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특집 ‘사회를 다시 만들자’ 노동당 제안의 의미
(2014년 5월 경)
"노동당의 제안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뭔가를 새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외면했던 것, 해야 함에도 주저했던 것들에 대한 반성과 실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윤현식 정책위원회 의장
기억은 정치적인 것이 되어야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에서 10시 경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힘에 겹든 아니면 복에 겹든 일상은 반복되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봄날의 어느 하루는 또 분주하게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날은 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악몽으로 잠재하게 되었다. 세월호의 참사가 벌어진 그날은 이념의 성향이나 먹고 사는 차이에 관계없이 사회 혹은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날로 기록될 것이다. 혹자는 한국사(史)가 그날 이전과 그날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그러한 판단이 과잉된 감정의 고양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을 분기점으로 만들어야 할 모종의 가치전환이 있지 않는 한 악몽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며 그 이후에도 무수하게 현실로 재현될 터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노동당은 “돈만 밝히는 세상은 침몰할 것(2014년 04월 22일, 당대표 담화)”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경고가 전혀 낯설거나 새로운 무엇이 아니었다는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노동당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파행적 폭주를 우려한 모든 사람들이 그 시원을 추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과거에서부터 이 경고를 계속해왔다.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것, 각주를 필요로 할 정도로 난해한 개념어이지만 적어도 그것이 몰고 온 파국의 실체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경쟁지상과 시장만능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강요하는 자본의 욕망이 사회구조 자체를 해체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했던 주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가라앉고 있는 세계는 오히려 일상이 되면서 ‘정상화’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오늘이 계속된다는 자위로 불안을 대체했다. 세월호 참사는 그 안심이 허구였으며 이미 우리의 일상이 침몰하는 중임을 폭로했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단순히 망각의 거부만으로 끝난다면 변화는 없을 것이다. 기억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연결되어야 한다. 각자의 기억이 온전히 개인만의 것으로 남게 된다면 우리는 라쇼몽(羅生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이야기꾼의 위상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해양인명사고 기록의 한 줄로 세월호 참사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이 작업은 절실하다. 물론 당면한 과제는 참사의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보상과 추모가 될 터이고, 이러한 과정이 사회적 치유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게 되면 세월호 참사는 단일사건의 국면에 머물게 되고 사회적 각성의 계기로 전환될 수 없다. 노동당이 “사회를 다시 만들자”라고 주장한 이유가 여기 있다.
‘공공의 적’의 편리함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후 참화를 수습할 의지도 능력도 보여주지 않은 정부를 보며 나온 말은 “이게 나라인가”라는 의문이다. 초기 골든타임의 구출실패, 탈출자 이외에 아무도 구조하지 못한 말 뿐인 구조작업,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경찰의 감시와 집회의 방해 등을 보며 사람들이 갖는 합리적 의문은 국가의 존재가치였다. 국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이 물음은 다양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세분하자면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우리는 근대 이후에 체계화된 국가라는 양식을 수용해야 하는가/수용하고 있는가, 국가 체제의 재구성을 고민해야 하는가 등의 의문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사진캡션: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물으며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진: KBS 뉴스 갈무리)
이 의제의 중요성을 포착한 정권은 예의 ‘국가개조론’을 사태에 바로 접목시켰다. 정권발(發) ‘국가개조론’은 국가체제의 재구성이라기보다는 국가체제의 공고화에 맞추어져 있다. 현재의 흐름으로 볼 때 그 저변에 깔린 목적의식은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를 믿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하고 있으니 국가를 믿으라는 강요에 주안점이 있는 듯 하다. 세월호 직후에 정권이 진행하고 있는 국가개조의 전개는 모든 책임을 유병언 일가에 집중시키는 한편, 관피아 척결이라는 다소 진부한 과제를 정권의 사활을 건 개혁의 과제로 등장시키는 것이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국가적 시스템의 총체적 교란과 왜곡이 아니라 일부 광신자들을 동원한 기업가의 타락과 이에 결탁한 몇몇 관료들을 목을 치는 수준에서 국가개조라는 과제는 달성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공공의 적으로 등장한 일군의 무리들은 엄격히 말해 국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국가 자체로 돌리지 않게 만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더불어 정치적 책임의 소재를 추궁하는 세간의 관심이 공공의 적에게 쏠리게 함으로써 정작 책임을 져야할 자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게 된다. 개인 또는 일부 국한된 집단을 공공의 적으로 돌림으로써 사회 전체가 져야 할 책임은 회피된다. 특히 그 책임의 한 복판에 있어야 할 정권은 아예 책임자를 가려내고 죄책을 묻는 심판자로 등극한다. 그 와중에 사실상 오늘의 문제를 배태한 근본적 원인인 사유화/영리화, 규제완화는 면죄부도 발부되지 않은 채 더욱 강력하게 진행된다.
결국 정권이 제시하고 있는 ‘국가개조’의 목적은 현 체제를 장악하고 있는 지배권력의 안녕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있다. 또한 지배권력 이외의 구성원들에게 체제에 대한 복종의 기제를 제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는데 주안점이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국가 개조의 숭고한 과정 안에 국민은 주체가 아니다. 개조는 정권이 알아서 한다. 국민은 그냥 지켜봐야 하는 존재이고 따라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 수동성을 강요하는 문구로 가장 적절한 것이 바로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방송이었다. 이로써 주권자로서 국민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가만히 있을 것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가.
가치의 전환, 가치체계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이게 나라인가?” 혹은 “국가는 어디 있었나?”라는 분노에 찬 의문이 직격하는 대상은 정부임에 분명하다. 즉 재앙을 몰고 온 무능과 무책임의 당사자는 국가라기보다는 정부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이 작동하는 범위가 바로 국가이다. 여기서 정부의 무능이라는 한계를 넘어설 대안의 창출이 필요해진다.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다면화 다각화 하는 사회의 확장에 부응할 수 있는 가치체계의 재구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정부의 능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의 도래에 따라 행정적 관리체계의 정상작동이 불가능해진 사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고민이 대두된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어떤 대안이 국가를 넘어설 수 있느냐이다. 정치적 의제와 정치적 과정이 국가행정과는 별개로 선언되고 조직되어 적대와 타협의 교합을 통해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더라도 결국 그 모든 내용의 안착화는 국가체계 내의 제도화를 거쳐야만 한다. 결국 국가와 사회의 상관관계를 염두에 두고, 단순히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대한 규탄과 척결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심과 참여가 정치적 힘으로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회의 재구성을 고민하자는 주장은 단지 기술적인 안전조치의 강화 정도로 의미가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전제로 노동당이 제시한 것이 “돈보다 사람, 이윤보다 생명”이었다. 핵발전이 초래할 미증유의 안전위협, 철도 등 공공부문은 물론 KT등 민간부문에서 노동자와 시민의 안전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민영화 및 구조조정,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등 장애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잘못된 제도, 의료 영리화 등 각종 문제의 배경에 사람보다 돈을 앞세우는 비정함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제는 가치의 전환이며 구체적인 실행방식은 재난예방과 재난대응을 축으로 안전사회를 설계하고, 대형재난대응, 핵발전 위협해소, 노동(산업)안전, 생활안전, 사회안전망(복지) 등 분야에 걸쳐 세부적인 점검과 대안마련이다.(그 구체적인 내용은 4월 29일 발표한 “사회를 다시 만들자” 제안서 참조)
노동당의 제안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뭔가를 새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외면했던 것, 해야 함에도 주저했던 것들에 대한 반성과 실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회는 없다”라고 선언했던 마거릿 대처의 무지를 그와 함께 영면에 들게 만들자는 것이다. 경쟁지상과 시장만능의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 소통과 나눔과 연대가 저변의 가치로 승인되는 다른 의미의 도약을 준비하자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가보지 못한 미래이기 전에 이미 오래 전에 예언되었던 현실을 먼저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다 하는 것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실천이며, 그 실천을 통해서야 “잊지 않겠다”는 말은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