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유권자의 체감도를 높일 수 있어야
지선이 끝나고 이런저런 후일담이 나오는 가운데, 감초처럼 등장하는 구호가 있다.
"지역으로~!"
평가와 반성은 소중한 것이다. 그 소중한 과정을 거쳐 나온 결론은 훌륭하다. "지역으로~!" "브나로드~!" 얼마나 훌륭한 결론인가?
훌륭한 결론은 언제나 훌륭하다.
17대 국회에 민주노동당이 입성한 후, 급격한 원내중심 정치활동이 문제가 되자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결의와 함께 등장했던 의제가 바로 "지역으로~!"였다.
민주노동당이 분당할 시기, '진보의 재구성'을 전면에 내세웠던 일단의 그룹에서도 "지역으로~!"는 중심적인 과제 중 하나였다.
갈라진 진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며 통합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도 "지역으로~!" 였고, 시즌 2 성격이었던 결집을 주도했던 사람들 역시 명분 중 하나로 "지역으로~!"를 내세웠다.
군소정당의 지역거점이 법률에 의해 붕괴되어버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략적 과제로 제시되었던 '민중의 집' 사업이 내걸었던 구호 역시 "지역으로~!"였다.
훌륭한 결론은 언제나 반복되는데, 이게 늘상 새롭다. 이 새로움은 왜 번번히 느껴지는 걸까?
우선, 이런 결론이 반복되는 이유는 어쩌면 때마다 말만 이렇게 해놓고 실상은 지역이고 나발이고 공중전만 하다가 진력을 다 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만 보면 꼭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이번 지선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신 재선 또는 삼선 나섰던 사람들은 물론, 새롭게 도전해보겠다고 나섰던 후보들 중에는 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꾸준하고 성실하게 활동을 지속했고,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 사람들이 낙선을 했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을 제끼고 당선된 다른 정당들(이라고 해봐야 뻘건 거 아니면 퍼런 거지만)의 후보들은 이 사람들보다 몇 배 더 어마무시한 지역활동을 해서 당선된 자들이었가?
내가 뭐 동네마다 안테나 꽂아둔 것이 아니라 내막을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꼭 그렇다고 볼 여지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케바케라고는 해도 지역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나름의 열과 성을 다해 지역을 파고 들어가서 자신의 삶을 녹이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
정의당과 진보당을 비교하면서, 후자의 지역활동을 높이 평가하는 입장도 봤는데, 뭐 그럴 수 있다. 솔직히 전반적인 경향이라는 측면에서는 부정할 수도 없고. 하지만 그런 비교는 매우 단편적이다. 이런 식의 비교는 지역 상황의 특수성이라든가 지역 의제의 정합성은 물론 현실 정치판의 한계 전반이라는 주요 변수들을 소거시켜버린다.
한국 정치의 지역적 특성이라는 건 지역에서 뺑이를 쳤느냐 아니냐가 선거시기 당락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그렇다.
예를 들어 이번 지선에서 광주시장에 당선된 강기정은 뭐 광주에서 죽도록 뺑이쳐서 시장된 건가? 기실 광주에서 강기정이 당선된 건 그냥 그가 광주출신의 퍼런당 주요 인사였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생애를 바쳐 뺑이를 쳐도 국힘은 당선 불가능이고, 정의당이건 뭐건 당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이번에는 아예 뻘건 거 아님 퍼런 거 둘 중 하나 아니면 뭘 해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만, 적어도 이전까지 영호남에서는 무소속 출마하면 그나마 가물에 콩나듯 당선되기도 했는데, 그 와중에도 그 지역의 패권정당이 아닌 다른 당의 후보로 나오면 그냥 참가하는데 의의를 둬야 했다.
이건 지역 선거에 출마한 누군가가 지역활동을 안 해서라기 보다는, 지역 유권자들의 심적 효용이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와 더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봐야 한다. 아닌 말로, 저놈이 도둑놈인지는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사람이 아닌 놈에게 표를 주는 건 더 싫다는 심정이다. 이런 심정마저 떠나면 그 때는 무관심이 되어버린다. 이번 광주시장 투표율이 40%가 되지 않았다. 엄한 놈 뽑기는 싫고, 그렇다고 이놈 뽑는 것도 이젠 싫어져 버리면 그냥 아예 쳐다보질 않아버리는 거다.
앞서 광주 강기정 당선을 사례로 들었는데, 지역정치에서 지역유권자들의 효용성이라는 게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선거는 2016년 제20대 총선이었다. 당시 안철수, 박지원, 천정배 등이 작당을 해서 창당한 국당은 호남 지역 28개 선거구에서 23개를 싹쓸이했다. 국당이 지역에서 엄청난 활동을 보여줬기 때문에? 안철수가 호남 어느 지역에 자리를 잡고 지역활동을 쎄가 빠지게 해놓아서?
아니라는 거다. 물론 박지원이나 천정배 등이 호남 출신이고, 특히 박지원의 경우 때마다 지역에 가서 지역구를 살뜰히 챙겨왔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살뜰히 지역을 챙기는 것이 지역 주민들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면서 지역의 의제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었던가? 따지고 보면 그다지 지역에 몸바쳤다고 하기엔 면구스러운 수준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그토록 깜찍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가?
지역주민의 효용이라는 건 여기서 기이하게 발현된다. 당시 호남은 그래도 내 새끼가 아니라고 내치진 않을 어떤 친연성을 가진 존재로 국당을 대할 여지가 있었다. 즉 민주계는 이제 징글징글한데, 그렇다고 새누리쪽을 찍는다는 건 용납이 안 되는 상황에서, 새누리도 아니고 민주도 아닌데 어쨌든 내 품 안의 거시기나 머시기 같긴 한 뭔가가 호남인들에게 보였다는 거.
이렇게 이야기하면 지역활동이고 나발이고 출신성분만 채우면 다가 아니냐는 식으로 논의가 샐 수 있지만, 당연히 그게 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유권자가 체감하는 어떤 효용을 배제한 채 지역활동을 쎄가 빠지게 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내놓아봐야 아무 쓸데가 없다는 거다.
예컨대 정의당의 경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간에 중앙정치판에서 노이즈를 만들고 언론에 그럭저럭 노출이 되는 반면, 까놓고 진보당이 중앙언론에 노출된 빈도가 몇 번이나 있나? 어라?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정의당은 깡통을 차고 진보당은 약진을 했네? 역시 지역활동을 잘 해야 돼!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진보당이 이번에 성과를 낸 지역을 보자. 기초의원에 당선된 지역 중 서울 노원구, 경기 수원, 충북 옥천을 제외한 나머지 14개 기초지역은 울산이 2곳, 광주가 6곳, 전남이 5곳, 전북이 1곳이다. 광역의원은 전남 2곳, 전북 1곳이고 광역 단체장을 울산 동구에서 배출했다. 울산은 전형적으로 울산연합의 아성이라 할 정도로 진보당과 지역적 친연성이 오래된 곳이다. 기초12개 지역과 광역3개 지역은 전부 호남인데, 이곳 역시 소위 광전연합이나 인천연합과 지역적 연고가 오래된 지역이다.
당연히 이들 지역에서 각 정치세력과 정치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지역과 밀착된 정치활동을 해왔기에 이러한 성적을 거뒀겠지만, 적어도 진보당과 이들 지역의 친연성이라는 것을 배제한 채 활동의 여부만으로 이번의 성과를 설명하긴 어렵다. 이런 결과를 보면서, 군소정당들이 중앙정치의 고공전을 아무리 해봐야 지역에서 죽을 쑤는 이유는 지역활동을 하지 않아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무슨 일만 생기면 당위적으로 제기되는 "지역으로~!"라는 주장은 언제나 훌륭한 결론이지만 식상한 결론이다. 그게 평소에 안 돼서 그런 게 아니라 더 씁쓸하다. 맥락이 거세된 채 구호로만 제시되는 상황논리는 향후의 전진을 위해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쎄가 빠지게 지역에서 달렸던 사람들의 힘을 빼는 "지역으로~!" 구호는 더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는 항변만 나오게 할 뿐이다.
이미 하던 거 계속 하면 된다. 다만 그 틀을 좀 달리 할 필요가 있다. 지역 유권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효용을 어떻게 만들어줄 수 있는가, 우선은 주민들이 저게 아무리 X쉑이라도 내 X쉑이라고 여기게 만들어 놓고 뭘 해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런 의미에서, 계속해서 지역의 친연성을 가진 대안정당의 건설, 특히 지역정당의 건설이 뻘건 거 아니면 퍼런 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현재의 아포리아를 넘어설 효과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해왔다(지선 이후 꼭 보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대구광역당이나 광주광역당이 만들어지는 거다).
자자, 그런 의미에서 지방선거도 끝나고 했으니, 이제 유의미한 정치활동을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이 보다 진지하게 지역정당을 고민해주기 바란다. 이게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적어도 체질을 바꾸고 면역력을 키우는데는 엄청난 도움을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