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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전, 민중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노동자들의 조직과 10월투쟁 _ 김영수

1987년 이전, 민중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노동자들의 10월투쟁

 

김영수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대부분의 사람들은 1987년 6월항쟁으로 군부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에 대해 민주시민의 승리로 간주한다. 이는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대학생 및 제도권 야당의 정치세력, 중간층의 화이트칼라 노동자, 그리고 민족민주진영의 운동세력 등 민주적인 시민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승리한 대항쟁이었다는 평가다. 이러한 경향은 민주항쟁의 주요한 요구사항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대통령 직선제 쟁취’ 등 탈계급적인 수준에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987년 6월항쟁의 주체와 요구사항을 이렇게 평가할 경우, 6월항쟁의 이면을 보지 못한 채 항쟁의 역사를 왜곡시킬 수 있다.

 

6월항쟁은 1987년 6월에 발생하였지만, 1970년대의 반유신투쟁 혹은 1980년 광주항쟁의 연속이었으며, 노동자·민중이 생존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전개하였던 투쟁의 연속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지배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양면적인 전략, 즉 제도권 야당의 정치세력과 대학생들을 포용하는 통제전략을 구사한 반면,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탄압하는 통제전략을 구사하였다.

신군부세력 및 전두환 정권은 1970년대에 민주노조활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을 사회정화조치의 일환으로 삼청교육대에 보내기도 했으며, 노동운동의 투쟁에 대응할 수 있는 정부의 ‘노동대책회의’를 상설화하였다. 또한 노동관계법, 즉 근로기준법·노동조합법·노동위원회법·노동쟁의조정법 등 4개의 법을 반민주적으로 개정하여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를 탄압하였다. 특히 노동조합법의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은 민주노조운동의 활동가들을 탄압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외에도 정당하게 파업투쟁을 전개하는 노동자들에게 가차없이 공권력을 행사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1981년 이후의 청계피복 노동조합 복원투쟁, 1984년 택시노동자들의 전국적인 연대투쟁, 1984년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의 파업투쟁, 그리고 1985년 구로지역 중소기업 노동조합의 동맹파업투쟁 등에 대해 폭력적인 공권력을 행사하였다. 구로동맹파업투쟁에 참여했던 5개 노조의 노동자 중에서 약 1,300여 명이 “불구속, 구류, 구속, 부상, 해고, 강제사직” 등의 탄압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은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불법행위도 자연스럽게 자행하였다. 그것은 1984년 초반부터 노동운동과 관련된 활동가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그들을 채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동부는 노동현장으로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이전한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을 불순분자로 간주한 상태에서, 그들을 취업하지 못하게 하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단위 사업장에 배포하였으며, 그들을 구속하기까지 하였다. 1987년 들어 정부는 소위 위장취업자라는 이유로 6.29이전까지 43명, 6.29 이후 9월 2일까지 37명 등 모두 80명의 현장활동가를 구속하였고, 노사분규와 관련하여 6.29이후 9월 8일까지 모두 2,618명을 연행하여 이중 388명을 구속하였다. 이 외에도 민주노조운동의 선진적인 개별주체들에 대한 직업적 깡패와 경찰의 납치・감금・협박・집단폭행 등이 자행되었다.

 

이처럼 전두환 군부독재의 반민주적 폭력은 노동자·민중들을 대상으로 일상화되었다. 단순히 대통령이 군인출신이었기 때문에 군부독재정권이었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부정하고, 노동자·민중들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미명하에 헌법을 유린하는 행위를 일상적으로 자행하였기 때문에 군부독재정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1987년 이전에 제5공화국의 헌법을 폐기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대표적인 경우가 85년 10월에 결성된 ‘전국 노동자 민중민주민족통일헌법쟁취위원회’와 1986년 10월 26일에 결성된 ‘민주헌법쟁취 서울지역 노동자투쟁위원회’이다. ‘민주헌법쟁취 서울지역 노동자투쟁위원회’는 1986년 10월 26일 서울 신대방동 돈보스꼬 청년회관에서 노동자,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여해 결성식을 치렀다. 1986년 5.3인천사태 이후의 상황을 고려할 때, 노동자들은 개헌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주헌법 쟁취를 주요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대통령 직선제 쟁취, 노동3권 쟁취 등을 위한 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민주헌법쟁취 서울지역 노동자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난 이후, 대림동 로터리에서 30여 분간 가두시위를 전개하면서 개헌투쟁의 필요성을 집중적으로 선전하였다. 이처럼 민주노조운동의 선진적인 활동가들은 이러한 투쟁기구를 중심으로 ‘민중민주주의 개헌투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정치적 노동조합운동의 주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노동자 정치운동의 개헌투쟁은 노동자 정치운동과 민중민주운동의 통일단결을 위한 노력으로 가속화되었다. 1986년 11월 29일에는 수도권 차원에서 민중민주주의 개헌투쟁을 전개하였고, 1987년 박종철 고문살인사건을 계기로 발생된 2.7투쟁과 3.3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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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헌법쟁취 서울지역 노동자투쟁위원회 결성선언문>

 

6월항쟁의 과정에서는 노동자 대중들의 조직적 동원을 추진할 전국적 지도체계가 부재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참여 노동자들의 비율이 점차 늘었고 항쟁이 노동자 계급으로 확산되는 시점에서 지배블록의 6.29민주화조치가 이루어졌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노동자들은 매일 출근해야만 했었던 상황이었지만, 퇴근 이후에 도심을 누볐던 넥타이 부대가 노동자가 아니고 누구였단 말인가? 가두투쟁을 전개할 때, 차의 경적 소리로 투쟁을 북돋아주고 최루탄과 경찰에 쫒길 때 몸을 숨겨 주었던 사람들이 노동자․민중이 아니고 누구였단 말인가? 그들을 시민으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은 비록 6월항쟁의 과정에서 비조직적이었고 개별적・분산적 수준이었지만, 개헌투쟁의 주요 동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6월항쟁이 노동자 계급으로까지 확산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투쟁들을 6월항쟁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는 점이다. 특히 노동운동을 ‘양날개론’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그렇다.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만을 추구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고, 정당운동만이 국가권력의 성격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경향성은 6월항쟁의 주도세력이나 요구사항들을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속성과 무관한 것으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6월항쟁이 성공하게 된 결정적 요인을 ‘넥타이 부대’의 동참에서 찾는다. 그런데 1987년 당시의 ‘넥타이 부대’는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의 핵심적 주체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1987년 이전에 민중민주헌법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노동자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 등과 요구들을 자신의 이해로 간주하였다. 노동자․민중들은 정치권력의 형식적 민주화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사회구조의 실질적인 민주화를 추구하려 하였다. 이는 정치적 민주화의 요구 내용들이 노동자․민중들의 이해와 통일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노동자․민중들은 자신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국가권력을 수립하려 하였던 것이다.

 

1987년 이전에 민중민주헌법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노동자, 1987년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했던 노동자․민중들은 진정한 평화주의자들이다. 노동자․민중들이 추구하는 평화는 인간에 대한 ‘착취의 폭력’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평화, 인간에 대한 ‘폭력적 지배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평화, 그리고 노동자․민중들에게 순종과 복종만을 추구하는 ‘강제의 폭력’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평화 등이다. 노동자․민중들의 ‘새로운 6월 민주항쟁’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구조를 진정한 평화구조로 변화시키려는 과정이다. 정치적 민주화만으로 진정한 평화를 구축하기는 힘들다. 사회의 하부구조(social infra-structure)가 실질적으로 민주화되는 과정, 즉 노동자․민중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구성되거나 운영되는 사회만이 진정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 노동자․민중들은 ‘새로운 6월항쟁’으로 다음과 같은 평화사회, 즉 사회구성원 중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민중들의 이해가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사회, 그들의 이해가 사회적․국가적 이해로 전화되는 사회, 그리고 노동현장의 공동체적 관계가 사회구성원 모두의 사회적 관계로 전화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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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아래 눈치 없이 파업을 했다 _이정영

문민정부 아래 눈치 없는 파업을 했다

 

이정영 (전 신일금속노조 위원장, 부양노련, 민주노총에서 일했고 지금은 임실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원래 정착했던 임실과 진안을 오가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잘 한 결정이다.

주변엔 한 때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하던 친구들이 있다. 같이 명상모임도 하고, 한 번씩 어울려 전주까지 조조상영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한다. 아이들의 생일 때면 집에서 직접 만든 피자에 초를 꼽아놓고 생일파티를 하기도 한다.

김장 채소도 같이 심고, 김장도 같이 담는다. 우리 집 고구마를 수확할 때면 어김없이 이 친구들이 와서 함께 캐준다. 경제적으로 조금 쪼들리긴 하지만 기쁘고 어려운 일을 함께하는 이웃이 있어 우리 가족은 지금 이 생활에 아주 만족한다.

 

전노협을 떠올려 보니,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모든 일들이 다 소중했다. 그 중 하나를 집어내자니 참 어려운 일이었다. 20년을 쭉 돌아보고서야 내 가슴을 가장 뜨겁게 했던 게 무엇이었나 정리할 수 있었다.

 

사람 ‘人 ’자가 지푸라기 두 다발이 서로 기대고 서있는 모습이란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그 한자가 학창시절 처음 배운 한자 중 하나인데 그 때는 그 뜻을 몰랐다. 아니 그때만 모른 게 아니라 그 이후로도 한 참을 모르고 살았는데 20대 후반 노동운동을 하면서 몸으로 알게 되었다.

 

93년 나는 부산에 있는 신일금속노조(지금 금속노조 비엠지회)위원장이었다.

그해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문민정부 이데올로기로 세상이 얼어있을 때 어용노조가 만들어준 일방중재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치 없이 투쟁을 했고 위원장인 나를 비롯해서 간부 6명이 연행되었다.

다음날 조합원들은 전면 파업에 돌입했고 부양노련을 포함해 부산지역 노동자들은 한걸음에 달려와 주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그동안 못 잔 잠이나 실컷 자자며 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이 우리보고 나가라고 한다. ‘어? 이놈들이 왜 이러지?’ 했는데 현장에 와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동신금속, 한독병원, 대우정밀, 메리놀병원, 성요사, 그리고 ‘마찌꼬바’라고 불렸던 작은 하청공장에 다니는 활동가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함께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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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감격이란...

생각해보니 금속 제조업종은 물론 병원, 언론, 화학(신발, 섬유) 등 다양한 업종의 노동자가 오직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생산직과 사무직, 학력과 생활수준 등 사회적 간극을 넘어서 함께 싸웠다.

 

내가 처음 징역을 산 것도 이런 연대 투쟁 관련해서다. 부양노련 조직국장으로 동래봉생병원노조를 지키는 투쟁에 함께 하다 제3자 개입으로 엮인 것이다.

그 당시 매일 수 백 명의 노동자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 앞에서 집회를 했다. 매일 저녁 일을 마치면 저녁도 거른 채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병원 앞으로 모였다. 74일간의 파업기간동안 지역 내에서 함께 싸워주었던 동지들의 연대가 없었다면 동래봉생병원노동조합의 파업투쟁은 이기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는 게 그런 것 같다.

내가 똑똑해서 혼자 헤쳐 나가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동료, 친구, 친지들의 도움과 격려 속에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어우러져야 살아진다는 것을. 그래야 잘 사는 거고. 운동도 마찬가지고.

 

중학교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철없이 놀다가 포기한 학업으로 인해 내 안에 가득했던 열등감, 패배감이 노동운동을 통해서 극복되고 긍정적인 인간이 되었다면,

부양노련, 전노협 활동으로 함께 할 때 커지는 힘과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동지애의 희열을 실감했다.

그리고 지금 농사지으며 이웃들과 어울려 사는 밑거름은 다름 아닌 바로 젊은 날의 노동운동과 그때 함께 했던 동지들임을 새삼 확인한다. 그때를 되돌아보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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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 사무실 새단장 했어요

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실을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사무공간이었던 301호에서 302호로 조금 넓혀 이사를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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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쌓을 곳이 없었던 ... >

 

자료 양이 늘어서 앵글을 짜고 앞으로 전산화해야 할 자료들을 정리했습니다.

자료 옮기는 일은 함부로 결정하면 낭패를 보는 것인데....상황을 알기에 다들 군소리 없이...  고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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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노동박물관 _ 석치순

태국 노동박물관(Thai Labour Museum)

  

석치순 (국제노동자교류센터 사무국장 /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태국노동박물관의 역사

 

태국 노동박물관은 태국의 수도 방콕의 마카싼(Makkasan) 철도역 근처의 아담한 단층짜리 건물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태국 철도노조의 사무실이었는데 철도노조가 다른 곳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철도 당국(태국은 국철)과의 협상을 통해 박물관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단체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이 「아시아 최초, 그리고 유일의 노동박물관」건립을 위한 논의는 1991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철도노조를 비롯한 태국의 노동운동 지도자, NGO 단체 대표, 진보적 학자들이 모여 태국 역사 속에 묻히고 실종된 노동자 ․ 민중의 역사를 복원하고, 기록과 자료의 수집 ․ 정리 ․ 보존과 더불어, 노동자 교육 및 활동가 양성 등을 위한 종합공간으로서의 노동박물관 건립에 공감하고 사업을 추진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구상은 열매를 맺어 2년 후인 1993년 10월 17일, 태국노동박물관이 개관하게 된다.

태국노동박물관의 건립에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riedrich Ebert Stiftung)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박물관 건립을 위한 논의의 촉발 과정이나 물적 토대인 재정적인 측면에서 많은 지원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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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박물관의 내부와 주요 전시 내용

 

박물관은 전시실과 컴퓨터실, 도서실, 회의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실은 태국의 노동, 노동운동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살펴 볼 수 있도록 몇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멀리 수코타이 왕조 시대에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노동의 역사가 각종 자료, 사진, 모형 등 전시물과 함께 설명되어 있다. 태국어와 함께 영어 설명도 첨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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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태국 노동운동사는 물론 태국 역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들, 즉 1932년의 절대군주제의 폐지, 이후의 빈발한 군사구테타와 독재 체제, 1973년의 민주화 투쟁 등이 상세히 사진과 함께 설명되어 있고, 20세기초 초기 자본주의, 산업화 시대의 혹독한 노동조건과 인권 유린, 그리고 이에 저항했던 태동기 노동운동의 소중한 자료 - 당시의 사진, 신문, 유인물 - 등이 전시되어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생겨난 중국 노동자, 이른바 "쿨리"에 관한 대목이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태국 노동운동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들은 태국에 있어 임금 노동의 첫 세대인 동시에 이주노동의 효시이기도 하다는 설명이다. 이들에 대한 설명과 사진들, 그리고 그들의 주요 노동수단 중 하나였던 인력거(릭샤)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등 2차대전시 일본에 의해 추진된 이른바 죽음의 철도(Death Railway)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고난과 고통에 대한 설명이 사진, 모형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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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최근 사건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 1993년 4월에 발생한 케이더(Kader)인형공장 화재참사 사건이 있다. 1993년 4월, 심슨 가족 인형을 생산하는 태국의 케이더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188명이 사망하고 469명이 부상을 입은 현대 산업재해 사상 최대의 대참사였다. 더구나 이 엄청난 참사는 노동자들이 인형을 훔쳐가는 것을 방지한다며 공장 문을 밖에서 잠궈놓는 바람에 일어났다고 해, 그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슬픔과 분노를 금할 수 없게 한다. 이 사건은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의 유래가 된다. 전시실에는 당시 공장 내부의 모습이나 화재 당시 상황이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고, 노동자들이 만들던 인형 등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의 비극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타 노동운동 관련 자료, 즉 각종 유인물, 잡지, 노보, 신문, 팜플렛, 뱃지 등은 물론 노동 관련 문학 작품과 예술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특히 쟁의시 사용했던 물품, 장비, T셔츠 등도 따로 모아놓고 있으며 일부는 판매하기도 한다. 또한 별도로 제작한 T셔츠나 기념품, 노동가CD 등도 판매하고 있었다. 그 노동가요 중에는 귀에 익은 "님을 위한 행진곡" 에 가사만 바꾼 노래도 있어 가슴이 찡해 옴을 느끼게 한다.

 

박물관의 운영

태국노동박물관은 주로 기부, 프로젝트, 회의실 대여료 등의 수입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부는 태국철도노조 및 기타 노동조합과 노동 단체, 협력단체들로부터의 기금이 그 주요 내용이다. 노동박물관은 입장료를 받고 있지 않는 대신 방문객들의 자발적인 성금을 받는데, 이 성금도 여기에 포함된다. 또 박물관은 운영 기금 확보를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예를 들면 노동자들의 컴퓨터 교육 강좌 등을 들 수 있다. 또 CD나 비디오를 제작하기도 하며, 박물관에서 기념품으로 팔기도 한다. 세 번째는 노조나 노동자 단체들이 박물관 회의실을 사용할 때 지불하는 대여료가 있다.

박물관을 운영하는 인력으로는 유급 스탭이 3명, 자원봉사자 1명 등 총 4명이 있다.

박물관을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은 대략 한 달에 6-7만 바트 (한화 약 230~270만원)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 내역은 대부분이 스탭의 급여와 전기세, 수도세, 전화세 등이다.

 

 

참고 ; 기타 정보

○ 개관 시간 ; 매주 수요일~일요일 10;00~16:30

○ 주소 ; 503/20 Nikhom Makkasan Road Rachathewi, 10400. Bankok

○ 전화 및 팩스 ; 02-251-3173

○ 이메일 ; tlm@thailabour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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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송 _ 이성철

진송

이성철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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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효문 감독의 1996년 작품입니다(국내에는 김용 원작을 드라마화한 <천룡팔부 2003>등으로 더 잘 알려짐). 강문, 갈우 등 중국의 대표적인 배우들이 등장하는군요. 강문은 <붉은 수수밭>, <부용진>, <햇빛 쏟아지던 날들>, 첸 카이거의 <시황제 암살>, 그리고 <송가황조>, <귀신이 온다>, <사라진 총>, <모리화>, <천리주단기>,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등으로 잘 알려져 있고, 갈우는 <야연>, <시황제 암살>, 그리고 <패왕별희> 등으로 잘 알려진 배우죠.

 

진시황(BC 210년 등극)과 한 음악가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나중에(13세 때) 진시황이 되는 양정은 연나라에 볼모로 잡혀와 있습니다. 그는 연나라의 고점리(나중 진나라의 대악사가 되는 인물)의 어머니에게 함께 젖을 얻어먹으며 자랍니다. 세월이 흘러 양정은 진나라의 왕이 되나, 그의 끊임없는 정복야욕 때문에 이웃 나라들(고점리의 조국인 연나라, 그리고 초나라 등)은 전전긍긍합니다. 그래서 각국에서는 암살자를 보내 진왕을 암살코자합니다(일설에 의하면 진왕은 재위 동안 19차례의 암살위협에 놓였다고 합니다). 예컨대 연나라에서는 ‘형가’(원래는 위나라 사람임)를 보내 척살하려하나 실패하게 됩니다(장예모 감독의 <영웅>의 실제 모델이기도 함). 이 결과 연나라는 초토화되고, 진왕은 고점리를 데려오게 만듭니다. 그러나 고점리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킨 진나라와 그 왕에 대해 저항합니다.

 

한편 진왕의 슬하에는 30명의 공주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총애를 받았던 공주는 월양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어릴 때, 아버지인 진왕과 함께 말을 타다 떨어져 앉은뱅이가 되어버려 딸에 대한 애틋함이 무엇보다 컸던 탓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진왕이 또 암살위협에 놓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고점리와 월양이 함께 타고 있던 마차에 바위 같은 큰 돌이 떨어지면서 월양은 중상을 입게 됩니다. 고점리는 월양을 닷새 동안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그녀를 회생시키게 되고, 이 과정에서 사랑이 싹터 ‘월양곡’을 짓게 되죠. 심지어 월양이 걷게 됩니다.

 

“물이 하늘에 이르러 구름이 되니

한가로운 세상에 사랑이 충만하다“

 

어릴 적 젖 동무였던 진왕은 고점리의 뛰어난 음악 실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진나라를 위한 노래(즉 진송, 일종의 애국가)를 만들라고 합니다만, “대왕, 내가 능한 것은 평민들의 음이라서 궁중 음악인 송(頌)과는 별개의 음이라네”면서 거절합니다. 그러나 진왕은 끈질기게 회유합니다. 진송을 만들어주면 종묘사직의 제사를 관장하는 대악사에 봉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점리는 계속 거절하고, 궁중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월양과의 애정행각만 이어갑니다. 그러나 월양은 왕과 대장군(왕건)간에 약조한 정혼자(왕분)가 이미 있습니다. 그런데 진왕이 ‘진송’을 만들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음악은 가장 쉽게 민심을 사로잡는 것이다”는 거죠. 천하는 통일했으나(제나라 정복 후 통일, 제나라는 지금의 산둥지역 일원입니다) 민심은 잡지 못한 진시황의 제 1염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간의 대학살을 가리려는 것이기도 했죠. 70-80년대 한국의 수많은 금지곡과 건전가요들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와중에 만리장성 공사장의 돌에 모반을 부추기는 글귀가 발견됩니다. “진시황이 죽으면 나라는 분열된다”는 내용입니다. 진시황은 공사장 민중들 3만 명을 백 명씩 묶어 참수하게 됩니다. 가히 공포가 극에 달하게 된 셈이지요. 이에 고점리는 결심하게 됩니다. “내가 월양도 잊고, 작곡도 할 테니 처형을 멈춰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2만 5천명의 생명을 구하게 되죠(아! 처형된 5천명은? 좀 더 일찍 결심하지.....^^;;). 그러나 고점리의 반항은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왕분에게 시집갈 월양과 성(聖)스러운 종묘에서 성(性)스러운 예식을 치르게 됩니다. 이 일 등으로 고점리는 눈이 멀게 되는 형벌을 받습니다. 슬퍼하는 월양이지만 월양은 그에게,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의 월양은 늙지 않을 거예요”라는 애틋한 마음을 남깁니다.

 

마침내 진송이 완성되고 진왕은 시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점리는 진시황의 등극 연설 중에도, 자신이 들고 있던 악기로 그를 때리게 됩니다. 이에 진시황은 “역사는 내가 쓴다. 그리고 너도 죽이지 않는다”면서 고점리에게 아량을 베푸는 듯하지만, 이미 고점리의 몸 속에는 독이 번져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제국의 건설과정이었지만 그 제국은 결국 BC207년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음악은 영원하다는 것이겠지요? 배우들의 연기가 빼어납니다. 중국역사 공부를 겸해서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하네요. 연전에 EBS에서 강연된 김영수 선생의 ‘사기열전’을 들춰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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