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를 시작하며

0. 근황

뭔가가 하나 끝나긴 했는데, 그닥 깔끔하게 끝낸 것이 아니라서 영 찝찝하다. 다만 오랜 시간을 질질 끌어오던 것이 마무리 되었다는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쉴 수밖에. 그리하여 인생 2막 시작. ㅋ

지난해 9월 말 경의 어느날, 진보신당에 탈당계를 냈더랬다. 독자파니 통합파니 하면서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로 갑론을박한 것이 무려 1년이 훨씬 지났던 당시, 그 어느쪽의 파도 아니었던 입장에서 그저 당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만 가득했었는데, 대의원대횐지 뭔지를 칼라티비로 보다가 홧김에 탈당계를 냈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컸더랬다. 또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핑계삼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노여움도 있었더랬다.

그런데 그 직후, 비대위원장으로 김혜경 고문이 왔고, 그걸 보면서 한편에서는 안타까움이, 다른 한편으로는 미안함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홍세화 선생이 대표가 되었다. 뭔가를 지키려고 저리들 몸부림을 치는데, 나는 뭘 하고 있는지 자괴감에 한동안을 고민했다. 무려 4반세기만에 처음으로 정당에서 자유로운 선거를 치루리라, 어디 나도 관망의 자세로 정치판을 바라보는 향락을 누리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죄다 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다시 당으로 돌아간다. 아니, 돌아갔다. 거기서, 그 바닥의 바닥에 깔린 먼지라도 움켜쥐고서 새롭게 시작을 해보려 한다. 누군가는 희망도 없는 당에 왜 돌아가려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답할 수 있다. '희망버스'는 희망을 찾아갔기 때문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치가 있었다고. 나도 마찬가지로 어딘가 있을 희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겠노라고.

 

1. 2012의 정치판

나는 2012에 있을 총선과 대선의 구도를 "상조회정치 vs 산 자들의 정치"로 정리했다. 한마디로 지금 정치판은 "상조회 정치"판이다. 연전에 논란이 되었던 용어를 차용하자면, 소위 "관장사 정치"가 될 것이다. 분설하자면 이렇다.

1-1. 박통 상조회

박근혜는 그 자신이 어떠한 말을 하던 그 아버지인 박정희의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박근혜는 결코 그 그림자를 벗어던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못하다한 사업을 대를 이어 완수하겠다는 각오로 이번 총선과 대선에 임할 것이다. 비록 박근혜가 대권주자가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전술은 유효하다. 누가 되었든 한나라당 + 자선당 + 친박그룹들에서 나오는 어떤 주자라도 박정희 관장사를 그만 두지 못할 것이다.

1-2. 노통 상조회

통진당의 국참그룹과 민통당은 서로 노무현의 적자 자리를 두고 다툴 것이다. 어차피 유시민 일파는 그 처지를 벗어날 수 없고, 민통당에서 유력한 인사들 역시 노무현의 그림자 안에 자신들을 가둘 것이다. 물론 노무현에 대한 향수는 어느정도 효과를 거둘 것이며, 따라서 효과가 나타나는 시점에서 그들 간의 다툼은 더욱 격해질 것이다.

1-3. 본사 상조회

수령님 + 장군님의 유지를 받들고자 하는 통진당 내 민노당 그룹의 움직임 역시 상조회 정치의 전형을 보여줄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평화통일, 그리고 거기 덧대어 노동문제를 들고 나오겠지만, 애초부터 본사의 정치지형에 영향을 받아오던 그들의 위치에서 이 이상 선택할 여지는 거의 없다.

1-4. 상조회 곁꾼들

이 와중에 입장이 난처하게 되는 것은 통진당 내 일부 그룹, 즉 진보신당 탈당파를 주축으로 하는 통합연대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박통 상조회는 어차피 같이 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노통 상조회나 본사 상조회는 손을 놓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1-5. 상조회 정치의 귀결은 결국 유훈통치다. 이미 무덤에 들어간 자들의 이름을 후광처럼 덧씌우고 죽은 자들의 유지를 얼마나 더 잘 받드는가를 대중에게 보여주는 노력은, 결과적으로 하데스의 배를 타고 멀리 떠난 자들을 현실로 재림시킨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 배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과거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2. 전망

터무니 없는 낙관이라는 비판을 듣고는 있지만, 최소한 2012의 정치지형이 진보신당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판단이 있다. 우선 진보신당은 적어도 이들 상조회 정치에서 가장 자유로운 정치세력이자 제도권 정당이다. 진보신당에겐 자당의 이익을 위해 덧씌워야 할 죽은 자의 아우라도 없고, 혹은 굳이 그럴 이유조차 없다. 따라서 살아 있는 자들의 살아 있는 현실에 대해 가장 정확한 입장과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다음으로 진보신당은 그동안 한국 정치를 왜곡시켜왔던 '앵벌이 정치'로부터 최초로 자유롭게 선거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위상은 물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현실 정치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된 당의 처지를 웅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면에, 어느 정치세력으로부터의 견제도 없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는 장점으로 볼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위 두 가지 이점으로 인하여, 위태한 현실에 대해 보다 근본적이고 직설적인 비판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미 FTA를 비롯한 각종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비판, 고용과 관련된 현재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대안제시, 폭력적 자유경쟁시장에 대한 견제 등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모든 사안에 대해 저들 상조회 정치는 어떠한 대응도 할 수 없다. 그들의 등에 업힌 망령들의 원죄가 그것들이고, 바로 그 원죄로 인하여 오늘 대속의 제단 위에 올라야 할 자들이 바로 그들 자신들이므로.

의고적 혹은 복고적 정치활동이 대중의 감수성을 자극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정치의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상황은 결코 진보신당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비록 진보신당에게 대중들로 하여금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할 과거가 없다고 할지라도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2012의 정치판에서는 큰 역할을 했다고 자임할 수 있을 것이다.

 

3. 숙제

문제는 이제부터. 뜻이 고귀하다 한들 현재 스코어는 갈 데 없는 바닥. 언제나 그렇듯이 진보정치의 위기는 그 자체가 통상의 상황으로 대두된다. 항상 계속되는 위기는 이미 위기가 아니다. 따라서 상황이 바닥이라고 한들 그것이 새삼스러운 위기는 아닐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이러한 상황판단이 단순한 자위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객관적인 모든 조건은 정신승리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는 사실.

그러나 이 열악한 현실은 또다시 당연히도 극복해야 할 조건이다. 극복의 방법은 의제의 설정과 대안의 제시. 여기서 고민이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향후 설정해야 할 의제를 두 가지 정도로 꼽고 있다. 하나는 성장담론을 극복하는 것, 다른 하나는 학력차별을 없애는 것.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인데, 과연 성장담론에 휩쓸린 채 진보를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겠다는 좌파가 계속 성장담론을 끼고 가는 것이 적절한지가 문제였다. 물론 결과는 당연히 그러면 안 된다는 것. 그런데 현실정치에서 이러한 성장담론 극복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설득력을 가지도록 하려면 어떤 정책적 대안을 내보여야 할 것인가가 숙제로 남는다.

다음으로, 남한 사회에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모순은 학력간 차별의 문제라는 생각 역시 오래도록 머리 속에 맴돌던 나름의 숙제였다. 민노당때나 진보신당의 지금이나 교육의 문제는 '학벌 철폐'라는 구호로 귀결되었고, 그 구체적 대안으로 제신된 것들은 '서울대 폐지, 국공립통합네트워크, 공교육 강화'였다. 통진당으로 당적을 옮겼지만, 진보신당 대표였던 심상정은 '핀란드식 교육'을 자신의 사업 테마로 들고 나오기도 했더랬다. 그러나 그 어느 정책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고, 여전히 그렇다.

향후 그 내용을 마련해야 할 것들이기에 당장 어떤 구체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의제를 형성하고 장기적인 전망과 단기적 정책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늘부터 해야 할 작업이 될 듯하다. 4월 총선에서 그 윤곽이라도 드러낼 수 있다면 원이 없겠고, 요행히 총선정국을 잘 견뎌내고 나면 연말 대선에서 더욱 촘촘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덧 : 그동안 못만나던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데, 정당정치가 현장의 의식과 많이 동떨어져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섣부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진보신당의 오늘날의 위기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선다. 현장과의 네트워크가 건강하게 구축될 때 당의 미래 역시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더덧 : 사람 만나고 다니는 것은 좋은데, 차비가 장난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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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1 14:05 2012/01/1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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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 행인 박사 <축> 이런 플랑 하나 만들어 붙여야겠는데요. 어디다 붙일깝쇼? ㅋ 고생했네요! 무쟈게. 짝짝짝!!!

    나도 덧; 난 그나마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정당정치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길을 택하려 함. 잘하면 두번 탈당하는 꼴.

  2. 차비 -> 물가 -> ?

    상조회 -> 유훈 -> ?

    현실 -> 과거 -> ?

    하고자 하는 일들이 좋은 열매를 맺기를 ....

  3. 당 인사란에서 이름을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행인이 맞는 거죠???
    우와...
    당에 가면 아는 사람 하나 있겠는걸요..
    추카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침몰하더라도 함께 침몰할 친구가 하나 있어서 조금은 안심? ㅋㅋㅋ

    • 당이 깨달아야 할 것은, 다른 정당에는 제가 없지만 이 당에는 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좋은 건지는 나중에 판단할 수 있겠죠. ㅎㅎㅎ

  4. 행인님 돌아오셨군요... 산오리 님의 말에 깊이 공감이 되네요.. 축하를 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저는 죽어가는 자에게 내 손으로 비수를 꽂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 탈당계를 못 냈습니다요... 이건 뭐 저절로 죽어가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ㅜ.ㅜ 참 복잡미묘한 감정이죠... 어쨌든 기나긴 학위과정 마치신 건 정말 축하드려요... 그리고 지금의 활동이 많은 이들에게 '마지막' 불꽃은 아니기를 기원해볼께요... 팟팅!

  5. 복당(?) 축하! 저도 요즘 진보신당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난생 처음 정치자금(?)도 한푼 낸 당이니, 잘 되어서 희망을 더 키워주시길...

    • 안녕하세요? 그렇잖아도 인사 한 번 드리러 가야 하는데, 언제 시간 한 번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진보신당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하려 합니다. 그런데 워낙 현장에서 오랜 시간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잘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조만간 조언을 주실 시간을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구요.

  6. 제가 뭐 도움이 될 게 있을지 걱정이지만, 뵙는 거야 얼마든지 좋습니다. 점심 때라면 다음주라도 아무 때나 가능하구요, 저녁이라면 설 연휴 이후에 목요일 아닌 때면 괜찮습니다. 행인님 일정의 여유가 있는 때로 잡으셔서 연락주세요. marishin 골뱅이 gmail.com

  7. 행인님이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행인박사님이 되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리구요, 당 활동 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텐데 부디 몸 상하지 마시고 건강히 잘 지내면 좋겠어요.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8. 드디어 제도권에서 벗어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언제 연락 주시면 맛있는 밥 한끼 대접해 드릴게요.^^ 연락주셔요^^.

    • 언제나 관심 주시고 항상 격려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학교 벗어나기 전에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9. 요즘 불질을 못하다 보니 행인 블로그에도 참으로 오랫만에 들어오네요. 오랫만에 들어왔는데 이렇게 반가운 글을 만나다니!!! 복당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예전에 무슨 드라마에서 들은 대사인데 "녀석의 모든 것을 빼앗아 궁지로 몰지 말아라. 잃을 것이 없는 놈은 겁날 것도 없어지니까" 뭐 이따위 대사가 있었는데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더라구요. 지금 우리당의 현실과 꼭 어울리는 것만은 아니지만 우린 잃을 것이 없으니 겁날 것도 없지 않나 싶기도 하네요. 아니 사실 잃을 것이 아직도 많긴 하죠. 홍세화 대표를 잃고 싶지도 않고 행인이나 산오리를 잃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어쨌든 반갑습니다. 그리고 '상조회 정치'란 표현 참 맘에 드네요^^

    • 상조회 정치로 밀고 나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당의 고결하신 분들이 별로 탐탁칠 않으셨나봐요. ㅎㅎㅎ 저도 실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으므로 간이 배밖으로 나온 듯 뛰어도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분들은 위기의식때문에 행동도 위축되신 듯 합니다. 칼 물고 뛴다는 심정으로 쌔가 빠지게 뛰어보겠습니다.

  10. 찰떡 만들고 있으니까 잘 되겠지.

  11. 얼마전 게임 관련 논평 보고선 기억을 더듬어 왔습니다. 잘 지내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