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1

술먹다보면 참 다양한 술주정을 보게 된다. 꼭 술주정이라고 하기 거시기 하면 술버릇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런 거 말이다. 행인 역시 좋지 않은 술버릇이 있었다. 차차 공개한다. 아무튼 이 술버릇 때문에 즐거운 일도 있지만 그보다는 성질나는 일이 더 많기 마련이다. 술을 마시더라도 곱게 마시고 즐겁게 놀다가 가뿐하게 come back home 할 일이다.

 

술버릇도 천차만별이다. 술 퍼먹으면 꼭 노래를 부르는 넘, 퍼질러 자는 넘, 이유도 없이 방성대곡을 하는 넘, 어디다 전화해서 계속 궁시렁 거리는 넘, 완전히 레코드판이 되서 했던 말 열 댓번은 반복하는 넘, 화장실 안 가고 빈 맥주병에 오줌 싸놨다가 꼭 그거 마시는 넘... 벼라별 인간들이 다 있다.



덩치가 산만한데다가 목이 없고 코가 멧돼지를 능가할 정도로 강렬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넘... 별명은 고릴라였다. 얼굴만으로도 동네 캡을 먹을 정도의 심오한 인상을 지닌 녀석이었다. 나이 스물에 노가다판에서 30대 형님들에게 형님 소리를 듣던 - 얼굴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마흔은 넘어 보이는 것으로 착각들을 한다 - 불운의 청년... 고.릴.라...

 

그래도 이넘 참 착한 넘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릴라라고 불렀다. 듣기 좋잖아? 릴라. 고릴라와 릴라의 차이는 상당한 차이다. 회사 동료들이 "어이, 고릴라~!"하고 부르면 이넘 진짜 고릴라 같은 인상으로 쳐다본다. 그러나 우리덜이 "야, 릴라야~~!" 하면 그 순박한 얼굴로 씨~익 웃고 만다.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사람의 얼굴이 달라질 수 있다.

 

착하고 성실하고 행동이 의젓해서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듬뿍 주는 친구였다. 게다가 힘도 좋고 재주도 좋아서 일도 잘하는 그런 친구였고. 당연히 회사 안에서는 칭찬이 자자하다. 그런데 이넘은 자기 외모에 대해서 상당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 친구를 아는 사람들은 전혀 이 친구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지 않는데, 첨 보는 사람들은 자리를 피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릴라에게는 한가지 좋지 않은 술버릇이 있었다. 이 넘은 술을 마실 때 굉장히 조심했다. 많이 마시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다. 그러다가 자칫 꼭지가 돌 정도로 술을 마시고 나면... 어김 없이 이넘 주변에서는 피바람이 불었다. 술만 제대로 처먹었다 하면 싸움을 일으키는 거다.

 

싸움을 일으키는 방식은 별 거 아니다. 그냥 가서 어깃장을 놓으면 되는 거니까. 지나가는 연인들 사이에 끼어 들어 "야, 이 짜식은 니 애인감이 아냐, 당장 헤어져." 뭐 이러거나, 아니면 양아치 같이 생긴 녀석들 앞으로 가서 일부러 몸을 부딪치거나 욕지거리를 해대거나 "내 얼굴이 이상하냐?"라고 질문을 던지는 등 뭐 이런 정도였다. 그것도 아니면 술집 안에서 남의 테이블로 가 깽판을 놓거나...

 

이거 말리는데도 보통 힘 든 일이 아니다. 졸지에 죄진 넘이 되어 연신 머리를 숙이며 생판 첨보는 사람들에게 죽을 죄를 진 것처럼 사과를 하거나, 아니면 원치 않는 패싸움판에 엉켜 쌍코피를 터뜨리던지 아니면 마빡이 깨지던지 하는 매우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다음날 술 깨고 나면 이넘에게 욕을 바가지로 퍼 붓고, 이 고릴라같이 생긴 넘은 순박한 눈을 껌벅거리며 아, 미안타, 내가 왜 그럴까? 뭐 이런 대사 읊조리고 있고...

 

대부분 시비가 붙어도 이넘 인상이 워낙 거시기 해서 십중 팔구는 다 그냥 피해버린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피하는 것은 아니다. 자칫 큰 사고도 날 수 있다. 실제 그런 일도 있을 뻔했고... 그래서 우리덜, 이넘과 술을 마실 때는 이넘이 5분 이상 자리를 비우게 되면 비상에 돌입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와 무슨일을 벌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랬다. 누구 생일이었는가 그랬는데, 그거 핑계대고 또 한무리의 인간들이 몰려 앉았다. 동기들 여럿 있어도 사실 근무시간이 서로 처부마다 다르고 해서 잘 모일 기회가 드문데, 그날은 용케 꽤 많은 친구들이 모일 수 있었다. 거기에 우리의 쥔공 릴라도 껴 있었다. 기분좋게 술들을 들이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며 젊은 넘덜 답게 꽤 시끌벅적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원래 정해진 코스가 있다. 1차는 저녁을 겸해 소주를, 2차는 입가심으로 맥주를, 3차는 또 소주를, 이후에는 알아서 각개전투... 이 코스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2차를 마치고 자주 가는 주점에 소주를 마시러 갔다. 지하에 있는 조그만 실내포장마차였는데, 행인은 개인적으로 이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딴 넘들은 이집 주인하고 형님 아우 하면서 아주 자주 찾던 그런 곳이었다.

 

어쨌든 거기서 한참 또 술을 퍼마시면서 놀고 있는데, 릴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술이 취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걱정되는 마음에 "어디가냐?" 그랬더니 "화장실!" 딱 한마디를 뱉어놓고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화장실이 밖에 있었으니까. 릴라가 밖으로 나가고, 우리덜은 또 그냥 그렇게 퍼마시기 시작했다. 흥청망청~~

 

그러다가 문득 우리의 호프 릴라가 화장실 간 지 한참 지났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야 말았다.

"야, 릴라 아직 안 왔냐?"

"그러게? 이기 오바이트 하나?"

"야, 또 어디 가서 사고치는 거 아녀?"

"아, 설마... 걔 오늘 많이 취한 거 같지도 않던데?"

"어... 이거 아무래도 이상해, 야, 니가 함 화장실 가봐."

이렇게 해서 한 넘이 릴라를 찾으러 밖으로 나갔고, 우리들은 설마 뭔 일이 있을라구 하면서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잠시 후 릴라를 찾으러 밖으로 나갔던 친구가 후다닥 내려오면서 "야, 큰일 났어, 빨리 밖에 나와봐~!!"하며 소리를 지르는 거였다.

 

결국 사고가 났구나, 이렇게 생각한 울 친구덜 후다닥 밖으로 뛰어 나갔다. 우르르 몰려 나가서 보니 이넘의 고릴라가 길 건너편에 큰 대자로 뻗어 있는데, 정신을 잃지는 않았는지 계속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얼른 가봤더니... 말 그대로 피범벅이었다. 마빡은 완전히 터져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고, 양 손도 완전히 피로 떡이 져 있었다. 손을 보니 주먹이 깨진 상태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곳도 있었다.

 

"야, 빨리 구급차 불러라. 병원 가자."

그러고 있는데, 이넘의 고릴라,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놔, 병원 안 가. 내 이 @!%$^*&%&^%들을 다 죽여버릴 거야. 이 쉬바..." 그러면서 몸부림을 치고 난리 부르스를 추는거다. 입으로는 연신 열십자 들어간 욕을 뱉어내면서 말이다.

 

"얌마, 그러지말고 병원 가자. 가서 일단 치료를 좀 해야지. 병원가자."

그랬더니 이넘 죽어도 병원은 가지 않겠단다. 병원은 가지 않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어떻게 해야할질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그래 까짓거 저거 다쳤다고 죽기야 하겠냐, 어디 좀 들어가서 쉬게 해주자, 이렇게 합의를 보고 마침 그 넘이 쓰러져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여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길래 친구들이 영차영차 그넘을 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친구들이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고 행인은 다시 술집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전봇대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그리고 그 전봇대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피가 묻은 위치들을 보아 하니, 이 피들은 다름 아닌 고릴라의 것임이 분명했다. 이넘의 고릴라... 그렇게 술퍼먹고 쌈질을 하더니 결국 전봇대랑 한 판 붙었구나...

 

아직도 굳질 않아 반짝거리고 있는 그 피. 정확하게 고릴라의 마빡 부근에 피가 흠뻑 적셔져 있었고, 고릴라의 양 볼따구 부근에 주먹에서 터졌을 피가 또 묻어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럼 이 고릴라가 전봇대한테 시비를 걸고, 전봇대가 뻗뻗하게 서 있으니까 이걸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오밤중에 전봇대와 일대 격전을...?

 

다시 소주집에 모인 친구덜... 고릴라는 진정을 시켰고,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다가 금방 잠이 들었단다. 그러면서 의견이 분분했다. 도대체 언넘일까? 언넘이 저 고릴라를 저렇게까지 만들었을까? 이건 단독범의 소행이 아니다. 분명 근처에서 집단적으로 돌아다니는 양아치들이 벌린 일일 것이다. 혹시 아리랑치기 당한 거 아닌가? 이 근처 술집과 당구장을 죄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친구 릴라를 저렇게 만든 넘을 찾아 응징하자... 벼라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있었다. 듣고 있는 행인은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오는데, 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밝히게 되면 불쌍한 릴라의 앞날이 걱정되고 어쩔까 저쩔까 막 고민이 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런데 친구덜 분위기가 심상칠 않다. 원래 공장다니는 애들 성질 무척 급하고 더럽다. 이넘덜 이러다가 진짜 어디 당구장이나 술집 들어가서 양아치들 보면 당장 쌈 일으키고도 남을 것 같았다. 평화주의자(?) 행인, 이거 안되겠다 싶어서 자리를 정리했다.

"어이, 이거떨아, 저거 릴라 저게 쌈하다 저렇게 된 게 아녀."

"이 쉬파야,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 니가 봤어?"

"안 봐도 그림이야, 저거 혼자 생 난리치다가 제풀에 저렇게 된겨."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혼자 어떻게 주먹이 피떡이 되도록 쌈질을 하냐? 그리고 마빡 깨진게 저게 그냥 난 상처가 아냐, 누구한테 짱돌로 찍혔거나 아님 하여튼 뭘로 주어 터진게 분명해."

"그래 맞아, 저거 완전 다구리 당한 상태야, 보고도 모르겠냐?"

 

행인, 친구덜을 조용히 시키고 모두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예의 그 전봇대를 모두에게 감상시켰다.

"요기가 릴라 마빡을 깬 짱돌 되겠고, 요기가 릴라 주먹을 박살낸 다구리 되겠다, 이 닭대가리덜아... 괜히 어디 가서 쌈질할 생각 말고 조용히 술이나 퍼먹다 가라고, 응?"

친구넘덜, 어이가 없어서 입만 딱 벌리고 서있었다.

"잘 생각해봐, 원래 쌈질할 때 틈만 보이면 무조건 뭐가 날라가는 건데, 릴라 저넘 마빡하고 주먹만 깨졌지, 뽈따구가 깨지길 했냐, 가슴팍에 뭐가 묻기라도 했냐? 딱 이거야, 이 전봇대가 릴라 케이오 시킨 거야. 뭐, 꼬우면 니들이 이 전봇대에 복수를 하던가 말던가..."

 

그로부터 며칠 후, 릴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발 부탁인데 어디 가서 이 이야기 하지 말아달란다. 지도 가오가 있지, 이 쪽팔린 사실이 온 천지에 알려지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느냐는 거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하나, 오줌싸개와 주정뱅이는 그 실상을 온 천지에 알림으로써 잘못을 고치는 법이라고 이야기하고 전 회사에 이 사실을 알리고야 말겠다고 협박을 했다. 협박의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넘이 또 술 사고 고기사고 해서 배가 째지게 먹었으니까... 그러나 어차피 말은 새게 마련이고, 행인이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해서 오밤중에 고릴라와 전봇대의 한판 승부가 인구에 회자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지 십몇년이 지난 오늘, 행인은 또다시 블로그에다가 이 사실을 올려놓고야 말았던 것이다. 흠흠... 불쌍한 릴라여... 애들은 잘 크고 있는지...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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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31 15:17 2004/10/3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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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흐흠...나두 요즘엔 이상한 술버릇이 생겼는데..그게 모냐면..옆의 사람 찝쩍대는거^^
    그래서 3달정도는 금주하려고요~ㅍ_ㅍ(믿거나말거나)

  2. 호홋... 조심하셔야겠군요... 그래도 옆사람들이 다 이해해주지 않을까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