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미와 도덕성의 화신 이건희

2005년 3월 16일 삼성그룹은 ‘경영원칙’을 발표한다. 계열사 사장단이 죄다 모여서 진행한 행사에서 삼성은 “삼성인이 공유하고 지켜야 할 핵심가치 : Samsung Value”를 공표했다. 그 핵심가치는 인재제일, 최고지향, 변화선도, 정도경영, 상생추구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 5대 경영원칙은 1) 법과 윤리를 준수한다 2) 깨끗한 조직문화를 유지한다 3) 고객, 주주, 종업원을 존중한다 4) 환경, 안전, 건강을 중시한다 5) 글로벌 기업시민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였다. 여기에서 15대 핵심실천과제가 등장했다. 자세한 사항은 삼성 계열사 아무 곳이나 홈페이지 들어가 찾아보면 다 나온다.

삼성의 경영원칙은 소위 ‘삼성헌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헌법’이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감은 기업의 별칭에서도 다름이 없어서, 이 경영원칙은 현재도 삼성의 모든 계열사가 채택 및 시행 중이다. 이 ‘삼성헌법’만 보면 삼성은 더할 나위 없이 도덕적이고 인륜적인 기업이다.

그런데 이 당시, 즉 ‘삼성헌법’이 발표되는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그 유명한 삼성 애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의 사법처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삼성족벌 3대 세습의 터잡기 공사였다. ‘아파트 한 채 값’으로 세금을 퉁치면서 푼돈으로 삼성을 삼킨 이 독보적 범죄행각은 입법 행정 사법이 총동원되는 드라마 속에 ‘합법적’으로 종결되었다.

애버랜드 전환사채 건의 간략한 정황은 다음 기사 참고.
프레시안 - “61억으로 200조 재벌 삼킨 비결”

1995년에 벌어진 애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사건은 그 규모와 방식의 범죄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사법처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2000년에 법학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고발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사회적 의제가 되었으나 사법처리는 지지부진했다. 여론이 들끓고 나서야 2003년 12월 1일 서울 중앙지검이 허태학, 박노빈 등 전현직 애버랜드 사장을 불구속으로 기소했다. 공소시효를 하루 남겨놓고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나마 몸통인 이건희는 쏙 빠졌었고.

재판도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다가 2005년 1월 허태학 징역 5년, 박노빈 징역 3년이 구형되면서 귀추가 주목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은 사실관계에 대한 추가심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선고를 연기했다. 이 와중에 법원 정기 인사로 재판부도 바뀐다.

이 상황에서 발표된 것이 바로 삼성그룹의 경영원칙이다. 기실 그 이전부터 삼성은 이미지 쇄신을 위한 홍보 및 언론작업을 엄청나게 진행하고 있었다. 예컨대 애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고 본격적인 논란과 검찰조사가 이루어지던 2002-2003년 사이에 삼성은 사회봉사활동을 강화하고 봉사활동에 전사적 사원동원을 수행하는 한편 이전에 비해 엄청난 사회공헌지원금을 뿌려댔다. 물론 이건희나 이재용의 돈으로 한 건 아니고.

전방위적인 이미지 쇄신작업과 여론홍보의 결과였는지 모르겠으나, 삼성그룹 경영원칙이 발표된 얼마 후인 2005년 10월 4일 허태학 박노빈이 실형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는 것으로 1심이 종결된다. 이후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는데 결국 2009년에 애버랜드 전환사채 건은 무죄로 끝났다. 사법부에 의해 이건희와 이재용의 족벌세습이 공식적으로 아무 문제 없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사실 저 ‘삼성헌법’의 기원은 1993년 이건희의 신경영 원칙 천명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경영원칙은 이건희가 신경영을 주장하면서 내놨던 여러 이야기들을 체계화한 것이었다. 정확히 언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희는 신경영 원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인간미와 도덕성에 대한 그의 ‘경영철학’론이었다.

그가 직접 밝힌 인간미와 도덕성에 대한 생각 중 주옥같은 구절들을 좀 보면 이렇다.

“도덕성을 회복하고 인간미를 살리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영원히 2류, 3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무엇을 해내도 소용없다. 1조 이익을 낸다 해도 나는 반갑지 않다.”
“삼성의 제일 큰 문제점은 도덕성 결여다.”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기업에서 좋은 물건이 나올리도 없겠지만 설령 물건이 나오더라도 반가울 게 하나도 없다.”
“나는 법률을 위반할지언정 도덕은 위반하지 않겠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우리끼리의 약속이며 곧 ‘삼성의 헌법’이다.”
“삼성의 헌법, 우리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 약속을 지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집단과 나라와 사회를 끌고 가는 기본정신이 아니겠는가.”

이 아름다운 발언의 전문을 보려면 다음 기사 참조.
머니투데이 – 이병철은 논어, 이건희는 삼성헌법

이토록 훌륭한 어록을 남겼으나, 이 구구이 명언이고 절절이 절창인 말과 본인의 행동은 전혀 달랐다. 무노조원칙의 관철을 위해 노조파괴공작을 수시로 일삼았고, 노조를 만든 노동자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편법증여로 세습을 감행했고, 탈세와 배임을 밥먹듯이 자행했다. 그 외 무수한 일들이 많으나 일단 생략하자(시간 나면 함 정리해 볼란다만).

애버랜드 전환사채 건만 가지고 보자. 저 사건 어디에 도덕성과 인간미가 흘러 넘치는가? 범죄행위 일체를 설계하고 집행하면서도 죄과는 부하에게 뒤집어 씌운 저 기법에서 무슨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가? 그건 그냥 조폭의 습속에 불과했다. 인간성이니 도덕성이니 하는 말의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을지가 의문이다.

이제 느닷없는 이건희의 부고는 지난 애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을 돌이켜보면 매우 찝찝한 의혹을 남긴다. ‘촛불정권’이 들어선 후, 정부는 삼성을 감싸고 돌았고 사법부는 처벌을 빠져나갈 팁을 제공하는가 하면 여당은 삼성에 유리한 입법활동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와중에 이재용은 사법처리를 받는 입장에 처해 있고. 이건희의 부고는 그래서 삼성 승계가 완료되었다는 선언, 이재용이 질 부담은 이제 사라졌다는 신호로 보인다.

이건희와 그 일족에게, 인간미나 도덕성은 그냥 뭔가 감춰야 할 일이 있을 때, 포장지로 사용하기 위한 언술일 뿐이다. 이건희는 자신이 말한 도덕성과 인간미가 오로지 자신의 직계혈족에게만 적용되는 것일 뿐, “또 하나의 가족” 따위에게 적용될 도덕성과 인간미는 없음을 보여줬다. 백혈병으로 죽어간 노동자나 노조탄압에 항의하다 분신한 노동자에게 적용될 도덕성과 인간미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통상의 인간미와 도덕성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생명연장을 해오다 이제야 부고를 올렸다. 그들의 인간미와 도덕성에 기가 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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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6 14:18 2020/10/2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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