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당제로 가기 위해선
레디앙에 올라온 글이다.
레디앙: 무관심과 예견된 몰락 - '다당제' 호소의 공허함
정의당은 왜 망했는가에 대한 개인적 분석과 판단인데, 여기서 '다당제'라는 말의 의미는 좀 짚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 기자는 이렇게 질타한다.
"양당과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왜 다당제 정치를 호소하나. 선거철마다 양당이 버릇처럼 반복해온 무릎 꿇고 읍소하는 구태스러운 모습까지 따라 하는 정의당이 광주에서 제2당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러게. 그니까. 그럴 걸 뭔 다당제 운운하는 거냐고. 그런데 그렇다면 다당제가 뭔가? 뭘 다당제라고 해야 하지?
2022년 6월 3일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되어 있는 등록정당은 47개에 달한다. 창준위를 등록한 6개 정당까지 합치면 정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할 수 있는 정당이 무려 53개다. 이쯤 되면 한국은 명실상부 '다당제' 국가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정치 좀 안다는 사람들은 한국을 다당제 국가라고 하지 않을까? 정의당 같이 원내의석까지 가진 이름난 정당조차 그 숙원의 정치과제 중 하나로 다당제를 들고 나오는 이유는 뭘까?
기실 다당제라고 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집권의 가능성을 가진 정당이 3개 이상 존재하거나 혹은 단일정당으로는 집권이 어려워 집권세력의 구성에 다수 당이 참여할 여지가 높은 정당정치의 구조가 있을 때에야 이를 비로소 다당제라고 할 수 있다.
일당독재 정치구조를 다당제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국처럼 거대 보수 양당이 때때로 서로 정권을 주고 받는 것으로 집권을 위한 조정이 끝나는 정치구조를 다당제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정권교체'는 그냥 허울 뿐이고, 양대 기득권 세력 간의 정권 '교대'만이 남아 있는 상태는 다당제라고 하기 어렵다.
미국은 양당제인데 잘만 돌아가는구만 우리라고 뭐 큰 문제가 있느냐라고 항변할 사람이 있나 모르겠는데, 미국 양당제가 무슨 정국안정을 위한 기본 원칙이 될 이유도 없거니와, 도대체 왜 정의당을 비롯한 군소정당이나 더 나가 안철수 처럼 간보기에 특화되어 있는 정치인조차 기회만 닿으면 다당제를 이야기하는지 조금만 생각하면 현재의 양당제가 왜 문제인지를 알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심각한 건, '다당제'로 나가기 위한 여정의 출발점이 그다지 명쾌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까지 정의당을 비롯한 일군의 정치세력에서 빡세게 밀고 나갔던 다당제로의 실천노선은 선거법 개정이었다. 비례성이 강화된 선거제도의 도입, 더 나가 전면 비례대표제 도입까지, 지금의 소선거구제 단순다수대표제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당연히 이렇게 선거제도가 바뀌면 다당제의 가능성은 높아질 거다.
또 한 측면에서는 아예 권력구조를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바꾸자는 주장도 등장했다. 아무래도 내각제가 되면 대통령제보다는 의회의 개입력이든가 이런 게 늘어날 터이니 지금보다는 훨씬 다당제로 전환될 가능성이 커진다. 개헌이 전제되는 사안이다보니 좀 더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되겠지만, 어쨌거나 시도해볼만한 대안인 것만은 틀림없다.
(아, 여기서 일단 짚고 넘어가는데, 난 내각제 개헌은 그닥 흥미 없다.)
이런 저런 대안들이 나오는데, 사실 어느 하나 시작하면 그냥 봇물 터지듯 다당제의 장밋빛 미래가 들이닥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제도적 전환이라는 게 어디 쉬운가. 저 양당이 정신이 나가지 않는 한, 아니 아닌가? 제정신이 돌아와야 하나? 아무튼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한, 지득 기득권을 집어 던지면서 대의를 위해 다당제 정계개편과 이를 위한 제도개선을 할 이유가 없다. 주어터지다 못해 극한으로 몰려가야 그제서야 엇 뜨거라 하면서 조금이나마 바꾸는 시늉을 할지 모르겠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밑천 다 달려서 땅을 파고 들어가야 할 형국에 몰렸다고 한들 아직 밥그릇에 남은 식은 밥덩이가 있는 한 더불이라고 해서 아이구, 우리도 다당제 하고 싶었쎄여~ 이러고 나올 거 같지는 않다.
선거법이 되었든 개헌이 되었든 간에, 다당제로 가기 위해서는 보수 양당의 기반에 균열을 내야 한다. 그들이 기반하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지역적 기반이 매우 강고한 듯 보이긴 하는데, 난 특히 저 지역적 기반이라는 것이 오히려 이들의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누차 이야기하는 거지만, 저들이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양대 지역이라고 해서 자기 지역의 패권정당에 대한 무한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들 말고 찍을 놈이 있으면 그놈 찍겠다는 정서를 수시로 확인해오고 있다. 그런데 그놈들 말고 찍을 놈이 없다는 하소연도 계속 듣고 있다.
다당제를 위한 기반은 여기서 오히려 더 빨리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노동현장이 생활현장과 지근해 있는 지역에서 좀 더 깊이 검토해보면 어떨까 한다. 과거 소위 영남 진보벨트라고 했던 지역에서 활동하는 역전의 용사들이 20여년 전 잠깐 빛을 봤던 진보대통합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 지역의 색깔을 가진 정당을 창당해서 움직인다면, 또는 갈 데까지 가서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더불에 투항해 퍼런 옷 걸치고 뛰는 것보다 현장에 결합된 지역정당을 만든다면, 더 명분 있고 효과 있는 지역정치가 가능하고, 지역에서부터 다당제를 만들어내고, 급기야 전국적인 차원에서 양당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정치적 힘을 키워나갈 수 있지 않을지.
덧} 아, 이거 뭔 의식의 흐름인지 말이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중요한 거 하나 빼먹었는데, 다당제 하자고 하면서 때만 되면 '진보단일후보' 만드는 거 이제 좀 어떻게 했음 좋겠다.
시절이 하 수상하다보니 그거라도 해야 할 정황이 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대중의 정치적 선택권을 사전에 제한하는 짓을 '진보'진영이 해야 하나? 그것도 자체적인 정치전망과 실천노선을 수 해 째 내놓지 못하는 민주노총이 기껏 선거때가 되면 '민주노총 단일후보' 뭐 이런 타이틀 만드는 거간 노릇이나 하면서 노동정치의 부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계속된다는 걸 이젠 좀 진지하게 비판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대선이나 총선도 아니고 지방선거에서조차 이런 관행이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지속된다는 건 결국 자기 살 깎아 먹는 거다. 아니 이럴 바에야 각 정당의 당원들은 뭐하려고 평상시에 자기 정당 이름 걸고 정치활동을 하나? 때 되면 자기 당 이름 파묻어 버리고 다른 당 후보 밀어주려고? 아무리 '4당 단일후보' 어쩌구 하면서 그 밑에 각 당의 이름을 써 넣은들, 결국 후보는 한 명이고 그는 단일후보의 정체성보다는 소속 정당의 정체성을 대중에게 어필하게 된다.
이런 이상한 형태의 후보전술은 어쩌다가 어쩔 수 없을 때 하는 거지 노상 당연한 수순처럼 가져가서는 안 된다. '진보' 정치판에서조차 이모양인데, 다당제는 언제 되겠나?