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가 발생하는 셈이다. 
원자력 발전은 해양 생태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원자로에서 나오는 온배수는 1초에 바다 700톤의 온도를 섭씨 7도까지 상승시킨다. 지구온난화에는 이렇게 핵발전소를 통해 배출되는 온배수 역시 사실상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온도가 높아지는 바다에서 해양 생물들이 원래의 모습대로 살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원자력 발전에서 나오는 엄청난 양의 방사성 폐기물의 문제는 더 이상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최소 300년의 시간이 필요하고, 사용 후 핵연료에서 나오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의 관리에는 100만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전 세계 어디에도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을 처분할 장소가 없다. 수백 톤의 핵폐기물은 드럼통에 담아 핵발전소 안 임시저장고에 계속 쌓아놓고 있을 뿐이다. 

 

 

셋째, 핵발전은 국가와 핵 전문가, 군 당국, 핵 관련 산업과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적 통제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사실 핵발전은 정부가 선전하듯 값싸고 효율적인 발전 시스템이 아니며,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다는 등의 이유로 친환경 에너지로 칭송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발전을 어떻게든 지속하려는 이유는 가장 일차적으로는 이 시설이 핵무기 개발을 위한 기반시설이 되기 때문이며, 핵발전 시스템은 정부와 소수 자본, 엘리트들만이 전체 결정과정에 대한 전권을 쥐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핵발전은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의존하여 운영될 수밖에 없고, 수많은 위험 변수들을 통제해야 하며,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모든 정책적 검토와 결정이 이들 소수 전문가들과 자본, 군, 정부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가부장적 통제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이 권력 그룹 안에 있는 이들은 ‘전문성’을 명분으로 얼마든지 담합과 비리를 저지를 수 있는 구조라는 얘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들은 연구와 개발, 실험, 진흥이나 규제, 이윤의 배분과 수출입 등을 위한 정책 결정 과정 전체에 낙하산 인사와 회전문 인사를 통해 자신들만의 ‘패밀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가부장적 시스템의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핵발전이 안고 있는 주요한 위험 요소들과 유해 물질, 운영 상태, 부품 및 핵심기술, 해외 수출입과 관련된 문제 등은 보안과 직결되어 있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통제되기 때문에 이 과정에 개입되어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핵발전소의 운영과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거의 제대로 알 수가 없고 따라서 사전에 문제제기를 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때처럼 엄청난 재난의 순간에도 어느 정도의 위험이 발생한 것인지,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조차 모두 정부의 발표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리 원전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일촉즉발의 사고와 부품 비리, UAE 등으로의 원전 수출에 얽혀있는 온갖 비리 등이 항상 뒤늦게 알려져 문제가 되고 있다. 중요한 건 원전 문제는 이러한 비리가 누적되고 위험이 제 때에 통제되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핵 마피아들은 정부기관, 산업, 학계, 언론 등에 포진하여 원자력 건설과 발전을 통해 얻은 이익을 서로 공유하면서 비리를 은폐하고 위험을 거짓으로 가리고 있다. 결국 핵발전이 지속되는 이상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운명을 이른바 ‘원자력 패밀리’, ‘핵 마피아’라고 불리는 이 집단들에게 맡기고 있는 셈이다. 
 

 

넷째, 핵발전은 주변부 지역과 하층 노동자, 지역민들에 대한 차별을 기반으로 지속된다. 

 

어느 나라든 핵발전소는 절대 수도권 중심부와 주요 지역에는 짓지 않는다. 인구가 적고, 낙후된 곳, 사고가 나더라도 국가가 감수해야 할 위험이 가장 적을만한 곳에 짓는다. 결국 수도권과 생산시설 밀집 지역의 막대한 전기 소비를 감당하기 위해 수많은 주변부 농촌 지역들이 핵발전소와 송전탑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핵발전소 주변 지역은 농업 뿐 아니라 바닷물의 온도 상승으로 어업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방사능 물질 누출의 위험을 상시적으로 안고 있으며, 밀양 투쟁으로 잘 알려졌다시피 송전탑의 경우에는 송전탑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전자파와 코로나 소음으로 인해 주민 뿐 아니라 주변의 동식물들까지 모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중앙 집중적인 핵발전 시스템의 특성은 이런 위험을 더욱 가중시킨다. 서울은 전기 자급률이 3%에 불과하지만 핵발전소가 있는 전라도 영광의 경우, 전력자급률이 256%에 달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시스템의 차별적 구조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고도의 피폭 위험을 감수하며 일을 해야 한다.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연간 누적 피폭량 기준치는 일반인의 100배인 100 밀리시버트이다. 심지어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은 이를 250 밀리시버트로 상향조정했다. 원전 사고 수습을 위해 임의로 허용 기준을 올린 것이다. 이런 위험한 일을 누가 하려 하겠는가. 핵발전소 노동자는 6차에서 심지어 8차, 9차까지 이르는 하청 구조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들의 90%는 비정규직이다. 당연히 산재처리가 제대로 될 리도 없다. 일본에서 후쿠시마 사고 후 수습대책으로 투입되는 노동자들은 하루에 14만원의 일당을 받고 일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노숙인들을 사고 수습을 위한 인력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진 바 있다. 또한 핵발전에 연관된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발전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련, 처리, 재처리 시설이나 핵폐기물 처리장, 저장 시설에서도 일을 하고 있다. 핵발전의 전 과정은 이렇게 지역 주민과 생태계, 하층 계급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착취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단 발전과 송전 과정에서만이 아니다. 우라늄 채굴 과정에서부터 폐기물 처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위험을 주변부 지역의 주민들과 생태계가 감당해고 있으며 이러한 차별적 구조는 한 국가 내에서 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다국적 기업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제3세계에서의 우라늄 채굴은 현지의 마을과 농토를 파괴하고 물을 심각하게 오염시킨다. 뿐만 아니라 광석에서 우라늄을 채취하기 위해 물이 많지 않은 지역에서 물을 엄청나게 끌어들여 사용하는 바람에 결국 현지의 주민들과 동물들의 식수를 고갈시키고 농경지의 물 부족을 초래하게 된다. 

 

 

다섯째, 핵발전과 핵무기 개발은 지구적 차원의 자본주의-군사주의-제국주의 연쇄고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핵발전소는 기본적으로 핵무기 개발과 직결되는 시설이다. 또한 발전소와 발전 설비의 제작 과정, 농축에서 재처리까지의 전 과정이 모두 고도의 기술과 막대한 비용을 요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핵발전소의 보유 여부는 해당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이렇게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들여 만들어내는 기술과 무기들이기에 각국은 어떻게든 모든 과정에서 자국의 비용과 자원 소모를 최소화하면서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기 위한 다양한 정치외교적, 군사적 수단을 동원한다. 때문에 핵발전과 핵무기 개발에 연관된 전 과정은 지구적 차원의 자본주의-군사주의-제국주의 시스템과 필연적으로 연동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개별 국가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핵발전과 핵무기 개발의 과정은 핵 마피아들의 담합에 의해 막대한 자본과 이윤을 그들끼리 나눠가지기에 최적화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구조는 다국적 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우라늄 채굴 과정에서부터 이미 전 세계적인 차원의 착취 시스템으로 구축되어 돌아가고 있다.  


우라늄 채굴 과정의 착취 구조에 관한 대표적인 사례로 니제르가 있다. 1960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니제르는 엄청난 우라늄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1968년 프랑스 국영업체 아레바가 니제르의 우라늄 광산 개발권을 획득한 이후 지금까지도, 프랑스는 우라늄 채굴을 통해 매년 200억 달러에 달하는 이윤을 챙겨가면서 니제르 주민들에게는 최악의 오염과 질병만을 떠안기고 있다. 숲은 사라지고 공기와 물은 방사능으로 오염되었으며, 니제르 아이들 4명 중 1명은 5세 전에 사망한다. 이렇게 최악의 생명 파괴의 대가로 나온 그나마의 광산 이익 분배금은 니제르의 부패한 소수 권력층에게 돌아갈 뿐이다. 아레바는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광산 노동자들에게 마스크 등 보호장비를 지급했으며, 수많은 광산 노동자들이 원인 모를 병이나 폐암으로 계속해서 죽어나가도 이를 무시하면서 도리어 자신들은 니제르에 막대한 개발자금과 일자리를 주고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또한, 우라늄 채굴의 막대한 이윤을 둘러싼 착취의 구조는 군사적 충돌로 이어진다. 2013년 1월에는 프랑스의 말리 군사개입으로 이슬람 무장 단체들이 잇따라 보복을 선언하자 프랑스 정부가 아레바의 니제르 현지 우라늄 광산을 보호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파견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으며5, 같은 해 5월에는 실제로 아레바의 우라늄 광산을 겨냥한 폭탄 테러가 발생해 13명의 노동자가 부상을 입기도 했다.6 국가 전력의 75%를 원전에 의존하고 있는 프랑스가자국 원전의 유지와 이윤 창출을 위해 이렇게 현지 지역민들과 노동자들의 위험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핵발전에 필요한 원천기술과 주요 부품, 핵연료, 원자로 등의 수출과 협력 관계는 모두 국제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와 긴밀하게 엮여 있다. 그리고 핵확산금지조약을 비롯한 핵과 관련된 각종 규제 조약들은 모두 겉으로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상 국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강대국들의 이익을 최적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군사적 긴장,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 관계들은 오히려 핵을 통한 국제적 이윤 창출과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필수요소이다. 애초에 미국과 구소련의 합의로 시작된 핵확산금지조약은 이미 핵무기를 충분히 보유하고 관련 기술을 통한 이윤 창출의 수단까지 모두 확보한 강대국들이 그들 간의 긴장을 해소하고 자신들만의 리그를 확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일 뿐, 실질적으로 미국과 구소련을 비롯한 핵보유국들은 핵군축에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되어 있더라도 전시에는 미국의 핵무기를 임대할 수 있으며, 일본의 경우 전시에는 1주일 만에 핵무장 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핵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이는 곧, 일본이 대외적으로는 ‘비핵화’를 내세우고 있지만 전시에는 얼마든지 단기간에 핵무장 체제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핵무기의 제작과 실험을 상시적 시스템으로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다. 

 

세계는 압도적인 자본력과 기술, 군사력을 지닌 소수의 권력 집단에 의해 다양한 형태의 착취가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가부장체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핵발전과 핵무기 개발은 근대 이후 이 시스템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발전과 저발전의 이분법적 가치 위계를 기반으로 강대국과 초국적 자본들은 경제 개발, 원조를 명분 삼아 주변부 국가의 지역 생태계와 주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핵산업에 연계된 각국의 권력집단과 기업들은 다시 자국의 저개발 지역 주민들, 하층 계급 노동자들을 지속적으로 착취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원과 생태계, 주변부 지역민들 및 노동자, 농민들은 착취의 대상, 즉 ‘개발이 필요’하고 그래서 ‘착취를 해도 되는 대상’으로서 끊임없이  타자화 되고 성별화/성애화 된다. 핵산업 시스템에서 군사주의는 이 연쇄고리를 지속하기 위한 핵심 요소이다. 이러한 가부장체제 핵 시스템의 한복판에 밀양이 있는 것이다. 

 

 

가부장체제의 가치 위계화를 넘어서는 밀양의 투쟁

 

 

한편, 한국 정부가 핵산업을 발전시켜 온 과정은 그 역사 자체가 오로지 발전만을 위해 핵의 위험과 경고를 거의 완전히 무시해 온 역사였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에서 원자로 용융 사고가 발생했던 1979년 이후 카터 대통령은 ‘앞으로 미국은 새로운 원전을 짓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한국은 1980년대에 고리 1호기를 가동하고, 월성 1호기, 고리 2, 3, 4호기, 영광 1,2호기를 동시에 건설했으며,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이후 전 세계적으로 원전 시장이 얼어붙었을 때에도 전두환 정부는 영광 원전 3, 4호기의 국제 입찰을 실시했다. 이후로도 울진 3-6호기, 영광 5, 6호기, 신고리 1, 2호기, 신월성 1, 2호기 등이 계속해서 지어졌다. 이 중 월성 1-4호기는 사용 후 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쉬운 중수로로 되어 있다. 그 기간 동안 해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고리원전의 방사성폐기물 무단투기 사건, 영광 원전 노동자들의 자녀들에게서 나타난 무뇌아, 대두아 사건이 발생하고, 수많은 원전 노동자들과 지역 주민들, 가축들의 질병이 보고되는 등 숱한 방사능 관련 사고들이 발생했지만 지금까지 어떤 정부도 이와 같은 사실들을 심각하게 다뤄오지 않았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2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2035년까지의 핵발전 설비용량 목표치를 43기가와트로 세웠다. 이는 현재 가동 중인 23기의 핵발전소 외에도 39~41기를 더 지을 수밖에 없는 목표이며, 이를 위해 삼척과 영덕에 신규 핵발전소를 짓겠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경우 청도와 밀양 뿐 아니라 강원도와 경상북도에까지 더 많은 765kV의 송전탑이 지어져야 한다.7


주민들은 고리 원전 1호기 건설 당시부터 원전뿐만 아니라 영덕, 안면도, 굴업도, 부안의 방폐장 건설 반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에 이르기까지 핵발전을 둘러싼 피눈물 나는 저항을 이어갔지만 정부의 대응 방식은 보상지원금 아니면 폭력 진압, 단 두 가지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 한 가지는, 부안에서 주민투표로 방폐장 건설을 저지한 이후 정부가 오히려 이 주민투표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방폐장을 유치하는 지역에 3천억 원의 특별지원금을 주고, 한수원 본사도 옮길 것이며, 중저준위 폐기물 드럼이 한 통 들어올 때마다 지방자치단체와 폐기물 관리사업자에게 63만 원씩의 반입 수수료를 주겠다’는 발표를 했다. 게다가 양성자가속기 사업을 신청하면 가속기를 주겠다는 약속까지 더했다. 그러자 노인 인구가 많고 인구수가 적어 지역 경제에 부담을 안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은 경쟁적으로 입찰에 나서고 주민투표를 독려했다. 이런 과정으로 결국 방폐장을 유치하게 된 경주의 사례는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민주주의가 얼마나 기만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이후 이런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주민들을 동원해서 제대로 된 정보도 알려주지 않고 주민투표를 하게하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이를 명분으로 삼게 된 것이다. 찬성-반대로 나뉘게 된 주민들 간의 갈등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밀양에는 이 모든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밀양이 송전선로 경유지로 선정된 것은 2001년이지만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신고리 원전-북경남변전소 765㎸ 송전선로 건설사업을 승인한 것은 2007년 11월이었다. 2001년은 신고리 3, 4호기의 종합설계 작업이 시작된 해이고, 2007년 11월은  두 핵발전소의 공사가 시작된 해이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2030년까지 전체 발전량에서 원자력 발전량이 차지하는 비율을 59%까지 높이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14기의 원전을 더 지어야 했다. 무엇보다 신고리 3, 4호기를 시작으로 향후 신고리 5, 6호기, 신울진 1-4호기를 모두 140만 킬로와트급 3세대 가압경수로인 APR-1400 으로 짓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2009년, 이명박 정부가 APR-1400을 가지고 UAE 원전 수주에 성공하자 밀양 송전탑 건설은 더욱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싸움 끝에 2012년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하시기 전까지 밀양 투쟁은 사실상 고립되어 있었고, 밀양 송전탑 건설과 신고리 3호기, UAE 원전 수주를 둘러싼 실체가 알려지기까지는 밀양 주민들의 외로운 싸움과 가슴 아픈 갈등, 숱한 죽음이 이어져야 했다. 


밀양은 지금 막무가내로 인권이 짓밟히는 공간이자, 이를 가능하게 하는 최악의 국가폭력이 용인되는 공간이며, 765kW 송전탑으로 인해 막대한 생태계 파괴가 예정된 공간이다. 그리고 이 모든 파괴의 중심에 핵발전을 둘러싼 한국 정부, 핵 산업 마피아들의 위험한 야망과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밀양에 가해지는 국가폭력은 사실상 이 모든 것들의 집합체이다. 


발 플럼우드는 이 글의 첫 장에서 언급했던 이분법적 가치 위계화의 특성을 이야기하면서 인간-비인간 뿐 아니라 인간 영역 안에서도 민족이나 지역 등이 착취의 대상으로서 타자화될 수 있는데, 이 때 이 타자화에는 두 가지의 왜곡된 관점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타자화의 대상이 자신과 다르다고 인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대상의 독립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 어떤 집단은 도덕적으로 고려될만한 엘리트 집단으로, 다른 집단은 그 집단을 위한 ‘단순한 자원’으로만 규정되고 윤리적으로도 고려될 필요가 전혀 없는 바깥-집단이 된다.8 밀양의 생태계와 주민들은, 말하자면 핵발전을 위한 가치 위계화의 이분법 속에서 이러한 ‘바깥-집단’이 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밀양의 주민들이 이 위계화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밀양의 주민들은 ‘정부 보상으로 주어지는 지역사회의 경제적 이익’이나 개인적 보상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갈 권리’를 택함으로써, 핵발전이나 송전탑이 아닌 자신들의 몸과 함께 부딪히며 살아온 그곳의 땅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선택함으로써, 개발에만 일방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이분법을 스스로 넘어선 것이다. 가부장체제 하의 전 세계에서 강대국이 주변부 국가들에게, 중앙 정부가 지역민들에게 숱하게 명분으로 들이밀며 강요하고 있는 ‘개발’과 ‘발전’의 착취 고리를 밀양 주민들이 끊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밀양의 주민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고, 그 이분법을 함께 넘어서기 위한 싸움을 함께 제안해 주었다. 하기에, 만약 송전탑 건설을 완전히 저지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밀양의 투쟁은 앞으로 곳곳에서 새로운 실천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밀양 투쟁이 보여준 가장 큰 가치이다. 

 

 

밀양의 투쟁을 이어가기 위하여

 

 

밀양 주민들, 특히 할매들의 투쟁은 히말라야 산의 대규모 벌목에 저항해 나무를 껴안고 저항했던 인도 여성들의 칩코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평야 또는 외지로 일을 하러 나간 남성들 대신 숲에서 다양한 먹거리를 구하며 삶을 의지해가던 여성들, 외지에서 폭력과 차별에 시달리다 홀로 도망쳐 온 여성들은 어떠한 전문 지식도 없고, 글조차 읽을 줄 몰랐지만 숲의 가치를 돈으로만 환산하는 정부와 자본에 맞서, 자신들의 삶이 공존하는 공간으로서의 숲을 지키고자 싸웠다. 핵물리학을 전공하다 에코페미니스트로서 적극적인 생태 운동가가 된 반다나 시바는 이 칩코 투쟁을 자기 생의 전환점으로 소개한다.  


밀양의 산 속에서 할매들이 경찰과 한전 직원들 앞에서 옷을 벗고 맞섰을 때, 그것은 단지 몇 명의 늙은 주민의 몸이 아니라 함께 그 삶을 만들어 온 그곳의 땅과 자연의 몸이었을 것이다. 밀양의 할매들은 국가와 자본의 가부장적 폭력에 의해 마구잡이로 짓밟히고 파헤쳐지는 땅을 지키면서, 동시에 가부장적 관계에서 끊임없이 짓밟히고 대상화, 타자화 되어왔던 자신의 삶을 함께 실어 투쟁했다. 비단 할매들 뿐만이 아니다. 살아온 역사는 다를지라도 이치우 어르신을 비롯해 극단의 싸움 끝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신 주민 분들 역시, 그 땅과 함께 '짓밟아도 되는 자원'으로 타자화 된 자신들의 몸을 통해 이 잔인한 세계를 고발하셨던 것이다. 


이 거대한 체제에 맞서 우리의 대안을 만들어가는 일은 역시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밀양 투쟁의 의미를 되새기며 함께 이어나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늘 익숙하게 받아들여 왔던 인간과 비인간/자연, 남성과 여성, 개발과 미개발, 발전과 미발전, 지식/기술과 몸/자연, 생산과 재생산의 이분법적 가치 구분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새롭게 찾고 착취가 아닌 자립의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립의 네트워크가 지역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지구지역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단지 일상을 새롭게 하는 일만으로는 구축되지 않는다. 핵발전의 지구적 착취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노동과 생산, 자연과 성적 위계화의 경계를 넘어 오로지 생산성과 발전만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나의 노동은 어떠한 착취와 연결되어 있는지, 자신의 노동과 삶이 이 이분법적 위계들 아래에서 누구에 대한, 무엇에 대한 착취 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서로를 연결하는 투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밀양의 투쟁은 이제 이렇게 우리의 몫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글은 아래의 자료들을 참고, 인용하여 작성되었습니다

 

고정갑희, ‘가부장체제와 적녹보라 패러다임’,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섹슈얼리티>,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그레타 가드(번역:영), ‘퀴어 에코페미니즘을 향하여’,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섹슈얼리티>,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마리아 미즈 저/최재인 역,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갈무리
박혜영, ‘생태 파괴 시대의 페미니즘’, <페미니즘 차이와 사이>, 문학동네
고이데 히로아키, <은폐된 원자력 핵의 진실>, 녹색평론사
<후쿠시마에서 살아간다>, 땡땡책 협동조합
이정훈, <한국의 핵주권>, 글마당
발 플럼우드, '생태여성주의 분석과 생태적 부정의 문화', 한국생명학연구원 자료실
Ariel Salleh, 'Fukushima-A call for women's leadership', The New Significance, Nov.1st, 2011
<Strategy Against Nuclear Power>, Friends of Earth (Canberra), Jan. 1984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 1 마리아 미즈 저/최재인 역,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갈무리텍스트로 돌아가기
  2. 그레타 가드(번역:영), ‘퀴어 에코페미니즘을 향하여’,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섹슈얼리티>,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텍스트로 돌아가기
  3. 고정갑희, ‘가부장체제와 적녹보라 패러다임’,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섹슈얼리티>,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텍스트로 돌아가기
  4. 이 부분의 내용은 고이데 히로아키의 <은폐된 원자력 핵의 진실>, 이정훈의 <한국의 핵주권>, Friends of Earth(Canberra)의 <Strategy Against Nuclear Power>에서 많은 부분을 참고, 인용하여 정리하였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5. 연합뉴스, “프랑스 ‘니제르 우라늄 보호’ 특수부대 파견”, 2013.1.25텍스트로 돌아가기
  6. 연합뉴스, “니제르서 프랑스 기업 운영 광산 등 연쇄 폭탄테러”, 2013.5.23 텍스트로 돌아가기
  7. 이유진, '박근혜 정부의 2차 에너지기본계획 비판‘, <후쿠시마에서 살아간다>, 땡땡땡 협동조합텍스트로 돌아가기
  8. 발 플럼우드, '생태여성주의 분석과 생태적 부정의 문화', 한국생명학연구원 자료실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