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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사, 구로역사연구소, 노동자대회_박준성

바보사.구로역사연구소.노동자대회

 

박준성(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90년대, ‘바보사’는 꼭 읽어야할 역사책으로 꼽혔다. 10여만 부 이상 나갔다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본래 이름은 ‘바로 보는 우리역사’인데 줄여서 바보사라고 불렀다. ‘바로 보는’이라는 제목을 놓고 말이 많았으나 줄여서 ‘바보사’라는 이름을 만들려고 일부러 ‘바로 보는 우리역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전태일 열사가 ‘바보회’를 만들던 심정이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면서 기계와 노예처럼 살아온 자신과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이 ‘바보’였다고 자각하였다. 바보처럼 억눌려 살아온 처지와 현실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바보가 되자고 ‘바보회’를 만들었다.

 

전태일 열사가 ‘바보회’를 만들었듯이 노동자 민중도 바보처럼 믿어온 ‘지배층 중심의 역사’를 벗어나 자신들의 역사를 바로 보아야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생각들이 ‘책을 내면서’에 담겨 있다.

 

“우리는 이 책을 <바보사>로 약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지금껏 지배자들이 항상 우매하고 무식하다고 깔보고 짓밟아 온 민중의 역사를 참되게 대변하고자 한다. 고통과 굴종의 역사를 거부했던 1980년대 민중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이 <바보사>가 1990년대에도 이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힘찬 진군을 멈추지 않을 민중의 가슴에 살아 숨쉬는 ‘바로 보는 우리 역사’이기를 기대한다”

 

<바로 보는 우리역사>의 총론인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내가 썼다. 1984년부터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중운동 단체에서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와 역사인식’ 같은 제목으로 강의했던 내용을 종합해서 정리한 글이었다. 글 끄트머리에서 전태일이 자각했던 ‘바보’를 떠올리며 노예 같은 존재와 삶을 이야기하였다.

 

“지배자들의 삶이나, 그들이 불어넣어 준 환상과 허위의식에 물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노예적 삶은 역사적 삶이 아니다. 자신의 노예적 상태를 깨닫고 그것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예는 이미 노예가 아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노예 상태를 감수하는 노예는 노예일 뿐이다. 노예적 존재를 기쁘게 묘사하거나 자신의 주인을 친절하고 훌륭하다고 찬양하는 노예는 꼭두각시이거나 천박한 환각에 빠져 있는 멍청이일 뿐이다”

 

바보사는 구로역사연구소에서 공동작업으로 만든 노동자 민중의 역사였다. 좁은 공간에서 연구원들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쓰고, 돌려 읽고, 고치기를 수 없이 되풀이한 끝에 만들었다.

 

구로역사연구소는 1984년에 창립된 망원한국사연구실이 모태였다.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투쟁의 거센 바람이 휘몰아 친 뒤 망원한국사연구실과 ‘한국근대사연구회’를 통합하자는 ‘역사연구자 대중조직론’이 제기되었다. 한국사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삼아 연구자 대중조직을 만드는데 중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민중운동과 결합하여 실천할 것인가 하는 점이 쟁점이었다.

 

밤을 밝히고 피를 말리는 토론 끝에 총회에서 망원한국사연구실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총회의 결과는 무시되었다. 그럴듯하게 포장한 이념과 노선 밑바닥에는 미묘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었다. 결국 대중조직 건설을 주장하던 연구자들은 한국근대사연구회와 통합하여 1988년 9월 한국역사연구회를 만들었다.

 

나는 처음부터 통합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1980년대 공부했던 관계나 인연으로 따지면 한국역사연구회를 만드는데 앞장섰던 연구자들 가운데 가깝게 지낸 사람들이 많았다. 더 많은 역사연구자들이 ‘혁명적 지식인’으로서 역사를 무기로 대중과 만나 변혁운동에 함께 복무하는 조직으로 발전하는 것이라면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머리로는 호응하되 몸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는지, 통합 논의가 그런 방향으로 나가지 못했다.

 

논의 과정에서 나는 망원 독자유지론을 주장하였으나, 연구자들의 존재와 속성을 볼 때 어떠한 연구자 조직이 바람직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토론과 논쟁에 익숙한 체질이 아닌데다 인간관계까지 겹치니까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1988년 3월에 있을 혼인 준비를 핑계로 잠시 휴가를 얻기까지 했다.

 

새롭게 건설할 연구자 조직은 내 삶과 연구와 실천의 중요한 근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대중’으로 설정하여 ‘대중조직’의 연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망원한국사연구실은 더 이상 버틸만한 힘이 없었다. 망원한국사연구실을 유지하자던 집행부와 일부 회원들이 새로운 연구소를 준비했다.

 

아끼고 믿었던 후배들은 대부분 따라오지 않았다. 술자리나 토론 자리에서 이루어졌던 약속과 현란한 말잔치는 거품이었다. 책을 복사했다가 뱉어 놓는 듯 한 번지르르하고 어려운 말이나 글이 모두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술값이 아깝지는 않았다. 말과 글의 주눅에서 벗어나 말과 글을 다시 돌아보게 한 값비싼 체험을 했으니까. 요즘처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하는 논어 앞 대목을 그 때도 실감했다면 오히려 배운 것이 적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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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 _ 사진 : 홍지욱/ 노동자역사 한내 소장 자료>

 

1988년 11월 13명의 연구원들이 구로역사연구소를 열었다. 1985년 구로노동자연대투쟁의 현장이며 노동운동의 중심지인 구로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고 연구소 이름에도 ‘구로’를 넣었다. 창립일도 전태일 열사의 분신 18주기인 1988년 11월 13일 전날인 11월 12일로 잡았다. 그해 11월 13일은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매년 가을 열리는 노동자 대회의 역사가 시작된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노동자 운동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국’의 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가장 많이 모인 노동자대회였다.

 

11월 13일 오전에는 마침 1980년대 같이 공부한 후배가 가슴 아픈 혼인식을 치뤘다. 양쪽 부모님들이 완강하게 반대하였고, 주례도 공부 모임의 이세영 선배가 섰다. 피로연은 안가고 바로 연세대로 달려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대회는 이미 끝났다. 여의도로 행진하는 대열을 따라 잡았다.

 

행진에 나서기 직전 노동자 선봉대원들과 파업하던 인천 세창물산 노동자들이 연단 위로 뛰어 나가 손가락을 깨물어 하얀 광목 위에 ‘노동 해방’ 네 글자를 썼다고 한다. 행진 대열 맨 앞에서 피로 쓴 노동해방 깃발이 5만여 노동자 학생 시민들을 이끌었다. 여의도에 도착한 노동자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 악법 개폐 촉구 대회’를 열고, 전경련 앞에서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 대회’를 열었다.

 

진통 끝에 구로역사연구소를 열고, 노동운동사에서 한 획을 그은 노동자대회에서 느꼈던 감격으로 신나게 구로역사연구소 시절을 보냈다. 내가 선택한 구로역사연구소의 길이 옳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고 말과 글에 책임을 져야 했다. 혼인 초 아내와 함께 지낸 시간 보다 구로역사연구소와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연구소에서 번번이 밤을 새웠다. (그렇다고 그게 다 연구와 활동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버전으로 이야기하면, 테트리스 점 수 올리느라, 새로운 게임 끝까지 가보느라 막차를 놓쳐 할 수 없이 연구소에서 잔 적도 여러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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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노동자대회 후 한강다리를 건너 여의도로 행진하는 노동자_사진: 홍지욱/노동자역사 한내 소장자료 >

 

그 이후 조직을 만들거나 참가할 때면 구로역사연구소 초기처럼 활동하기 어려울 것 같아 주춤거렸다. 연구소가 가장 중점을 둔 사업과 활동은 민중사학의 성과를 대중화하는 작업이었다. 창립 직후부터 민중사학에 입각한 대중교과서를 준비하여 1990년 2월에 <바로보는 우리 역사>(1.2)를 냈다. 또 한 축이 대중교육 사업이었다. 여기 저기 도맡다시피 교육을 다니다 보니 ‘박준성의 구로역사연구소’라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다른 연구원들에게 미안하고 들을까봐 민망스러운 말이었다.

 

구로역사연구소는 1993년 8월 역사학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구로역사연구소로부터 따지면 22년이 지났다. 어떤 조직도 처음 만들 때 세웠던 거창한 취지를 제대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그 사이 연구소를 떠난 연구자들도 있고, 새로 들어온 연구자 들도 늘어나 13명으로 시작한 연구원 수가 지금은 40여명 가까이 된다. 연구원 수는 늘어 났어도 연구소는 회원들의 회비로 간단간닥 유지하고, 연구원들은 반 이상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어렵게 연구자의 길을 가고 있다.

 

돌아보면 언제나 아쉽고 부족한 것 투성이기 마련이지만, 나나 연구소나 혁명적 지식인으로서 변혁운동에 얼마나 보탬이 되었을까. 그래도 연구소는 전태일의 ‘바보회’를 생각하며, ‘전태일 열사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 맞춰 연구소를 창립한 뜻을 살려 연구와 출판, 교육을 계속해왔다. 2003년 11월에는 ‘투쟁의 역사, 희망의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창립 15주년 기념심포지움을 열었고, 성과를 묶어 2005년 11월 <노동자, 자기 역사를 말하다>를 펴냈다. 올 2010년 전태일 열사 40주기를 맞아서는 11월 7일 노동자대회에 맞춰 11월 6일 전태일재단과 함께 ‘청계피복 노동운동과 전태일의 재현’이라는 심포지움을 열었다.

 

망원한국사연구실, 한국근대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구로역사연구소를 만들었던 20여년 전의 ‘진보적인 소장파 연구자’들이 이제는 학계의 중견 연구자들을 넘어 원로가 되어가고 있다. 나이만 먹은 것이 아니라 몸도 마음도 늙어간다. 한편으로는 썩어가는 냄새가 난다는 소리도 들린다. 스스로 다시 한 번 껍질을 벗고, 뒤에서 흘러오는 샘물과 섞이지 않으면 강물은 맑아지지 않는다. 아직은 장강의 뒷물에 밀려 퇴출될 때는 아니다. 오히려 가장 낮은 곳, 바다로 향해 함께 가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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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은 떠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죽인 전태일_이숭원

 

우리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죽인 전태일 

이승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전태일열사의 40주기를 맞이하였다. 살아계셨다면 환갑이 넘어 노년에 접어든 나이다. 금년에도 예외 없이 전태일열사 정신계승을 이야기하고, 많은 행사들이 열리지만 노동자들의 현실은 자본과 권력의 분리정책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양극화는 심화되고 계급적 단결도 못 이루고 있다. 이 가을 또 한 동지의 분신은 지난 40년간 굴곡은 있었으나 줄기차게 노동자를 탄압하고 착취하는 일관된 자본과 정권의 실체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얼마나 많은 열사와 희생자를 내어야 하는 것인가?

전태일열사는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스스로를 죽이고 우리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전체 노동자의 각성된 투쟁을 호소하였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에서 인용, 전태일지음/전태일기념사업회 엮음)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를 간절히 호소하고 목숨을 바친 것이다. 열사가 전사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열사는 48년 8월 26일(음력) 출생하여 스물 두 살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힘든 생을 보냈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 구두닦이, 꽁초줍기, 하드장사, 우산장사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만큼 닥치는 대로 일했다. 어려운 환경에 초등학교를 중퇴했지만, 배우고자 했던 열망이 컸던 열사는 15살 때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닌 시기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16세가 된 열사는 1964년 봄 노동자가 된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시다’, 하루 열네시간의 노동에 일당 50원, 먼지 구덩이 다락방이 노동현장이었다. 열사는 그곳에서 노동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깨닫게 되었고,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보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고민하였다. 첫 번째 행동은 재단사가 되는 것이었다. 재단사가 되어 열악한 어린 여공들을 도와주려 했으나, 노동자인 재단사로서 열사는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재단사들의 모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 1969년 ‘바보회’를 만들고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조사하여 노동청에 진정했지만, 그들은 비웃음과 무시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열사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투쟁하기 위해 70년 4월 삼각산에 들어가 낮에는 수도원 공사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근로기준법을 연구하며 이후를 도모하였다. 결단을 내린 열사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바꾸고 투쟁조직화 하여 회장을 맡았다. 청계천 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분석하여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정서]를 만들어 노동청에 진정하고 경향신문에 보도까지 되었다. 그러나 근로조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삼동회원에 대한 회유와 협박만이 극에 달했다. 이에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으나, 당국과 경찰의 방해공작으로 계획된 투쟁은 실패하였고, 결국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과 함께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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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열사는 조직 활동가였고, 정책가 이며, 사상가, 실천하는 운동가였다. 열사는 다섯 권의 일기를 남겼다. 자신의 활동과 사상, 느낌들을 적어 놓은 것이다. 또한 어린 시절의 회상수기와 소설초안1,2,3, 모범업체 설립계획서 등을 남겼다. 현실을 극복하고 타개하기 위한 방법들을 고민하고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과 행동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전태일열사의 40주기를 맞아 살아있는 열사의 정신은 바로 현재를 고민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방법을 찾고, 실천하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나부터 변화하고 세상을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거보다 생활환경이나 소득이 나아졌고, 입고 먹는 것이 좋아졌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와 노동에 대한 착취는 더 심해져 계급적 모순은 심화되었다. 현실의 모순을 바꾸려고 했던 열사의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외장의 화려함과 행사의 다양함 보다 전태일이 꿈꾸었던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실천이 절실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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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과 들뢰즈 _양규헌

전태일과 들뢰즈

양규헌 (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밤에 말에게 재갈을 물린다. 욕조에서 나오자마자 사슬달린 재갈이나 두꺼운 벨트로 말의 발을 단단히 묶는다. 완벽한 무구들, 고삐와 엄지손가락을 죄는 고문 도구들을 지체 없이 장착한다. 그것들을 마구에 장착한다. 그리고 음경을 금속케이스에 집어넣는다. 주인의 뜻대로 낮이나 밤이나 2시간 동안 고삐를 죈다. 3, 4일간 감금. 고삐는 단단히 조이고 헐거워지기를 반복한다. 주인은 말에게 다가갈 때는 언제나 채찍을 들고 있으며, 채찍질을 한다. 말이 참지 못해 저항하면 고삐를 더 단단히 죈다.

 

사육과정을 통해 야생말의 욕망은 재배치되어 주인이 쥐는 고삐와 채찍, 편자의 발에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일 수 있는 사육된 말로 다시 태어난다. ‘들뢰즈’는 이러한 방식으로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것은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으며, 욕망을 재배치하는 것을 통해 욕망의 흐름이 자유롭게 횡단하고 기쁨으로 소용돌이치는 사회를 향해 획기적으로 변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의 주장처럼 욕망과 신체의 해방과정은 먼 후일의 과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실천 속에 담겨있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프랑스의 노동자계급은 당당하게 총파업의 깃발을 올렸다.

 

"정년 2년 연장"에 반대 투쟁에 프랑스 전역은 봉기를 가늠하게 하는 투쟁들이 물결치고 있다. 이 투쟁에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결합하며 '68봉기'를 가늠하게 하는 노학연대가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정유공장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프랑스는 연료가 바닥난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는 거 같고, 미화원 노동자들이 파업과, 교통, 운수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민들의 발이 묶이고 불편이 늘어나고 있지만, 프랑스 시민들의 파업지지율은 증가되고 있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청소년들은 "'사르코지' 네가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오도록 꼬드겼어"라고 외치며, 시위대들은 '파리 교외로의 명랑한 산책으로는 더 이상 투쟁의 의미가 없다','우리가 국가경제를 마비시켜야만 지배계급의 관심은 우리를 향할 것이다'라고 외친다.

 

프랑스 '국립청소년교육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혁명적인 행동에 의해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켜야 한다”고 응답한 청년의 수는 80년대 11%에서 현재 28%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으며, 사르코지 집권 이후 집회, 시위에는 프랑스 청년 절반가량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는 가운데, 방학과 휴가를 마친 11월, 프랑스 노동자들의 근본적 변혁을 향한 투쟁에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몇 개월 전부터 야단법석을 떨었던 11월 11-12일 G20 서울회의는 지난 수 십 년간 노동자민중을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 넣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정책과 구조를 온존시킴으로서 노동자계급 내부의 대립관계를 더더욱 강화시키려 하고 있을 뿐, 경주 재무장관회의 결과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프랑스 정상회담 일정만 결정한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 열사 40주기 노동자대회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열렸다.

 

전태일 열사 정신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지 않는 세상,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세상"을 꿈꾸는 해방정신이며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결의의 집합이 노동자대회의 전통일 것이다.

열사정신 계승의 외침이 매년 반복되어도 70년대 청계천은 중단되거나 달라진 것이 아니라 진행형일 뿐이다. 때문에 ‘투쟁의 상징 전태일’에서 ‘인간적 전태일’을 꿈꾸는 건 시기상조가 아닐까.

 

40년 전, 그를 죽음으로 내 몬 구조적 폭력은 현재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무기를 하나 더 빼들고 노동자계급을 공격하며 70년대 청계천인 영세사업장과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배고픔에 대한 호소조차 가로막으며 노동자계급 내부의 대립구도를 통해 ‘사육하는 말’을 만들어 가고 있다.

 

모순에 저항하고 절규하며 투쟁하는 열사의 정신이 발견되지 않고, 열사의 행렬이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어도 그 정신은 가을바람에 낙엽 흩날리듯, 분산고립의 형태로 부각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노동해방정신의 명맥을 이으며 열사정신 계승을 외치는 대오가 '노동해방 선봉대'였다.

 

2007년부터 매년 11월 초에 ‘노동해방선봉대’를 조직하여 전국 각 지역과 투쟁현장에서 사회변혁운동을 전파하고 당면 노동자민중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해 왔다. 올해도 11월 4일 서울 양재동을 출발하여 전국 투쟁현장을 돌고, 전태일의 해방정신을 선전, 선동하며 노동자대회 전야제에 결합함으로서 그 일정을 마쳤다.

 

'노동해방선봉대'의 선전선동은 민주노조운동의 변혁지향에 대한 노선을 복원해 내고, 활동가들의 실천적 모습과 결의롤 통해, 당면한 현재 위기를 극복하고, 70년대의 전태일을 오늘의 전태일로 부활시키기 위한 몸부림이 ‘기관 없는 신체’에 뜨겁고 격동적인 심장의 박동을 부추긴다.

 

정년을 줄이는데 반발하는 프랑스 청년, 노동자들. 정년을 늘리기 위해 투쟁해야하는 한국의 노동자들, 상반되는 요구가 작금의 상태를 반영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회복지조차도 투쟁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고, 근본적 변혁이 수반되지 않는 한, 이런 모순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게 진실이다.

 

노동자대회에 결집된 대중적 투쟁의지가 도처에서 분출하고 있으며 공권력을 앞세운 이명박정권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재능을 비롯한 특수고용의 문제는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고, KEC노동자들에 대한 총체적 탄압에 대한 대응은 병원에 갇혀 있으며, 용산참사는 대법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수원과 광명에서는 철거민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쌍용차는 전망 없는 졸속매각으로 제2의 상하이차를 반복하고 있다. 현대차 비정규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며 불안정노동에 저항하며 생존을 향한 투쟁의 깃발을 올렸다.

 

들뢰즈의 논리적 철학과 전태일의 해방 철학이 결합하여 거대하게 조직된 ‘노동해방선봉대’를 힘 있게 조직하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모순에 따른 저항을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은 현 시기 노동자계급이 기본 임무가 아닐까.

분출하는 투쟁의 물꼬를 열어 내고, 도처에서 진행되는 투쟁을 계급적 투쟁으로 발전시켜, 투쟁대오의 한가운데 노동해방의 깃발을 세워내며,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확산되어, 광란의 자본주의를 척결하고 해방된 세상을 열어가는 거대한 횃불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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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보안사 민간인 사찰_정경원

20년 전, 보안사 민간인 사찰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자료실장)

 

1990년 10월 4일 보안사에 복무 중이던 한 이병의 폭로로 보안사(국군보안사령부)가 민간인을 사찰해왔던 사실이 밝혀졌다. 공개된 사찰대상자는 정치·경제·사회·문화·언론 등 각 분야 1,303명이었다. 보안사는 방첩활동이나 군 보안관련 활동만 하게 되어있었다. 민간인 사찰은 불법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이상훈 국방부장관을 경질하고, 조남풍 보안사령관을 대기발령했다. 1991년 1월 1일 국군기무사령부로 명칭도 바꿨다. 이 기무사도 2009년 민간인 사찰을 한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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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보안사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는 대자보>

 

어디 기무사뿐인가.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도 민간인을 사찰해 세상을 뒤집어 놓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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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노협백서 그리고 전노협 _고계형

전노협백서 그리고 전노협

 

고계형(백서발간동지회,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내가 ‘전노협’을 ‘발견’한 건 1996년 창신동 어느 5층 건물에서였다.

 

“네가 할 일이 많고, 진짜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만날 수 있다”는 학교선배의 말에, 아직 대학생이었던 나는 창신동 전노협백서 사무실에 가게 되었다. 사무실에는 제본된 문서들로 빽빽하게 찬 수십 개의 책꽂이가 있었고, 책상마다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서 백서발간팀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1년 전 해산했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투쟁 기록들을 백서로 남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난 자연스럽게 자원봉사자라는 이름으로 그 사무실 한켠에서 낡은 컴퓨터 하나를 차지하고 각종 성명서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일을 시작했다. 전노협의 역사는 6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료는 엄청나게 많았다. 전노협 자체에서 발행한 문서들 말고도 각종 신문기사, 단체의 문서들, 각종 메모들 등 데이터베이스화해야 할 자료들이 그야말로 산더미였다. 메모 한 장이라도 소중한 기록이라고 생각했기에 거의 모든 자료를 입력해야 했다.

처음 한동안은 오타를 내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자료를 입력하는 데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여유가 생기면서 자료를 분류하고, 교정도 보고, 때로는 학교 후배들과 어두운 학교도서관에서 지난 신문의 축쇄판들을 뒤져가며 신문색인 작업도 했다. 나중에 누군가 백서에서 잠시라도 일했던 사람들이 연인원으로 수천 명이라고 했지만 언제나 일은 많고 사람은 모자랐다. 그렇게 난 처음 생각했던 것 보다 꽤 긴 시간을 창신동에서 보내게 되었고, 할 일이 많고, 진짜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만날 수 있다던 선배의 말은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거기서 난 전노협을 봤으니까.

 

그 때까지 사회과학 서적에서 보았던 노동자, 노동자계급, 노동운동은 머리 속에서만 존재했지, 실제로 노동자들을 만난 적도 별로 없었고, 노동운동을 실제로 느낀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다 백서발간팀에서 일하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실제 현장의 기록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한에서 이렇게 치열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은 새삼 놀라웠다. 한쪽에서 삼당합당이 자행되고 있던 시간에 노동자들은 탄압을 뚫고 전노협을 출범시켰고, 이후 해산할 때까지 수많은 투쟁으로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노동조합의 협의체의 건설이 이렇게까지 힘들고 지난한 투쟁을 필요로 했다는 것에 가슴이 뭉클해졌었다. 그야말로 전노협은 투쟁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나는 전노협과 직접적으로 함께 한 적은 없지만 전노협백서의 발간작업을 속에서 끊임없이 전노협과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 투쟁결의문, 각종 성명서, 신문기사, 회의록, 각종 통계, 판결문 속에서도 전노협은 있었다.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은 전노협이었고, 수많은 투쟁에 개입하고 선도했던 것도 전노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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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노협백서 사무실에서 전노협 창립을 조촐하게 기념했다. _한내>

 

백서를 만들면서 종이 속에서 전노협을 보았지만 또 다른 경로로 전노협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통해서였다. 백서발간팀장을 맡고 있던 고 김종배팀장은 전노협의 역사를 온몸으로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아니 사실 난 전노협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고 김종배 팀장이다. 전노협에 관해서, 당시 노동운동에 관해서 모르는 것이 있어 물어보면 항상 생생하게 이야기 해주곤 했다. 그 자신이 전노협의 역사와 같이 했기 때문이었다. 세세한 얘기들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전노협을 건설하고 지켜내려고 했었는지 전노협이 얼마나 노동자편에 서서 노동자계급을 지켜내고 싸워왔는지 그의 진지한 눈빛과 언어로 알 수 있었다.

백서발간 작업은 많은 시간과 인력을 필요로 했기에 만들면서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했고, 야식거리를 사들고 응원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중에는 노조활동가, 각종 노동, 문화 단체 등 전노협과 직간접적으로 함께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분들이 올 때는 일을 잠시 쉬며 그들의 산 경험들을 통해 전노협의 생생한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다. 모두들 전노협이 단지 해산한 과거 조직이 아니라, 역사에 기록되고 다시 불러내어야 할 것 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전노협백서의 중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은 전노협에서 찾아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믿는다.

전노협 6년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일이었다. 단지 전노협만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노협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단순한 생각으로는 그렇게 엄청난 일을 밤새워가며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월급을 받는 그냥 직장이라고 생각했다면 절대로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전노협의 역사를 노동운동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자부심으로 밤을 새가면서도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내가 전노협에 눈을 돌렸을 때 전노협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었지만, 전노협백서를 만들면서 전노협을 만났고, 그 역사 속에서 싸웠던 노동자들을 만났다. 아무리 자본과 언론이 그들의 투쟁을 지우려 해도 백서 속에서 만났던 노동자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투쟁하고 있음을 믿는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전노협 백서의 중요성은 높아지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기에 필요한 것은 전노협이 지키고자 했던 민주성과 자주성, 투쟁성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97년 백서 출판기념식에서 오래된 전노협 깃발을 다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수많은 투쟁의 현장을 함께 한 전노협 깃발. 해산과 더불어 접어서 보관돼왔던 것처럼 전노협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을까? 백서는 나에게 항상 노동자는 존재해왔으며 노동자계급의 존재는 투쟁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빛내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 중심에 항상 전노협이 있었고, 지금도 전노협은 전노협백서 속에서 살아서 학생들이, 연구자들이,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이 펼쳐보고, 자신을 불러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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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위스키> _이성철

위스키

이성철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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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isky, 2003, 우루과이)

 

국내에는 거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우루과이산 영화입니다. 2004년 도쿄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탄 작품이네요. 정말 시간이 나실 때, 시끄럽고 요란스럽고 활극이 난무하는 그런 영화들에 지쳐 있을 때, 함 들여다 보시길 바랍니다.

 

형인 야코보는 우루과이에서 조그만 양말 공장을 경영하고 있습니다(노동자 2명, 현장관리인 1명). 브라질에 사는 동생 에르만 역시 양말 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업인 모양입니다. 단지 동생은 형과 달리 신기술도 도입하고, 여러 나라에 수출도 하는 등 사업을 넓히고 있습니다. 한편 과묵한 형과 달리 동생은 쾌활한 듯 보입니다만, 형제간에는 무거운 어색함이 감돕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어머님을 형 혼자 모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며칠 후면 장례식이 있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동생이 여러 해 만에 형의 집으로 오게 됩니다. 이야기의 사단은 여기서부터 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나이 많은(이제 노인이 된) 형은 결혼을 안한 듯 합니다만, 동생에게는 결혼을 한 것으로 말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형은 공장의 현장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는 마르타에게 동생이 머무는 동안 자신의 집에서 지내달라고 부탁합니다. 즉 부인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지요. 마르타 역시 곱게 늙은 홀로 된 여인인 것 같습니다.

 

사진관에서 동생에게 보여줄 전시용 부부 사진을 찍을 때, 사진사는 ‘위스키~’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진 찍을 때 ‘김치~’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형의 집에서 며칠 지내게 된 에르만은 형수(?)에게 많은 정을 느낍니다. 이제 장례식도 끝나고, 내일이면 동생은 다시 브라질로 떠나야 합니다. 형도 동생이 빨리 떠나길 바라지요. 그런데 동생은 갑자기 뜬금없는 제안을 합니다. 두 분을 위해 자신이 좋은 해변 관광도시(피리아폴리스)로 초청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형은 거절하지만, 마르타가 이에 응하는 바람에 셋은 다시 며칠간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호텔에서의 야코보의 생활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단조롭기 그지 없습니다. 혼자 호텔 수영장으로 내려간 마르타는 그녀를 찾아나선 에르만과 수영도 하게 되고, 호텔 노래방에서 에르만의 노래를 듣고 감동하기도 합니다. 마르타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야코보지만 이런 몇몇 장면에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동요가 느껴집니다. 어쩌면 동생에게 살짝(?) 질투를 느끼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르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에르만은 형에게 “그동안 어머니를 보살펴줘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것은 그에 대한 나의 조그만 보상이다”라면서, 꽤 많은 돈을 형에게 건네게 됩니다. 형은 거절하지만, “새 기계를 사는 데 보태라”는 말을 듣고 어쩐 셈 인지 이 돈을 챙기게 됩니다. 그러나 혼자 카지노에 들러 돈 전부를 칩으로 바꿔 배팅을 하게 됩니다.

 

근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배팅을 했건만, 예상치 않게 오히려 큰 돈을 따게 됩니다. 동생 줄 선물과 이 돈 중 대부분을 곱게 포장해서 나중 마르타에게 주게 됩니다. 동생은 다시 브라질로 떠나고, 마르타와 야코보는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일단 야코보의 집으로 돌아온 마르타는 자신의 짐을 챙겨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택시를 불러주는 야코보는 앞서 말한 선물을 챙겨 줍니다. “내일 공장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마르타 역시, “내일 봐요, 신이 허락한다면...”이라면서 택시에 오릅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마르타의 눈 가는 촉촉이 젖어듭니다. 마르타 역시 황혼의 사랑을 가꾸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평소처럼 다음 날 아침 7시 30분, 공장 문을 열게 되는 야코보지만, 언제나 자신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다 함께 작업준비를 했던 마르타가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늘 마르타가 타주던 차도 자신이 타 마시면서 마르타를 기다리지만.... 조금 뒤 출근하는 두 여성 노동자들 중 한명이 “라디오를 틀어도 되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야코보는 “안 트는 게 좋겠다”고 말하지만, 이내 “마르타가 오면 물어봐”라고 합니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끝나게 됩니다.

 

줄거리는 그저 단순하게 흘러갑니다. 그러나 두 노 배우들의 가슴 속 연기가 바깥으로 아름답게 배어나옵니다. 황혼의 사랑 역시 “신이 원한다면”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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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만의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 그리고 강우근의 [들꽃이야기]

김성만 동지가 음반을 냈다.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

그의 삶을 그대로 압축한 제목이다.

판매 수익금은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위해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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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근의 [들꽃이야기]가  나왔다. (메이데이 출판사)

강우근은 북한산 밑자락에 살면서 아이들과 사계절 생태놀이를 하며 어린이 책 그림 그리는 일을 한다.

그가 2003년부터 6년 동안 무려 150회 걸친 들꽃이야기를 연재했다. 이 책은 그 가운데 엄선된 94편의 들꽃이야기를 새로 묶은 것이다.

‘보잘것없는 것이 세상을 바꾼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주는 들꽃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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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날 2011년 1월 22일(토)에 열기로_한내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의 날 열기로

 

노동자역사가 2011년 1월 22일 토요일이에  회원의 날을 열기로 했습니다.

정기 총회를 겸해 회원 모두가 모여 즐겁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자는 것입니다.

회원들이 꾸미는 문화공연, 기록 남기기 생활화를 위한 공모전, 회원이 만드는 회원 프로그램 공모전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달력에 동그라미 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사업보고서 작성 교육

 

노동자역사 한내가 12월 14일 사업보고서 잘 만들기 위한 교육을 합니다,

1년동안 사업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10년 후에도 가치 있는 기록으로 만들자는 취지에서 마련했습니다.

사업보고서에 무엇을 남길지, 1년 자료를 어떻게 수집 정리할지, 어떤 사진을 찍고 고를지 등의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노조간부, 단체 활동가, 그리고 관심있는 분들은 참여하십시오.

자세한 사항 문의는 02-2038-2101 노동자역사 한내로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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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노협건설을 위한 등반대회 _ 정경원

전노협 건설을 위한 등반대회

 

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자료실장)

 

단풍이 산을 뒤엎는 계절이다.

그 붉은 단풍 사이로 노동자들이 뭔가를 외치며 산을 오르던 시절

전노협 건설을 앞둔 1989년 10월.

등에는 흰 천을 잘라 만든 '건설 전노협' 몸벽보를 하고,

싸워 만든 민주노조 깃발을 펄럭이며 줄을 이어 산에 올랐다.

부산 금정산에, 광주 무등산에 그리고 서울 북한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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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10월 8일 전노혐 건설을 위한 등반대회 _ 사진=노동자역사 한내> 

 

그 시절엔 등반대회가 참 많았다. 지역 조직의 연대를 위해서도, 노조 단합대회도, 한겨울 쟁의 훈련도, 노조 결성식을 산에서 하기도 했다.

힘들면 받쳐주며 올라가는 산, 그게 노동자 연대의 모습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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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_양규헌

한여름 밤의 꿈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침울한 날씨로 일관했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철에 접어들었다. 자본이 쏟은 배설물로 계절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일교차의 폭은 기록이 달성되고 있다. 봄과 가을의 정서와 느낌은 여름과 겨울에 묻혀 가고 있다.

계절에 특별한 의미는 강조하지 않더라도, 이맘때쯤이면 높은 하늘에 아득해지는 꿈과 희망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단풍이 물드는 아늑한 공간에서 감미롭고 잔잔한 선율이 격동하는 음악과 마주하며, 영혼 깊이 젖어오는 감동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의 바람일 것이다. 새로운 계절은 접하며 금새 그 끝자락이 가물거리는 지나버린 여름을 생각하게 한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기억이 상종하는 동안, 생애가 몸부림치는 동안, 계절 속에 과거가 역사 속에 담겨지고, 기억 속에 계절은 잔잔한 향수와 그리움을 불러오기도 한다.

  

지난 여름 김종배열사 추모제를 마치고 찾아들어간 북한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진추하'와 '아비'가 부르는 '한여름 밤'이란 노래가 작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수 십 년 만에 들어보는 노래가 심금을 파고든다. ["한여름 밤 별은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한 여름 밤의 꿈...날 자유롭게 해 주세요..나무 위 새들처럼..."] 이 노래를 들으며 지난 시절 여름에 대한 기억, 추억들이 오버랩된다.

 

논바닥 물이 온천수처럼 뜨거워질 만큼, 땡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하루 종일 논을 매고 몰려오는 피로를 이웃들과 함께 저녁의 뜨거운 칼국수로 식히며 생쑥으로 피워낸 모깃불 앞에서 진한 연기를 연거푸 부채질하며 모기와 더위를 쫓으며 두런거리는 이웃과의 대화와 함께 풀벌레소리와 영롱한 별들이 마당 멍석위로 내려앉는 한여름 밤. 에 정겨움이 스쳐간다.

 

15년 전 여름, 나를 포함 수배자 세 명이 김종배 동지의 안내로 오대산을 찾았다. 마시고 싶도록 맑은 계곡물을 건너 넓게 펼쳐진 배추밭 언저리에서 바라보는 여름 밤하늘은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수배에 찌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풀어주는데 손색이 없었다. 눈이 시리도록 빛나는 별들의 조화와, 가끔씩 획을 긋는 유성과 뿌옇게 펼쳐진 은하수 너머가 우리들의 세상일 수 있다는 환상. 작은 두 팔로 그것을 껴안을 수 없지만 마음은 영롱한 별바다에 묻혀 가는 오대산의 여름밤은 막걸리에 취하기보다 우주와 자연의 오묘한 조화의 한가운데 그렇게 취하고 있었다.

 

모든 별들은 차츰 광채를 잃어가고 새벽별만이 먼동을 손짓하고 새벽 경운기 소리가 적막을 깰 때까지 뜬눈으로 지새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재현시키지 못할 추억이기에 그리움이 더하는지 모른다. 삭막함에서 벗어나 잠시 갖게 되는 마음에 풍요는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 속에 자리하는 짧은 여름밤 . 그러나 행복했었다.

 

그리고 십 수 년이 경과한 여름은 정서와 보편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있다. 참과 거짓이 서로 뒤엉켜 뒤죽박죽이 되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지는 여름이다.

노동부는 없어지고 고용부가 생김으로써 노동자는 권리와 인격이 실종되어 물건이 되고 말았다. 타입오프를 앞세워 노동운동은 물론, 노동자의 존재이유를 부정하고 있다. 대운하의 기초공사로 4대강은 묻지 마 강으로 흐르고 있다. 생존의 몸부림으로 투쟁했던 쌍용차 노동자들은 이명박 임기동안에 징역에서 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용산 망루에 철거민들은 중형을 선고 받고, 전철연의 지도부였다는 이유 때문에 남경남의장이 7년이라는 중형을 선고 받았다.

 

소위 사회고위층이라는 자들에게 '인사검증 기준을 강화하라'는 대통령의 주장에서 '나는 빼고'라는 전재를 달고 있다. 가계 빚 증가의 위험성이 제기되는데 DTI완화로 대출이 느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중앙은행 총제의 자질이 골 때린다.

 

동의오토, 기륭전자, 재능교육을 비롯한 간접고용, 특수고용, 파견노동을 포함한 비정규노동자들은 거리에서 "1000일 이상의 장기투쟁"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의 계급말살정책에 대응하는 노동자계급의 상황은 '우리는 보이지 않고 너와 나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지난해 여름밤을 달궜던 용산의 여름밤은, 평택의 여름밤은, 그리고 대한민국의 지나간 여름밤은, 자유를 저당잡힌 징역보다 더더욱 답답하고 짜증스럽고 치솟는 분노가 더위를 한층 부채질하는 긴 여름밤이 되어 가을의 중턱에 걸려있다.

 

어린 시절 꿈꾸었던 여름밤의 꿈을 실현하고 싶다. 잠 못 이루고 밤하늘을 주시하던 오대산에서 김종배 동지와의 한여름 밤을 별들과 함께 다시 그려내고 하반기 투쟁의 열정일 지폈던 그 열정을 되찾고 싶다. 그리고 숨 막히는 여름밤의 희망을 가을이란 계절에서 찾고 싶다. 그 희망이 세익스피어가 살던 르네상스 시대가 암흑의 중세시대라고 할지라도 세익스피어가 작품으로 표현하고자했던 '한여름 밤의 꿈'을 계급투쟁으로 이루고 싶다.

 

고전과 예술에 관심을 두고 이성적 중심 사고를 강조하던 중세시대에 전개했던 '한여름밤의 꿈'이 글로벌시대를 앞세우는 21세기의 지루한 여름, 절망의 '한여름 밤' 보다 낫지 않았을까. 반복되는 절망을 딛고 노동자계급의 우렁찬 함성이 구름 없는 가을하늘의 적막을 깨뜨리고, 찬 기운이 온몸을 움츠리게 하는 노동자, 민중의 길바닥 농성투쟁이 없어지는 계절이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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