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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0:5

3회 1:9

4회 1:10

6회 3:10 결국 3대 10으로 게임 종료

... 6월 15일 해태와 LG의 경기 결과다...

아마야구에서는 5회 10점 이상, 7회 7점 이상 점수 차이가 나면 콜드게임으로 쫑치는거다.

우째... 이렇게 깨질수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부활이다.

최근 해태 타이거즈, 날마다 깨지고 또 깨지고,,,

 

요즘 해태쪽 관중석에 있으면

안타를 맞아도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고,

홈런을 맞아도 꽃가루를 뿌린다.

이 상태가 조금만 더 가면, 아주 철조망에 매달릴 태세다.

그러다 폭동이 일어나는거쥐 모~ ㅋㅋ

 

1할대 타율을 꾸준히 유지하는 이종범 보기도 안스럽고,,,

메이저리그 언저리 기웃거리다 왔다는 권윤민 알까는 거 보기도 한심하다.... 쩝...

8개 팀 가운데 8등.

 

해태도 잘 나가던 때가 있었는디~

팀이 기아 타이거즈로 바뀐 뒤에도,

우리는 홈런볼 껍데기를 마빡에 붙이고,

맛동산 껍데기를 위아래로 흔들어대며

'해태!' '해태!' '해태!'를 연호했다.

게임 안풀리면 "김봉연 나오라고 해!" "야! 김성한 어딨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제도 머나먼 잠실까지 달려가

소주 까가며, 닭튀김 먹어가며 소리소리 질렀건만,,,

10대3이 모야...

 

우쒸~

소설가 박민규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소설에서

"1할2푼5리의 승률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라고 썼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후기리그 승률이다. 1할2푼5리... 5승 35패.

 

현재, 해태 승률은 4할1푼4리... 우야믄 좋노~

 

바로 지금. 갈등중이다.

잠실로 달려갈 것인가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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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6 14:09 2007/06/16 14:09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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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가 뒤틀린다

2007/06/11 12:12

6.10항쟁 20주년, 곳곳에서 기념질이 넘쳐났다.

왜 우리에게 진정한 6.10항쟁을 되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는가.

공무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고 2천명 넘게 징계를 하고 4백명 넘게 해고한 노무현은

바로 그 때문에 13일째 지도부가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공무원노조 농성장 바로 옆,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식을 뻑적지근하게 했다.

일요일 내내 공중파에서는6.10항쟁 기념방송이 넘쳐났다.

유명짜 하는 인사들이 너도나도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고,

나 20년전 명동에 있었노라고, 나도 그때 데모했었노라고, 그 항쟁 덕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민주화되었노라고,

한마디씩 한다.

물론 그들이 전부 ‘가짜’라고 몰아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사가 뒤틀리는걸까.

설마, 6월 뒤에 잇따라 올 7, 8, 9 노동자대투쟁 마저

저 변절자들이 멋대로 기념하는 것은 아니겠지. 제발 그러지 말기를...

집권세력의 '덕목'이 되어버린 6월항쟁 뒤켠으로

노동자들의 7, 8, 9 대투쟁이 그림자처럼 묻혀버리는 것도 기가 찰 노릇이지만,

제발... 저 변절자들이 가슴아리게 소중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념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그들의 입으로 '그래서 이제 노동자들이 살만하게 됐다'고 씨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6.29선언으로 너무 민주화돼서,

래서 그 민주정권은 노동자들의 7,8,9대투쟁을 그렇게 핍박했을까.

그래서 지네들이 쏜 최루탄에 맞아 죽은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열사 장례식에 미친 개처럼 치고들어와

노동자들을 933명씩이나 잡아가고, 67명이나 구속했을까.

그래서 현대중공업, 대우자동차 공장안에 그 이름도 옛스러운 '백골단'을 집어넣어,

노동자들을 그렇게 패고 잡아갔던 것이냔 말이다.


그 노태우보다 김영삼은 나았을까, 김대중은? 노무현은 지금 어떤가?

왜 모두들 민주화됐다고 말하는가?


결정판은 바로 오늘 박근혜의 대통령출마 선언이었다.

공교롭게 6.10 바로 뒷날인 6월11일에 대통령후보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박근혜는 이렇게 말하더라.

박근혜는 “철들기 시작할 무렵, 밥상에서 가난한 국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목이 메어 밥을 넘기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평생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시다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의 삶을 대신하여,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며 살았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박근혜는 “저는 아버지께서 못 다한 두 가지를 꼭 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대한민국의 선진화이며, 또 하나는 그 시절 고통을 받았던 분들에게 보답하는 것입니다. 제 아버지 시대에 불행한 일로 희생과 고초를 겪으신 분들과 그 가족 분들에게 저는 항상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이 분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은 민주주의를 더욱 꽃피우고 나라를 잘 살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아! 정말 미쳐버리겠다....


느닷없이 등장한 칠일군바리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돌고 돌아, 다시 박근혜란다...

그 박근혜가 아버지가 못다한 일을 하고자 나선단다.

그럼 우린 다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의 후손들을 길이길이 대통령으로 두어야 하는가.

도대체, 얼마나 더 민주화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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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1 12:12 2007/06/11 12:12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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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2007/06/09 12:43

아주 사소한 건망증.

물리적 육체적으로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매우 강력한 상처를 준다.

아~ 난 왜 이 모냥일꼬... 라는 자기비하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망원동 집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택시 요금이 2천5백원으로 딸깍 올라갈 즈음,

핸드폰을 안가지고 나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택시를 돌려 집에가서 핸드폰을 갖고 나왔다...

 

오늘아침, 망원동 집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택시 요금이 2천원으로 딸깍 올라갈 즈음,

가방을 뒤져보니 핸드폰이 없다.

다시 택시를 돌려 집 앞에 내려, 계단을 올라가다가

입고있는 옷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을 발견했다.

다시 내려와 택시를 탔다.

 

일상적인 건망증 증세들...

안경쓰고 세수하다 콧잔등에 상처내기

안경쓰고 안경찾기

버스타고 가다가 어디 가는 중인지 잊어버려서 버스 내리기

운전하고 가다가 내가 뭐하고 있는 중인지 아무 생각이 안나서, 나가야 할 인터체인지 지나치기

과속 단속중이라고 GPS가 계속 "속도를 줄이세요"라고 떠드는데, 소리가 끝나면 잊어먹고 사진찍히기

전화걸다가 누구한테 걸고 있는지 잊어서 전화끊어버리기

누군가 받았는데 왜 했는지 잊어버리기

내 전화번호 까먹기

기타 등등....

 

사람들은 대개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구나 다 그래~"라고 위로한다.

그러나 위로가 안된다.

내 뇌세포가 몇개나 남아있는걸까 궁금해질 뿐.

다만 내가 저질렀던 '까먹기' 증상들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이런 생각을 하며 또 뇌세포 네개정도 죽인 것 같다.

내 주먹으로 내 머리를 톡톡(또는 쿵쿵) 강타함으로써...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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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9 12:43 2007/06/09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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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

2007/06/05 12:06

우울하고 짜증나고 만사가 귀찮다가,,,,

술병 앞에 앉는다.

갑자기 기분이 up된다.

마구마구 들이킨다.

원샷! 원샷! 잔 건네고 원샷! 다시 잔 받아서 원샷!!!

정신 가물가물해진다.

사람들과 휩쓸려 2차, 3차....

 

정신 차려보면 다음날 아침.

목이 마르다.

주변을 둘러본다.

집이다.

찬물을 들이킨다.

핸드폰과 지갑 등등이 제대로 있는지 살펴본다.

차마, 내가 어찌 들어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핸드폰의 통화내역과 보낸문자, 받은문자 따위를 훑어본다.

모르는 번호까지 통화내역에 동지들 이름이 주루룩 떠 있지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른다.

 

주변이 시끄러워진다.

잠도 안오고, 생뚱맞게 일찍 출근한다.

일하기 싫다.

담배를 끊어버릴까도 생각한다.

술을 왜 마셨을꼬... 후회한다.

1시간쯤 지난 뒤,

술이 점점 깨며,

담배를 문다.

다시 우울하고 짜증나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러/다 술병 앞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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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5 12:06 2007/06/05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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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빌딩

2007/06/01 11:27

참 주책이다.

아직도 대영빌딩 들어서는 일이 어렵다.

지난 30일, 대영빌딩에서 토론회가 있었다.

건물 안에 발을 디디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가슴이 뛰고, 어색하고,,, 무슨 도둑질하러 들어가는듯한....

 

그냥, 내가 예전에 다니던 사무실일 뿐인데,

다 그렇게 다니다 그만두고, 또 다닐 수도 있고, 안 다닐 수도 있고 그런데...

난 왜 그렇게 주책스럽게 대영빌딩만 보면 가슴이 떨리고 아픈지...

'민주노총'이라 표현하는 것조차 어찌나 아린지...

 

부정하고 싶지만,

난 정말, 그곳에 있고싶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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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1 11:27 2007/06/0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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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이다.

이번달에 술을 딱 다섯번 마셨다.

 

5월3일 안양.

5월9일 서울.

5월13일 대전.

5월22일 파주.

5월30일 파주.

 

와우~ 만 18세부터 술 먹기 시작해서,

주5회 이상 음주질로 점철된 나의 삶...

 

그러나, 2007년 5월! 딱 다섯번!

월 5회 음주는 최초의 기록이다!

역사에 길이 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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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31 19:08 2007/05/31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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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결혼식

2007/05/28 12:29

드디어, 언니가 결혼했다.

준비과정은 짧고 복잡했다.

아무튼 40줄 안팎의 3형제 가운데, 맨 꼭대기를 점하고 있던 41세인 그녀의 결혼은

가족으로 볼때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첫째, 자식새끼 셋이 다 마흔줄인데 시집장가 못갔다는 멍에를 둘러쓰고

자괴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부모님한테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드디어 우리 부모님도 어디가서 '사위'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가져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역시 부모님 입장에서 볼때인데

공직생활을 거치고, 퇴임 이후에 이르기까지 그 무수한 경조사를 챙겨오신 부모님들에게

비록 한 차례일지라도 수금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셋째, 아주 이기적인 나의 입장에서 볼때,

부모님은 종종, "언니만 시집가면, 너야 뭐~ 너 하고싶은대로 하고 혼자 살아도 나쁠 건 없겠다"라는

뜻을 간간히 표명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언니 혼례식에서 만난 친척 어르신들의 멘트는 정반대였지만... "이젠 니 차례구낫!(강경하게)"

 

* 한가지 짚고 넘어갈 대목

- 어른들은 늘 우리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이유로 드는 것이 "효도"다.

아니, 세상에... 반평생을 함께 살아갈 사람과 정신적 육체적 법적으로 결합하는 중차대한 '결혼'을

효도하기 위해 하라니... 이게 무신 얼토당토않은 개 풀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바뜨, 비/유/티...

꼭 활영할만한 일은 아니다.

부정적 의미를 찾아본다면야 수천 수만가지겠지만,

그래도 울 언닌데, 결혼식 뒷날 그 결혼의 부정적 의미를

내가 구구절절 찾아 무엇하랴... 흐흠...

 

다만, 난 언니 결혼식때 우아하게 앉아 축하하면 될 것이라 상상해왔지만

현실은... 심부름과 기사노릇으로 점철된 매우 피곤한 하루였다는 것...

아무든 일가친척 다 모이는 잔칫날은 가장 경계해야 할 날이다.

겨우겨우 유지해온 평상심을 단 한 순간에 날려버릴 위험이 가장 높은 날.

밥 한 끼 먹는 데 이토록 불합리한 모든 상황이 압축돼 치러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성차별과 여성착취(여성학대가 차라리 맞는 표현일 것이다)의 절정!!!

(심지어 같은 여성일지라도 직계인지 방계인지에 따라서 노동량이 달라진다는 사실~ )

 

분명한 것은,

언니 역시, 이후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는 것...

그 댓가로 얼마나 큰 '행복'이 주어질 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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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8 12:29 2007/05/28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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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2007/05/17 11:32

불면의 나날을 보내다,

간만에 스르르 잠이 오려는 새벽에

난 어쩌다 이 책을 펼쳐버렸던가...

 

내가 이제껏 살아오며,

무슨 일 하세요? 라는 질문에 감히 '노동운동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왔던 것이

사무치도록 부끄럽게 만드는 글들...

 

사실, 김진숙동지의 말빨과 글빨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그리고, 게 중에는 내가 직접 들었던 연설문도 실려있는 걸 알고 있었던 터라,

(2003년 10월22일 부산역광장에서 열린 '노동탄압 규탄 전국대회'/김주익열사 장례식에서 김진숙동지의 연설을 듣고, 눈물 훔치지 않았던 노동자가 몇이나 됐던가...)

진짜 이 앙당물고(각오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책을 내며'라는 첫 대목부터 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고,

 

첫번째 글 '20년만의 복직'을 읽으면서는 목놓아 울어버렸다.

혼자 집에서 책을 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어가다, 남은 쪽수 줄어가는 게 아까워

불 끄고 누워 울다가

결국 다시 일어나 불을 켜고 책을 폈다.

그냥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부끄러움이 사무쳤지만,

다만, 김진숙동지가 나에게 부족하다는 이유로 타박할 것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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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7 11:32 2007/05/1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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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

2007/05/15 11:10

난 그 동지를 잘 알지는 못한다.

비정규사업을 하는 아주 선량한 인상의 활동가라는 것 정도...

화창한 5월 일요일 오전, 노동안전 활동가들과 간만에 야유회를 나간 그는

경찰한테 아내의 부음을 들었다.

 

내가 본 그는 그저 궂은 일을 웃는 낯으로 해내더라는 것 뿐이었다.

아내의 사진을 핸드폰 첫화면에 담아다니며 자랑했던 동지라는 것.

아내 퇴근길에 데리러 다녔던 동지라는 것.

아내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안되서 무척 애틋했다라는 것.

빈소에서 영정사진으로 처음 본 그의 아내는 정말 이뻤다.

빈소에서 본 그는 오열하고 있었다.

 

뉴스에 나온 버스 전복사고.

1명이 죽고, 6명이 크게 다쳤다는데,

하필 그 1명은 그의 아내였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이, 너무 서글프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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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5 11:10 2007/05/15 11:10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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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2007/05/10 15:23

 

2005년 3월, 처음 싸이질을 시작할 때.


메뉴에 '프로필'이란 게 있어서, 난 거기에 프로필을 써야만 하는 줄 알았나보다...

우연히 싸이 미니홈피를 뒤져기다, 그때 쓴 나의 프로필을 발견했다...

이 프로필을 쓰던 때는, 그닥 우울하지 않았나보다...


[세상에 나올 때]

30여년 전,

목포 자그마한 전세방(월셋방이었을 수도 있다)에서

쌍둥이같이 닮고도 귀여운 딸과 아들, 그리고 무심한 남편과

나름대로는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던 울 어머니...

구강포가 훤히 펼쳐진 강진군 바닷가 마을에 있는

남편의 부모님 집에 가서

흐릿한 나를 낳으셨다...

그러나, 나를 낳으신 이후로도 죽~

울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시장통에서 주워왔다고 주장하신다.


[정규교육을 받기 전까지]

난 다시 포대기로 싸매진 채

목포로 옮겨져,

주워온 아이치고는 나름대로

엄마, 아빠, 언니,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만2살때 할아버지에게 "나는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운운하는 삶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온 집안의 비웃음을 한몸에 샀고,

만3살때 국민학교 선생인 사촌언니에게 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집안으로부터는 '영특한 아이'라는 총애를,

사촌언니 반 아이들에게는 '4살 주제에 비교당하게 만드는 느자구없는 아이'라는 시기를 한 몸에 받았고,

만4살때 홀로 장흥에 있는 외갓집에서 강진에 있는 할아버지집으로 독자적인 이동에 성공함으로써, 이에 감격한 할아버지는 목포에 계신 나의 부모님에게 감동이 묻어나는 편지를 쓰시기도 한다.

또한 어린 시절 틈틈히 할아버지에게 화투짝으로 노는 방법을 터득하여, 목포 집에서 그 기계를 이용하여 노련하게 기술을 선보임으로써 동네 어르신들에게 걱정을 끼치기도 한다.


[국민학교]

언니, 오빠가 학교에 다니자 나도 그곳에 가고싶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언니랑 오빠가 다니는 학교에

'입학식'이라는 게 열린다는 속보를 입수했다.

난 엄마를 조르고 졸라서 입학식 구경에 나섰다.

난 당시 만 5살하고도 석달을 살아낸 연륜있는 '아이'였다.

엄마는 그저 구경만 시켜주자고 데리고 나섰으나,

난 줄을 서겠다고 떼를 썼고,

급기야 오빠 1학년 담임선생이 또 1학년을 맡았다는 사실을 알아낸 엄마는 안면을 이용해 나를 그 반 뒷줄에 세워두었다.

나의 국민학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 원해서 들어간 학교이건만, 난 매일 울었다.

아직 덜 배운 것이 시험에 나왔다고 울었고(이를테면 부등호 표시 따위들,,,)

난 하기 싫은 '무용'이라는 어색한 것들을 시키길래 울었고,

선생님이 만들어오라고 한 걸레를 잊고 안 가져갔기에 울었고,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울었다.

그 뿐인가, 공기놀이 하다가 지는 해를 보고 울었고,

우리 집 개 '똘만이'가 내가 밥을 퍼넣어준 개밥그릇을 뒤엎는 것이 괘씸해서 울었다.

그런 방자함으로 점철된 목포생활은

군화발이 남도를 짓밟던 1980년에 마무리되었다.

나는 어엿한 광주시 국민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새 아파트단지 옆에 있던 그 학교는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는, 경험하도 했다. 이를테면 대야에 흙퍼나르기, 운동장에서 돌 고르기 따위들.

그곳에서 나는 운다는 것이 무척 쪽팔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울어야 할때 울지 않고 눈을 치켜뜬 덕에 나서 처음으로 싸대기를 맞기도 했더랬다.

그러다가 당당하게, 졸업생의 절반이 넘도록 받는 그 귀한 상장까지 몇 장 챙겨 꽃다발 목에 걸고 '졸업생'의 반열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중학교 이후]

역시,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그것들을 정리하기 위해선

기억 몇 자락이 아니라

나에 대한 처절하고 정밀한, 그리고 에~ 또

깊이있는 '돌아보기'가 선행돼야 한다.

그/래/서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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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0 15:23 2007/05/1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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