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결선투표제, 최선을 선택할 권리다(2012년 6월 27일)

선거가 치러지기 전 정치세력 간의 합종연횡을 통해 이루어지는 후보 단일화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없도록 강제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념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을 대의를 저버린 사람들로 매도한다. 결국 정상적인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물밑 교섭과 인기투표에 기하여 후보를 단일화하는 과정들이 유권자들로 하여금 최선의 선택지를 보장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건의 반추 혹은 재구성?


장면 1.

귀여움만 받으면서 크던 부잣집 막내도련님의 변덕이었을지, 혹은 머슴처럼 부리던 노동자들에게 인사만 받던 굴지의 대기업 총수 출신으로서 2인자가 되는 것이 자존심을 긁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자서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진실로 원대한 정치적 전망 때문이었는지 그 내막을 알 바는 없으나, 2002년 대선 하루 전 정몽준은 노무현과의 단일화 합의를 파기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그 순간부터 휴대폰에는 생전 연락도 없던 어떤 녀석들의 문자질이 쇄도하기 시작했고, 전화가 걸려왔다. 온라인이 뒤집어졌고 티비를 비롯한 방송에서는 유시민, 문성근, 명계남 등의 절규가 쏟아져 나왔다.

민주노동당의 당원이었던 내게 날아온 문자들은 야권의 승리를 위해 이번에는 노무현을 찍어달라는 내용으로 일관되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던 선배, 후배, 친구들이 전화를 해서 “네 입장은 알겠으나 이번만은 노무현을”이라고 하소연하거나 협박을 해댔다. 유시민은 민주노동당 당원들을 향해 대승적 결단을 해달라고 요구했고 다른 유명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그들은 민주노동당의 후보가 아니라 노무현을 찍어달라고 민주노동당 당원들에게 협박에 가까운 호소를 해야 했을까?


장면 2.

2010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돌이켜보자.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에게 진작부터 압박이 들어왔다. 오세훈을 낙선시키고 야권이 승리하기 위해 한명숙 민주당 후보에게 서울시장을 양보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노회찬이 서울 시장으로 당선될 가능성이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세훈과 한명숙 간 박빙의 상황이 예견되면서 단일화에 대한 요청이 거세졌고 실제로 중간에 조율과정이 있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진보신당은 독자후보로 서울시장 선거를 치르기로 결정했고 실행에 옮겼다.

개표가 진행되기 시작하자 진보신당 당직자들은 엄청난 항의전화를 받아야 했다. 노회찬 때문에 한명숙이 오세훈에게 지게 생겼다는 항의였다.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와 여기 저기서 항의하는 상대방에게 응대하는 당직자들의 목소리가 엉켜 거의 아비규환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지 않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막 그때부터 한명숙의 득표가 오세훈을 앞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적은 오래가지 못했고, 진보신당의 당직자들은 개표일 이후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걸려오는 항의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47.4%의 득표율을 얻은 오세훈이 46.8% 득표율에 그친 한명숙을 간발의 차이로 이겼고, 노회찬은 3.3%의 득표에 그쳤다. 항의전화의 요지는 바로 이 3.3%에 있었는데, 만일 노회찬이 후보단일화에 합의했으면 한명숙이 오세훈에게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라는 계산에 근거한 것이었다. 졸지에 노회찬은 야권패배를 초래한 흉적으로 전락했고 진보신당은 ‘민주세력’의 공적이 되었다.


장면 3.

그것이 선의였느냐 아니었느냐, 즉 고의의 존재 여부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박명기에게 돈이 갔고 그 돈이 곽노현으로부터 나갔다는 사실관계만이 법적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232조 제1항 제2호의 규정을 어겼느냐 어기지 않았느냐 만이 죄의 여부를 가리는데 기준이 될 뿐이었다. 

해당 조항의 규정은 “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것을 중지하거나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 후보자가 되고자 하였던 자나 후보자였던 자에게 제230조(매수 및 이해유도죄) 제1항 제1호에 규정된 행위를 한 자 또는 그 이익이나 직의 제공을 받거나 제공의 의사표시를 승낙한 자”에 대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매우 강력한 처벌규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범죄의 구성요건에는 고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규정은 사후에 고의가 발생할 수 있다는 논리로 되어 있다. 이 사건에서 곽노현은 박명기 후보에게 교육감 선거 전에 이익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면서 사퇴를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교육감 선거에서 곽노현이 당선된 후 소위 ‘단일화 세력’의 압박에 의하여 후보를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박명기의 궁핍한 사정에 대하여 동정을 느낀 곽노현이 사후에 금전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익은 제공되었고 그 이익의 성격이 대가성을 가진다고 판단되기에 사전에 그 사실에 대한 인식이나 고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법 규정에 따라 범죄가 성립된다. 이러한 구조는 범죄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구성요건론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따라서 곽노현은 법원으로부터 유죄의 판결을 받았고 현재 상고가 진행 중이다.


장면 4.

민주통합당 당대표 선거에서 김한길 후보에게 간신히 승리하면서 겨우 체면을 살린 이해찬 민주통합당 당대표가 야권의 강력한 대선후보로 부상하고 있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원장에게 7월 20일까지 민주당 입당여부를 결정하라는 최후통첩을 날렸다는 기사가 유수의 언론매체에 6월 20일자로 올라왔다. “민주당 대선 후보가 야권 단일 후보가 돼야 하며 정권 교체는 정당정치로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 이해찬의 논리였다.

정당정치의 복원에 대한 그의 열망에 대해서는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겠으나, 이해찬의 이 말을 달리 보면 민주당의 승리를 통한 정권교체를 위해서 안철수는 민주당원이 되든지 아니면 민주당 후보에게 양보를 하던지 결정을 내리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 더 적실하게 말하자면 안철수가 민주당 중심의 대선 야권후보 단일화에 응하지 않는다면 정권교체 실패의 책임이 안철수에게 있다는 협박이다.


앵벌이 정치의 본질 "될 놈 밀어주자"


각각의 에피소드는 다른 시기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각각의 문제들이 가지는 본질은 단 하나다. 이 모든 사태가 “될 놈 밀어주자”는 발상에서 출발한다는 것. 

2002년 대선과 2010년 지방선거의 경우 그 결과는 달랐지만 군소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에게 가해졌던 압력은 투표가 진행되기 전까지 후보를 단일화하자는 것이었다. 곽노현 교육감 사건의 경우 만일 박명기 후보가 끝까지 교육감 선거에 임했다면 애초부터 발생할 일이 없었던 일이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준비했던 박명기 후보가 아니라 갑자기 일군의 집단과 함께 후보로 등장하면서 단일화를 요구했던 곽노현 후보측이 아니었다면 박명기가 사퇴할 일도 없고 나중에 금전을 제공할 일도 없었다. 이해찬의 안철수에 대한 공세는 오로지 이 땅에 새누리당과 대적할 정치세력은 민주당밖에 없다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임과 동시에 단일화라는 카드 없이는 독자적으로 새누리당과 대적하기 힘든 민주당의 열악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제5공화국 군사정권에 조종을 울리려던 1987년 대선에서부터 우리 사회는 하나의 불문율을 갖게 된다. 소위 ‘단일화’라는 용어로 귀착되는 이 규율은 보수우파진영에 대한 승리를 위해 진보좌파진영은 언제나 후보를 한 사람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비판적지지”라는 형용모순의 용어를 일종의 유행처럼 만들어버린 이 단일화의 논리는, 실질적으로는 적대적 대척관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진영 내에서 힘 있는 세력이 모든 자원을 장악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본질적으로 반민주적인 발상이 한 세대를 넘어 온존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한국 사회 내에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수구세력에 비해 민주세력과 좌파세력이 각각의 힘으로는 대적하기 어려운 열세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구조로 인하여 과거 열린우리당, 현재의 민주통합당 등이 주요선거시기마다 자행하는 이 협박정치 내지 앵벌이정치가 상당히 약발이 먹힌다. 하지만 아닌 말로 과거의 민주노동당이나 현재의 진보신당이 대선후보나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다고 한들 그 선거의 장에서 이들이 거두는 득표율이라는 것은 사실상 대세에 영향을 끼치기 어려운 정도에 불과하다. 그 결과 2002년 대선 전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민주노동당의 양보를 호소하던 유시민은 대선이 끝난 후 민주노동당의 영향은 별로 없었다고 눙치고 지나갔다. 2010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명숙의 경우 사실상 3.3%에 불과한 노회찬 지지표 때문에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수준에 비해 과도한 지지를 얻었던 것에 대해 미안해해야 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될 놈 밀어주자는 것에 불과한 단일화 논의가 횡행하는 것에는 승리를 하건 패배를 하건 간에 ‘될 놈’이었던 자들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효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될 놈’들의 입장에서 승리를 자신들의 능력으로 돌리고 패배에 대해선 단일화를 거부한 한 줌도 되지 않는 무리들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 이 농간의 와중에 진보좌파정당의 입지는 87년 대선 이래 모든 선거에서 항상 백척간두에 선 채 자유낙하운동만 하지 않기를 바라는 처지로 전락했다. “비판적지지”, “통 큰 단결”, “구동존이(求同存異)”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포장된 앵벌이 정치는 결과적으로 진보정당의 발전을 억누르는 요인이 되어왔다.


최선의 선택을 박탈당하는 유권자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의 심각성은 또 다른 곳에 있다. 바로 이 앵벌이정치가 민주적 정당성이라는 일정한 가치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수가 극히 적은 진보좌파정당의 심정적 지지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에게는 최선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선거 특히 대선은 항상 최선이 아닌 차선, 혹은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도록 이들을 강제했다. 물론 끝내 자신의 신조를 지키면서 진보좌파 후보를 선택한 이들은 자신들의 표가 말 그대로 “사표(死票)”가 되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거기다가 행여 ‘민주화 세력’의 후보가 보수우파 후보에게 패배라도 하면 자신들이 원한 후보를 끝까지 지지했다는 자부심은 패배에 일조한 것이 아닌가라는 자책감으로 대체되기 일쑤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왜 자신의 신조를 견지한 사람들이 패배에 대한 자책감을 가져야 하는가?

선거가 치러지기 전 정치세력 간의 합종연횡을 통해 이루어지는 후보 단일화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없도록 강제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념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을 대의를 저버린 사람들로 매도한다. 결국 정상적인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물밑 교섭과 인기투표에 기하여 후보를 단일화하는 과정들이 유권자들로 하여금 최선의 선택지를 보장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유권자들은 차선이나 차악을 선택하기 전에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이 문제는 좌우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제도정치 안에서 자신들의 정치역량을 발휘하고자 하는 자들이라면 좌우를 막론하고 유권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임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이 땅에서 한 가닥 하는 거대정당의 정치인들은 야합과 합종연횡을 정치적 기술로 포장하고 유권자의 선택권을 박탈하면서 군소정당의 앞길을 막거나 자신들의 양분으로 흡수해갔다.

바로 이전의 글(“투표할 수 없는 계급에게 투표권을” – 정치신문 R, 6월 20일자)에서 언급했듯이 유권자들의 권리행사가 방해되는 지금의 현상들은 무엇보다도 제도에서 연유하는 바가 크다.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는 또 다른 형태로 “투표할 수 없는 계급에게 투표권을” 제공하는 제도이다. 앞에서 보았던 최선의 선택을 처음부터 박탈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성 거대 정당들과는 다른 계급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로 하여금 현실정치의 긴박함을 이유로 자신과 다른 계급의 의사를 대표하는 자들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하도록 하는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든 실질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든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따라서 “투표할 수 없는 계급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자는 취지의 공직선거법 개정운동이 왜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로와 관련되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은 이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겠다.

한편 왜 지금 이 시기에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거듭 시의적 상황에서 이 제도의 도입을 요구하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이라는 답이 가능하다. 공직선거법 전체의 완전한 개정을 준비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것이 단지 기계적 제도론의 관점에서 제기되는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운동의 차원으로 제안되는 문제라고 할 때, 당장 운동의 촉발을 위한 기제로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 도입은 의미가 있다.


결선투표제 도입부터 시작하자


현재 각 정치세력들은 이 문제에 대해 일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 정도와 방향성은 각각 다르다. 예컨대 새누리당 내의 친박과 비박은 입장에 따라 결선투표제 도입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며, 안철수를 경쟁상대로 인식할 수 있는 민주통합당의 입장에서는 사전 단일화가 아닌 결선투표까지 안철수와 대결할 때 자신들의 유불리를 따질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제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선투표제가 도입되어야 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한다는 것은 정치적 책임의식을 결한 태도이다. 무엇보다도 유권자들의 참정권을 제대로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가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하며, 보수와 진보 혹은 우파와 좌파 어느 쪽에 유리한 제도인가를 저울질하는 수준에서 논의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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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0 16:17 2016/10/2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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