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깬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거울의 효용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비춘다는 데에 있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금붙이로 번쩍번쩍 치장을 해놓은 거울이라고 해도, 그 앞에서 무언가를 비추어보는 것이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 앞에서 그 반영을 들여다보는 것이 있을 때에라야 거울은 존재의 가치가 있다. 루이스 캐럴의 ‘거울나라의 엘리스’에서처럼 거울 뒤에 다른 세상이 있다거나, ‘전설의 고향’류 이야기에서처럼 거울에서 귀신이 나오거나 하는 건 이승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니 거울의 효용을 다른 데서 찾을 필요는 없다.
‘미러링(mirroring)’이라는 말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일베라는 족속들 혹은 그와 유사한 개마초들의 말하기를 그대로 본떠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발화방식을 일컫는다. 메갈리안이라 일컬어지는 일군의 사람들이 주도하고 있다. 미러링이라고 하지만, 기실 이러한 방식은 안티테제 혹은 반정립적 투쟁의 한 양식이다. 받은 만큼 되돌려준다는 것인데,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격언이 그 전형이다. 소위 ‘동해보복(同害報復, lex talionis)’이다. 근대적인 법이 정형화된 이후 공적차원에서는 동해보복이 사실상 소멸되었고, 사적 복수의 측면에서 자행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미러링이 되었든 동해보복이 되었든 간에 근본적인 문제의 지점 또는 발본적인 문제해결의 방식은 애당초 그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원인을 없애는 일이다. 애초에 다른 성(性)에 대한 모욕적 공격이 없었다면 미러링은 발생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누군가에 대한 위해가 없었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위해를 당할 동해보복은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해보복은 현대의 법체계에서 사라졌다. 다만 손해배상에서 원상회복의 원칙이나 경범죄 등의 범죄에 대한 벌금산정 등에 근거로 사용되는 정도만이 잔존해 있을 뿐이다. 사적보복이 원천적으로 금지된 현대에서, ‘보복’적 의미를 가진 처벌은 오로지 국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며 그 형태도 특히 신체에 대하여 동일한 위해를 동일하게 가하는 방식은 부정된다. 미러링이 현재진행형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런데 항간의 논란이 되고 있는 미러링은 그 성격이 동해보복과도 다르다. 지금 벌어지는 미러링은 남성의 ‘폭력’에 대한 대항폭력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단순화된 도식으로 보자면 강자에 대한 약자의 소극적 반응인 것이다. 동해보복이 약자냐 강자냐의 힘의 위계와 관계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비교된다. 개마초들의 폭력이 일상이 되어 있는 현실에서 발생한 미러링은 그 일상적 폭력에 치이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다.
중립적 지위를 가장한 사람들이 미러링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혐오를 혐오로 맞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미러링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서는 안 된다는 논리와 똑같다. 그러나 이 비판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혐오에 맞선 어떤 태도가 그 혐오와 같은 형식을 띤다고 하여 그것 역시 혐오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베와 개마초의 혐오는 그것이 단순히 발언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의 한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일베와 개마초들의 혐오발언은 그들이 저지르는 물리적 폭력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으며, 실질적인 폭력행위를 조장하는 동시에 그 폭력행위에 당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러링’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한다.
반면 미러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현실에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고, 그럴 위험도 없다. 미러링이 최소한의 저항에 그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미러링의 한계도 여기 있다. 거울 앞에 사람이 서 있지 않는 한 그 거울이 사람에게 아무런 효용이 없듯, 미러링을 촉발하는 원인이 없는 한 미러링 자체는 소멸하게 된다. 이를 외면한 채 미러링을 “혐오를 혐오로 맞선다”면서 그저 중단하라는 것은 그냥 거울을 깨라는 것이다.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결정하는 건 자기 자신일 뿐, 거울이 나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