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관계법 전면 개정 운동을 제안한다 - 1차 보고서 제출과 그 과제(2012년11월20일)

2000년 7월의 기억

공직선거법을 비롯한 정치관계법에 대해 진보신당은 그동안 제대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선거시기마다 공약사항으로 정치관계법 개정에 관한 내용을 약방문의 감초처럼 끼워 넣긴 했었다. 또한 틈틈이 공직선거법의 일부 조항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 외에 정치관계법이 진보정당 운동에 어떤 걸림돌이 되는지에 대해 평상시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것을 운동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소위 변혁적 정치운동에 자신의 정체성을 맡긴 정당의 입장에서, 제도권 진입에 치우친 듯 보이는 공직선거법 등 정치관계법에 대해 관심을 쏟는다는 것이 어색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제도개선을 통한 원내진출 또는 집권환경 조성 등은 그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한 개인적인 공감과는 별도로 당 차원의 의제화 혹은 운동조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자세를 견지하는 한 진보신당 혹은 이후에 등장할 어떤 진보정당도 집권은커녕 원내진출 역시 요원할 뿐이다. 

정치제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사회적인 의제로 만드는 것이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과거의 어떤 사건을 상기해보자. 2000년 7월에 민주노동당은 소선거구제 단순다수대표 선출방식의 지역구 국회의원 제도가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하며, 각 정당의 전국득표율과 의석수의 불균형을 야기한다는 취지의 헌법소원을 제출하였다.
 

20120828025050_4161.jpg▲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출처: 헌법재판소 홈페이지)


이에 대하여 2001년 7월 19일 헌법재판소는 당시까지 ‘전국구’ 의석배분의 근거가 되었던 단순 1인 1표제가 위헌이라고 결정하였고, 이 결정에 따라 2002년 3월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면서 그해 6월 지방선거에 처음으로 정당명부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2004년 총선에서 1인 2표 정당명부제를 도입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진보정당이 원내 의석에 집착하고 권력지향적 사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입장에서, 제도개혁에 대한 논의의 집중은 이질적인 동시에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입성 이후 현장과 결합된 운동이 퇴색하면서 입법활동에 천착하거나 이와 동시에 정당정치과 관료화되는 과정을 겪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다. 게다가 원내 의석확보라는 것이 자칫 당의 정치활동을 명망가 위주로 구조화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고 실제로 그 폐해를 감당해야 했기에 그러한 우려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제도권 정당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우리의 정책을 실물화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원내진출이 필요하며 집권의 목표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내적 역량의 강화를 비롯한 수다한 과제가 있을 것이나, 그와 동시에 진보정당의 성장 및 강화를 가로막고 있는 제도에 대하여 전면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제기된다. 민주노동당 당시 헌법소원과 위헌 결정, 그리고 이를 통해 원내에 진입할 수 있던 과거의 사례는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역사적 전거이다.


이제 겨우 1차 보고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진보신당 정책위원회는 지난 8월 23일 “공직선거법 개정운동 제안을 위한 제17대, 18대, 19대 총선투표율 분석 및 공직선거법의 문제점 파악과 개선방향 검토 1차 보고서”(이하 1차 보고서)를 작성 제출하였다(1차 보고서는 진보신당 홈페이지 정책위원회 정책게시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1차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1) 17~19대 총선에서 읍면동 별 투표율 경향분석 및 시각화 작업, (2) 공직선거법, 정당법 및 정치관계법 등 정치관계법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 제기, (3) 투표율 제고 및 국회의원 선출방식 변경 등 정치관계법 개선 방향 제시, (4) 대안을 현실화하기 위한 당 차원의 운동 제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1차 보고서에서 중심적으로 진행한 작업은 17~19대 총선에서 각 읍면동 별 투표율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시각화한 것이다. 즉 읍면동 지도를 이용해 개별 읍면동이 각 총선 때마다 투표율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그래픽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지도는 newjinbo.org/vote 사이트로 접속하거나 혹은 당 인터넷 기관지 R-Zine 메인화면 우측 하단의 ‘읍면동별 투표율 지도’ 배너를 통해 이용할 수 있다.

투표율 경향을 지도를 이용하여 확인한 결과 나타난 우선적인 특성은 도시지역의 투표율이 낮고 산간도서의 투표율이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은 이미 익숙한 것이어서 특별한 결과라기보다는 기존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중심부지역과 주변부지역 및 그 외곽지역의 투표율이 일정한 경향을 나타내면서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20120828025457_8493.jpg▲ 제19대 총선 경기지역 읍면동 투표율

왼쪽 지도는 19대 경기도 지역 읍면동 단위 투표율을 나타낸 것이다. 색이 진할수록 투표율이 높고 색이 옅을수록 낮은 투표율을 나타낸다(보다 명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는 newjinbo.org/vote사이트를 이용하시라). 서울, 인천은 본 지도에서 빠져 있다. 그런데 서울, 인천의 주변부 및 안산 등 공업단지 지역은 경기 북부 및 동부와 비교할 때 투표율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타 도의 경계지역일지라도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도로 등의 인접지역 및 거점 도시가 있는 지역의 투표율이 떨어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17, 18, 19대 총선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향의 주원인으로 노동자들의 투표권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가능하다. 즉 대도시의 위성지역들 혹은 공장 등 산업시설 밀집지역이나 이 지역으로 통근하는 노동자들의 배드타운 등에서 투표율이 떨어지고 있는 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1차 보고서는 이러한 가설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만한 근거를 확보하는 데에 실패했다. 통계청 등의 자료를 가지고서는 의미 있는 상관관계를 도출해낼 수 없었다.


투표율이 떨어지는 이유

다만, 이와 관련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자료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다음의 표를 확인하자.
 

20120828025832_3518.jpg▲ 각 총선에서 투표를 하지 않은 이유(자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5대 총선에서부터 19대 총선까지 유권자들 중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투표를 하지 않은 이유로, 더 정확히는 하지 못한 이유로 직장 및 생업 등으로 바빠서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전체의 30% 이상에 육박한다. 18대 총선에서는 30% 이하를 기록했지만, 최근 총선에서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17대 선거에서조차 직장 등 생업문제로 투표를 하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37.7%에 달한다. 총 유권자 대비로 환산하면, 19대 총선의 경우 4천만을 넘는 전체 유권자 중 730만 명에 달하는 유권자들이 먹고 사느라 바빠서 투표를 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보다 면밀한 실사와 분석을 통해 실증적인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는 숙제는 남았지만, 1차 보고서는 특정한 지역에서 투표율이 항상 제자리를 맴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자료를 결합한다면 최소한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황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투표율이 떨어지는 이유는 또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19대 총선 유권자 의식조사만 보더라도 명백한 것은 유권자들이 선거에 참여할만한 동기유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i) 정치나 선거에 관심이 없어서, (ii) 투표를 해도 바뀌는 것이 없어서, (iii) 찍고 싶은 후보자가 없어서, (iv) 정치인에 대한 불신 때문에, (v) 투표를 해도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못해서와 같은 이유로 투표를 하지 않은 유권자의 비율이 52%에 달한다.

19대 총선 전체 유권자 중 비율로 환산하면 물경 950만명이 넘는 유권자들이 정치혐오 또는 정치적 무관심을 이유로 투표를 기피했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의 이러한 인식은 물론 기성 정치인들의 구태로 인한 것이 크겠으나, 제도적으로 공직선거법이 유권자들의 정치참여를 유발할 수 있는 다양한 기제들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현행 공직선거법이 각종의 방식으로 선거운동 및 정치활동을 제한함에 따라 유권자들의 관심을 일으키는 것이 원천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소선거구 단순다수득표제 지역구 의원선출방식은 유권자들의 선택권을 부당히 제한하면서 투표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욕을 꺾어버린다.


2차 보고서를 향하여

공직선거법 뿐만 아니라 정당법이나 정치자금법 역시 마찬가지다. 정당의 당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부당히 제한하고 정당의 정치활동에 각종 규제를 정하고 있는 정당법, 국고보조금 지급의 당비연동제 등을 택하지 않고 있는 정치자금법의 문제 등은 여전히 진보정당의 발목을 잡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차 보고서는 이러한 부분들에 대하여 깊이 있는 논의를 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러나 1차 보고서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한계를 당 차원의 운동을 통해 극복하고 철저한 분석을 통해 완전한 대안을 구성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1차 보고서는 중앙당 차원에서 정치관계법 개정을 당 사업으로 채택하고, 중장기적인 활동 계획을 수립하여 당협과 실사 등의 작업을 진행하면서, 사회운동진영과 교류 및 소통을 통한 여론화와 의제화를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한다.

2012년 총선을 경유하면서 시민사회에서는 공직선거법 등 정치관계법 개정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이미 지난 몇 차례의 글에서 밝혔듯이 결선투표제 도입에 대한 논의는 시민사회단체들과의 교감 속에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 있었고, 그 결과 벌써 입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물론 이처럼 예상을 뛰어 넘는 사업진행의 결과 애초 의욕했던 사회의제화 작업이 중단되어버린 문제도 발생했지만, 그만큼 현재 공직선거법을 둘러싸고 시민사회 등에서 느끼는 문제의식이라는 것은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한편 정책위원회가 1차 보고서를 발간한 후 공직선거법 등 정치관계법 개정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사회에서는 1차 보고서의 맥락과 거의 같은 차원에서 정치관계법 개정에 대한 여론화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 의제 선점의 효과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결국 시민사회의 선도에 끌려갈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인력과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재 진보신당의 여력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정치집단으로서는 유일한 위치에 있는 진보신당이 자신들이 제기한 문제를 자신들의 업적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또 다른 정치적 무능력을 보여주는 나쁜 사례가 될 수 있다.
 

20120828025747_4917.jpg▲ 19대 총선 정당득표율(출처 : 오마이뉴스 블로그 “이야기만들기”)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당 내에서 공직선거법 등에 대한 문제의식에 동감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당원 및 관련 전문가들이 최대한 빨리 결합하는 모임을 구성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 모임에서 정치관계법의 문제를 해소하고 진보정당의 활동이 더욱 광범위하게 보장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적 대안을 도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1차 보고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 보다 정교하게 교정될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게 될 2차 보고서가 한국 사회의 정치지형을 바꾸는 시금석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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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0 16:03 2016/10/2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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