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할 수 없는 계급에게 투표권을(2012년 6월 말)

'투표할 수 없는 계급'의 이해를 어떻게 관철할 수 있을 것인가? 투표율의 상승이 보수 혹은 우파에게 유리할지언정 '투표할 수 없는 계급'에게 투표권이라는 시민권을 보장하는 것은 진보 혹은 좌파의 임무이다. 진보신당은 공직선거법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가장 먼저 '이번 대선부터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대선 결선투표제 주장은 우리가 공직선거법 자체를 건드리겠다는 의지를 최초로 발현하기 위한 것이다.



유명인들의 ‘삐끼질’


지난 4월 총선 당시, 내로라하는 일군의 인물들이 색다른 ‘공약(?)’을 제시했다. “만일 투표율이 70%를 넘으면 ~를 하겠다”는 것이 그것. 흥미로운 몇 가지 약속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건 : 만약 투표율이 70%를 넘는다면,

“스포츠머리로 짧게 삭발하겠다.” (이외수)
“미니스커트 입고 춤추고 노래하겠다.” (안철수)
“아이유 코스프레를 하겠다.” (공지영)
“망사스타킹을 신겠다.” (조국)
“빨강머리 가발 힙합바지 입고 개다리춤을 추겠다.” (명진)
“광화문 광장에서 ‘롤리폴리’ 춤을 추겠다.” (한명숙)
“엘비스 프레슬리 코스프레를 하겠다.” (노회찬)


4월 총선의 투표율은 54.3%에 머무름으로써 이들의 약속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들의 퍼포먼스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었을지 모르겠으나, 투표율이 70%를 넘어가더라도 이들이 약속을 이행하는 광경을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선거를 한바탕 축제의 장으로 승화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대해서는 그 충정을 높이 살만하나, 그 방식이 기껏 어둠 깔린 유흥가 뒷골목에서 삐끼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그건 꼴사나운 일일 뿐이다.

문제는 이들의 발상이 삐끼들의 호객행위와 유사성을 가진다는데 머무르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저 요란스러운 약속들이 실상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 그리고 바로 왜 그 약속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야 할 사람들이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투표율을 올려보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는 점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백보 양보해서 이외수나 공지영 같은 작가들, 김미화(“일주일 간 순악질 여사 복장을 하고 일자 눈썹을 하고 다니겠다”)나 김제동(“상의 탈의하겠다”) 같은 방송인들 혹은 김어준(“주진우 기자와 공개적으로 딥 키스 하겠다”)과 같은 똥침 전문 패러디 웹진의 총수 등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한명숙, 노회찬 등 정치인과 조국과 같은 법학자가 투표율이 낮은 이유와 투표율을 올릴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은 무엇인지를 대중들에게 알리기보다는 이런 유의 이벤트성 허언을 하면서 투표율 독려운동을 했다는 것은 실로 난감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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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투표율이 70%를 넘으면 ~를 하겠다” 지난 4월 총선 당시, 내로라하는 일군의 인물들이 색다른 ‘공약(?)’을 제시했다.


18대 총선이 끝난 후, 그리고 가깝게는 2010보궐선거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과정에서 “계급투표”라는 용어가 회자된 일이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잘 사는 동네의 유권자들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을 찍고 못 사는 동네의 유권자들은 야당을 찍는다는 의미로 그 용어가 사용되었다. 서울의 일부 지역에서 이러한 “계급투표”의 경향이 나타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계급투표”의 경향성이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최근 들어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장정당에 투표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 질문은 다시 말해 왜 “계급투표”가 이루어지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배반하고 부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정당을 선호한다는 어떤 분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다른 나라에서라면 몰라도 한국에서만큼은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평가하기에 어딘지 모르게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다. 과연 현실에서 “계급투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 의미에서 거론되는 “계급투표”가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할 근거는 사실상 명백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전혀 다른 각도에서 “계급투표”의 의미를 고찰한다면 우리 사회는 분명 이미 “계급투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 사회에서는 투표행위 자체가 바로 계급적인 지위를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점을 짚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투표하는 행위 자체가 계급적 행위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는 “투표할 수 있는 계급”과 “투표할 수 없는 계급”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왜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정당에 투표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기 이전에 “왜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투표를 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 이 점을 인지하지 않는 한 “계급투표” 논의는 완전히 다른 맥락으로 빠지게 된다.


투표율의 문제 = 계급투표의 문제


이러한 “계급투표”, 즉 “투표할 수 있는 계급”과 “투표할 수 없는 계급”의 문제가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인지를 보자. 4월 5일자 오마이뉴스 기사는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및 비정규 노동자들이 아예 투표에서 배제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관련기사 : "하루 일당 버는 처지라 투표 포기할 수밖에 없어" - 오마이뉴스, 2012년 4월 5일 기사). 대구지역에서 있었던 일이 이 기사의 주요 내용이지만, 이와 같이 특히 비정규 일용직 노동자들의 참정권이 실질적으로 박탈되는 현상은 전국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었다.(관련기사 : "투표요? 눈치가 보여서…" - 충청타임즈, 2012년 4월 9일 기사, 민노총 "중소영세비정규직근로자 선거권 보장하라" - 뉴시스, 4월 4일 기사)

비정규 노동자들의 선거권이 박탈당하고 있는 현실은 2012년 4월 총선에서 처음으로 촉발된 사건이 아니다. 이 문제는 매 선거시기마다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미 2010년 6월 지방선거 당시 민주노총은 노동부 통계 기준으로 따져도 총 유권자 중 14.8%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표를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밝힌 바가 있다. 지난 4월 총선 당시, 거제의 양대 대기업 사업장인 대우조선과 삼성중공업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출근을 명했다. 대우조선의 경우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투표참여의 시간을 보장해주기로 했으나, 실제 사업장 안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업무지시를 하고 관리감독을 해야 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이라고 해서 마음 놓고 투표장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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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일 전 기권사유는 '뽑을 사람이 없어서,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 등인 데 반해, 선거 후 기권 사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출근'이다. (출처: 함께하는시민행동)


결과적으로 이러한 구조 안에서는 남한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계급투표의 문제, 즉 “투표할 수 있는 계급”의 의사만이 반영되면서 “투표할 수 없는 계급”의 의사는 아예 투표소 밖에서 사장되어버린다. 따라서 당면 문제의 적실한 해소를 위해서 우선 필요한 작업은 이 구조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한 분석은 현재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다 설명할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1) 현재의 선거제도 아래서 “투표할 수 없는 계급”, 즉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및 일용직 노동자들의 선거권은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2) 선거를 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직종, 주거지역, 출퇴근 거리, 정보접근성의 용이성 등에 의하여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는 바,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는 점, (3) 군사정권의 가장(假裝) 민주주의를 극복하고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구성된 현재의 공직선거법은 오히려 자본종속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투표할 수 없는 계급”의 처지는 곧장 투표율의 저하로 이어진다. 예를 들면 원격지로 일을 하러 가야 하는 사람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투표구의 투표율과 유권자들의 일상생활반경이 거주지역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 투표구의 투표율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분석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자료를 보더라도 지역적으로 나타나는 고령층의 투표율과 청장년층 투표율의 과도한 격차를 실감할 수 있다. 선거일 당일에 거주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연령층과 직업, 학업 등의 이유로 거주지역에 머물 수 없는 연령층의 투표율이 얼마나 심각하게 차이가 나는지를 알 수 있다.


멍청아, 문제는 제도야!


이러한 현상은 16대, 17대,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히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탄핵사태로 정치적 관심이 증폭되었던 17대 국회의원선거를 예외로 하더라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국회의원 투표율은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비록 보다 면밀한 심층적 조사가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경향적으로 주거환경과 노동조건 등이 투표율에 끼치는 영향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투표율의 저하는 단지 유권자의 정치혐오와 같은 원인에 기한 것이 아니라 계급적으로 투표할 수 없는 사람들의 문제가 결정적 원인으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투표장으로 불러내 올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투표율이 70%가 넘으면 ~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무식한 것이거나 일종의 기만이거나 둘 중의 하나다.

현행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제6조 제1항에서 "국가는 선거권자가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고 돼 있고 3항에는 "공무원과 학생 또는 다른 사람에게 고용된 자가 선거인명부를 관람하거나 투표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간은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휴무 또는 휴업으로 보지 아니한다"고 돼 있다. 이러한 규정은 헌법 24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는 원칙을 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이러한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것은 제도가 아닌 다른 차원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과는 별개로 문제는 제도 안에 존재하고 있다.

목하 대한민국 모든 제 정당과 정치인들은 대통령 선거든 국회의원 선거든 모든 공직선거 기간이 도래할 때마다 다투어 공직선거법의 내용을 개정해야 한다며 기염을 토한다. 그 내용은 국회의원 선거 방식의 변화(예컨대 독일식 정당명부제 또는 광역단위 완전정당명부제 등)나 선거운동방식의 제한 철폐(예를 들어 SNS 선거운동 완전 보장 또는 게시판 실명제 폐지 등)로부터 부정선거운동에 대한 처벌강화나 심지어 결선투표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정작 재미있는 사실은 특정 선거가 치러지고 난 후에는 어김없이 공직선거법 개정논의가 수면 아래로 침잠해 버린다는 사실. 일단 당선된 정치인은 현행 제도에 대해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할 이유가 없어지고 당선되지 않은 정치인은 현행 제도를 건드릴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공직선거법의 문제는 선거기간에만 반짝하는 이벤트 아이템으로 전락하고, 평상시에는 그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입장에 따라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올 뿐이다.

그럼에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아주 간단하고 분명하게 선언하자면, 공직선거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분해하여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는 것. 공직선거법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낙후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현재의 투표율 저하에 대한 문제에 대한 해법을 결코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기껏 해봐야 왜 프랑스 대선의 투표율과 우리의 투표율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 수준의 문제제기와, 정치인들의 수준미달이나 대중의 정치혐오와 같이 자질론 내지 인성론으로 귀결되는 분석이나 가능할 것이다.

논의의 명료한 진행을 위해 곁가지를 치고 보자면 저조한 투표율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제도에 있다. 투표율이 올라가면 소위 ‘진보’ 혹은 ‘좌파’에게 유리한가의 논의는 지금 단계에서 제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설령 투표율이 올라간다고 한들, 진보 또는 좌파에게 유리하다고 볼 여지는 현재 상태에선 없다. 그러나 지금 적어도 정치의 복원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도모하는 세력이라면 자신에게 유리한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투표율의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봐야 한다. 특히 “배제된 자들의 서사”라는 총선전략을 세웠던 진보신당은 더더욱 이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해야만 할 것이다. “배제된 자들”은 여전히 투표에서 배제되어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을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정치의 전면으로 등장하도록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진보신당이 내세웠던 “배제된 자들의 서사”가 가지는 가치의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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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표율 저하가 유권자들의 정치혐오 때문이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추세를 보이는 국회의원 투표율, 우리의 주거환경과 노동조건의 변화는 이와 무관한 것일까?



배제된 자들의 서사?


진보신당이 내건 “배제된 자들의 서사”라는 캐치프레이즈에는 일정한 번역이 필요하다. 그 훌륭한 번역의 예는 당시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던 김순자 후보가 제시했던 “청소노동자들에게 휴게실을!”이라는 간명한 표현을 들 수 있다. 그 번역의 한 형태일 “투표할 수 없는 계급”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문제는 이보다 훨씬 쉽다. 왜냐하면 이것은 지금까지 없던 투표권을 새롭게 만들어 주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투표권을 정상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총선의 결과 1.13%라는 참혹한 득표율을 보이면서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배제된” 존재가 되어버린 진보신당이지만, 그 결과와 무관하게 유권자들에게 약속했던 것을 지키는 것이 책임 있는 정치집단의 자세라고 한다면, “배제된 자들의 서사”는 지금도 진보신당의 정치적 기조로서 가지고 나가야 할 지향이 되어야 한다. 그 차원에서 진보신당은 “배제된 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며, 그 방법 중의 하나로 공직선거법에 대한 문제제기 당사자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제기되어야 할 주장은 공직선거법의 전면 개정이다. 현행 공직선거법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모든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다. 각계의 공론을 수합하고 보다 구체적인 연구 작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선 필요한 이슈의 제시와 대안의 설정, 그리고 대안의 현실화를 위한 실천 작업이 가능한 부분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견지해야 할 것은 “투표할 수 없는 계급”의 이해를 어떻게 관철할 수 있을 것인지 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투표율의 상승이 진보 혹은 좌파에게 이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록 투표율의 상승이 보수 혹은 우파에게 유리할지언정 “투표할 수 없는 계급”에게 투표권이라는 시민권을 보장하는 것은 진보 혹은 좌파의 임무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하여 진보신당은 우선 현행 공직선거법이 정하고 있는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 지방선거 및 보궐선거 등 각종 선거제도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야 하며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다음으로 현행 공직선거법 상 규정되어 있는 선거운동의 방식에 대해 심층적인 검토를 수행해야 한다. 선거부정방지라는 미명으로 출마자들과 유권자들의 알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막고 있는 각종 규제를 일소하고, 보다 광범위하게 기본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식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공직선거법과 관련된 제 법률들, 즉 정당법 등을 어떻게 개정해야 효과적인 정치제도를 구성할 수 있을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 우선적으로 제시해야 할 이슈와 대안,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한 이슈와 대안 등을 구분하고 순차적으로 또는 통합적으로 개선방향을 내놓는 로드맵을 설정하여야 한다.


“이번 대선부터 결선투표제를!”


가장 먼저 “이번 대선부터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대통령 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것이 헌법사항이냐 법률사항이냐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나 현행 헌법의 규정에 따르면 이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헌법 제67조 제2항의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인 때에는 국회의 재적의원 과반수가 출석한 공개회의에서 다수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한다”는 규정이 결선제에 대한 내용을 헌법으로 정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그러한 해석은 무리가 있다. 애초 이 규정에서 말하는 2인 이상의 최고득표자라는 표현은 똑같은 수의 득표를 얻은 사람을 전제하는 것인데, 실질적으로 유권자가 4천만에 이르는 한국의 현실에서 동일득표를 얻는 후보자가 2인 이상 나올 가능성이라는 것은 지구가 달을 공전하게 될 가능성에 버금간다. 또한 결선투표제의 내용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어떤 조건에도 어긋남이 없이 공직선거법의 개정을 통해 얼마든지 구성할 수 있다. 결선투표제도 도입 주장은 과거에도 줄곧 제기되어 왔던 것으로써 전혀 새로운 주장도 아니며, 최근 한 매체에도 이와 같은 주장이 실린 바 있다.(“2012년 대선부터 결선투표제 도입하자”- 프레시안 6월 12일 기사)

대선 결선투표제 주장은 우리가 공직선거법 자체를 건드리겠다는 의지를 최초로 발현하기 위한 것이다. 환언하자면, 대선 결선투표제 도입 주장은 시의적으로 가장 적절한 주제를 통해 공직선거법에 대한 유권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의미를 가진다. 즉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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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0 16:15 2016/10/2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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