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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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인은 몇 분 선조들의 제사를 모신다. 종손이냐고? 그건 아니다. 기존의 관습대로 하자면 행인은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만 모시면 된다. 그런데 모시는 제사는 정확히 세 분이다.

한 분은 우리 아버지

한 분은 작은 할아버지

한 분은 외할머니...

 

 

2.

아버지야 뭐 당연히 아버지니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천상 노동자였던 아버지. 살아 생전 효도도 제대로 못했는데 항상 죄스러울 뿐이다.

 

3.

외할머니는 아들이 없으셨다. 왜정과 전쟁을 겪으면서 아들은 낳는 족족 젖도 못 떼고 죽었단다. 살린 딸만 6이었던 외할머니. 돌아가시면서 제사지내줄 사람도 없이 가신 것이 가장 안타까워야하는 이 견고한 가부장제 사회지만, 당연히 외손자도 손자. 내 대까지만은 제사봉양하리라고 모신 것이다. 뭐 그래봐야 제사상 준비하려면 어머니가 젤 힘드신 건 똑같다.



4.

작은 할아버지의 제사를 봉양하게 된 것은 사연이 있다. 어릴 적 시골 어르신들은 작은 할아버지가 6.25 당시 북한군에게 끌려가 생사를 모른다고 했다. 다들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어느날 할머니가 무당을 찾았는데 그 무당이 이 할배가 공산군에게 총살을 당했고, 자기 제사 봉양을 형님댁 작은 조카가 해줬으면 한단다고 신점을 주었단다. 해서 작은 할아버지의 제사를 덜컥 울 아부지가 봉양하게 되었고,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 행인이 제주가 되어야 했다. 그냥 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5.

그 해 여름... 1년 내내 비가 주룩 주룩 쏟아졌던 그 여름이었다. 행인은 산 속 깊숙히 들어가 있었다. 마을에서 뚝 떨어진 외진 곳에 있던 흉가에 들어가 혼자 그 해를 나고 있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산 속 생활을 정리하려고 맘 먹고 있던 어느 날 밤이었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곳인데 누군가 밖에서 인기척을 한다. "여기 누가 살우?" 하는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고향마을 어르신이다. "들어 오시죠." 하고 안으로 모셨더니, "아니, 그래 여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려?" 하고 어리둥절 하는 모습이다. 약주 한 사발 좋이 하신 모양이었다.

 

"저어 짝 길로 가는데, 여기 분명히 사람이 없거던. 그런데 불빛이 있더란 말이지. 그래 누가 사나 싶어서 와봤어." 그러시더니 무슨 사연으로 여기 있느냐고 물으신다. 저 마을 안에 아무개라 하시는 분 둘째 아들 큰 손주입니다, 그랬더니 아, 그사람 잘 알지, 알다마다하면서 연신 울 할아버지와 아버지 함자를 들어 말씀을 하신다. 당연한 일이다. 동네사람들이야 평생 한 곳에서 같이 살았던 분들이라 누구네집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다 아는 판이니까.

그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이 할아버지가 행인에게는 놀라운 이야기를 꺼내 놓으셨다.

 

6.

6.25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피맺힌 사연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작은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근동에서 수재가 났다고 평판이 자자했던 사람이란다. 공부도 많이 했고, 똑똑하기가 이를 데가 없어서 장래가 촉망되던 사람이란다. 그런데 어느날 전쟁이란 것이 터졌다. 6.25가 그것이었다. 전쟁이 났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피난갈 여지도 없이 인민군에게 쫓겨 산으로 들어갔단다. 그렇게 산 속에서 숨어 지내다가 초겨울이 다 되어 인민군이 물러가고 국군이 들어왔단다.

 

국군은 들어오자 마자 인민군에 부역한 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산골 깊숙한 촌동네에서 피난은 커녕 운 좋은 사람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살아 남았지만, 미처 산으로 도망조차 못 간 사람들은 꼼짝 없이 인민군들에게 붙들려 노역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국군은 그것이 강제 노역인지 뭔지 가리지도 않고 인민군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부역자로 지목된 사람들을 역적취급 했단다.

 

부역자 색출이 벌어지자 산으로 도망친 사람 중에 마을 이장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장이었기 때문에 국군의 색출작업이 더욱 가혹하게 진행되었는지도 모른다. 국군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한 자리로 모아 놓고 이장이 나타나지 않으면 모두 사살하겠다고 했단다. 상황이 급박하게 되자 이장을 데려오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그분이 작은 할아버지였다. 작은 할아버지는 워낙에 이 동네 사람인데다가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산속에 숨어 있던 사람이어서 이장이 어디 숨어 있을지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가보다.

 

이장만 데려오면 마을사람들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산으로 올라간 작은 할아버지는 결국 이장을 찾아 내려왔단다. 그런데 국군은 마을사람들을 풀어주는 대신 이장과 작은 할아버지를 함께 묶고 양평쪽으로 갔단다. 그리고 그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죽였다고 한다. 총으로 쏴죽였는지 생매장을 시켰는지 잘 모른다고 한다. 인심을 흉흉해지고, 부역자로 몰려 죽었다는 소문이 나면 연좌제로 당할 판이니 국군에게 끌려갔다는 말은 커녕 어떻게든 인민군에 의해 희생당하였다는 포장을 해야 의심을 받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7.

동네 할아버지는 담배까지 피워가며 연신 6.25 때 이야기를 해주셨다. 미군이 들어왔을 때는 온 동네를 다니면서 잘 타는 나무들만 골라서 가져갔단다. 제사상의 목기와 나무로 된 위패는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땔감이었다고 한다. 위패를 빼앗긴 어떤 마을 사람은 그게 한이 되어 내내 가슴앓이를 했다고 한다.

 

중공군은 애들이었단다. 동네에 여장부라고 불리던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산에 올라 칡뿌리며 나무 껍질이며 먹을만한 것을 캐어가지고 오니 왠 중공군 한 명이 방에서 이불을 꺼내 나오더란다. 아주머니가 지게 작대기를 들고 도둑놈 도둑놈 하면서 주어 패니 이 중공군 소년이 손을 싹싹 빌면서 뭐라고 하는데 그게 미안하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단다. 아주머니가 보니 한 겨울에 볼이며 손이 다 터서 피가 덕지덕지 앉았는데, 눈물까지 흘리면서 손을 비비는 이 소년이 너무 안스러워 식구 먹일려고 가져온 칡이며 뭐며 죄 꺼내주고 이불까지 등에 얹어주고는 같이 펑펑 울었단다.

 

8.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귀에 왱왱 울리는 것은 우리 작은 할아버지가 인민군에게 끌려가 총살당한 것이 아니라 국군에게 이유도 없이 끌려가 비명횡사를 했다는 것이다. 노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말할 수 없었다. 말 하기도 싫었을 것이다. 국군이 그런 짓을 했지만 인민군도 역시 그런 짓을 했었고, 미군도 들어와서 온갖 패악질을 다했으니까. 그러나 인민군 죽일 놈들이라고 이야기는 할 수 있어도 국군이나 미군이 죽일놈이라는 이야기는 금기였다.

 

전쟁이 끝난 후 20년이 훌쩍 지나서도 무당을 불러 인민군이 작은 할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또 이렇게 30년이 흘렀건만 그 때 죽어간 사람들의 한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국군이 그랬건 누가 그랬건 진상이 어떻게 밝혀진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의 한이 그냥 풀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묻혀 있는 곳이라도 찾아야 하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노인들이 다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이 묻혀 있는 곳이라도 물어봐야 하는데...

 

9.

제사는 올해도 지냈다. 그러나 자손된 도리는 아직 다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아직도 모르겠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제사상 모시고 있는 작은 할아버지도 그렇게나마 찾았으면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어떻게든 시작을 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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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5 23:28 2004/10/25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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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뭐든 시작해야지 하는 맘에 답답하시겠지만 그래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잘하시는 것 같아요. 어디서든 그 맘 받고 계실 거란 생각..저도 전쟁터에서 죽은 전선기자를 위해 술과 향으로 명복을 빈 적이 있는데...어쩜 산 사람을 위한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문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