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가 위기?

누차 하는 이야기지만, 단군이래로까지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정치에 실질적인 관심과 참여를 시작한 이래 지금처럼 정부여당이 야당복에 겨운 시절을 본 적이 없다. 청와대의 정부와 더민당이 뭔 짓을 하든 자한당은 그 이하를 보여주는 수준에 머문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볼 것이다. 그 덕에 정부와 여당은 희희낙락할 수 있다. 보는 유권자의 복장이 터지거나 말거나.

이러한 관전평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오늘날의 상황을 훑어볼 수 있는 안목만 지녔다면 누구라도 하는 이야기다. 모두까기 인형으로 복귀한 진중권 역시 이런 현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대통령은 야당 복이 터졌다. ... 자유한국당이 제1야당인 한 더불어민주당은 아무 걱정이 없다."

경향신문: [진중권의 돌직구] 자유한국당 단상

상황에 대한 판단은 같은데, 이 칼럼에서 진중권이 이야기하는 보수의 위기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진중권은 한국의 '보수'가 좌빨딱지 붙이기와 '박정희 서사'만으로도 그 장구한 세월동안 처먹을 거 다 처먹을 수 있다보니 개념을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그동안 보수가 공포마케팅으로 제 사익이나 채워왔기 때문"에 결국 위기에 처했다고 보는 거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진중권이 이야기하는 '보수의 위기'는 진정 보수가 처한 위기상황인가? 진중권이 이야기하듯, "보수적 가치의 핵심은 '국가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에 있다." 이 명제에 의할 경우, 한국의 "보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바로 뒤따를 수밖에 없다. 진중권이 말하는 '국가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의 표본은 어디 있는가? 

적어도 이러한 전제를 충족하는 사례는 몇몇 민주당 계열의 인사들 중에서 희귀하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예를 들자면 최근에 와서야 진중권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그 평가를 높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노무현. 진중권이 제시한 저 기준에 따를 경우 이에 부합하는 정도라면 DJ나 노무현, 그리고 그 외 몇 몇 정도가 아닐지. 최근 들어 정치권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보수의 아이콘이라고 하면 금태섭 정도인데, 글쎄다, 이러한 판단에 누가 동의해줄지 모르겠다만.

문재인은? 추미애는? 이해찬은? 박지원은? 그 외에 이런 저런 사람들을 생각해봐도 선뜻 저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당연히 황교안이나 나경원 같이 자한당 그룹에 속한 자들이나 그 언저리에서 우왕좌왕하는 자들, 예컨대 유승민이나 하태경 등을 저 기준에 맞는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라나 모르겠다.

이 대목에서 물어보자. 조국은? 유시민은? 김어준은? 어라? 얘네들은 진보 아냐? 자기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자들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은 전형적인 보수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부수적이 되었든 아니면 주객이 바뀌었든 간에 이들이 '국가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의 덕목을 갖추고 있다면 역시 보수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조건을 대입하면 이들이 과연 이런 덕목을 갖춘 자들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이들은 사익을 위하여 국가공동체를 희생시킨 전형적인 반동들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저 진중권이 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들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 오히려 그동안 '진보'라고 자의반타의반 분류되어왔던 사람들이 저 올바른 보수의 조건에 부합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렇다면 이제 위기에 빠진 '보수'가 정작 진중권이 이야기하는 자들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예를 들면 진중권을 포함한 자유주의자들-는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진중권이 말하는 보수의 정의가 달라져야 하는지 아리송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썰로 풀자면 한이 없으니, 오늘은 여기서 일단락 하고,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정리할 것만 확인하자. 진중권이 말하는 위기는 '보수'의 위기라기보다는 '자한당'의 위기일 뿐이다. 자한당의 일부가 '보수' 축에 들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보수는 그 정의부터 다시 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보수'라는 어떤 지향이나 경향으로 뭉뚱그려서 이야기할 수가 없다. 진보 역시 마찬가지고.

그래서 어떤 비판을 할 때는 그 대상을 차라리 명확하고 한정적으로 확정하는 것이 더 낫다. 없는 보수 까는 건 허수아비 치는 거와 마찬가지니까. 진중권도 지금까지 숱하게 당해왔잖은가? 더민당 같은 부류까지 진보로 퉁치는 분류의 경향으로 인해 진짜배기 진보들이 도매급으로 욕처먹었던 거. 더나가 그냥 사회부적응자취급을 당했던 거. 물론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자일 뿐인 진중권이 좌익으로 분류되는 영광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걸 진중권이 바랬을 거 같지는 않고. 뭐 그렇다고.

덧: "황교안 전도사는 빤스 목사와의 관계를 끊지 못한다"는 표현은 진중권의 모두까기신공이 아직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문구다. 그런 의미에서, 진벙장 화이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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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0 09:40 2020/02/1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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