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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차별의 정치, 젠더는 없다 : 정의당 사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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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

글로컬포인트기획편집팀

 

* pdf 파일 다운받기 [10. 칼럼 - 채영정치.pdf (232.70 KB) 다운받기]

 

한국은 통계상으로도 성차별이 심각하고, 성범죄 발생률도 높은 국가이지만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는 성평등 담론은 ‘역차별론’이다. 역차별론이란, 이미 한국사회가 성평등을 이뤘기 때문에 여성을 위한 그 어떠한 적극적 조치나 생활 속의 배려가 오히려 남성에게 역차별을 일으킨다는 주장이다. 역차별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양성평등’ 연대와 ‘여성주의 없는 성평등주의’가 진정한 성평등을 위한 일이라고 믿는다.

 

1. 차별은 없다, 오로지 역차별만 있을 뿐


객관적 지표에서 성차별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나고, 이에 대해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통용되는 담론이 ‘역차별론’인 것 자체가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준다. 이미 성차가 드러나는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그건 젠더문제가 아니다”며 덮고, 문제제기 자체를 낙인찍어버리는 방식은 일상적이다. 이들이 얼마나 뻔뻔한가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는 이들의 담론, 즉 ‘역차별론’이 진리에 등극하고 그에 따른 정책이 실체화된다는 것이다. 김종인 의원은 “지식을 전제로 한 직업의 경우, 오히려 남성이 차별받는 시대가 오지 않았나. 우리 여성분들이 조급하다”고 말했다. 정의당 김종대 의원은, 당선 전 한겨레 피티쇼에서 “제가 외람되게도 정당에 입당한지 6개월밖에 안됐습니다만, 최다득표로 1위를 했습니다. 남자기 때문에 2번을 한 역차별도 받았죠.”라고 발언했다.


김종대 의원이 역차별을 입었다고 주장한 제도는 비례대표에서의 여성할당제로, 홀수 번호에 여성 후보자를 지명하도록 선거법에 규정되어 있는 제도이다. (이를 어겼을 시 벌칙조항이 없어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에 의한 위반이 있었다.) 이는 베이징 세계여성대회에서 유엔 189개 회원국 대표들이 채택한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베이징 선언과 행동강령을 이행하기 위한 노력으로 정치 영역에서 여성 대표성을 진작시키기 위해 도입되었다. 여성할당제와 여성의원들의 활약으로 국회에서의 여성 의원의 수는 20대 총선에서 역대 최다로 51명이 되었다. 나머지 249명은 여전히 남성이지만. 정당이 마련한 명부에 투표하는 것이 ‘직접선거’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헌재 판결에 기반하여 생각해볼 때, 정당 명부에서의 여성 홀수번호 할당은 여성 대표성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라고 봐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여성 의원들이 지역구에서 예년보다 약진한 것을 두고 ‘여풍’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실상 300명 중 17%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차별’이라는 명명은 문제적이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의원이 말한 ‘지식을 전제로 한 직업’이란 사실 전반적인 ‘전문직’이 아니라 공무원 시험을 통해 선발되는 공무원의 비율만을 말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험을 막 통과한 낮은 직급의 공무원에서의 성비를 말한 것이었다. 고위직 공무원의 여성비율은 5%도 되지 않으니까. 어느 한 영역이라도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높고, 남성의 자존심이 꺾이면 정치적으로 큰일이지만 여성의 경우 자신의 커리어가 어떻든 독박육아를 강요당한다.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은 “어린이집 아동학대 배경에 무상보육 있어”, “절대적으로 엄마 품이 필요한 0~2세 아이들조차 2/3가 보육시설에 가 있다”며 정치가 해결해야 할 보육의 공공성 문제를 전적으로 여성 개인에게 전가시켰다. 여성이 노동의 영역에 투입된 양차 세계대전 이래로 실업율이 높아지면 항상 여성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정책이 시행되어 왔다. 여성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어린이집 등 영유아 보육시설을 만들면서 싼값에 비정규직 여성 노동을 취하던 사회가 이제는 여성들에게 ‘모성’을 이유로 직장 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이를 ‘젠더 혹은 여성 구조조정’으로 불러도 좋지 않을까.
이들에게 차별은 없다. 오로지 역차별만 있다. 

 

2. 정의당 사태 : 탈정치화되는 젠더 의제 _ 젠더는 없다.


헬조선에서 여성청년이든 남성청년이든 결혼은 경제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고, 여성에게는 가사·육아의 독백트랙과 남편폭력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 또 ‘길거리 괴롭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선강간과 대중교통에서의 성추행부터 직장 내 성폭력, 가정 내 성폭력 등 여성은 이 사회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데에 온갖 에너지를 다 써야 한다. 게다가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는 오히려 ‘꽃뱀’ 누명을 쓰는 일이 허다하고, 자신의 일상적 피해를 이 지옥 같은 삶과 협상하기 위해 여성들은 스스로의 멘탈을 갉아먹어야 한다. 여성(청년)들이 이 같은 문제로 자신들의 꿈을 잃고 있다는 것을 사회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남성들의 삶에서도 고민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에서는 이들의 고통 역시 가부장제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거기가 연대와 대화의 틈일텐데, 한국 사회는 여성의 삶이 어떤지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몰이해하고 나아가 남성 삶의 고통의 원인 혹은 위로를 여성의 몫으로 돌린다. ‘여성들이 차별받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과는 대화가 불가능한 이유다. 
놀랍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한국 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 같은 공감대가 널리 퍼지고 있다.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기 시작했고, 사회의 문제적 의식에 저항하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사실 매일매일 뉴스로 접하던 여성살해 사건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사건 전에도, 사건 후에도 한국 사회의 흉악범죄의 90%는 여성을 대상으로 일어났고, 평소처럼 언론은 피해자에게 00녀 프레임을 씌워 기사를 썼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이 문제를 여성혐오의 문제로 공감했고, 사회가 여성혐오 범죄를 바라보는 시각에 문제제기했다. 아직 확실히 제정된 법안은 없지만 국회 내에서 여성살해 문제가 논의될 정도로 정치적으로도 공론화가 시작되고 있다.

 

이렇게나 전반적인 공감대를 가지고 여성들 스스로가 여성혐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그만큼이나 전반적으로 여성혐오가 심하고, 여성들의 삶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여성 청년들에게 자신들의 꿈을 잃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들이 너무도 가혹하기 때문이다. 한편 ‘청년들에게 잔인한 국가’라는 담론은 헬조선/흙수저 담론이 유행하면서부터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 참정권 운동이 “시민에/투표권자에 여성이 있는가?”라는-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물음으로 역설을 일으켰듯 헬조선에서 고통받는 흙수저 청년들에 여성은 없었다는 것이 정의당 사태들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여성청년의 한 명으로서 한국에서 청년으로서 겪는 고통을 똑같이 겪고 있다. 고용불안, 삶의 불안정, 불확실하고 더 어둡기만 할 미래 등등이 나에게도 똑같이 해당될 것인데, 중식이 밴드 사태에서 드러난 ‘헬조선에서 흙수저 청년들의 애환’은 ‘성형만 생각하는 김치녀들에게 등쳐먹힐 피해를 걱정하는 (남성)청년들의 애환’이었다. 중식이 밴드의 가사들을 보면서 너무나도 화가 났지만 무엇보다 나의 이 분노를 탈정치적인 것으로 탈각시키고 “페미니스트 정당 아니니 나가라”는 태도가 더욱 분노스러웠다.
청년을 위한 정치도 거의 없지만, 평소 청년들의 정치를 표방하는 정의당에서도 여성청년을 위한 정치는 없었다.

 

3. 중식이 밴드 사태 : 여성청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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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은 중식이 밴드와 콜라보를 발표하면서, ‘헬조선에 살아가는 흙수저 밴드’라며 콜라보 이유를 밝혔다. 정의당이 평소에 집중하는 청년과 노동 담론에 걸맞는 콜라보라고, 헬조선인 이 국가에 청년을 주체로 세워주다니 진보정당이 할 법한 일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문제는 중식이 밴드가 그 동안 ‘창작’해 온 노래의 가사들이 매우 여성혐오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밴드의 노래가사들은 몰카, 김치녀, 성형하는 여성들에 대한 희화화 등 전형적인 여성혐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몰카는 범죄다.)  
놀랍게도 정의당은 이 밴드의 가사를 헬조선에 살아가는 청년들의 애환이라고 읽었다. 이 관점이 매우 문제적인 것은, 첫째로 헬조선에서 고통받는 청년이 남성청년으로 상정되었고, 둘째로 고통 받는 청년범주에 여성청년은 지워지고 오로지 ‘이기적 김치녀’로 여성들이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 흙수저남들이 개인적으로 이런 노래가사를 쓰는 것은 소비자로서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정의당의 사태 이전에는 이 밴드의 존재도 몰랐고, 쇼미더머니 가면 이런 가수들 더 많다.) 그러나 한 정당이 택하는 전략들은 그 하나하나가 정당의 관점을 보여주며, 선거 국면에서 그것은 특히나 더 정치적이다. 그들이 유권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택한 당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정의당이 보여준 태도는, 그들이 어떤 유권자를 의식하고 있는지와 그들 스스로의 젠더감수성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역시 일관성 있었다. ‘’정의당을 여혐정당으로, 중식이 밴드를 여혐밴드로 낙인찍느냐‘의 문제설정은 사실 중요하지도 않고 관점도 틀렸다. “낙인찍지 마시라”에 담긴 의미가 사태모면에 불과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여성혐오 논란에 대한 담론을 테이블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가장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이었다. 여성혐오 논란을 순전히 스캔들로 치부하는 것은 누구인가? 여성혐오 논란을 제기하는 유권자들인가, 그 논란을 모면하려는 정당인가? 논의 자체를 테이블 밖으로 밀어내고, 사실상 이 논의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식의 제스처가 정의당의 태도다. 

 

청년문제에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고,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중요시하는 정의당의 모습을 진보적 유권자로서 응원해왔다. 일회성의 정치적 이벤트로 청년비례후보를 내세우는 양당과 달리 당이 청년 후보를 지원하려는 실질적 정책을 마련하고, 이들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정의당이라는 토양이 청년 당사자로서 매력적이었고, 좋았다. 그런데 그 청년들의 목소리가 온통 남성청년들의 목소리고, 단지 수적대표성을 넘어서 이들의 목소리가 여성청년들의 고통을 온통 지워내고 모욕하는 방식이라면....
이런 문제제기들을 ‘당을 음해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으로 읽으며, ‘남성청년들의 삶을 모욕’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그들의 태도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읽을 수 있다. 그들에게 여성청년의 삶은 정치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 계급과 달리 젠더는, ‘괜한 문제로 저 여성들이 떼를 쓰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 감정싸움의 문제일 뿐이다.

 

한국에서 청년담론은 사실상 만들어져 가고 있는 단계이다. 아직 청년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주류도 아니고, 또 한국의 청년담론이 세대와 계급을 교차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태를 기점으로 젠더 역시 중요하게 고려될 수 있겠다.) 기득권자들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정체성과 주체성의 문제를 매번 정치적 소수자들은 고민해야 하는데, 청년 정체성 설정의 문제 역시 고민스럽다. 

 

여성청년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우선 청년담론에 여성이 없다는 것이 무섭다. 온갖 사회문제의 기본값이 남성인 것도 서럽고, 여성들의 발화를 맨즈플레인으로 막아버리는 작태에 분노하고, 언젠가 성폭력을 당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다. 청년실업시대에 내가 나중에 나 하나라도 먹여살릴 수 있을지 염려가 되고, 부모님에게 연금은 잘 나올지 걱정이 되고, 내가 대학 들어오면서 깨버린 보험들 때문에 나중에 아프면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지도 무섭다. 대학원에 갈까 싶은데, 내가 계속 공부를 할 만큼 똑똑한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정치외교학과가 남초에 마초적인 분위기를 가졌다고 해서 겁도 난다. 부부강간도 싫고, 독박육아도 싫어서 애초에 결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고민도 한다. ‘내 아이’를 갖는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한데,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이 또 얼마나 엄청난 무게인가, 경기도 안 좋은데 포기하자 싶고. 결혼이라는 제도는 싫은데, 파트너쉽 제도 같은 것도 없고, 반려동물과 같이 살까 고민 중인데 동물권도 잘 보장이 안 된 사회라 나중에 더 마음 아플까봐 미리 걱정도 한다. 

 

4. 당원 비대위의 당원민주주의 : ‘진정한 페미니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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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를 둘러싸고 더 큰 논란이 일어났다. 실제로 탈당한 당원 수도 꽤 많다. 당을 나간 것이 반페미니스트일지, 페미니스트일지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이번 사태는 많은 고민과 과제들을 남겨준다. 몇 가지 짚어야 할 포인트들도 있다. 첫 번째 흥미로운 포인트는 중식이밴드 사태에서 ‘페미니스트 정당 아니’라고 주장하던 이들이 ‘진정한 페미니즘’을 운운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두 번째 흥미로운 포인트는 이들 중 몇몇이 진지하게 당비반납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오유 유저 중 누군가는 ‘둠스데이급’이 될 거라며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부디 좋은 답장을 받으셨길 바라지만, 여하튼 새누리당은 아무런 공식입장이 없다. 탈당협박과 당비반납 요구, 새누리당 메일링 등은 이들이 구축하는 남성연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남성비하하면 탈당하고 새누리당 갈 거다/절독할거다”의 사고방식은, 이들이 평소 진보정당에 기대하는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어 준다. 물론 민주주의+다당제 사회에서 유권자나 당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당은 그들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런 와중에 고민하고 분투하고 있는 주위 페미니스트 정의당원들을 보면서 이들의 노력과 전략을 응원하고, 꼭 성공하길 바란다.

 

시사인은 ‘분노한 남자들’_‘정의의 파수꾼들?’에서 나무위키의 의미망 분석을 통해 이들의 분노가 사실상 ‘성기 크기에 대한 비하’에서 촉발된 것이며 대부분의 담론이 그 때 완성된 것이라는 것을 밝혔다. 아이즈의 나무위키에 관련된 기사를 살펴봐도 알 수 있는데, 나무위키는 이미 메르스갤러리가 나타나고 아직 게이혐오, 워마드 등의 논란이 일어나기 전인 2015년 8월~2015년 11월 사이에 이미 메갈리아에 대한 판단을 내렸다. 그 공간에서 메갈은 이미 낙인찍힌 상태인 것이다. 이 분석에 따르면 이들이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논거인 게이혐오, 장애인 혐오 등의 논거는 논리적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들의 판단(혹은 심판)이 그러한 논거에 의해 내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의 논리가 대부분 나무위키류의 판단에 근거하고 있을지라도 어쨌든 확신하고 있다. 트위터, 인스타, 페북 등등의 논란에서 이들은 끊임없이 메갈이 혐오세력임을 소문내고 있다. 메갈리아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이들의 확신은 얼마나 공고한지 정의당의 일부 평당원들은 당원 비대위의 이름으로 몇 개의 현수막을 걸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혐오 널! 용서하지 않겠다!”, “정의여, 혐오여? 뭐시 중헌디? 뭐시 중허냐고!” 등 시사인이 ‘정의의 파수꾼들?’이라고 꼬집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의당의 몇몇 평당원들이 이토록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 정의당에서는 ‘당원민주주의를 실시하는 평당원들(당원 비대위)’과 ‘여성주의 운운하며 당원들과 불통하는 정당지도부’의 대결구도가 당게시판에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민주주의의 화신으로서 정의당을 구원하려고 한다. 
나무위키가 다중지성의 힘으로 메갈리아를 낙인찍는 데에 성공했다고 자축하는 것처럼, 정의당의 당원민주주의도 다른 목소리를 없애는 데에 성공한 듯 보인다. 인터넷 게시판이라는 곳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대결구도 설정은 숙의와 토론을 거친 것이라기보다 같은 논리의 반복으로 “우리는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있어”라며 똘똘 뭉친 세력에 가깝다. 그러나 인터넷 게시판들 자체가 남성중심적인 공간임을 고려한다면, 비단 인터넷 게시판들 뿐 아니라 많은 공간들에서 여성들은 침묵당해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의당게 식의 당원민주주의는 다시 생각되어야 한다. 

 

이들이 어떤 지점에 열이 받았든, 이들이 메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납득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저들에게는 빈곤청년의 문제가 더 중요할 수 있고 메갈리아는 애초에 여성문제를 의제로 가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몇몇 발화들이 혐오를 촉발시켰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 남성혐오는 없다.) 나 역시 메갈리안/메갈리아의 지지자 중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 퀴어로서, 빈곤한 청년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지점들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혐오가 없다고 선언하거나, 반대로 스스로가 남성혐오의 피해자들이라고 나서는 모습을 보면 저들과 나는 같은 논의 테이블에 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들을 정의의 사도로 임명하고 저 혐오세력을 척결해야겠노라고 주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저것이 바로 감히 보편을 상정할 수 있는 나르시시즘적 남성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상정 대표가 정의당은 여성주의 정당이라고 밝혔지만 당원 비대위원들은 강령에는 ‘성평등주의’만이 거론되고 있다며 “정의당은 성평등주의 정당입니다. 남성을 버리지 말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사실상 이들이 성평등주의라는 수사 이외에 그 안에 여성주의적 내용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성평등주의든 여성주의든 그 태도를 약속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앞으로 당이 젠더문제를 주효하게 고민하겠다는 선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당게에서 몇몇 당원들은 계속해서 일련의 사태들이 젠더문제가 아니며, 젠더문제로 다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사태들은 젠더문제로 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으며 애초에 그들이 답해야 할 것으로 제기된 질문들은 젠더였다. 중식이밴드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남아있는 질문은 ‘당신들의 진보주의에 여성들의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가-있다면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이다. 메갈리아로 인해 촉발된 사건들, 혹은 게시물들 중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혐오 현상을 사회적 문제로 이슈화시켜 많은 여성들의 생각을 변화시킨 메갈리아의 맥락을 무시하는 것은 결국 젠더문제를 회피하는 결론이 된다.  


정의당 뿐 아니라 많은 곳들이 이 질문을 받고 있다. 시사인은 예상한 최대 수치의 절독을 경험했고, 정의당 역시 600여명의 당원들의 탈당을 경험해야 했다. 한국 사회에서의 페미니즘이 얼마나 그 기반이 약했는지를 확인하며 절망했다가도 한편, 이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어찌되었건 앞으로도 진보의 의미는 젠더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질문 받게 될 것이다. 이미 많은 여성들은 자기 삶의 고통을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발화하기 시작했고, 그를 바탕으로 관계를 재정의하기 시작한 그 당사자 여성들은 (그 과정이 스스로에게도 힘든 것임을 알면서도) 그 고통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젠더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GP 

 

p.s.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생물학적 구분(sex)로 보이는 ‘여성’을 호명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페미니즘의 오랜 고민처럼 매우 혼용된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떨 땐 페미니스트일수도 있고, 사회가 여성으로 인식해서 관습이나 성폭력 등에 의해 ‘여성화’시키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어쩌면 ‘타자’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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