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과 그 다음날
어젠 10.26 사건이 발생한지 꼭 4반세기가 지난 날이었다. 당사에서 밤 꼴딱 세우고 아침 뉴스를 보기 위해 인터넷에 들어가자 어제가 그 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행인이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신문마다 말 그대로 대서특필, 방송마다 난리가 아니었고, 이승복의 뒤를 잇는 반공소년이었던 행인은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세월은 흘러 흘러 오늘까지 왔는데, 국민학교 4학년 짜리의 걱정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으며,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측근에 의해 사살당한 이후에도 대한민국 힘든 세월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잘 견뎌왔다. 머리 큰 다음에 박정희가 민족의 태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전두환이 구국의 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난 배신감을 상당기간 간직하고 있어야 했다. 어쩔 거냐, 세상이 다 날 속였는데... 하긴 뭐 속은 게 어디 행인뿐이겠냐?
그러나 박정희가 죽은지 4반세기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은 박정희의 권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 프로그램 안에서 노동자의 피를 빨아 성장했던 재벌들은 커진 덩치를 앞세워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고 있고, 군사정권의 시녀로 호의호식 했던 자들은 나이 먹은 값을 하느라고 원로노릇까지 하고 있다. 반역수괴의 딸로서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수행했던 그네공주는 지금 제2정당의 대표노릇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박정희 향수는 그 묘한 노린네를 풍기며 흘러나온다. 조갑제의 펜 끝에서, 수구본산 한나라당에서...
그네공주는 아무래도 아버지의 후광만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계속 유지해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듯 하다. 그래서 의원사무실 안에 걸려있던 부친의 영정마저 떼어냈단다. 그러나 영정을 떼어낸다고 해서 아버지의 후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네공주는 아무리 애를 써도 박정희의 분신이자 재림이라는 사실이 오늘 국회 대표연설에서 증명되었다. 그네공주 자신의 입으로 이를 증명했다.
오늘 아침 그네공주는 헌법수호의 화신으로 변신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곧 헌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헌법에 대한 도전이며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란다. 그네공주의 이런 발언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그네공주의 독설은 자기 아버지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다. 박정희는 헌법을 존중하지 않았고, 헌법에 도전했으며 체제를 전복시켰다. 그리고 18년 동안 계엄령을 내리고 위수령을 내리고 긴급조치를 선포하면서 공포정치로 정권을 유지했다. 거기에 더해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을 항구히 보존하고자 공화국체제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내용으로 가득찬 유신헌법까지 만들었다. 지하에 있는 박정희, 귀한 장녀의 일갈을 들으면서 가슴이 뜨끔뜨끔 했을 것이다.
15세기 경국대전에 의해 헌법적 가치를 인정받은 정체성수호의 화신 그네공주는 이 참에 잔다르크역할까지 도맡는다. 잔다르크는 하느님의 성령을 받았지만 그네다르크는 죽은 아버지의 혼이 씌였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네다르크는 정부여당의 소위 4대 개혁입법을 싸잡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놈의 4대 입법의 여당안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 개혁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분분한데, 그네다르크는 그나마도 원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혈압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4대 법안들이 민생경제를 살리는 정치본연의 역할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수도이전이 먹고 사는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단다.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그네공주, 아버지의 위업을 맘껏 자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보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그건 그네공주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과거의 어느 독재자가 대대손손 그 위업이 빛날 정도로 경제성장을 일구어냈기에 그러한 지도자를 모시고픈 민중들의 열망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현실에 대한 기대가능성이 사라지게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될 수록 과거를 향한 지향은 더욱 강렬한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현실에 대한 기대가능성의 실종과 미래에 대한 불안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정경유착을 통해 개발독재의 혜택을 입었던 그 재벌들, 그 재벌들이 만들어 놓은 왜곡된 경제구조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이 요사스런 천민자본주의를 생성했다. 얘네들 배를 불려주기 위해 노동자, 농민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장본인이 다름 아닌 박정희였다. 그 박정희가 효과적으로 반대세력들의 비판을 차단하고, 노동자 농민이 감히 자본가들에게 대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했던 짓이 간첩조작, 민주인사 테러와 같은 더러운 행위들이었다. 그리고 이 더러운 행위들을 위해 동원했던 법이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과거사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승만이 정권을 잡은 이후 친일부역행위에 대한 적절한 평가나 처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419가 있었다. 그런데 419가 제대로 꽃도 피워보기 전에 그 잘난 혁명을 그네공주의 부친께서 진행하셨다. 419로 인해 무슨 위해라도 입을까 전전긍긍하던 친일부역세력들 곧장 혁명정부의 둘도 없는 전위대로 변신, 생존에 성공한다. 어디 생존에만 성공했는가? 기왕 살아남은 길에 대대손손 자신들에 대한 도전이 없도록 하기 위해 반대세력들이 솟아올라올 구멍들을 다 막아버렸다.
덕분에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그 자손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완전히 막혀버렸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거지된다는 속설이 해방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불멸의 원칙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거 도대체 누구 덕분인가? 그네공주의 잘난 부친 덕분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그네공주야 부친 잘 만나 잘 먹고 잘 산 덕분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겠지만, 입장 바꿔놓고 생각 한 번 해보길 바란다. 그런 말을 그리 쉽게 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네공주, 또다시 공포분위기 조성한다. 국보법 폐지되면 거리에 인공기가 날려도 막을 수가 없고, 주체사상을 가르쳐도 막을 수가 없고, 친북활동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단다. 바로 그거다. 거리에 인공기가 사라지고 주체사상을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친북활동은 사형을 해도 무방한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바로 박정희이다. 아버지의 업적이 존중되지 않는 한 자신의 권력 역시 존속되지 않을 것임을 잘 아는 그네공주의 입장에서 이렇게 위대한 아버지의 업적을 무위로 돌리려는 세력들은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거리에서 인공기 날리는 것을 왜 막는가? 그냥 한 번 쳐다보고 갈 일이다. 거리에서 성조기 날리는 것은 왜 안막는데? 주체사상 가르치는 것을 막을 일이 아니라 주체사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연구와 논리로 이에 대응하면 될 일이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나라에서 특정 사상은 아예 입에도 올리면 안 된다는 이 파쇼적 발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친북활동을 해도 정도를 벗어난 행위를 하면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다. 누가 그런 것까지 처벌하지 말라고 하는가? 그러나 친북활동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처벌되어야 한다면 뽀글장군 손까지 잡고 온 그네공주는 왜 처벌되면 안 되는가?
흥분한 그네공주 오버페이스를 하고 만다. 정권이 국보법 폐지를 강행하면 한나라당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단다. 국보법 폐지가 싫으면 국보법 존속을 위해 투쟁할 일이다. 같잖게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는 이야기 하면 매우 웃긴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대한민국 지들이 지켰냐? 본인은 물론이고 자식들까지 병역기피 시킨 의원이 한나라당에 몇 명이나 되는지 세어보고 말 좀 했으면 좋겠다. 헌법 그렇게 좋아하는 한나라당이 어째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방의 의무는 죽으라고 피해다녔단 말이냐? 이것들은 그것도 모자라 자국방위에 전념해야할 정예 군인들을 차출해서 미국의 침략전쟁에 참여시킴으로서 국방력을 현저히 약화시키는데 일조하기조차 했다. 대한민국 위태롭게 만드는데 지금까지 선봉에 서왔던 것들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고 하면 소가 웃고 개가 사래들릴 일이다.
끝내 이데올로기 공세로 초지일관한 그네공주, 결국은 현 정부를 좌파정부로 규정하고 좌파적 노선을 철회하라고 일갈한다. 퍼스트레이디 노릇하느라고 공부 안 한 티가 난다. 티가 나도 너무 나서 문제다. 제발 부탁인데, 사회과학방법론이라도 함 훑어보고 좌파가 뭐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좀 했으면 좋겠다. 노무현정부가 좌파면 파리가 새다...
처음에는 그네공주의 연설문 전문을 입수해서 한문장 한문장 뜯어줄라고 했다. 그런데 대충 봐도 짜증이 솟구친다. 솔직히 말해 그네공주의 오늘 대표연설은 평가해줄 부분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완벽할 정도로 지가 뭔 소리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수업준비하고 있는 사이 티비를 통해 흘러나오는 대표연설을 보면서 사실은 하루의 기분을 다 잡쳐버리고 말았다. 특히 "국론을 분열시키는 모든 행위를 일체 중단하고, 정치권은 국민의 세금부담과 기업규제를 파격적으로 줄이는데 힘을 모으고, 노조는 파업을 중단하고, 기업은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최대한 힘써야 한다"말을 들을 때는 기가 찰 뿐이었다.
"국론분열행위 중단" 요구가 어떻게 지들 입에서 나올 수가 있나? 지들이 나서서 통과시킨 법을 하루아침에 위헌이라고 난리법석을 떨더니, 입법권이 무시되도 위헌만 되면 만세를 부르는 이 똘아이들 덕분에 얼마나 많은 국론이 분열되었나? 그런데 국론분열행위 중단하란다. 지들 스스로 하는 다짐인가?
노조는 파업을 중단하라고? 지가 파업하는데 한 번이라도 와 본 적이 있나? 노조원들하고 이야기 한 번 해본 적이 있나? 그 엄혹한 70년대에, 전태일이 분신할 때부터 여공들이 똥물을 뒤집어쓸 때까지 지 손에 기름때 한 번 뭍혀본 적이 있었나? 정말 단 한번이라도, 단 한번만이라도 왜 21세기 오늘날에 릴레이로 노동자들의 분신이 이어지고, 단식투쟁이 이어지고, 거리집회가 이어지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었는가 말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파업중단하라고 하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런데 가만 보면 이 말들이 어디서 많이 듣던 말들이다. 국론분열때문에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다는 판단으로 나라를 살릴라고 군인들이 봉기했다. 이거 박정희가 한 말이다.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좌경용공세력들을 발본색원해야 대한민국이 살 수 있다면서 반공태세 강화를 국시로 삼았던 정부가 있었다. 바로 박정희 정권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했던 그네공주의 모든 말이 사실은 18년 독재정권을 이어왔던 박정희 정권이 취했던 태도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다른 점이라면 박정희는 권력을 쥐고 지가 했던 말을 폭력으로 실천했다는 것이고, 그네공주는 부친의 실천을 밑천삼아 공포라는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는 것의 차이일 뿐이다.
그네공주의 오늘 발언은 고스란히 무덤에 들어가 있는 박정희에게 돌려줄 이야기들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한나라당 수령인 그네공주가 망자 부친의 볼기를 곤장으로 심하게 내리친 것이다. 김병연은 조상의 죄를 묻는 글로 명성을 얻었으나 이를 부끄러워한 나머지 평생 삿갓을 쓰고 살았다. 조상이 아무리 죄를 지었기로서니 후손으로서 조상의 볼기를 치는 일이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방예의지국 자손으로 김삿갓의 호연지기를 이어받은 한민족 불세출의 영웅 박정희의 따님은 지 아버지 볼기를 치고도 매우 떳떳하다. 쪽팔린 줄을 모르는 것이다.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그네공주의 아버지, 지금 심히 둔부에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만큼으로 끝났지만 내일은 또 어떤 건수로 자기 딸에게 곤장을 맞을지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 모른다. 천하에 불효막심한 사람같으니, 아버지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이제 아버지 궁둥이 주어 패는 짓 좀 그칠 생각이 없는가?
기억력 좋으시네요..초등학교 4학년 시절을 기억하다니..
산오리는 대학교 다니면서도 아침에 8촌 형님한테 전화받고 박통이 죽었다고
박수치면 좋아했던 기억만 있네요...
호홋... 그게 세대별로 느끼는 감정이 달랐던건지 아니면 그렇게 감정이 달리 느껴지도록 교육을 받은 거였는지 모르겠어요. 전 글쎄 펑펑 울었다는 거 아닙니까?? ^^;;;
"사회과학방법론이라도 함 훑어보고 좌파가 뭐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좀 했으면 좋겠다. 노무현정부가 좌파면 파리가 새다..."진짜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재미있으시네요. '파리=새'ㅋㅋ
이제사 진보블로거들이 행인님의 광적인 팬들이 되어가는 이유를 알 수 있을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 왕팬할께요~
중요한건, 그네공주가 죽는다해도 여전히 바통을 이어받을 '줄'(?)은 사라지지 않는 끔찍한 현대사가 펼쳐질거라는 '예감'까지..ㅡㅡ
스머프/ 어어... 쑥스... 저도 가끔 그런 예감이 스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갑갑해져요. 에혀~~!
제가 현재 총학생회 선본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대세에 따라 IT관련 공약이 나올 수밖에 없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모바일캠퍼스의 경우처럼 정보인권에 있어서 취약한 부분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약자료집이 나오게 되면 관련 부분을 보내서 검토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지금 상당히 조심스러운 분야입니다. 그리고 조언을 좀 부탁드립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다른 학교에서도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인데, 학생들이 먼저 나서 모범적으로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실례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좋은 사례를 만드실 수 있을 겁니다. 연락은 finger@kdlp.org 로 메일을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